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시비 걸면서 간 보는 놈이 어디 있어.”
“그건 진짜 미안. 패치노트 님한테도 죄송하네요.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니었어요.”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두 사람은 약간 찝찝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를 이해한다는 듯, 미묘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악수했다. 약간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사나이들이 개싸움 후 우정을 나누는 것만 같은 장면이라고 할까. 그래서 결국 신경전은 왜 벌인 거냐. 지들끼리서만 결론 내고 나한테는 안 알려 주네? 양아치 새끼들.
“쓰으읍, 문영윤 그 이상 템포 올리면 뒈진다.”
“아, 왜! 겨우 기분 좋아졌는데! 야야, 도윤이라고 했나? 내 잔도 받아야지!”
“네, 형.”
한차례의 화해와 동시에 이어진 눈빛 교환을 마친 두 새끼는 순식간에 호형호제하며 나만 빼놓고 술을 처마시기 시작했다. 죽이 잘 맞아도 너무 맞아떨어져 버렸다. 정녕 이 새끼들이 아까까지만 해도 기 싸움 하던 그 새끼들이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잘 마시네! 소맥 먹어 봤어? 내가 아주 그냥 소맥 장인이거든? 이모! 여기 사이다 좀 주세요!”
“소맥에 사이다가 들어가나요?”
“술만 들어가면 쓰잖아. 소주 1, 사이다 1, 맥주 2 비율로 말면 을매나 맛나게요-?”
“오…. 이런 건 처음 먹어 봐요.”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알쓰가 술 처먹는 걸 지켜보는 나.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뒤처리.
“크으으-! 와, 사이다가 들어가니까 확실히 맛있네요!”
“그치? 술술 들어가지? 자, 한 잔 더 받아! 더더!”
“네, 감사합니다!”
둘 다 이 술자리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표정들이 밝다. 밝아도 너무 밝아서 바로 눈앞에서 해가 쨍하니 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술을 마시는 속도가 새 술을 주문하는 속도보다 빠른 것 같다. 특히 소맥을 말아 먹겠다고 맥주를 퍼부었더니 어느새 네 병이 사라졌다.
아니, 문영윤이야 원래 이런 놈이니 그렇다 쳐도 한도윤은 왜 저래? 저 양반 본인 입으로 술 못한다 하지 않았나? 무엇보다 저번 정모 때 생맥 몇 잔 마시고 바로 골로 갔잖아. 이미 주량을 넘긴 것이 확실함에도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빨간불에도 멈추지 않는 소방차처럼.
“그으으래서 내가! 곧죽이 이 새끼를 확 씨! 때렸어야 했는데에에!”
“나 뭐.”
“정우 형이… 때릴 데가……어디, 있, 어요….”
“그으으니까! 그래서 내가! 안 때렸다니까아아? 때리면 박정우우… 다음 날 변사체로 발견되다!”
“작작 해라.”
깽값이고 나발이고 진짜 줘 패고 싶으니까. 주먹을 꽉 쥐며 분노로 몸을 떨던 나는 뒤에서 들리는 종소리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연중무휴, 정태원이었다.
처음에는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느긋하게 우리 쪽 테이블에 다가오던 그는… 딱 봐도 술에 꼴아 개진상을 부리고 있는 문영윤과 한도윤을 보고 멈칫했다. 인사부터 하기 위해 손을 든 채로 멈춘 정태원이 평소와 달리 흐릿한 미소를 그린다. 나는 그 미소를 본 순간 확신했다. 아, 저 새끼. 이 알쓰들을 내게 떠넘기고 도망칠 생각이구나. 그렇게는 못 둔다.
“어딜… 도망가….”
“으헉…! 어, 언제 오셨어요? 하하. 제가 가긴 어디 가겠어요. 방금 왔는데!”
“그렇죠. 방금 왔는데 백스텝을 치더라? 너도 쟤들처럼 되고 싶나요?”
“에이이이잉! 제가 언제 백스텝을 했다고 그러세요? 생사람 잡으시네! 하하! 하하하하!”
과장된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 앉은 정태원은 이런 상황을 어색해할 것이란 내 예상과 달리 점점 미쳐 갔다. 물론 처음에는 괜찮았다. 최대한 술을 자제하려는 모습도 보여 준 데다 많이 줘도 조금씩 꺾어 마셨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문영윤이 그런 걸 절대 못 보는 스타일이라는 거다.
“개…새끼…….”
“으르렁컹컹! 크헝!”
“푸허하하하학! 얘 봐! 개소리해!”
“으르르를르르르르르!”
소주를 병째로 쑤셔 넣는 문영윤의 만행에 정태원은 도착한 지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개가 되었다. 저 으르렁 소리는 대체 왜 내는 건지 모르겠다. 짜게 식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지금까지 먹은 것까지만 계산한 뒤 유유히 가게를 빠져나갔다.
저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맨정신으로 살아 있었다면 홀로 집에 가진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양반 셋을 데리고 집에 갈 자신이 없는걸. 나는 남보다 내 자신이 더 소중해서 말이야.
“쟤네 내일 숙취로 죽어 나가겠네.”
