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평소라면 춥다고 거북이인 양 느릿하게 걸었을 텐데 오늘따라 걸음이 빨랐던 모양이다. 한도윤이 왔을까. 왔다면 어디 있을까. 주변을 쭉 훑으며 그의 위치를 찾았다. 안 보이는데…. 아직 도착을 못 했나? 추위에 차갑게 식은 핸드폰을 매만지며 새빨개진 손을 패딩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기다리다 보면 오겠지.
그렇게 5분, 10분이 지나도록 한도윤은 오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을 시리게 하는 서늘함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 갑자기 불렀으니 오는 게 힘들었겠지. 그렇다면 진작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너무 기대한 모양이다.
구름이 가득 끼어 있는 하늘을 보다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렸다. 돌아가면 게임이나 할까. 아니, 그냥 자는 게 좋겠다.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다. 하나, 이제 막 집으로 향하려는 발걸음을 익숙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형! 정우 형!”
어쩐지 다급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도윤이 일그러진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죄송해요. 주차장이 안 보여서 찾느라 조금 늦었어요. 어디 들어가 계시라고 톡 보냈는데 못 보셨어요?”
“그런 거 안 왔어요.”
“네? 그럴 리가….”
내 대답에 그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핸드폰을 확인했고, 이내 작은 한탄을 내뱉었다. 그는 내용을 적어 놓고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아 보내지지 않은 톡을 보여 주었다.
“전송 버튼이 안 눌렸나 봐요…. 죄송해요. 많이 추웠죠?”
“진짜 왔네요. 안 올 줄 알았어요.”
“형이 불렀는데 와야죠.”
“왜요?”
내 질문에 한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옅게 웃을 뿐이었다. 대답을 회피하는 그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없이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 들어가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주변은 시끄러웠으나 나와 한도윤 사이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까.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슬쩍 그의 눈치를 봤다. 그는 진동벨이 울리자 서둘러 카운터에 달려가 음료를 가져왔다. 내가 뭐라 할 새 없이 말이다.
“계속 밖에 있어서 추우셨을 텐데, 아이스로 괜찮으시겠어요?”
“전 음료는 무조건 아이스로 마셔요.”
한도윤에게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건네받고, 빨대를 휘저으며 말을 골랐다. 내가 불렀으니 말문도 내가 먼저 여는 게 옳다.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그… 갑자기 불러서 죄송해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요즘 생각이 많아서 그랬나 봐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별거 아닌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빨대를 물어뜯으며 힐끗 한도윤의 눈치를 보았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왜 그런 얘기를 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그냥 생각났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 사람도 그 동기처럼 나중에 뒤에서 무어라 하고 다닐까.
“형, 편하게 얘기하셔도 돼요.”
한도윤이 손을 뻗어 플라스틱 커피 잔을 매만지고 있던 내 손을 붙잡았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그의 행동에 빨대를 물어뜯던 것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그냥… 제가 이맘때만 되면 좀, 뭐라고 할까…….”
“네. 말씀하세요.”
“곧 있으면 새해잖아요. 아니, 곧도 아니지. 내일이면 새해인데 그동안 좀, 한 게 없는 거 같아서…. 한 살 먹을 때마다 해 놓은 게 없으니까 불안하다고 해야 할지….”
채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에 고개를 떨궜다.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너무 못난 것만 같다. 저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지. 왜 이런 고민을 하는지도 모르겠지. 누가 보아도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뒤이어 나온 그의 말은 내 예상을 깨부쉈다.
“저도 그럴 때 있어요.”
“…네?”
“중, 고등학생 때에는 그냥 대학만 잘 가면 되겠지 싶었는데 막상 대학교에 들어가니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학과도 내가 잘 들어온 게 맞나 싶고. 졸업하면 뭘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되는 건 당연한 것 같아요. 저는 아직 군대도 안 갔으니까 더욱 그런 면이 없잖아 있고요.”
테이블 아래 떨궜던 고개를 들어 올려 한도윤을 마주 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저희 나이대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 아닐까요? 그리고 해 놓은 게 왜 없어요. 학기 중에는 게임도 안 하고 열심히 과제 하셨다면서요.”
“그건 누구나 하는 거잖아요.”
“그 누구나 하는 걸 안 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쁘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미 잘하고 계시잖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2)
코끝이 찡한 느낌에 손을 들어 코를 매만지자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웃어.
“형이 네가 뭘 아냐고 그랬으면 할 말 없었을 텐데. 사실 제가 형을 잘 모르긴 하잖아요. 기껏해야 게임에서 알게 된 사이니까.”
“뭐…. 그렇긴 하죠.”
