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55화 (55/88)

#55

“조심해서 마실게요.”

끄덕끄덕끄덕. 과한 호응에 괜히 내가 머쓱해진다. 나는 막창이 나오기 전, 미리 술을 주고 떠나는 알바생을 뒤로하고 각각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한도윤이 양손으로 곱게 잔을 받자, 그래 봐야 다섯 살 차이인데 한 열 살은 차이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저리 예의를 차린담.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그냥 맞먹으면 되지.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아무 이유 없이 술 먹자고 하진 않았을 거 아녜요.”

“그… 고민이 있어서요…….”

고민? 나는 그와 가볍게 술잔을 부딪친 뒤 짧게 끊어 마시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정말 큰일이 있었던 건가. 나오길 잘했네. 이후 상황이 좀 거시기해져서 그렇지, 저번에는 내가 고민이 생겨 그를 갑작스레 부르지 않았던가. 이 정도는 들어 줘야지, 당연.

그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내려놓으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더욱 커져 가는 궁금증에 나머지 맥주를 원샷 때렸다. 탁 소리가 나게 술잔을 내려놓자 한도윤의 목소리가 들린다.

“손절하고 싶은 친구가 하나 있는데… 걔네 부모님이랑 저희 부모님이 친하세요. 그래서 오래 알았고…. 어떻게 손절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는 빈 잔에 다시 맥주를 따르며 그의 말을 계속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걔한테 좀 휘둘려 다녔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이제는 휘둘리기 싫다?”

“네…. 별거 아닌 얘기지만 혼자 고민해 봐도 답이 안 나와서….”

곤란하기야 하겠네. 부모님끼리 친하다면 하루 이틀 알고 지낸 것도 아닐 테고 최소 10년은 알고 지냈을 거다. 그런 사람을 한순간에 잘라 내려면 많은 고민이 필요했겠지. 막창을 불에 구우며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근데 그거 연중무휴 님이에요?”

“…어떻게 알았어요?”

“뭐, 제가 아는 사람이 그분밖에 없기도 하고, 정모도 같이 나올 정도로 친하잖아요.”

설마 채팅 뒤에서 한도윤을 조종했던 게 연중무휴인가? 그럼 진짜 대박인데. 맥주를 홀짝이며 눈동자를 굴려 한도윤을 흘겨보았다. 어쩐지 당황한 티가 팍 나는 모습에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딱 봐도 그가 말하지 않은 게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다.

단순한 느낌일 뿐이라서 뭐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진심으로 연을 끊으려는 것 같지 않다. 그냥 말만 한번 꺼내 본 것 같다고나 할까. 노릇노릇 맛있게 익은 막창을 쌈에 싸 먹으며 말문을 열었다.

“진짜 손절할 거예요?”

“…네?”

“손절할 생각 없죠?”

“그건…….”

“제 눈치 볼 필요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면 되는 거지. 제가 굳이 왜 게임하다 말고 나와서 이러고 있겠어요. 그동안 도움받은 것도 많고, 이대로 입 싹 닫고 무시하긴 싫어서 나온 거거든요? 그쪽 얘기 들어 주려고.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대놓고 하세요. 욕해도 상관없으니까.”

뒷담 정도야 뭐, 요즘 누구나 하는 거 아니던가. 손절까지 얘기한 건 의외지만, 사람이 상대방에게 빡치는 일 있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나저나 막창 맛있다. 여기 맛집이네.

“따로 연중 님 찾아가서 말 안 할 테니까 속 터놓고 얘기해요. 막말로 그 양반보다 댁이랑 더 친하다고 생각하니까 편들어 줄게요.”

“…저랑 더 친해요?”

“그렇지 않나요? 연중 님이랑은 딱히 따로 얘기 같은 거 잘 안 하는데, 님은 뭐… 먼저 연락을 보내오기도 해서 자주 얘기하니까 상대적으로 내적 친밀감이 더 높죠.”

여기 막창 진짜 맛있다. 술도 술술 들어가네. 나는 맥주를 완전히 다 비우고 술을 추가로 주문하면서 한도윤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와 달리 나는 술이 X나 세니까.

“기쁘네요.”

“네? 뭐가요?”

“친하다고 해 주셨잖아요. 그게 기뻐서 다른 건 다 괜찮은 거 같아요.”

수줍게 웃으며 술을 비우는 한도윤의 모습에 추가 주문한 맥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던 알바생이 멈칫하며 묘한 눈으로 나와 한도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니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 주세요! 저도 내적 친밀감 최고니까!”

“아… 예에…….”

그러시구나. 그럴 수도 있지. 아까까지만 해도 풀이 죽은 것 같았는데 한순간에 기운 차려 밝디밝은 미소를 짓는 한도윤을 보니 비틀린 미소만이 얼굴 밖으로 흘러나왔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네가 좋다면 된 거지.

“형, 제가 따라 드릴게요.”

“전 자작이 편해서.”

“네….”

