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크흠……. 아아, 그나저나 형 언제 저한테 말 놓으실 거예요? 슬슬 반말할 때 됐잖아요.”
“음… 어쩐지 말을 놓기 힘든 분위기라…….”
“네?”
거울로 네 얼굴 좀 보세요. 함부로 말 놓기 좀 그런 얼굴이에요. 입 안에서 맴도는 대답을 혀로 굴리며 꿀꺽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너무 큰 실례잖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고개를 숙여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차가운 음료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속이 다 시원해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 뭘 해야 하나. 생각해 둔 거라도 있어요?”
“전 형이랑 하는 거면 뭐든 좋아요.”
난 요즘 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는데. 남은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를 맹렬하게 굴렸다. 지금 떠오르는 건 피시방 혹은 술집밖에 없다. 노래방은 내가 노래를 잘 안 불러서 좀 그렇고. 차라리 지금 문영윤도 부를까?
“혹시 괜찮으면 저 친구 한 명 좀 불러도 될까요?”
“네? 친구…요? 아, 네. 전 괜찮아요.”
한도윤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씰룩거렸다. 진짜 괜찮은 거 맞나?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핸드폰을 매만졌다.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뭐함]
[문영놈: 겜]
[나 패치노트님이랑 같이 있는데 님도 나오실?]
[문영놈: ? 뭐임]
[문영놈: 왜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있음?]
[문영놈: 너 누구냐 박정우 아니지?]
[개솔말고 나올거면 나오고 오기 싫음 마라]
[문영놈: 곧감 삼겹살집에서 기다려]
[ㅇㅋ]
“그, 제가 별로 재미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이왕 노는 거 사람이 많으면 좋을 거 같길래….”
“…네?”
“아, 한도윤 씨도 아는 사람이에요. 홀리스터 투명 알죠? 처음 봤을 때 광역기로 조져 버렸던. 저번에 한 번 말했지만, 걔가 제 대학 동기거든요.”
한도윤이 어딘가 멍한 얼굴로 핸드폰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지? 혹시 낯가림이 심한가? 하기야, 나도 낯가림이 있는 편인데 그라고 없을 리가 있나. 지금이라도 문영윤한테 오지 말라고 해야 하나. 핸드폰을 쥔 채 고민에 빠져 있자 한도윤이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내 손을 붙잡았다.
“괘, 괜찮아요. 투명 님이랑 그렇게 친하신 줄 몰랐어요.”
“저도 걔가 투명인 줄 몰랐어요. 같이 술 마시다가 알게 됐지. 아, 삼겹살집에서 보자는데 슬슬 일어나죠. 커피는 다 드셨어요?”
“네…. 치우는 건 제가 할게요. 이리 주세요.”
내 손에 들려 있던 플라스틱 컵을 받아 간 그는 어쩐지 혼이 나간 표정으로 빈 잔을 카운터로 가져갔다. 역시 낯가림이 좀 심한가 봐. 괜히 문영윤을 불렀나? 둘만 있으면 어색할 거 같아서 분위기 메이커 하나 끼우려던 거였는데. 아니면 연중무휴도 부르자고 할까?
카페를 나서 삼겹살집에 가는 도중에도 내 고민은 계속되었다. 역시 스물다섯 사이에 스물이 혼자 덜렁 껴 있으면 어색할 거 같다. 연중무휴한테 개인 톡이라도 보내 둬야 좀 마음이 편할 거 같은데…. 슬쩍 한도윤을 곁눈질로 살핀 뒤 핸드폰을 꺼내 연중무휴에게 개인 톡을 보냈다.
[님 지금 패치노트님이랑 저랑 투명이랑 셋이서 삼겹살집 가려는데 오실래요?]
[정태원: 뭐죠? 그 재밌어보이는 조합은??]
[정태원: 지금 바로 갑니다^^]
답장 한번 빠르구나.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연락할 것을. 여기까지 오는 데에 시간 걸릴 거 아냐. 나는 혼자 땅을 파고 있을 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괜찮을 거예요.”
“네? 뭐가요?”
“아무것도요.”
내가 옅게 웃으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자 한도윤이 부드러이 웃으며 얼른 가자고 나를 재촉했다. 말은 안 해도 나름 기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연중무휴에 대한 건 서프라이즈로 해야지. 셋이서 어색한 공기를 내뿜고 있을 때 친한 친구가 ‘짠!’ 하고 등장하면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하지 않을까? 나는 나름의 호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라, 상황이 잘못될 거란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어쩐지 뿌듯함까지 느껴져 코를 쓱 매만진 나는 그들이 초장부터 PK했던 과거를 잊어버리고 좋은 사이로 거듭나기를 바랐다. 뭐,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저들끼리 알아서 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크나큰 오판이었음을 나중에 가서야 깨닫게 되었다. 여긴 누구? 난 어디?
(3)
치이익-. 싸늘하다. 돼지기름이 가슴에 날아와 꽂힌다.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어 갔다. 고기 굽는 냄새가 주변에 쫙 퍼지자, 오늘 하루 아무것도 먹지 않아 텅 빈 위장이 어서 고기를 넣어 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
“…….”
“그… 고기 다 익었으니까 먹죠….”
“아, 네.”
“그래, 얼른 먹자. 아이고 맛있어라.”
너 고기 집지도 않았잖아. 먹지도 않고 뭐가 맛있다는 거야. 한도윤을 이끌고 삼겹살집에 가자 먼저 도착해 있던 문영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생각보다 괜찮을 것 같은 분위기에 마음이 편해졌던 나는 이어지는 두 사람의 신경전에 위장을 붙잡았다.
