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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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결투장에서 PVP를 돌렸더니 어느새 내 랭킹은 100위권대로 진입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거리며 화장실로 향한 나는 허옇게 질릴 대로 질려 버린 썩은 낯짝을 보아야 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죄는 현생에서 지었던가. PK를 한 게 죄야? 게임 내에서 정해 둔 룰에 따라 한 건데? 어쩐지 눈물을 흘려야 할 것 같았으나 아쉽게도 내 눈가는 건조하기만 했다. 찬물로 세안을 하고 밖으로 나온 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길드 단톡 외에 연락 온 곳은 없었다.
[이세영: 진짜 곧죽님이랑 투명이 실친이에요??]
[임효린: 둘이 학교 동기래요]
[임효린: 곧죽이 대학생이니까 대학 동기일지두...?]
[이세영: ㅋㅋㅋㅋㅋㅋㅋㅋ곧죽님 실친을 그렇게 죽이고 다녔던거였구나...]
[김현호: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임효린: 무슨 기도하는데?ㅋㅋㅋㅋㅋㅋ]
[김현호: 딱히 의미는 없습니다.]
[정태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런]
“재밌어? 내가 고통받은 게 재미있어?”
물론 저들은 문영윤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 녀석이랑 전화하다 온갖 혀 짧은 소리를 듣고, 핸드폰을 내던졌다가 다시 찾으니 토악질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저들은 모른다. 알긴 아는데 빡치네?
[웃어?]
[임효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곧죽왔니? 어솨^^]
[웃어?]
[임효린: 웅!!]
[웅소리 한번만 더하면 결투신청 오조오억개 보낸다]
[임효린: ㅇㅖ? 웨죠?]
[이세영: ㅋㅋㅋㅋㅋㅋ곧죽님 왤케 빡쳣어요...?]
그걸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져서 말 안 할래요. 비죽, 아랫입술을 내밀며 핸드폰을 내려놓은 나는 눈가를 꾹 누르며 애써 피곤함을 풀어냈다. 분명 새벽 한 4시쯤에 잠들어서 오후 2시가 넘은 지금 일어났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이걸 뭐라고 할까. 너무 과하게 달린 나머지 그로기 상태가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길게 하품을 한 나는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고 프리지아에 접속했다.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며 뻐근한 몸을 푼 것은 덤이었다.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님 투명이랑 무슨 사이임?]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사이 안좋지안았음?]
“이건 또 뭐야.”
접속하자마자 날아드는 귓속말에 느리게 눈을 깜빡인 나는 곧바로 차단을 먹였다. 답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굳이 뭐 하러. 그러나 내게 귓속말을 보내는 이는 방금 전의 놀줄아는놈인가뿐만이 아니었다.
[귓속말/영험한기운>나한테명령하지마: 어제 투명이랑 뭐한거?]
[귓속말/영험한기운>나한테명령하지마: 화해했냐?]
[귓속말/클레오빡돌아>나한테명령하지마: 니가 자러가라니까 투명 자러가던데 뭔 사이임?]
[귓속말/해치웠나>나한테명령하지마: 님아 투명이랑 친해요?]
[귓속말/영험한기운>나한테명령하지마: 야 씹지말고 답장해라]
“하아…….”
귓속말 전체 차단 옵션을 켰다. 그러자 미친 듯이 몰려오던 귓속말이 싹 사라졌다. 역시, 평소에는 귓속말을 차단해 둬야겠어. 그렇게 마음먹자마자 이번에는 외치기가 튀어나왔다.
[외치기/영험한기운: 차단멕이네ㅋㅋ;]
[외치기/놀줄아는놈인가: 그래서 먼 사이냐고오오~~~~]
[외치기/영험한기운: ㅅㅂㅋㅋㅋㅋㅋ그거 물어본게 죄임?ㅋㅋㅋ]
[외치기/놀줄아는놈인가: 울 투명 그런애 아닌디!!]
[외치기/클레오빡돌아: ㅁㅈ 곧죽 죽이겠다고 실친한테 부탁도 한 애인데!!]
[외치기/클레오빡돌아: 그런애가 싸우지 않고 걍 넘어갔다?!]
아, 머리 아파. 관련도 없는 제삼자 주제에 뭐 저리 오지랖이 넓단 말인가. 눈가 대신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문영윤 이 새끼, 날 잡아서 조져 버리겠어.
[외치기/나한테명령하지마: 실친이다 됐냐 시12발들아]
[외치기/대학등록금: ?]
[외치기/놀줄아는놈인가: ㅁㅓ??]
“남의 일에 뭐 이리 참견이야. 개빡치네.”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으며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어디, 실친이라고까지 했는데 뭐라고 지껄이는지 한번 보자고. 귓속말 차단 해제를 풀어놓자 딱 한 사람에게서 귓속말이 도착했다.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님 진짜 투명이랑 실친임?]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아니 다들 현피떴네 어쩌네 얘기가 많아서]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진짜 그런줄...]