“하하, 좀 민망하네요.”
한도윤이 제 볼을 긁적이며 옅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푸념을 이렇게 들어 줄 줄은 몰랐다. 별것도 아닌 걸 고민한다는 말이나 들을 줄 알았지. 괜히 머쓱해져 커피를 마시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죠. 적어도 미래에 무얼 할지 생각은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넋 놓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그런 고민이라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어른스러우시네요. 제가 아니라 한도윤 씨가 연상이라 해도 믿겠어요.”
“그런가요?”
장난스러운 한도윤의 말이 우중충했던 내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 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평소였으면 불편하게 느껴졌을 그의 호의가 지금은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답을 못 들었는데, 왜 저한테 잘해 줘요? 전 한도윤 씨한테 따로 해 준 게 없잖아요.”
“굳이 이유가 필요한가요?”
“필요해요. 이유 없는 호의는 없어요.”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오는 기억에 주먹을 꽉 쥐었다. 한도윤은 과연 뭐라고 답을 할까. 그때 그 녀석처럼 그냥 마음에 들어서, 별다른 이유는 없다고 답할까. 아니면 그만의 이유가 있노라 말할까. 그는 말을 고르는 모양인지 창밖을 바라보며 뜸을 들였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한도윤의 입이 열렸다.
“처음에는 그냥 재밌어 보여서 그랬던 건데…. 독특하잖아요. 다른 직업도 많은데 굳이 거너만 골라다 PK하고 다니고.”
“커흠, 그건 제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지금은 알아요. 알타니아가 최애였다면서요? 그냥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서 따라다녔던 거예요.”
죽으러온놈으로. 한도윤이 아까처럼 사람 좋게… 아니, 아까보다 더욱 환하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찌르는 족족 반응이 오는 게 재밌더라고요. 같이 다니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더 쫓아다녔던 거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보통 그렇게까지 하진 않지 않나요.”
“저도 누군가를 쫓아다닌 게 처음이라, 어느 정도로 해야 하나 감이 안 잡혀서 되는 대로 해 버렸죠. 나중에야 너무 심했다고 느껴져서 이상한 사람 취급 받기 전에 본캐도 깐 거고요. 요즘은 좀 점잖아지지 않았나요?”
맑게 웃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긴 하지. 패치노트의 계정을 공개하면서부터 점잖아지기는 했다. 죽으러온놈만 알고 있었을 때는 진짜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새삼 얼마 지나지 않은 일들이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뜻인가. 물기가 묻은 커피 잔을 매만지며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 순간 한도윤의 말이 이어졌다.
“그땐 그랬다는 거고, 지금은 다른 이유도 있긴 해요. 근데 그건 아직 말할 때가 아닌 거 같아서,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다른 이유? 그게 뭔데? 고개를 기울이며 궁금증을 표하자 한도윤이 아직 말할 때가 아니라며 나중에 알려 주겠다 답했다.
“…그거 참 사람 궁금해지게 만드는 화법이네요.”
“더 궁금해해 주세요.”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게. 어렴풋이 들려온 뒷말에 고개를 들어 한도윤의 얼굴을 응시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홀짝일 뿐이었다. 잘못 들은 건가. 그때 한도윤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형은 이제 뭐 하실 거예요? 우리 이제 막 카페에 온 건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충동적으로 만나자고 한 거라 뒷일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 크흠…. 글쎄요. 따로 생각은 안 해 뒀어요.”
“그래요? 그럼… 저랑 놀아 주시면 안 돼요?”
한도윤이 양손에 턱을 올린 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문영윤이 했으면 두들겨 패고 싶었을 행동을 멀끔한 한도윤이 하니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얘가 왜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 정도려나. 최대한 점잖게 왜 눈깔을 그렇게 뜨냐고 물어보려던 나는 습관적으로 아무 말을 내뱉었다.
“덩치도 산만 한 사람이 어디서 귀여운 척을….”
“…큼. 그럴 수도 있죠.”
“그럴 수 없어요.”
그나마 잘난 사람이 해서 멀쩡하게 느껴진 거지 나나 문영윤이 했으면 주먹을 불렀을 거다. 내 단호한 어조에 한도윤이 뻘쭘하게 손을 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면 된댔는데….”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질문을 회피한 한도윤의 턱이 잘게 떨렸다. 어디선가 ‘개자식, 죽여 버려야지.’라는 환청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요즘 기가 많이 허한 게 틀림없다.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를 듣고 말이다. 심지어 빠드득, 하고 이 가는 소리까지 들리자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벼 팠다. 보약 한 재 지어 먹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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