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여전히 올라오고 있는 패치노트의 채팅을 멍하니 보며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님]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누가 귓말 테러 보내라고 알려줬어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네?]
딴에는 단도직입적이라 생각하고 보낸 질문에 패치노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걸까. 이윽고 돌아온 답장을 확인한 나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저는 그냥... 형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보낸........ 거였는데....]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불편......하셨나요.........?]
아! 중간중간 쓸데없이 온점 와다다다 찍는 거 개 짜증 나! 그냥 보내면 되지 뭐 하러 온점을 저렇게 무지성으로 찍냐!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아 예]
드르륵-. 나는 의자를 뒤로 살짝 뺀 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탄에 가까운 숨을 내뱉었다. 쉼 없이 채팅을 보내던 패치노트는 배후를 묻는 질문엔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멈칫했다. 그 말인즉, 누군가에게 뭐라고 답장해야 하는지를 물어보고 왔다는 뜻.
“도대체 누구냐.”
어떤 새끼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냐. 장담컨대 그놈은 분명 어딘가 한쪽이 모자라 보이는 패치노트를 골리기 위해 저런 답변을 하라고 알려 줬을 거다. 이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이었다. 어떤 경험이냐고?
“정확히는 내가 뒷사람 역할이었지.”
투명, 문영윤이 다른 과에 있는 여학생한테 번호를 딴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뒤에서 도와주겠답시고 놀려 먹을 때 딱 저랬다. 웃긴 건 놀려 먹겠다고 저 난리 친 게 뜻밖에도 통하는 바람에 진짜 둘이 CC가 됐다는 거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문영윤이 눈물을 흩뿌리며 내 팔을 붙잡았을 때 참 아니꼬웠었지.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목적이 뭘까. 애초에 목적이란 게 있기는 할까? 딱 봤을 땐 그냥 아무 생각 없는 거 같은데. 슬쩍 눈동자를 굴려 꾸준한 채팅 창을 바라보았다.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형 제가 잘못했어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귀찮게 안 할게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그냥 형이랑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요 진짜예요!!!!111]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형??? 자리에 안 계세요??ㅠㅠㅠㅠㅠ]
“…모르겠다.”
그를 조종하고 있는 뒤 놈에게서는 패치노트가 엿 됐으면 한다는 악의가 느껴지지만 정작 패치노트 본인에게는 딱히 그런 느낌이 없다. 뭐랄까….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그만 휘둘리라고 조언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조언 한번 해 주면 그랬구나 하고 정신 차리겠지. 커뮤니티에 올린 글들이 하나같이 논문 뺨치는 걸 보면 머리가 모자란 사람은 아니니까. 좋아, 알려 주자.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저기]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제가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거든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해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네! 열심히 들을게요!]
답장이 너무 깨발랄해서 안쓰러움이 배가된다. 측은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마저 키보드를 놀렸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누가 뒤에서 조종하는진 몰라도 안하는게 나을 거 같아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저한테 귓말 보내기 전에 누가 어떤 식으로 보내라고 알려주고 있죠?]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에 단순 의심이었던 것이 확신이 되었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그거 님 엿 먹으라고 그러는 거예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누군진 몰라도 그런 사람 말 믿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그러다가 나중에 진짜 뒤통수 거하게 맞을 수도 있어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조심해요 진짜로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니까]
여전히 답장은 없었다. 이윽고 채팅 창에 올라온 것은 패치노트가 접속을 종료했다는 알람뿐이었다. 그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 내 말을 믿고 그 뒤 놈을 줘 패러 나갔구나! 이 혹독한 인생을 살아가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흥겨움에 책상 위에 대충 올려놨던 핸드폰을 들어 패치노트에게 톡을 하나 보냈다.
[기왕 패러 가는 거 제 몫까지 좀 패주세요]
[이기고 돌아오세요]
[파이팅]
한 개가 아니라 세 개인가. 나는 뿌듯하게 핸드폰을 내려놓고 마저 던전을 돌았다. 알 수 없는 의문이자 심적으로 괴롭히던 것 하나가 사라지자 키보드 위를 노니는 손가락이 아주 그냥 날아다녔다. 간만에 완벽한 컨트롤을 뽐내며 던전을 끝마친 나는 다음 던전에 들어갔다. 매일매일이 오늘만 같으면 좋겠다.
덜컹덜컹-!
폭설에 창문 들썩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아, 날씨만 빼고.
