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 (63)화 (63/88)

#63

여태껏 보아 온 패치노트는 다른 이들에 대해 함부로 떠들고 다닐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건넸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그냥 그런 분위기인 것 같았어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그렇구나]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다른 사람한테 말했어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ㅇ예?? 설마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아니 저ㅓ 진ㄴ짜 그런 사람 아니에요!!11]

알아요. 그럴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애초에 상종을 안 했겠지. 나직이 웃으며 마저 채팅을 보내기로 했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ㅋㅋㅋㅋㅋㅋㅋㅇㅋㅇㅋ]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둘이 사귀는 건 맞는데]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되도록 다른 사람들한테는 좀 비밀로 해주세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공개는 저 둘이 알아서 할테니까]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당연하죠 걱정하지마세요]

확답을 받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본인이 한 말은 지키는 양반이니 이후에 벌어질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으로 던전에 들어가려던 나는 뒤늦게 날아온 패치노트의 귓속말을 확인하고 손끝을 멈칫했다.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형이 싫어하는 건 저도 하기 싫어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드는 말이었다. 꼭… 내가 싫어하는 건 안 하겠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저런 말은 여자 친구한테나 할 것이지. 어쩐지 머리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어 헛기침을 내뱉고는 곧바로 답장을 보낸 뒤 던전에 들어갔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ㄱㅅㅇ]

…너무 싸가지 없게 보였으려나. 아니, 뭐 어때. 랜덤 매칭으로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를 때려잡는 내내 머릿속에는 패치노트에 대한 생각만이 떠올랐다. 이 사람이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호의를 보내는 걸까, 하는 생각.

그동안 패치노트가 내게 했던 행동들을 곰곰이 되돌아보았으나 팍하고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아무리 되새김해도 잘 모르겠다. 이 사람, 나한테만 잘해 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친절하던데. 그냥 사람 성격이 좋아서 그랬던 건가?

대충 그렇게 납득하기로 결정한 나는 슬슬 다가오는 공대 시간을 확인하고 던전 도는 것을 멈췄다. 남은 시간은 대충… 1시간 정도인가? 밥 먹고 세수로 정신 차린 다음에 돌면 딱일 거 같은데.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습관처럼 소주를 꺼냈다.

“공대 전에 술 마시는 사람, 나야 나, 나야 나.”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갑작스레 술을 집은 것은, 어쩐지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심적 안정감을 위해서, 라고 할까. 소주를 한 바퀴 돌린 뒤 뚜껑을 딴 나는 잔을 꺼내는 게 귀찮아 병째로 들이마셨다.

[길드/베타: 공대할싀간~~~]

[길드/베타: 다덜 모여라~~^^]

[길드/주님한놈갑니다: 1.]

[길드/연중무휴: 2222]

[길드/베타: 뭐여]

[길드/뚝배기장인: 33333333]

[길드/퇴사기원: 44444]

[길드/패치노트: 5]

[길드/베타: 그럼 나는 6666!!]

꿀꺽, 꿀꺽. 한 번에 반병을 비워 낸 나는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아 냈다. 아, 병째로 마시는 것도 꽤 편한데? 남들이랑 마시면 비위생적이라 못 하겠지만 혼자 마실 때는 앞으로 이렇게 마셔야겠다.

[길드/베타: 곧죽 ㄹㅇ 죽음?]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ㄴ 음주중]

[길드/베타: ????먼솔??]

“무슨 소리는 뭐가 무슨 소리야.”

음주 근딜이라고 들어는 보셨나? 나머지 반마저 싹 다 비운 뒤, 빈 병을 재활용 쓰레기봉투에 집어넣고 새 소주를 꺼내 뚜껑을 땄다. 딱! 소리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파초 ㄱ]

[길드/베타: 곧죽 뭔일있나..?? 애가 안 그러던 짓을 하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암일 없음; 파초 ㄱ;;]

[길드/베타: ㅇㅋ;;]

베타 누나가 보낸 파티 초대를 받자 이미 공대원들 몇몇이 파티에 들어와 있었다. 다 모였으니 이제 정말 이스카리아를 가겠구나. 사실 이스카리아도 슬슬 끝물에 들어가는 터라 파밍을 더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부캐를 키우는 사람들 장비 먹는 것 좀 도와줄 겸, 고인물이라 할 게 없어 레이드를 가게 된 것이다.

