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50화 (50/88)

#50

녀석도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걸까. 영험한기운이 어떠한 독촉도 하지 않아서 나는 PVP를 돌다가 그에게서 온 귓속말을 아예 까먹었다. 매칭을 기다리는 틈틈이 길드원들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 잠깐 패치노트를 만나 그에게 골드를 건네주는 등, 나름 유익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이윽고 도착한 장문의 귓속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귓속말/영험한기운>나한테명령하지마: 나 최지수인데 심한말해서 미안해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랑 영윤이랑 나름 친한 사이라 오지랖을 좀 부렸던 거 같아 네가 영윤이를 때렸다는 얘기도 나와서 그게 진짜인 줄 알았어 당사자한테 미리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귓속말/영험한기운>나한테명령하지마: 다른것보다 최근 문영윤이 곧죽 때문에 힘들어했어서 그게 너인 줄도 모르고 막말부터 나갔던 거 같아 정우 네가 곧죽인 거 영윤이도 알고 있는 거지? 다시 한번 미안해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최지수가 누구야.”

얘도 학교 동기인 건가.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도 뭐, 적어도 놀줄아는놈인가와 비교했을 때 완벽하게 잘못을 사죄하는 장문의 귓속말은 조금이나마 그를 삐뚤게 보았던 내 기분을 한결 괜찮게 만들어 주었다. 처음에는 무슨 연락이 와도 씹으려 했는데, 이건 씹으면 내가 나쁜 놈이 될 거 같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영험한기운: 최지수가 누군진 모르겠는데 일단 사과 잘 받았고 문영윤이 투명인 줄 모르고 막 대했던 내 잘못도 있으니 네가 문영윤 생각해서 그런 건 이해할게]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영험한기운: 문영윤이랑은 이 문제에 대해 이미 얘기 나눈 상태니까 너도 더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귓속말/영험한기운>나한테명령하지마: 어.... 너 나 몰라? 우리 같은 과인데.... 디지털콘텐츠...]

디지털콘텐츠학과가 우리 과는 맞는다만 최지수라는 이름은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없다. 적어도 문영윤과 친한 동기 중에는 없었다. 과를 맞춘 거 보면 거짓말은 아닐 터인데, 도대체 누구인 거지?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영험한기운: ? 첨들어봄]

[귓속말/영험한기운>나한테명령하지마: 나... 지수 선배야.... 한 학년 위...]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영험한기운: 예?]

“시바…….”

선배님이었냐고. 아니, 나랑 몇 번 마주친 적도 없는 선배 이름을 어떻게 알아? 그리고 동기고 선배고 왜 다 프리지아 하고 있는데? 우리 학과 애들은 이 게임만 하냐?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영험한기운: 죄송합니다... 선배님인 줄 몰랐어요...]

[귓속말/영험한기운>나한테명령하지마: 아냐... 내가 먼저 실수한데다 모를 수도 있지]

[귓속말/영험한기운>나한테명령하지마: 다음에 학교에서 보면 서로 인사하고 다니자...]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영험한기운: 네...]

키보드에서 손을 뗀 나는 곧바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X발,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10. 지옥의 플러팅

(1)

멍하니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내일이면 새해가 된다. 지난 1년 동안 무얼 했나 생각해 보니, 그저 학교를 다니고 게임을 한 기억밖에 없었다. 이거, 아르바이트 같은 거라도 하면서 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날백수 수준인데.

“이제 새 학기면 졸업반이니까 포폴이라도 준비해야 하나….”

그렇지만 침대가 너무 좋은걸. 이불 밖은 위험하단 말이야. 무언가를 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새해가 다가온다는 것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아마 내 나이대의 성인이라면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학교를 졸업하면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혼란함, 졸업하고 나면 정말 백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하루하루 나이는 먹어 가는데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는 압박감까지.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도 해결되지 않는 막연함에 1년 휴학까지 했음에도 아직 잘 모르겠다. 미약하게 울리는 진동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하자 개인 톡이 와 있었다.

[한도윤: 형 뭐 하고 계세요?]

[한도윤: 혹시 바쁘세요?]

한도윤, 패치노트였다. 나는 예상치 못한 연락에 머뭇거리며 손끝으로 핸드폰을 두들겼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딱히 뭔가를 하고 있던 건 아니니, 그냥 별일 없다고 해야 하나.

