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 (60)화 (60/88)

#60

패딩에 달린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홀린 듯 라면 코너로 향했다. 내가 원래 라면만 먹는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막상 뭘 해 먹을 생각을 하니까 귀찮음이 밀려오더라고. 라면은 완전식품이니까 괜찮아. 탄수화물에 지방도 있고 나트륨으로 염분도 섭취할 수 있잖아?

라면 코너 앞에 서서 무슨 라면을 먹을까 고민했다. 요즘 라면 종류가 진짜 다양하단 말이야, 고르기 힘들게. 주섬주섬 마트 바구니에 라면을 챙기는 사이, 주머니에 대충 넣어 뒀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뭐지. 전화 올 곳이 있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정여사]

…젠장. 정 여사한테서 온 전화일 줄이야. 손톱을 잘게 깨물며 통화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정 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제 받아.

“잠깐 뭐 좀 하느라…. 무슨 일이세요?”

-뭐 하는 중이었는데.

“장 보는 중이었어요.”

정 여사와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내 눈동자가 빠르게 라면 코너를 훑었다. 아, 이거 저번에 먹어 보니까 맛있던데. 이걸로 살까?

-그래? 밥 잘 챙겨 먹고 다녀. 라면만 먹지 말고. 인스턴트 몸에 안 좋아.

“아유, 알죠. 집에서 해 먹으려고 재료 사는 중이었어요.”

거짓말이다. 나는 오늘 라면을 먹을 것이다. 물론 내일도, 모레에도 라면을 먹을 것이다. 선픽한 라면을 재빨리 바구니에 집어넣은 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산대로 향했다.

-집에는 언제 와?

“어… 조만간 한번 들를게요.”

-와서 며칠 있다가 가. 곰국 해 놨어.

“알았어요.”

-그래, 아들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지?

“그럼요.”

계산을 마친 봉투를 들고 마트를 빠져나왔다. 숨을 내뱉자마자 퍼지는 입김을 보며 연락이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속이 더부룩해졌다. 터덜거리는 발걸음을 이끌고 집에 들어선 나는 주방에 대충 봉투를 내려놓고 그 안에서 라면 하나를 꺼내 부쉈다. 원래라면 끓여 먹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한 입 크기로 부서진 라면을 의미 없이 씹어 먹으며 컴퓨터를 켰다. 오늘따라 부팅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곧바로 프리지아에 접속하는 대신 자유게시판에 들어간 나는 내 글에 달려 있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한빛 길드원은 따로 눈에 띄지 않았다.

“뭐지, 반응이 영 없는데.”

내가 너무 과민 반응 했던 걸까. 다른 길드까지 끌어들여 2차 쟁을 걸겠다는 것치고는 잠잠하단 말이야. 까드득, 입 안에서 라면이 잘게 다져지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퍼졌다. 그리고 그들이 왜 자게에서 잠잠했던 건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무도 없네.”

말 그대로의 뜻이었다. 접속한 길드원이 없었다. 대부분 성인 직장인들이긴 했지만, 다들 겜창 중의 겜창이라 접속할 때마다 한 명 정돈 있었거늘…. 이렇게 텅 빈 길드 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베타누나]

[접속한 사람이 없으면 길드쟁은 어케 됨?]

[임효린: 올때까지 진행 안 되는 거지 뭐]

[임효린: 죽여서 포인트 먹어야 하는데 암도 없음 포인트 못 먹잖]

[ㄱㄹ?]

[그래서 한빛이 가만히 있는 건가]

[지금 겜접한 사람 나밖에 없음]

[친구 패치노트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원 패치노트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어 하나 더 생김]

타이밍 봐라. 내가 들어오자마자 접속할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이 양반도 어지간히 할 게 없었나 봐.

[길드/패치노트: 안녕하세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ㅎㅇㅇ]

[길드/패치노트: 그..]

[길드/패치노트: 저 이스칼 갈건데 같이 가실래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그럴까요]

오자마자 또 난리 치진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패치노트는 얌전히 파티를 요청할 뿐이었다. 그 잔잔하고 평화로운 느낌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나는 곧바로 파티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이스카리아 공팟을 짜려는 순간, 채팅 창 상단에 시스템의 안내 문구가 떠올랐다.

[<시스템> ㅇrㄱrㄹlㅍrㅇlEㅓ 길드가 폭주기관차 길드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파티/패치노트: 어...]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 쟤들뭐임?]

쟤들도 길드 이름이 영 만만치가 않은걸?

(5)

[외치기/용용죽겠지: 축제다!!! 풍악을 울려라아아아아아!!!]

[외치기/대학등록금: 폭주는 길드전 전문 길드임???]

[외치기/왜두개써지지: 왜 두 개 써지지? 왜 두 개 써지지?]

[외치기/소울리스: 길드닉 꼬라지들 봐랔ㅋㅋㅋㅋㅋㅋ개쳐웃기넼ㅋㅋㅋㅋㅋㅋㅋ]

핸드폰을 꺼내 길드 단톡방에 쟁이 터졌음을 알린 후 곧바로 패치노트에게 채팅을 날렸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일단 저것들 조지고 난 다음에 이스칼 가죠]

[파티/패치노트: 지인들한테 위치 제보해달라고 할게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그래주심 감사하죠]

우선 접속 인원수가 적은 만큼 쪽수에서 확실하게 밀린다. 아무리 날뛰고 다녀도 다굴에는 장사 없는 법이니까. 이럴 땐 게릴라전만큼 쓸 만한 전략이 없는데, 저들이 그걸 그대로 당해 줄지는 모르겠다. 패치노트도 같은 생각인지 적 길드원들이 어디 있는지 확인되었다는 채팅을 올렸다.