술 못 따르게 했다고 다시 풀이 죽었다. 텐션이 정말 오락가락 하는구나. 사람은 참 순하고 착한데… 이왕이면 하나만 해 다오. 한도윤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막창을 먹으며 신나게 말을 이었다.

물론 겜창 둘이 만나 할 얘기라고는 게임 얘기밖에 없어서 주로 공통된 관심사인 프리지아에 관해 떠들었다. 어떤 시스템은 마음에 들고 어떤 시스템은 좀 개선했으면 좋겠고 등등. 한번 말문을 여니 할 얘기가 많았다. 게임 얘기를 이렇게 속 시원하게 하는 건 오랜만이라서 나도 모르게 흥이 올랐다.

“그쵸. 저도 그 보스는 진짜 짜증 나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패턴 거지 같아.”

“공략 글 쓰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때 처음으로 영상을 올렸었어요.”

그땐 그랬었지, 하며 대화를 나눈 지 얼마나 되었을까.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낮이었는데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갔다. 술을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한도윤에게로 돌렸다. 난방이 한창 가동되고 있어 따뜻함에도 술기운에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마치 추운 데서 오래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붉었다. 여기서 더 먹으면 이 양반 골로 갈 거 같은데….

“여기까지 하고 이만 집에 갈까요? 여기서 더 마시면…….”

“왜요…? 저 싫어요…?”

왜 말이 그렇게 되지. 골로 갈 거 같다고 생각하자마자 한도윤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서글퍼 보이는 그 얼굴에 무어라 한마디 하려던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가 나쁜 놈이 된 거 같은 이 기분은.

“저는… 형이랑 더 놀고 싶은데……. 지금 헤어지면 언제 또 볼지 모르는데…….”

“게임에서 보면 되죠.”

“전 밖에서 보고 싶은걸요…. 근데 형은…… 밖에 나오는 거 싫어하니까….”

그건 그렇지. 집이 얼마나 편안하고 안락한데 굳이 밖에 나가겠어. 원래 이불 밖은 위험한 법이라고.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안 되는데요.”

뒷수습은 누가 하라고? 전에는 그래도 문영윤이 껴 있어서 최영수한테 부탁이라도 했지, 오늘은 그것도 못 한다. 단호한 내 말에 한도윤이 다시 눈물을 흘렸다. 서글프다 못해 서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 눈물에 이쪽을 보고 있던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저기 봐. 저 사람 울고 있어.”

“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까지 우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집 갈 때가 돼서 집에 가자고 했는데 우네요.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훌쩍이는 한도윤을 보며 부드러이 웃었다. 누가 봐도 내가 나쁜 놈이네. 다른 테이블에 있었으면 내가 봐도 나를 나쁜 놈으로 봤겠네.

“저기요, 한도윤 씨? 내일 일정도 있을 텐데 집에 가야 하지 않겠어요? 예?”

“없어요….”

“일정이 없어도 잠은 집에서 자야죠. 자, 택시 잡는 거까지는 도와줄 테니까 일어납시다. 제발.”

한숨과 함께 계산을 마친 나는 한도윤을 어르고 달래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훅, 하고 몰아친다. 부디 한도윤이 이 바람을 맞고 제정신을 차리길 기도했다. 말 그대로 기도만 했다.

무겁다. 집돌이라 밖에 나가기는커녕 운동도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비실비실한 육체라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듬직한 한도윤을 들어 업기에는 근력이 너무 쪼들렸다. 이래서 사람이 운동을 해야 하는 거구나. 기본적인 체력과 근력은 있어야 이럴 때 쓸 수 있구나…. 나는 게임에서 힘이랑 체력 스탯 올릴 때 빼고는 그런 거에 신경 써 본 적도 없는데.

“아오…. 정신 좀 차려 봐요! 진짜 버리고 간다?”

“말….”

“뭐라고요?”

“말 놔요…. 형….”

존댓말 싫어요. 멀어 보여. 작게 중얼거리며 흘러나온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말 놓을 테니까 네 힘으로 좀 일어나 봐. 진짜 무겁단 말이야….”

“진짜…? 진짜 말… 놔요?”

“그래. 놓을 테니까 좀 일어나, 이 주정뱅이야.”

힘겹게 한도윤을 떠받치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그 녀석 말이 맞았다는 둥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데, 솔직히 혀가 너무 꼬여 있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다.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에 주변이 밝아진 느낌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자, 그가 정말 기쁘다는 듯이 나를 끌어안으며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남자 둘이 이게 뭐 하는 짓이여?!

“야야야야! 이거 안 놓냐?! 아오, 힘은 또 왜 이렇게 세!”

“헤….”

그냥 집구석에 처박혀 있을걸! 괜히 나왔어!

“형, 오늘 진짜 너무 즐거웠어요…!”

“알았으니까 좀 놔 봐!”

“다음에도 저랑 놀아 줘요. 꼭이요.”

아, 알았다고! 끙끙거리며 벗어나려던 나는 이어진 한도윤의 행동에 딱딱히 굳었다. 그는 내 어깨를 붙잡으며 잠시 멀어지더니 그 어느 때보다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내 볼에 가벼운 뽀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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