[별일없어요]

[한도윤: 그렇지만 오늘 게임 제대로 하지도 않으셨잖아요]

[한도윤: 힘든 일 있으면 말해주세요]

[한도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드릴게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긴 했다. 그토록 좋아하던 게임은 물론이고, 식욕조차 없어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그나마 목은 말랐는지 오늘 먹은 거라고는 물이나 몇 모금 마신 게 다였다. 스스로가 너무 못나게 느껴져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한도윤: 괜찮으세요?]

사람이 이렇게 순해도 되는 거냐고. 나랑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식으로 호의를 보일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나쁜 사람일 수도 있잖아. 좋은 모습은 딱히 안 보여 줬던 거 같은데. 치미는 우울감에 문득 혼자 있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오늘 시간 있어요?]

[한도윤: 어디로 갈까요?]

한도윤은 뭐 때문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어디로 가면 되냐는 답을 보냈을 뿐이었다.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 참 착하네. 그러다가 뒤통수 맞으면 어쩌려고, 내가 사기꾼이면 어쩌려고 냉큼 오겠다고 하는 걸까. 괜히 옛날 생각이 난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내게 친절하게 대해 준 동기가 있었다. 그 동기를 아는 이들은 그의 밝고 상냥한 모습에 감화되어 모두 그를 좋아했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힘들면 언제든 자신에게 말하라며, 이야기를 들어 주겠다고 선하게 웃는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그리고,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지난 일들이라고, 더는 힘들지 않으니 괜찮다고 웃는 동기가 멋있게 보였다.

가끔가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 동기를 찾아가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그는 고생 많았다며 나를 다독여 주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는 녀석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때 당시 문영윤과는 썩 친한 편이 아니었는데, 문영윤은 내가 그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조용히 다가와 이렇게 말했었다.

‘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놈이 아니야. 상처받지 마.’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워낙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몰랐다. 문영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뒤에서 그 동기가 내가 했던 말들을 옮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더라면 지금도 당하고 있었을 거다.

‘귀찮아 죽겠어. 그거 조금 친절하게 대해 줬다고 계속 징징거리잖아.’

‘내가 걔 보모도 아닌데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차라리 나한테 면전에 대놓고 얘기했더라면 그렇게 처참한 기분은 아니었을 텐데. 믿고 있던 친구가 내 뒷담을 하고 다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고, 멀쩡한 얼굴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때마침 입영 통지서가 오지 않았더라면 다른 이유로 휴학을 했을 것이다. 문영윤이 아니었더라면 제대 후에도 학교에 가는 게 힘들었을 터다.

뭐, 그땐 나도 어렸기도 하고. 이미 지나간 일 신경 써서 뭐 하겠어. 고개를 흔들어 기억을 털어 낸 나는 곧바로 한도윤에게 답장을 보냈다. 꾸준하게 들어 왔던 의문이었다. 이 사람은 왜 내게 잘해 주는가. 이유 없는 호의를 보내는가. 마치 그 동기처럼.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안 궁금해요?]

[한도윤: 말해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저 아세요?]

보내고 나서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리더니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했다. 분명 안 좋게 봤겠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미안하다 사과하기 위해 다시 자판을 여는데, 한도윤의 답장이 더 빨랐다.

[한도윤: 몰라요]

[한도윤: 모르니까 알아가려는 거죠]

[한도윤: 어디로 갈까요?]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갓 성인 아니었었나. 이럴 때 보면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 더 연상인 것만 같다. 허탈하게 웃으며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의 이름을 보내자 한도윤은 금방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왜 이맘때만 되면 이러는 건지. 동기의 뒷담을 듣게 된 게 딱 이때쯤이라 그런가. 한도윤이 정말 올까? 갑자기 약속을 잡은 건데. 정말 와 줄까? 초조하게 핸드폰을 매만지며 옷을 갈아입었다. 저번 정모 때 입은 것과 똑같은 복장에 새삼 옷이 없구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문영윤한테 옷 같이 사러 가 달라고 또 부탁해야지. 그 녀석이라면 귀찮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성심성의껏 나를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내게 딱 맞는 옷을 골라준 뒤 한턱 쏘기나 하라며 익살스럽게 말하겠지. 참 좋은 친구를 뒀다니까.

그렇게 30여 분의 시간이 흐르고, 한도윤에게 톡이 도착했다. 5분 뒤면 도착할 테니 지금 나오면 될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막상 나갔는데 안 오면 어떡하지. 불안함과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으며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서늘함에 나직이 숨을 내뱉으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천천히, 그렇지만 너무 느긋하지 않은 속도로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머릿속에 뒤늦은 후회가 떠올랐다. 그냥 문영윤한테나 연락할걸. 초면이나 다름없는 한도윤보다 그 녀석이랑 만나는 게 더 편했을 텐데.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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