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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 (62)화 (62/88)

#62

한편의 만담을 보는 듯한 느낌에 혼자 실실 쪼개다가 과열된 분위기를 일단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진정시킬 때 가장 좋은 수단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뼈를 부수는 팩트를 던지는 것이다.

[님들 일하는 중에 이래도 되시는지?]

[일 끝나고 생각하심이?]

[임효린: ㅜ...]

[이세영: 넘...햇......그런 심한 말을....]

[임효린: 집에..가게....해줘......]

[사회인 어서 오고]

[임효린: 대학생 진짜 부럽다 저때가 편했는데]

[라고 꼰대가 말했다]

대학생 때가 편했다니. 참으로 꼰대 같은 말이 아닌가. 한동안 PK로 다 죽여 버릴 거라며 분노를 표출하던 베타 누나는 이번 일로 자게가 아주 난리가 났으니 시간이 나면 구경하러 가 보라는 말을 남겼다. 난리가 나 봤자 거기서 거기지 뭐.

“와…….”

아니었다. 그냥 난리가 아니라 개난리가 났다. 저런 방식으로 길드 포인트를 먹을 수 있으면 정당하게 싸워서 모은 사람들은 뭐가 되냐는 말부터, 저런 말도 안 되는 버그를 발견했다고 그대로 써먹은 아가리 길드원들을 욕하는 글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몇 페이지가 다 이번 일에 대한 얘기네.”

솔직히 프리지아 사상 역대급으로 크게 터진 박살이긴 했다. 그동안은 기껏 해 봤자 던전에서 시비가 걸린 유의 일들만 있었는데 갑자기 길드전 버그라는 대형 사고가 터졌으니…. 사람들이 불타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빛 길드와 아가리 길드에서 해명문인지 사과문인지를 올리긴 했다. 저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도 했으니까 이건 쌍방 과실이라는 점을 어필하고 싶었나 본데, 유저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 그래서 길드전 날먹하려고 하셨다는데?? 니들이 잘못 없다는 건지???

└ ㄹㅇㅋㅋㅋㅋ솔까 저따구로 선빵 처맞았는데 안 빡치면 그게 사람임? 꼴받아서라도 역지사지의 묘미를 보여줘야지

- 버그를 발견했으면 영자한테 이거 픽스해달라 요청을 해야지 그걸 그대로 써먹넼ㅋㅋㅋㅋ졸렬ㅋㅋㅋㅋㅋ

└ 갓직히 이건 길드전 이따구로 만들어놓은 영자 문제도 있지 않냐? 애초에 잘 만들어놓든가; 시스템 허점 이용한 것도 실력이지

└ 너 쟤네 친구냐? ㅈㄴ 끼리끼리 노네??

└ 실드를 칠거면 말 되는 데에서 쳐라; 뭐 이런 거에 실드를 쳐;;;

└ 친구 없나봄

- 아가리 애들 하는 거 보고 곧바로 따라한 것도 X나 웃기긴 하다ㅋㅋㅋㅋ반응 개빠르네

└ 알고 보니 쟤들이 버그 쓰는 걸 기다린 거 아님? 먼저 버그 쓰면 문제 되니까 뇌에 힘주고 참았던 거지

└ 뇌내망상 개오지네;;

- 저걸 따라한 쟤네도 문제 아닌가?? 할 게 없어서 저런 걸 따라하냐;

└ 그럼 주력 길드원 싹 다 자리 비운 상태에서 선빵 맞았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음? 것도 실력으로 처맞은 게 아니라 버그로 처맞았는데?

└ 너 폭주 길드원이지?

└ 꼭 할 말 없는 무뇌 새끼들이 편 가르기 오지게 하죠?

└ 꼭 할 말 없는 무뇌 새끼들이 욕부터 오지게 박고 보죠?

대충 댓글들을 쭉 훑으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들은 남의 일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한동안 귓속말 테러 오지게 오겠네. 전체 차단이나 걸어 둬야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게임사 측에서 길드전을 재개편한다고 공지를 올렸다. 진작 그렇게 만들 것이지, 뭐 하러 공성전 전에 필드전을 먼저 업데이트했는지 모르겠다. 공지 내용만 봐도 그쪽이 재밌겠더만.

“노이즈 마케팅인가?”

X같은 걸 먼저 보여 주면 이후에 나온 게 상대적으로 덜 X같을 거 같아서 그런가. 게임사에서 직접 공식 해명을 하기 전까지는 이 뇌피셜이 공식처럼 느껴질 것 같다.

“패치 끝날 때까지 뭐 하지.”

할 게 없다. 방학 내내 프리지아만 했던 나인지라 업데이트 한번 진행된다 하면 할 게 없어서 곤란했다. 잠을 자기에는 별로 피곤하지도 않고. 누워 봤자 못 잘 거 같았다. 결국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핸드폰을 꺼냈다.

[임효린: 나 오늘 일퇴할 거 같은데 같이 놀 사람?]

[김현호: 일퇴가 뭡니까?]

[임효린: 일찍 퇴근한다고ㅎ...]

