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생각지 못한 일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한도윤은 술에 취해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붕붕 뜀박질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허탈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뭐야 이게….”
진짜 뭐냐고…. 한참을 그렇게 길거리에 서 있던 나는 뼈가 시릴 정도로 몰려오는 추위에 재채기를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따뜻한 아랫목, 아니 전기장판에 누워 몸을 지지면서도 머릿속에서는 헤어지기 전에 있었던 일만이 떠올랐다. 쉬이 가시지 않는 충격에 게임도 안 들어갔다.
내가 이래 봬도 방학 때는 하루도 게임을 쉰 적이 없는 진성 겜창인데…. 오티인지 나발인지에 불려가서 술을 한 궤짝 퍼먹고 들어왔을 때도 게임만큼은 쉰 적이 없는데…. 멍하니 무늬 없는 천장을 보며 혼란한 머리를 헤집었다.
“다시는 걔랑 술 먹지 말아야지.”
아, 그러고 보니 동기 중에도 술만 먹었다 하면 옆 사람에게 스킨십을 해 대는 놈이 있었다. 한도윤도 똑같은 거겠지. 나는 너무 과하게 생각을 한 것 같다며 희미한 미소와 함께 생각을 비웠다. 에휴, 내 팔자야. 별것도 아닌 거로 머리 썼네.
뭐, 솔직히 쪽팔리는 짓거리를 했다며 다음 날 이불 뻥뻥 차는 건 내가 아니라 한도윤이잖아? 껄껄껄. 말 까기로 한 거까지 잊지는 않았겠지? 다음에 게임에서 보면 그냥 존댓말 쓸까. 전기장판 위에서 데굴데굴하고 반 바퀴 돈 나는 그냥 마음 편하게 존대를 하기로 결정했다.
“아, 안 되겠다. 던전 몇 판 돌고 자야지.”
게임 말려. 비척비척 걸어가 컴퓨터를 켠 나는 곧바로 프리지아에 접속해 던전에 들어갔다. 정확히는 앵벌이였다. 골드 벌어야 하니까. 깔끔하게 딜을 넣으며 키보드를 다다닥 두드리는데 귓속말이 날아왔다. 아, 던전 있을 때는 귓 안 보내는 게 매너 아니냐고!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곧죽 ㅎㅇ]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할말있는디...ㄱㅊ?]
짜증스럽게 채팅 창을 흘겨본 나는 일단 던전부터 끝낸 후 답장하겠다는 생각으로 키보드를 미친 듯이 두들겨 보스를 순삭했다. 하도 집중했더니 목이 다 뻑적지근하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Y]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너 낮에 비접속이라 못 알려준 게 있어서]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
못 알려 준 거? 딱히 중요한 건 없지 않았나? 그러나 이어진 베타 누나의 말에 습관처럼 한숨이 흘러나왔다.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우리 길드전 터짐 ㅎ...]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필드 다닐 때 조심하쇼 ㅎㅎㅎㅎㅎ]
뭐요?
11. 강해져서 돌아와라.
(1)
나는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방금 읽은 내용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의심했다. 아니… 아니, 잠깐만.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갑자기 길드전이 터지는데? 우리 그동안 평화로웠잖아?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 봤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던 나는 다급하게 채팅을 쳤다. 일단 이유, 이유를 찾자.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길드전이 왜 터져]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뭐 때문에? 무슨 이유로????]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그,,,,나도 잘은 모르는데 트러블이 있었다더라고]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무슨 트러블?]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레이드에서 일이 있었대,....]
나는 독촉 아닌 독촉을 하며 베타 누나에게서 원하는 답을 끄집어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있었던 일을 모두 들은 나는 키보드에서 손을 놓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니까 뭐냐….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길드 애들이 딴 길드 애들이랑 레이드를 가게 됐는데 거기서 의견 조율이 안 되는 바람에 싸움이 났다?]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엉....]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그때 있던 공대원은 한놈님이랑 퇴사님뿐? 나머지는 다 자리를 비웠었고?]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길드전은 누가 먼저 걸었는데?]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쟤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채팅로그랑 이런 건 다 있고?]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보내줄게,...]
새로운 메일이 뜰 때까지 새로 고침을 연달아 누르며 어서 빨리 메일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이윽고 도착한 메일을 확인하자 채팅 로그와 당시의 플레이 영상이 들어 있었다. 그 모든 내용을 확인한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고작, 고작 이런 거로 싸웠다고? 요즘 초등학생들도 이런 이유로는 안 싸우겠는데?
저쪽 길드의 멤버는 서브 탱커, 메인 힐러, 서브 힐러 이렇게 셋. 우리 길드의 멤버는 메인 탱커 및 나머지 딜러 라인. 그중 메인 탱커 자리에 들어간 것은 한놈 님이었다.
게임 좀 해 봤다 하는 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탱커와 힐러들의 직업 부심은 장난이 아니다. 뭐, 딜러들도 딴에는 딜부심이라는 게 있다고 하나 그게 탱부심, 힐부심보다 거세지는 않다.