[파티/베타: 다덜 안전운전 부탁합니다^^]

[파티/베타: 특히 곧죽이 음주운전 하지 마라^^]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ㅇ]

술 마셔도 딜은 잘 뽑을 자신 있거든? 새로 깐 소주 또한 이미 반 이상 비워 낸 참이다. 남은 양을 한 번에 마시며 깔끔하게 비워 낸 나는 다시금 입을 닦은 뒤 보스 몬스터를 향해 돌진하는 한놈 님의 뒤를 따라 달렸다.

초반 오프닝 때 딜을 잘 넣어야 나중에 가서 편하니까 확실하게 해야지. 버프용 아이템을 사용하고 빠르게 콤보를 누르며 딜을 쏟아부었다. 고일 대로 고인 사람들이 모여 있어 그런지 보스의 HP가 쭉쭉 닳으며 본래 나왔어야 할 기믹이 캔슬되고 곧바로 다음 페이즈로 넘어간다.

이윽고 과거에 터질 뻔했던 쫄 페이즈에서 패치노트가 모든 어그로를 가져간 뒤 광역 딜로 몹들을 녹이는 것이 시야에 보였다. 언제 봐도 감탄을 자아내는 화려한 이펙트라 그런지 자꾸만 눈길이 갔다. 시선을 계속 다른 데에다 둔 탓일까. 멍하니 보스만 두들겨 패고 있던 나는 순간적으로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를 저질렀다.

[파티/퇴사기원: 아잠만ㄴ]

[파티/뚝배기장인: 헐]

콰아아앙-! 커다란 이펙트가 터지고, 우렁찬 효과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딜컷을 제대로 하지 않아 발생한 전멸기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화면을 보며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내가 이런 빡대가리 같은 실수를…….”

어이가 없네. 대체 왜 그랬지? 초행이었을 때조차 하지 않았던 실수가 끝물에 나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한숨과 더불어 미안한 심정이 불쑥 튀어나온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죄송합니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딜컷을 제대로 못 했어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집중하겠습니다]

[파티/주님한놈갑니다: 괜찮습니다. 실수할 수도 있죠.]

[파티/주님한놈갑니다: 사실 저도 생존기 하나 안 돌렸습니다.]

[파티/연중무휴: ? 어쩐지 피가 많이 닳더라!!]

[파티/베타: 그러게 말이여!! 생존기 빠싹 올리라우!!1]

최대한 좋은 분위기로 이끌기 위해 없던 실수까지 만들어 내는 이들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더더욱 커졌다. 아씨, 진짜 나 왜 이러냐. 다시 한번 사과를 한 뒤 이번에는 바짝 집중하며 딜을 꼬라박았다. 그러나, 딜컷 부분은 원만하게 넘겼지만 다른 부분에서 실수해 또다시 나 혼자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워낙 끝물인 레이드라 나 하나 죽는다고 클리어를 못 하는 건 아니라지만… 기분상의 문제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연중무휴의 부활로 되살아난 이후에도 한 차례 더 드러눕는 바람에 주변에서 걱정 어린 반응이 돌아왔다.

[파티/뚝배기장인: 곧죽님 진짜 무슨 일 있으세요??]

[파티/베타: 그러게... 어디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지??]

[파티/퇴사기원: 괜찮으신가요??ㅠㅠㅠ]

[파티/퇴사기원: 오늘은 일찍 들어가시는게ㅠㅠㅠㅠㅠ]

…차라리 욕을 하지. 그럼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들을 보니 속이 쓰리다. 나 진짜 아무 일도 없는데, 아무렇지 않은데.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건지 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괜찮다고 채팅을 치려는 찰나, 패치노트가 채팅을 올렸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파티말이 아니라 귓속말로.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형 괜찮으세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정말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제가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어어, 없어. 네가 도와줄 건 하나도 없어. 정확히는 네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어. 입을 꾹 다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적당히 파티 채팅으로 일단 레이드는 끝이 났으니 이만 가 보겠다는 말을 남긴 뒤 게임을 종료했다.

“후…….”

심장이 마구잡이로 뛴다. 술을 먹어서 그런가? 여태껏 이런 일 없었는데, 가슴께가 뻐근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부정맥 같은 건 아닐 거고.”

그런 병이 쉽게 나타날 리가 있나. 호흡 곤란도 없고, 현기증이 이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기울이며 소주 한 병을 더 꺼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술 때문이라고 보기엔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았거늘. 의문이 사라지지 않아 소주 뚜껑을 따면서도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웠다. 그냥 이거만 마시고 자야지. 생각하기도 귀찮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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