[임효린: 한놈아... 아재티 내지마라]

[임효린: 네가 아재티내면 나도 줌마티나잖냐]

[김현호: 딱히 상관없지 않습니까?]

[김현호: 어린 친구들이 보면 여기 있는 사람 다 아저씨 아줌마로 보일 겁니다.]

[임효린: 개색기....]

잘들 노네. 이 두 사람, 처음에는 그래도 서로 예의를 차리면서 대했던 것 같은데 정모 이후부터는 완전 만담 콤비가 다 되었다. 그래서 때마침 심심하던 나도 저 만담에 껴 보기로 했다.

[둘이 사귄지 며칠됐어요?]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 솔직히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장난 아닌가? 보통 친구 사이에서 ‘야, 너네 사귀냐?’ 이런 장난 많이 치잖아?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뭐냐면….

[임효린: 야 너 어떻게 알았냐]

[임효린: 김현호가 말함?]

[김현호: 곧죽님, 혹시 효린이가 말한 겁니까?]

[김현호: 언제 들었어요?]

맹세컨대 이렇게 진지한 내용의 개인 톡이 두 사람에게서부터 올 줄 몰랐다는 거다. 이게 뭐야. 두 사람이 보낸 내용을 머리가 이해하길 거부한다. 아니, 그래. 막말로 이해하긴 했다. 저렇게 말하는데 이해 못 하면 그건 빡대가리인 거고.

[ㄹㅇ 사귐?]

[구라아니고?]

두 사람에게 똑같은 내용의 채팅을 각각 보냈다. 황망함에 기운이 쭉 빠진다. 아니, 나는 진짜로 사귀는 줄 몰랐지. 그런 낌새도 없었잖아.

[임효린: ㅎ...]

[임효린: 찍은 거니...?]

[ㅇㅇ...]

[언제부터 사귀었는데?]

[임효린: 애들은 몰라도 된다]

“지랄도…….”

누나가 말 안 해도 물어볼 사람 하나 더 있거든요? 나는 베타 누나와의 채팅 창을 나가 곧바로 한놈 님에게 채팅을 보냈다. 그래서, 그래서? 원래 연애는 남의 연애사 듣는 게 제일 재밌는 법이라고.

[한놈님 베타누나랑 언제부터 사귀었어요?]

[김현호: 아....]

[김현호: 정모 이후에 그냥 둘이서 따로 밥 먹자는 얘기가 나와서]

[김현호: 같이 밥을 먹으러 갔는데]

[김현호: 어찌어찌 그런 분위기가 되어서]

[김현호: 효린이가 먼저 고백하길래]

[김현호: 그]

[김현호: 저도 마음이 없는 건 아니어서]

[김현호: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런 일이 생겼구나. 그야말로 노빠꾸 킵고잉이지 않은가. 두 사람 사이에 그런 기류가 오고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자리에서 바로 고백을 했다는 베타 누나의 패기에 2차로 놀랐다.

“상상도 못 한 정체…….”

[두분 예쁜 사랑하세요]

[김현호: 어... 감사합니다.]

채팅방을 나온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눈에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다 같은 겜창이면서 누구는 눈 맞아서 마음이 생기고 누구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사귀기 시작했다는데 나는 집에서 게임만 하네. 좋겠네, 좋겠어. 어우, 옆구리 시려라.

“연애가 뭐 대수인가. 인생은 어차피 혼자 사는 거야. 아무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고….”

부러워서 이러는 거 아니다. 진짜로.

(2)

베타 누나와 한놈 님이 사귈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말하는 걸 들어 보면 마음은 진작 있었는데 정모를 계기로 고백할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분명 둘 사이가 잘됐으니 좋은 일이 맞긴 맞는데….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나름 두 사람과 친하다고 생각했던 입장에선 조금 섭섭하긴 했다. 둘이 연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도 그 부분이었다고 한다. 알리는 순간 다른 사람들과 거리가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숨겼던 거라고.

나중에 때가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알리겠다는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연애하는 건 두 사람이니 내가 중간에 끼는 것도 조금 그렇다. 그러니까 둘이 알아서 할 때까지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그렇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무도 두 사람에 대해 물어보지 않아 정말 조용히 지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따로 말은 안 해도 이미 눈치챈 듯?

뜻밖의 커플 탄생에 대해 알게 된 지 며칠이 지났다. 오늘도 평화로운 프리지아 생활을 즐기던 무렵이었다. 갑작스럽게 패치노트에게서 귓속말이 도착했다.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뭐 좀 여쭤도 될까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먼데요?]

패치노트가 먼저 연락을 보내오는 게 원 데이 투 데이가 아니었던지라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뒤이어지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혹시.. 베타님이랑 한놈님 연애하시나요?]

“워어…….”

아까 내가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다들 눈치챘다고 그랬던가? 그중 한 명이 아무래도 패치노트였던 모양이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직접 물어보는 건 좀 그럴 거 같고...]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왠지 형은 알고 계실 거 같아서요]

거참, 사람을 잘 찾아오셨네. 내가 몰랐으면 어떡하려고 나한테 물었다냐. 나는 코를 매만지며 어찌 대답할까 고민했다. 맞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모르겠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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