내일만 힘들면 오히려 다행이지. 주당인 내가 알딸딸하게 느낄 정도로 퍼마셨으니 몇 날 며칠 개고생해야 할 터다. 삼가 알쓰들의 숙취를 빕니다. 적어도 저들이 뻗은 한동안은 조용하겠네. 게임이나 해야지.
(4)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넌 진짜 쓰레기 새12끼야]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놀줄아는놈인가: ㄱㅅ]
학과 동기, 최영수에게서 귓속말이 날아왔다. 별 이유는 아니었고…. 아무리 그래도 술 취한 놈들을 그냥 두고 갔다 큰일 날까 봐 집에 가는 도중 최영수에게 연락해 뒤처리를 맡겼기 때문이다.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이번 진상은 빚으로 달아둔다]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양심없는놈]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놀줄아는놈인가: ㅇㅋ ㄱㅅ]
평소 문영윤을 맡겼을 땐 별말 안 하던 놈인데 이번에 세 명을 동시에 맡긴 건 확실히 심했나 보다. 벌써 며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게임에 접속할 때마다 저런 귓속말을 보내오는 걸 보니 말이다. 게임에 없으면 개인 톡으로 나타나서 투정 부리더라.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놀줄아는놈인가: 밥삼]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고기 사줘]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놀줄아는놈인가: ㅇㅋ]
여기까지는 그냥 평범한 해프닝인지라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없다. 나 때문에 고생한 거나 다름없으니 밥 사 주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날 이후 문제가 생겼다면 이쪽이었다. 나는 묘한 눈으로 모니터 하단에 올라온 채팅을 확인하며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오늘 꿈을 꿨는데 무슨 꿈을 꿨는지 아세요?]
별로 알고 싶지 않다. 남의 꿈속 사정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꿈에서 형이 나왔어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그래서 그런가? 오늘 하늘이 되게 맑은 거 있죠?]
나는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암막 커튼에 살짝 가려져 있는 창문 너머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눈발이 보였다. 우중충한 회색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어 빛 한 줌 제대로 보이지 않는 데다, 돌풍과 함께 몰아치는 눈발에 풍경이 다 가려져 보이는 거라고는 새하얀 눈밖에 없었다.
“제정신인가.”
오늘 폭설 주의보 떴던데, 진심으로 날이 맑다고 생각하는 건가. 도대체 기준이 뭐지?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그러시구나]
뒤에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으나 뇌에 힘을 주어 꾹 참았다. 그나마 채팅이라 생각할 시간이 있고 말을 골라 할 수 있으니 망정이지… 현실에서 대면하며 저런 말을 지껄였으면 뇌 내 필터링을 거치지 못한 욕설이 제멋대로 튀어나왔을 거다.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형 라면 잘 끓여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네]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저 라면 잘 못 끓이는데... 형 집에 라면 먹으러 가도 돼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컵라면 드세요]
가루 털어 놓고 물만 부으면 3분 안에 뚝딱 만들어지는 간편 컵라면을 두고 왜 남의 집에 와서 라면을 먹겠대.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ㅠㅠㅠㅠ]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그럼 좋아하는 음식은요? 한식? 중식? 양식?]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혼자 먹는 밥이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그렇구나...]
스킬 버튼을 누르며 몹을 잡는 중에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귓속말에 진이 다 빨렸다. 이 인간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길드 창에 던전 들어가 있는 거 떡하니 뜰 텐데 왜 자꾸 귓속말질이냐고. 집중하고 있을 때는 조용히 연락 안 하는 게 기본적인 게임 매너 아니냐.
알 만한 사람이 이러니까 더 어이없기도 하고, 뭘 노리고 저러는 건지도 모르겠고. 요즘 다른 길드원들이랑도 친하게 지내던데 나쁜 물이 든 건 아닌가 싶다. 빠르게 던전을 클리어하고 필드로 나온 나는 곧바로 베타 누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님 요즘 패치노트님이랑 친하게 지내시던데]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ㅇ? 질투?]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 노망났나]
와락, 오만상을 구긴 나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이 양반 댁들한테 나쁜 물 든 거 같은데]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뭘 알려준거임?]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왜? 뭐라하는데?]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예전에 누나랑 몇몇이 자주 안 놀아준다고 귓속말 테러했을 때랑 똑같음]
그때 정말 힘들었었다. 당시에는 귓속말이 올라오는 채팅 창과 다른 채팅 창을 따로 구별해 두지 않았었다. 그 탓에 파티원이 내린 오더를 제대로 못 보고 전멸 날 뻔한 데다, 거래를 위해 귓속말을 하는 틈틈이 시답잖은 채팅이 올라와 거래자에게 답장을 못 하고 마우스 휠만 굴리며 실눈으로 채팅을 찾아야 했었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누나가 알려준 거지? 날 빡치게 하는 방법]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ㅋ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존ㄴ ㅏ웃기긴 한데 일단 나는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라고?”
그럼 누가 이런 거지 같은 짓거리를 저 양반한테 알려 준 거지? 베타 누나 아니면 알려 줄만한 사람이 없는데?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