[파티/패치노트: 길드 하우스에 전원 모여있대요]

[파티/패치노트: 아무래도 저희 쪽 인원수가 적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졸렬한 새12끼들이네]

“아니, 아니지.”

오히려 이득이지. 저번이야 그러려니 해도 지금은 화력의 최고봉인 패치노트가 맨정신으로 있잖아?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음성채팅들어와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저번에 썻던거]

음성 채팅에 들어간 나는 곧바로 마이크를 켜고 패치노트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는 전략 아닌 전략 같은 전략이 통한다면? 둘이서도 길드 하나 작살내는 건 일도 아닐 터다. 이윽고 패치노트가 음성 채팅에 들어왔다는 신호음이 들리자 나는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둘이서 빠르게 쟁 끝내는 겁니다.”

-둘…이서요?

“네. 단둘이서.”

프리지아 길드전의 가장 큰 단점은 1만 포인트를 먼저 얻는 쪽이 승리한다는 점이다. 1만이라는 포인트만 보면 이게 왜 단점이냐 하겠으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또 다르다. 우선 킬당 얻는 포인트가 50이라는 점. 길드 간부나 길드 마스터의 경우 각각 100과 500이다. 즉, 길드 마스터를 20번 죽이면 게임이 끝난다는 거다.

또한 길드전의 특성상 해당 길드에 소속된 모든 유저들에게 PK 시스템이 강제적으로 적용된다. 이 때문에 평화로운 게임 플레이를 원하는 유저들은 분란이 일어나는 게 싫어 도중 길드를 탈퇴하기도 한다. 무작정 길드전을 치르라 하면, 글쎄다. 순수하게 게임만 즐기려는 사람들이 남아 있으려나.

“아시겠지만 PK로 주는 킬 포인트는 모두 동일해요. 아무리 스펙이 좋고 센 놈이라 해도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비와 같은 양의 포인트를 준다는 거죠.”

우리는 텔레포트를 이용해 적 길드의 길드 하우스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나는 내 오더를 따라 뒤이어 온 패치노트를 뒷선에 세우고 마저 말을 이었다.

“쟤들도 그걸 알아서 길드 하우스에 길드원들 모아 두고 밖에 안 내보내는 거예요. 우리 측이 쪽수가 부족하다는 걸 안다면 더더욱 그럴 거고. 아마 죽더라도 빠른 백업을 위해 부활 포인트도 길드 하우스랑 가까운 곳에 각각 나눠 뒀겠죠.”

-주력 길드원들만 길드 하우스를 부활 포인트로 해 뒀겠네요. 버틸 수 있는 탱커 위주로.

“맞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범위가 가장 넓고 가장 딜이 센 스킬 몇 개 꼬라박고 쿨타임 벌 겸 바로 쨀 겁니다.”

-바로 준비할게요.

패치노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캐릭터 주변으로 버프용 화려한 이펙트가 연달아 터졌다. 눈이 부실 정도의 빛무리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돈이 참 좋긴 좋네….”

-네?

“아니에요…….”

힐러도 아니고 딜러에게 버프 스킬이 있어야 몇 개나 있겠는가. 방금 터진 이펙트는 캐시 샵에서 현질해야 구매할 수 있는 버프들이었다. 심지어 근처에 있는 파티원 모두에게 들어가는 광역 버프 말이다.

“공격력에 치명타 증가…. 와, 진짜 너무 아깝다….”

-얼마 안 하는걸요.

“얼마 안 해도 아까운 건 아까운 거예요. 쟤들이 뭐라고 현질 버프씩이나… .”

원래 소비템을 99개씩 몇 묶음 가지고 있다 해도 막상 하나 쓰려고 하면 아까운 게 사람 심리인 법 아니겠는가. 그래서 내가 소비템을 잘 안 쓰지.

“일단 조지고 나서 생각합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길드전 패치나 좀 해 줬으면 좋겠네요. 너무 쓰레기 같아.”

-음…. 이번 길드전 끝나면 하지 않을까요? 둘이서 길드 하나를 째로 터트렸는데도 안 하면 욕을 엄청 먹을 게 분명하잖아요.

귓가로 패치노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간지러운 느낌에 귀를 긁적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하기야, 대대적인 패치가 안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 나는 모니터를 뚫고 나올 것 같은 공격 스킬들의 향연에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생각보다 쉽게 이기겠는걸. 패치노트의 폭딜로 전선을 무너뜨린 후 뒤를 돌아 적군의 원딜 라인을 하나씩 처리했다. 관짝에 들어간 광전사라도 현질 버프가 있다면 원딜이야 무섭지도 않지!

콤보를 넣는 사이 대상이 다운되면 바로 옆에 있는 다른 놈을 공격해 콤보가 끊기지 않도록 유지했다. 그렇게 적 길드원을 어느 정도 잡아 포인트가 쌓인 걸 확인한 나는 곧바로 패치노트에게 후퇴 오더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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