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휘청이던 문영윤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다.
“오늘부터 여기가 네 집이다.”
“에엥? 아닌데. 울 집 쩌어어긴데?”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그걸 알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여기서 입 돌아가든가, 아니면 귀소 본능을 믿고 집에 돌아가든가. 애초에 내 근력으로 이 녀석을 집에까지 바래다주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문영윤은 나보다 머리 반 개는 더 크고 무거운걸. 중간에 가다가 둘 다 쓰러지면 끝장나는 거다. 영 일어날 생각이 없는 문영윤을 정말 두고 갈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내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야, 너네 여기서 뭐 하냐. 사진 찍어도 됨?”
“너 살아 있었냐?”
“뭐래? 네가 제일 연락이 안 돼.”
같은 학과 동기였다. 특히 문영윤이랑 자주 붙어 다녔던. 그러고 보니 얘도 근처에서 자취한다고 했었지, 참.
“야, 잘 됐다. 얘 좀 데려가 봐.”
“…문영놈한테 술 먹였어? 제정신이니?”
“얼마 안 먹였는데.”
“저 새끼 알쓰잖아. 알쓰한테 술 먹인 놈이 잘못한 거지.”
…이게 내 잘못이야? 둘이서 소주 두 병 깠는데? 심지어 내가 거의 다 처먹었는데? 억울함에 동기를 바라보자 녀석은 낄낄거리며 나와 문영윤의 사진을 찍었다.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영 거슬린다.
“데려갈 거면 네가 데려가지 왜 나보고 데려가래. 얘 돼지라 무겁단 말이야.”
“내가? 저걸?”
“아, 하긴…. 네가 좀… 응….”
동기가 나를 향해 짠한 눈빛을 보내온다. 그 눈깔은 뭐냐. 확 씨, 찔러 버린다?
“나야 혼자 나온 것도 아니고 저기 친구 놈 둘이나 더 있으니까 넌 먼저 집에 가. 그러다 감기 걸릴라.”
“…그렇게 허약하진 않거든?”
“그래? 볼 때마다 빌빌거리길래 허약한 줄.”
“내가 그런 인상이야?”
“너 아는 사람 다 붙잡고 물어봐라.”
나는 찬 바람을 오래 쐬어 시린 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살면서 그렇게까지 허약하단 생각은 안 해 봤는데, 남들 보기 그렇다니까 정말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보다. 근육이라도 키우면 덜 하지 않을까.
“영윤이 엄마, 조심히 들어가! 넘어지지 말고!”
“아니, X발, 내가 왜 문영윤 엄마야? 미쳤어?”
“아휴, 영윤이 엄마가 영윤이 많이 아끼잖아. 처자느라 수업 제대로 못 들은 것도 하나하나 다 챙겨 주고. 됐으니까 어여 들어가. 아, 맞다. 생존 신고는 좀 하고!”
“하…. 오냐.”
동기와 작별 인사를 마친 뒤 집으로 향했다. 문영윤 때문에 밖에 좀 오래 서 있었더니 안 그래도 추운 몸이 더 춥게 느껴졌다. 돌아가는 게 일이다. 터벅, 터벅. 집으로 향하는 길이 무척이나 멀게 느껴진다.
“저놈의 새끼는 술이 왜 이렇게 약하냐.”
나는 진짜 간에 기별도 안 갔는데. 저녁 타임에 나와서 그런지 어느새 까맣게 물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근처 마트에 들렀다. 안주는 대충 육포로 하고, 술은 역시 빨간 뚜껑인가. 코를 훌쩍이며 원하는 것을 모두 구매한 뒤 검은 봉다리를 들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난방을 끄지 않고 나가서 그런지 따뜻한 집 안의 공기를 느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역시 집이 최고야. 옷걸이에 대충 외투를 걸어 놓은 뒤 의자에 앉았다. 게임은 역시 음주 게임이지.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며 컴퓨터를 켠 나는 곧바로 프리지아에 접속했다.
[길드원 나한테명령하지마 님께서 접속하였습니다.]
[길드/베타: ㅎㅇㅎㅇ]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ㅎㅇ]
[길드/베타: ㅇㅅㅋㄹㅇ ㄱ?]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ㄴ ㄱㅌㅈ ㄱ]
[길드/베타: ㅠ ㅇㅋㅂㅇ]
소주를 홀짝이며 베타 누나와의 채팅을 끝낸 나는 종이컵이 비어 있음을 깨닫고 다시 술을 채워 넣었다. 내가 홀짝 마시는 건 다른 사람의 원샷이나 다름없다 보니 금방금방 잔이 비었다. 술이 가득한 종이컵을 다시금 들어 올리며 결투장에 매칭을 넣으려는 찰나였다.
[전체/투명: 야ㅏ너ㅓ일롞ㅇㅏㅗ바]
“아니, 이 새끼는 술 취했으면 그냥 자러 가지 왜 게임을 켰냐. 미친 건가?”