(5)
패치노트에게 따끔한 조언을 해 준 이후, 그는 며칠 동안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다. 길드 내에서 은연중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냐며 걱정스러운 얘기들을 꺼낼 정도이니 어느새 그가 길드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느껴졌다.
나 또한 응원의 메시지 이후 돌아오는 답장이 일절 없어서 괜한 걱정이 들었다. 설마 줘 패러 갔다가 역으로 당한 건 아니겠지? 책상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힐끗 핸드폰을 확인했다. 본다고 뭐 달라지겠냐마는…. 그래도 나름 친해졌는데 아무 걱정 안 하는 것도 정 없지 않은가.
지잉-, 지잉-, 지잉-.
혹시나 하고 진동을 켜 둔 핸드폰이 가볍게 울렸다. 정확히 딱 세 번. 그 이후로는 잠잠한 것을 보고 나직한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들었다.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을 켜자 ‘한도윤’이라고 적힌 이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도윤: 형...]
[한도윤: 혹시 오늘 시간 되시면]
[한도윤: 저 술 한 잔만 사주시면 안 돼요?]
“…술?”
다른 것도 아니고 술? 차라리 밥을 사 달라 했으면 모르겠는데 술? 수우우우울? 바로 얼마 전에 그 지랄을 떨어 놓고?
“그건 좀…….”
그래도 다른 개진상들보다는 나았으나 제일 적게 마시고 제일 먼저 취해 제일 먼저 진상을 부렸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절로 난색을 표하게 된다.
“본인 술 약한 거 아는 사람이 마시자고 그러는 거면…….”
진짜 뭐 큰일이라도 있었던 거 아냐? 뒤 놈 줘 팬 이후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그동안 게임에 접속 안 한 걸 수도 있고…. 그럼 나한테도 약간의 책임은 있는 거잖아.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숨과 함께 답장을 보냈다. 혹시 모르니까 그냥 한 번은 봐줘야지.
[어디서 볼까요]
나는 컴퓨터를 종료한 후 한도윤의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원래 방학 때는 아무것도 안 하고 집 안에 처박혀서 게임만 하는데, 요즘 들어 밖에 자주 나가게 되는 것 같다. 사람이 밖도 좀 돌아다니면서 살아야 하니까… 좋은 건가?
빠르게 채비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공기가 뺨을 감쌌다. 숨을 내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튀어나온다. 오늘 날씨도 영하였지. 방학이라 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꽃을 좋아한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봄이 되면 정말로 해가 바뀌었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게 된다. 전만 해도 앙상하기만 하던 나뭇가지에 파릇한 새싹이 돋아오르고, 연분홍빛 예쁜 꽃이 피어오르는 걸 보면 괜히 감상에 젖게 된다고나 할까.
추운 날씨 탓에 얼어 버린 손으로 핸드폰을 매만지며 한도윤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나마 버스를 타면 갈아타는 번거로움 없이 도착할 수 있는 곳인지라 편하게 올 수 있었다. 근처 가게에 들어가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멀리서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이렇게 추운데 패딩도 아니고 코트라니. 안 추운가? 나는 추위에 붉어진 한도윤의 양 볼을 보고는 목에 매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그의 목에 둘러 주었다. 한도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패딩 입고 다녀요. 이 날씨에 코트만 입으면 얼어 죽어요.”
“네, 네! 다음부터는 패딩 입고 올게요!”
제 목에 매인 목도리를 매만지며 수줍게 웃는 모습에 나 또한 마주 웃어 주었다. 이게 뭐라고 저렇게 좋아하냐. 그동안 누가 목도리 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나? 마음이 짠해져 주머니에 쑤셔 박아 두었던 핫팩까지 꺼내 손에 쥐여 주자 그가 정말 감동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찌르고 싶어지니까. 주변을 확인하고 근처 가게에 찾아 들어간 나는 따뜻한 공기에 풀어진 얼굴을 하며 메뉴판을 확인했다. 난 곱창보다는 막창이 좋던데. 내가 먹고 싶은 거 시켜도 되나.
“뭐 먹을래요? 좋아하는 거 있어요?”
“저는 형이랑 같은 거면 돼요.”
딱히 가리는 게 없다 이 말이렷다. 나는 알바생을 불러 양념 막창 2인분과 맥주 두 병을 시키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도윤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 볼 차례다. 물론 그 전에 주의는 줘야겠지.
“술 사 달래서 사 주기는 하는데, 많이 먹지는 마요. 그쪽 뻗어 버리면 저기 전봇대 앞이 댁 집이 될 테니까. 애초에 무거워서 제 힘으로는 못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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