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더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부활한 놈들이 백업 오면 귀찮아져요. 빠르게 빠져나가는 게 좋아요.”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내 캐릭터 뒤로 몇몇이 뒤따라 달려왔다. 어디까지 따라오려나. 저세상 땅끝까지?
“어?”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따라오던 놈들을 죽이고 포인트나 먹자는 마인드로 잠깐 멈칫한 찰나였다. 내 시야의 사각에서 들어온 원거리 스킬을 맞고 나한테명령하지마가 스턴 상태에 걸리더니, 순식간에 몰아치는 폭딜을 맞고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와, 이건 상상도 못 했네.”
-괜찮으세요? 백업 바로 갈게요.
“아뇨, 오지 마세요. 이미 죽었어요.”
내 마지막 부활 포인트가 어디였더라. 나직이 혀를 차며 부활 버튼을 누르려는데 놈들의 채팅이 올라왔다.
[전체/부어라: 얌생이처럼존12나튀더니결국ㅋㅋㅋㅋㅋ]
[전체/부어라: 시야를잘봤어야짘ㅋㅋㅋ등ㅋㅋ신ㅋㅋㅋㅋㅋㅋ]
[전체/마셔라: 곧죽도별거없네]
[전체/즐겨라: 막타내꺼였는데~~~이걸넘겨줘버리네~~]
이 새끼들이 이런 저렴한 시비를? 슬쩍 위로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오냐, 부활해서 너네만 주구장창 쫓아다니마. 길드전 끝나도 쫓아다녀서 PK 박아 버릴 거야. 꼬우면 게임 접든가.
[전체/마셔라: 왜말이없음?쫄려?]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띄어쓰기도 할 줄 모르는 손가락 잘린 놈들이랑 채팅 안함 ㅅㄱ]
[전체/부어라: 처ㅓ발리니까띄어쓰기운운하는거보솤ㅋㅋㅋㅋㅋㅋ]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요놈들아]
치솟는 빡침을 꾹 누르고 손목을 돌리며 손을 풀었다. 시비가 걸렸는데 받아쳐 주지 않으면 오늘 잠 못 잔다. 무조건 저거 잡을 거야. 무조건. 빠드득, 이를 갈며 얼른 부활 시간이 끝나길 기다리는데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뭐야, 쟤네? 이거 뭐야?”
날 공격한 놈들의 닉네임 옆에 떠 있는 길드 이름이 다르다. 그럼 아가리 길드원이 아니라는 건데……. 다급히 눈동자를 굴려 길드전 포인트를 확인했다. 상대 길드의 포인트가 미미하게 상승한 걸 보면 나를 죽인 건 아가리파이터 길드원이 맞다.
“이걸 넘겨줘… 아……. 이 X발놈들이?”
-네? 왜 그러세요?
“저 양아치 새끼들이 또 다른 길드를 끌어들인 거 같아요. 절 킬한 건 아가리 길드원인데 다운되기 직전까지 딜한 건 다른 길드 놈이거든요. 막타로 포인트작 하려고 작정을 했나 봐요.”
이런 건 나도 생각 못 했다. 허점이 많아도 이렇게 많다니. 이거 게임이 정상적으로 굴러가는 건 맞는 거냐? 길드전 중에 다른 길드 놈들이 딜 박고 막타만 넘겨줘서 포인트작을 처하는데? 빡침을 넘어 이젠 혈압이 올라 뒷목을 절로 부여잡았다.
“망겜 망겜 했더니 진짜 망겜이 되어 버렸네. 그동안 굵직한 쟁이 안 터져서 아무도 몰랐나 본데, 허점을 이런 식을 써먹는 쟤네도 참….”
차라리 진짜 망해서 서버 종료해 버렸으면 좋겠다. 미련 없이 다른 게임으로 갈아타게.
-저희도 따라 하면 되죠.
“뭘 따라 해요?”
-다른 길드 불러서 공격했다면서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저희도 똑같이 하면 되잖아요.
“저 친구 없는데….”
아니, 있긴 있는데 개가 접속해 있는지를 모르겠네. 아직 친구 추가 안 해 뒀단 말이야.
-저 있어요. 도와줄 만한 길드. 딱 피 1 남겨서 그로기로 만들어 달라 할게요. 좌표 찍을 테니까 그쪽으로 오시면 돼요.
채팅 창에 특정 좌표 하나가 올라왔다. 아니, 방금 전에 한 얘기인데 벌써 도와줄 사람을 불렀다고? 이게 가능한 일이야? 얼떨떨한 마음과 함께 좌표로 이동하자 그곳에서는… 대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뭐임….”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전장을 활보하는 처음 보는 유저들과 그들에게 두들겨 맞고 그 자리에서 그로기 상태에 빠진 아가리파이터 길드원들이 화면에 꽉 찼다. 뭐랄까… 그동안 머리를 싸매고 있었던 내가 멍청이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인생 진짜 부질없네.”
툭툭 평타만 쳐도 곧바로 사망 판정을 받아 다운되는 적 길드원들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님 친구들이에요?”
-친구라기보다는…그냥 아는 사람들이에요. 예전부터 게임을 같이했거든요.
“그렇구나…….”
어디 가서 게임할 줄 안다는 말 하지 말아야지. 저 양반들 보다가 스스로를 돌아보니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한동안 진짜 빡겜 돌아서 실력 키워야지. 이왕이면 장비도 더 맞춰 봐야겠다. 자아 성찰에 빠진 내가 힘없이 적 길드원을 잡는 사이, 아가리파이터 길드원들의 분노에 찬 채팅이 올라왔다.