내게는 반갑게 인사하던 문영윤은 함께 들어온 한도윤을 향해 ‘그쪽이 패치노트?’라고 물어보며 그를 위아래로 흘겨보았고, 그에 기분이 상했는지 한도윤 또한 ‘그쪽이 투명?’이라며 문영윤을 마주 훑어보았다. 그때부터였나요. 나름 재밌게 놀다 가자는 의미로 만들었던 삼겹살집 정모가 개판이 된 것은.
고기를 굽는 와중에도 둘의 신경전은 끊임이 없었다. 그냥 집에나 갈걸,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내가 이 지X을 겪어야 하나. 고통스러움에 위장이 쓰렸다. 술을 퍼먹으면 좀 괜찮아지려나. 아, 근데 하필 둘 다 알쓰네? 진짜 거지 같다. 상추에 쌈을 싸 먹으며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을 향해 산뜻한 미소를 그렸다. 작작 좀 하자. 이것들이 밥 먹는데 뭐 하는 거야.
“…좀 처먹지?”
“어어, 먹고 있어. 먹고 있어.”
“지랄하지 말고 처먹어라.”
“와, 여기 삼겹살 맛있네요.”
“너도 안 처먹어 놓고 어디서 개소리세요.”
“아니에요. 저는 먹었는걸요.”
내가 뭐라고 하니까 그제야 먹었잖아요. 눈은 문영윤에게 둔 채로 젓가락을 놀려 고기만 집어 먹는 한도윤은 그의 외관상의 이미지 그대로 서늘하게 느껴졌다. 분명 삼겹살을 씹고 있는데 왜 다른 걸 씹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빨리 연중무휴가 와 줬으면 좋겠다.’
그가 오면 이 개판이 좀 수습되지 않을까? 흐릿한 눈으로 가게 천장을 바라본 나는 과거, 길드 정모에서 보여 주었던 연중무휴의 개소리를 떠올렸다. 하하, 더 개판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이마를 짚었다.
“눈빛을 아주 뜨겁게 교환하시는데, 혹시 서로 첫눈에 반하셨는지?”
“어디서 그런 끔찍한 소리를!”
“그런 거 아니에요! 오해하시면 안 돼요! 저는……!”
“아, 그러세요?”
나는 다급하게 해명하려는 두 사람을 번갈아 흘겨보며 입꼬리 한쪽을 비틀어 올렸다. 완벽하기 짝에 없는 썩소였다.
“그럼 눈빛 교환 작작 처하고 밥이나 먹자? 밥상 앞에서 지랄하면 X 된다는 얘기 못 들어 봤냐?”
“뭐…그래야지. 이모! 여기 소주 세 병 주세요!”
“맥주도 시켜.”
술을 시키는 문영윤을 보고 생각난 일에 맥주까지 추가 주문하자 녀석이 마시지도 않을 맥주는 왜 시켰냐는 눈빛을 보였다. 그에 나는 턱으로 한도윤을 가리키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 주었다.
“한도윤 씨 술 못하셔. 오늘 드실 건지 말 건지 모르겠길래 일단 맥주 하나 추가한 거야.”
“…술 못해요? 그 얼굴로?”
“제 얼굴이 뭐 어때서 그러시죠?”
그만해라. 너희 왜 이러냐.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아니, 둘이 언제 봤다고 이러는 거야. 초면 아니었어? 왜 얼굴 보자마자 싸움박질하려는 기세인데? 두 사람은 빠드득 이까지 갈며 신경전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고기 한 점을 집으며 그들을 향해 나직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한 번만 더 지X하면 니들 두고 나 혼자 집에 간다.”
순간 멈칫한 둘은 그제야 고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와, 고기 맛있다!”
“여기 완전 맛집이네요! 투명 님도 좀 드시죠. 자, 여기.”
“저 먹고 있는데요? 님이나 많이 드시죠?”
“얼라도 아니고 뭐 하는 짓거리들이야.”
둘 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영 웃고 있지를 않네. 날 멕이려고 이 지랄 하는 건가? 하하. 그렇다면 나도 똑같이 해 줘야지. 싸늘한 눈으로 입꼬리만 비튼 채 두 놈을 번갈아 흘기자 두 놈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서로 재차 눈빛을 교환하며 어떻게 해 보라는 듯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 새끼들이 내가 빡대가리로 보이나.
주문한 소주와 맥주가 나오고, 소주를 들어 한 바퀴 돌린 다음 뚜껑을 따 나와 문영윤의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아무리 빡쳤어도 술 못하는 사람에게 소주를 줄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기에 한도윤의 잔에는 맥주를 한가득 채워 주었고 말이다.
“자, 술을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자. 너네 왜 얼굴 맞대자마자 지랄하는 거예요?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어? 이 자리를 만든 나한테 불만을 이런 식으로 토로하는 거냐고.”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에이, 설마. 내가 그런 쪼잔한 짓을 하겠어?”
“이미 둘 다 X나 쪼잔해 보이니까 제대로 대답해라. 안 그러면 술병으로 대가리 깨 버릴 거야.”
못 할 거 같지? 어, 맞다. 못 한다.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고 깽값 물어 주기가 아깝잖아. 이 둘이 내게 깽값을 받겠다고 지랄할 것 같진 않지만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놀라운 단어가 있었다.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당장 대답하라는 시선을 보내자 그제야 문영윤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니…. 별건 아니고 그냥 패치노트 님이 어떤 사람인지 난 잘 모르잖아. 그래서 괜찮은 사람인지 간 좀 보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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