특히나 상대적으로 탱힐 운용을 잘 모르는 딜러들이 제 운용법에 뭐라고 한마디 얹는 순간 그 자리에서 바로 개싸움이 일어난다. 이번에 싸움이 일어난 계기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채팅 로그만 봐도 답이 나온다고 할까.
[힐러님 멘탱님이 힘들어하시는 거 같은데 커버 좀 더 쳐주시면 안 될까요?]
[충분히 커버치고 있는데요]
[그.. 너무 섭탱님께 버프가 몰리는 거 같아서요 좀만 더 신경 써주심 좋을 거 같아요]
[;;; 힐러 해보셨어요?]
이후에는 뭐,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내용이 끝이다. 중간에 한놈 님까지 끌어들이며 멘탱이 너무 무른 걸 자기 보고 뭐 어쩌라는 거냐는 말이 나왔을 때는 이마를 탁하고 쳤을 정도.
‘저 사람이 얼마나 튼튼한데….’
그나마 레이드 자체가 원활하고 클린하게 끝났으면 이렇게 일이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1티어 탱커인 한놈 님이 죽어라 버텼음에도 몇 번이나 전멸했다. 그 순간 ‘이건 네 탓이요, 저것은 네 탓이니, 나는 아무 잘못 없다.’를 시전하면서 서로 물어뜯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
“그래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한놈 님이 유일하네.”
서브 탱커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혼자서 다 처맞았을 텐데도 끝까지 버티는 장면은 눈물이 절로 나올 정도로 처절해 보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지막 보상으로 딜러용 아이템이 나왔는데, 이쪽에 해당 아이템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쪽 길드에서 딜러들 때문에 탱힐들이 고생했으니 자기네가 가져가겠다 말한 것이다. 한놈님을 봐서라도 애써 불만을 참고 있던 길드원들이 거기서 결국 펑 하고 터져 버렸다.
“어째서 난 행복하질 못해…….”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금 영상을 확인해 문제점을 메모장에 하나하나 적었다. 스킬 운용법도 그렇고 전체적인 무빙도 그렇고, 한놈 님을 제외한 탱힐들이 만렙을 찍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뉴비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그냥 좀 해 봤다 하는 사람들 말 듣고 좋게 넘어가지 뭔 존심이 그렇게 세냐.
게임 좀 해 봤다 싶은 우리 길드원 무빙도 성에 차지 않는데 그보다 못한 탱힐들 무빙이 눈에 찰 리 만무. 이런 플레이 영상을 계속 보고 있자니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이거 어떻게 화해는 못함?]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안 그래도 저쪽 길마랑 얘기 중ㅇㅇ]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피차 귀찮은 일 싫을 테니까 적당히 화해하고 끝내자 해]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딜러가 말했다고 고깝게 본 그쪽 탓도 있잖아]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장비도 딜러꺼를 지들이 가져가겠다고 하고]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장비 같은 경우는 사전에 조율 다 하고 들어갔을 텐데]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죽어도 싫댄다 곧죽어도 길드전 걍 하재]
안 그래도 구겨져 있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뭐 어쩌자는 거야.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이쪽에서 좋게 끝내자고 굽히고 들어갔으면 저쪽도 어느 정도는 굽혀 줘야 하는 거 아냐? 그냥 패치노트 불러다 지옥의 언플이 뭔지 보여 줘 버려?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사과받기 전에는 안 끝낼 거래]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울 애들은 왜 자기들이 사과해야 하냐고 그러고 있고]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진짜 어이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기다려봐]
“후우…….”
여기서 이 이상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다. 저쪽에서 끝까지 저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어쩔 수 없지. 장비 창을 열어 내구도와 여러 옵션을 확인했다. 소모품도 뭐,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을 거 같고.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길드이름뭐더라? 쨋든 길드전 건 새12끼들 처죽이러 갈 파티 구합니다 (1/99999)]
[길드/베타: ㄴㅏ,,,,]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저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ㅋ]
[길드/주님한놈갑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말하겠습니다.]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어이가 주님 곁으로 떠났습니다.]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살면서 제 스펙을 보고 무르다 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아, 나도 그 장면이 제일 어이없었어. 고개를 끄덕이며 한놈 님의 말에 긍정하는 사이 다른 사람의 채팅이 올라왔다.
[길드/퇴사기원: 저도 갈래요]
[길드/퇴사기원: 당사자2로서 말하겠습니다 섭탱이 장판들고 딜러한테 쳐왔습니다 궤쉨희가]
[길드/퇴사기원: 살면서 섭탱이 장판으로 딜러 다 죽이는 건 처음 봤습니다]
[길드/연중무휴: 뭐야 뭔데요??]
[길드/연중무휴: 왜 탱이 딜러를 죽이러 달려와요?]
[길드/퇴사기원: 대12가리가 도뢌나보죠]
[길드/베타: 도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나둘, 상대 길드를 쳐 죽이자며 들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유를 아는 사람들은 드디어 빡침을 풀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고,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오랜만에 개싸움이 일어난다고 하니 아주 좋다며 장비를 점검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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