[전체/웃어: 아니;;; 이 ****아!!!!!!!!111]
[전체/웃어: 왜 니들이 **이야!1!11]
[전체/천만원만주세요: 그니까;;;족또 상관없는 놈들이 왜 끼어들어;;;]
[전체/영감: 그 이유가 궁금한가?]
어어, 설마 저기서 맞장구를 쳐 줄 줄이야.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 나는 널브러진 상대방들을 하나씩 죽여 킬 포인트를 먹으며 채팅 창에 시선을 두었다.
[전체/영감: 너희가 너무 약해서 그렇다.]
[전체/영감: 그래서 그런지 영 재미가 없군.]
[전체/영감: 강해져서 돌아와라.]
“뭐야, 중2병인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아차 싶었다. 남 지인한테 뭐라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다급하게 실수라고 말하려는 찰나, 패치노트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쟤 중학교 2학년 맞아요.
“그렇구나.”
진짜 중2였구나.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TMI를 알게 되었다. 머릿속에서 지워 버려야지.
12. 마법의 소라고둥
(1)
[공지] 길드전 점검 및 업데이트 안내
[20xx년 x월 xx일(수) 길드전 점검 및 업데이트 진행 안내]
1. 일시: 20xx년 x월 xx일(수) 10:00~15:00
2. 내용: 길드전 점검 및 업데이트
※ 길드전 업데이트와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하단 공지를 참고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길드전 추가 업데이트]
※ 점검 시간 동안 게임 및 런처 접속이 불가합니다.
※ 점검 시간은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업데이트 노트] 길드전 재개편
※ 길드전 재개편
* 길드전이 공성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전쟁 선포 시 PVP가 가능한 공성 지역으로 이동됩니다.
-공성 지역은 타 길드의 출입이 불가능하며, 전쟁이 일어난 길드의 길드원 중 지역 이동을 수락한 유저만이 이동하게 됩니다.
-길드전은 전쟁이 일어난 길드들의 동의하에 관전이 가능합니다.
* 각 길드의 공성 거점이 추가되었습니다.
-거점은 길드당 하나씩 존재합니다.
-한차례 길드전이 끝난 후 새로운 길드전이 발생할 경우, 거점의 HP는 초기화됩니다.
* 길드전에 참가하는 유저들의 레벨이 모두 일정하게 조율됩니다.
-신규 유저 또한 길드전에 참여가 가능합니다.
-길드전에 참가한 모든 유저들은 Lv.100으로 조율이 되며 스킬 또한 해당 레벨에 맞게 사용이 가능합니다.
* 길드전 승리 조건
-포인트 획득
└ 길드전 공성 시간은 120분이며, 그 안에 PVP로 포인트를 많이 획득한 팀이 승리하게 됩니다.
-적군 섬멸
└ 길드전 공성 시간 동안 적군을 모두 섬멸하는 팀이 승리하게 됩니다.
-적군의 거점 탈취
└ 아군 거점을 지키고, 적군 거점의 HP를 모두 소모시키는 팀이 승리하게 됩니다.
(더보기)
***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길드전이 끝난 후, 길드 단톡방에서 불이 났다. 심지어 나를 지정해 멘션까지 날리며 후기를 달라고 부르짖어서, 단톡 알림을 꺼 놔도 진동이 계속 울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톡방을 확인했다. 그곳에서는 베타 누나를 위시한 겜창들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임효린: @박정우 곧죽 나와라 오버]
[임효린: @박정우 아 빨리!!!!!!!!!!!!]
[이세영: 옳소!!!! 곧죽님은 어서 나오씨오!!!!]
[Y]
[임효린: 참말로 첨보는 놈덜이 쟁을 걸었디야?!!]
[ㅇ;]
뭐야, 말투 왜 저래. 술 먹었나?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인게임 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짤막하게 설명했다. 가령 개뜬금 선빵을 맞았음에도 밀어붙였다든가, 저쪽에서 질 거 같으니까 타 길드 용병을 데려와서 버그 같지도 않은 버그를 남발하는 바람에 똑같이 해 줬다든가 말이다.
내 설명이 모두 끝나자 톡방의 길드원들이 분기탱천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솔직히 그럴 만하긴 하지.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 듣기만 한 입장이었어도 빡쳐서 상대 멱살 짤짤 흔들러 갔을 거다.
[임효린: 이 스벌롬들이 카아아앜퉤에에엨!!]
[임효린: 동무덜 저 간나 쉐키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있습네다]
[임효린: 시방 고인물의 힘을 지대로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구먼??]
[임효린: 내래 저 종간나새기들의 대갈통을 뽀사버리러 갈 거시여!!!!]
[임효린: 딱대딱대!!!!]
[이세영: 아따 지도 함께 하것습네다!!!]
[이세영: 동무!!! 맡겨주시라요!!!]
[임효린: 좋소!!!! 동무 저 간나새기들을 어찌 조질지 같이 생각합시다!!]
[이세영: 당근 뚝배기를 깨부러야지 않것습네까?!!]
[이세영: 지금 바로 연장 챙기것습네다!!!!]
두 사람의 걸쭉한 욕지거리에 나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이 양반들, 북쪽 나라 간첩 출신이었나? 와중에 타이핑인데도 시끄러운 것 좀 보소?
[임효린: 한놈 동무 어데갔습네까!!!!]
[임효린: 당장 튀어나오시라우!!!!!]
[김현호: 누구세요.]
[임효린: 한놈동무!!!!]
[김현호: 저 아세요?]
이 와중에 한놈 님은 자기는 모르는 사람들이라며 발을 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