이 새끼 봐라? 변명 전에 사과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니냐? 욱한 마음에 무어라 쌍욕을 박으려던 나는 이어지는 놀줄아는놈인가의 귓속말에 벙찐 표정을 지으며 손을 멈췄다.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나도 투명이랑 실친이라,,,]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울 학교 동기이신가,,,?]
“뭐?”
학교 동기? 투명, 아니 문영윤이랑 학교 동기라고? 그럼 나랑도 동기라는 건데…? 머릿속에 문영윤과 같이 다니던 녀석의 친구들이 스쳐 지나갔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놀줄아는놈인가: 너 이 새12끼 누구냐?]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최영수]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놀줄아는놈인가: 니가 최영수라고?? 너 프리지아했냐???]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엌ㅋㅋㅋㅋㅋ ㄹㅇ 학교 동기엿네 너 누구냐?]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놀줄아는놈인가: 박정우]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넠ㅋㅋㅋㅋㅋㅋ영윤이 엄맠ㅋㅋㅋㅋㅋㅋ엄마가 곧죽이었어???ㅋㅋㅋㅋㅋㅋ]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놀줄아는놈인가: 내가 왜 문영윤 엄마야 ㅅㅂ 누구한테 들었냐 그거]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저번엨ㅋㅋㅋ문영 개만취했을 때 재형이가 알려주던데?ㅋㅋㅋㅋㅋㅋ영윤이 엄마가 너무 연약해서 자기한테 술취한 문영 맡겼다곸ㅋㅋㅋㅋㅋ]
그 새끼가 떠벌리고 다녔구나. 문영윤이 제 쪼대로 술을 처먹어 꼴아 버렸을 때 근처에서 만난 동기에게 녀석을 떠넘기고 집에 돌아왔던 게 떠올랐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꾹 누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문 나는 문영윤과 더불어 그때의 동기, 김재형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놀줄아는놈인가: 그딴식으로 부르지마셈;]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ㅇㅋㅇㅋㅋㅋㅋㅋ일단 미안 둘이 ㄹㅇ 현피 떠서 알게 된 줄 알앗음 다른 애들한텐 내가 잘 말할게]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놀줄아는놈인가: 또 헛소문 나면 그땐 현피뜰거임]
[귓속말/놀줄아는놈인가>나한테명령하지마: 네가?ㅋㅋㅋㅋㅋㅋㅋ아 ㅇㅋㅇㅋㅋㅋㅋㅋ]
“거지 같네.”
현피 떠 봤자 지는 건 내가 되겠지. 하나,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이래 봬도 나름 문영윤과 사이좋다 못해 학과 내에서 녀석의 메가 베스트 프렌드 되는 게 바로 나다. 나는 삐뚜름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핸드폰을 꺼내 문영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이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영윤이 전화를 받았다.
-어? 왜?
“너 최영수 알지?”
-알지, 알지. 걔는 왜?
“어제 네가 술 처먹고 개진상 부렸잖아. 그것도 게임 내에서.”
-응… 미안…….
“그거까지는 내가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 뒤에 게임 접속하니까 네 지인이라는 놈들이 나한테 귓속말 테러 보냈거든? 특히 영험한기운인지 뭔지가.”
-어? 진짜? 근데 그… 아니다. 그리고?
뭐야, 싱겁게. 어쩐지 어정쩡한 문영윤의 대답에 의아했지만, 일단 할 말은 해야 했기에 적당히 납득하고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최영수가 놀줄아는놈인가라며? 걔도 테러 보냈다. 둘 다 네가 어떻게 좀 해봐. 개 빡쳐 죽겠어.”
딱 봐도 짜증이 팍팍 묻어나는 내 목소리에 문영윤이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제 딴에는 심각하게 대답했다.
-야, 진짜 미안하다. 걔들이 그럴 줄 몰랐어. 내가 잘 말할게.
“제대로 말해 놔. 한 번만 더 그러면 진짜 걔들 죽고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너 혼자 살아남는 거… 아니, 알았어. 내가 말해 둘게.
전화가 끊기고, 위장약을 먹은 것처럼 속이 뻥 뚫리는 기분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저 게임을 진행했다. 짜릿해, 즐거워, 엿 멕이는 게 최고야! 지금이라면 어떤 빡대가리가 시비를 튼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을 것만 같다.
[귓속말/영험한기운>나한테명령하지마: 너 박정우라며?]
이건 또 뭐야. 한창 PVP를 달리며 랭킹을 올리던 나는 갑작스레 도착한 귓속말을 힐끗 곁눈질로 보며 답장하지 않고 씹었다. 나 지금 랭킹이 걸려 있거든? 한창 싸우는 중이거든? 컨 삑사리 나면 DPS 나가리 되는 광전사라 뇌에 힘주고 게임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알아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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