아니면 조용히 게임만 하든가. 어처구니가 없어 입에서 헛바람이 절로 튀어나왔다. 종이컵을 내려놓은 나는 곧바로 채팅을 쳤다.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걍자러가라]
[전체/투명: 겨ㅕㄹ퉂장으ㄹㅎ따라외]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자라고;]
하필이면 전체 채팅으로 드잡이질을 한 탓일까. 어느새 삼삼오오 모여든 유저들이 나와 투명을 보며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전체/클레오빡돌아: 엌ㅋㅋㅋㅋ투명이랑 곧죽이랑 또 싸운다!!!!ㅋㅋㅋㅋㅋ]
[전체/놀줄아는놈인가: 야 나랑도 싸워;]
[전체/놀줄아는놈인가: 재밌어 보이니까 끼워줘;;]
알고 봤더니 이전에 부적절한닉네임으로 투명을 만났을 때 오지랖을 부렸던 유저들이었다. 닉네임이 하도 희한해서 기억하고 있었지.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니까. 갑작스러운 두통에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냥 혼술이나 하면서 게임 좀 땡기다가 자려고 했을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길드/베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 또 투명이랑 싸운다며? 소문 퍼짐ㅎ]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안 싸움]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저새12끼 술 취해서 자러 보내야함]
[길드/베타: 오엌 아니 뭐야 왜 갑자기 투명한테 친절해졌어??]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설명해 줄 수 있긴 한데 그걸로 놀릴 거 같아서 좀 꺼려졌다. 내가 길드 채팅을 훑는 한편 전체 채팅으로 투명에게 자러 가라는 말을 오조오억 번 때릴 때였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건지, 패치노트가 길드 채팅 창으로 묵직한 팩트를 던졌다.
[길드/패치노트: ?]
[길드/패치노트: 왜 형이 투명을 챙겨요?]
[길드/패치노트: 둘이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나요?]
안 좋긴 안 좋았지. 나와 투명의 사이가 나빠서 그런지 투명의 길드인 홀리스터와 폭주기관차의 사이도 별로 안 좋았다. 공팟을 돌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누구 하나가 쟤네랑 같이 게임 하기 싫다며 튕겨 나오는 수준이라고 할까.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친구예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예?]
[길드/퇴사기원: ?????]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저도 몰랐는데 저 새12끼 같은 학교 동기였어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술처먹은 것도 오늘 저랑 먹은 거라...]
나랑 마신 게 아니었으면 이 자리를 탈주했지, 뭐하러 남아 있겠어. 쯧, 혀를 차며 핸드폰을 꺼내 문영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전화 받고 잠 좀 처자라. 그러나 문영윤은 핸드폰을 어디에다 둔 건지 채팅으로 지랄하되 전화는 받지 않았다. 이거 완전 개새끼 아니냐?
[전체/투명: 안니 곃투정 땨량ㅎ런;까?]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투명: 아12갈 싸1물고 쳐자,,,]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투명: 아니면 전화를 처 받아 개1새2끼야,,,]
[전체/투명: ㅁㅎ러늦거야?]
[전체/투명: 나 폼 이로러버룎어]
[전체/투명: 아딖닦ㅈ;?]
“미치겠네…….”
이마를 부여잡으며 문영윤을 집에 바래다주었을 다른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내 전화를 제때 받았다.
“너 지금 문영윤이랑 같이 있냐?”
-아니? 걔네 집 현관 앞에 버려두고 나는 돌아갔지.
“…그러냐? 걔 핸드폰은 제대로 가지고 있던?”
-몰라. 다른 애들한테 한번 물어볼게. 잠깐만.
수화기 너머로 동기가 다른 사람과 무어라 얘기를 나누는 게 들렸다. 되돌아온 녀석은 자신들은 모르겠다는 말을 남겼고, 그에 나는 알겠다고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전체/투명: 어ㅏ나 촌 탖앗ㅅ어]
[전체/투명: 냐가ㅏ 겋개]
“하… 진짜 미치겠네.”
핸드폰이 전화가 왔다며 진동을 울린다. 화면에 떠 있는 문영놈이라는 글자를 바라보며 양손에 얼굴을 묻은 나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다 죽었으면 좋겠다.
“야… 너 얼른 자라.”
-어, 어, 나 잠 안 와!
“어쩌라고. 쳐 자. 게임에서 등신 짓 하다가 박제당하지 말고.”
-싫어어! 안 자아알 거야!
“술 말리네…….”
아니, 이럴 때는 담배 말린다고 해야 하나? 비흡연자도 담배가 생각나게 만드는 등신 짓이라니, 볼 때마다 새로운 놈이 아닐 수 없다. 목이 타는 느낌에 소주병을 통째로 들어 올려 그대로 들이마셨다. 비흡연자니까 담배 대신 술을 먹어야지. 어느새 비어 버린 소주병을 보며 쓰게 웃었다. 나도 좀 취하고 싶다.
“영윤아.”
-웅?
“혀 짧은 소리 한 번만 더 내면 죽여 버린다.”
-우웅….
“진짜 X발, 제발, 제발, 제에에에발, 자러 가 줘. 제발……. 나중에 PVP 해 줄게! 아니, 내가 져 줄게! 자라! 제발!”
-으잉…….
“으아아아아아악! 악! 으악! 끄악! X나 듣기 싫어!”
핸드폰을 침대 위에 내던진 뒤 귀를 틀어막았다. 혀 짧은 소리 내지 말라고! 짜증 난다고!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핸드폰을 찾았다. 누가 나 좀 살려 줬으면 좋겠다.
-나… 우욱……. 우웨에엑…….
아니, 그냥 살리지 말고 죽여 줬으면 좋겠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전화를 끊었다. 몰라, 지 알아서 하겠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내가 더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마친 나는 짜게 식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PVP를 돌렸다. 분노를 풀 곳이 없으니 합법적인 게임 내에서 킬을 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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