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47화 (47/88)

#47

수신음이 귓가에 맴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이 전화를 받았다.

“한 번에 받을 줄은 몰랐는데.”

-……? 왜 전화 받자마자 시비?

“님, 술 먹으러 가실?”

-갑자기요?

전화기 너머 얼떨떨해하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다. 녀석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더니 이내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어디서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순순히 만나 줄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빨래 건조대에 대충 널어놓은 옷가지를 꺼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은 나는 따뜻한 롱패딩을 마지막으로 껴입고 밖으로 향했다.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오늘 날씨가 몇 도라고 했더라. 영하 1도였던가, 10도였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뒤로한 채 천천히 약속 장소로 향했다.

“미친 날씨….”

춥다. 추워서 얼굴이 뜯겨 나갈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두툼하게 입고 군밤 모자라도 쓰고 올걸. 뒤늦은 후회에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얼른 도착해서 따뜻한 건물 안으로 들어갈래. 그렇게 평소와 달리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문영윤이 먼저 와 있어 나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우리 집 여기서 겁나 가깝잖아. 네가 부르는 일은 드무니까 대충 겉옷만 입고 바로 나왔지.”

“그러냐. 춥다, 안에 들어가자.”

약속 장소는 전에 한 번 온 적 있는 삼겹살집이었다. 솔직히 다른 데는 너무 멀어서 가기 싫다. 춥기도 춥고 멀리 나가기 귀찮단 말이야. 적당한 자리에 앉으며 메뉴를 주문한 문영윤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 새끼도 나 못지않은 노빠꾸라니까.

“그래서, 무슨 일인데? 웬일로 먼저 술을 먹재?”

“나 게임 접을까 봐.”

“응, 지랄 노.”

이 새끼가? 내가 정색하며 문영윤을 바라보자 녀석은 콧방귀를 뀌며 개소리 말라고 일갈했다.

“겜창이 막말하죠? 네가 진짜로 접으면 개강하면 내가 네 꼬붕이다.”

“X나 나에 대해 너무 잘 아는걸? 죽어 줘야겠어.”

“네, 다음 겜창.”

“개새끼.”

뭐, 진짜 접으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녀석에게 그동안 깜빡해서, 혹은 귀찮아서 안 했던 말을 하기 위한 빌드업이라고나 할까.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며 불만을 표하자 문영윤이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답하며 소주 뚜껑을 땄다. 녀석이 따라 주는 술을 잔에 받으며 원샷을 때렸다.

“투명아.”

“박정우 씨, 밖에서 닉네임 부르는 건 무슨 개똥 같은 매너죠?”

“내가 곧죽이야.”

“…뭐요?”

문영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더니 이내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을 와락 구기며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X발…. 진작 말하지.”

“안 물어봤잖아.”

“그래도 내가 투명인 걸 알게 된 순간 말해 줬어야지! 이건 배신이야!”

녀석은 제 잔에 술을 따르고 털어 넣기를 반복했다. 어지간히도 속이 쓰린 모양이다. 이러다가 저번과 같은 꼴이 날 것 같아서 겁나네. 이 새끼 취하면 개노답 새끼인데.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은 문영윤은 양손에 제 얼굴을 묻으며 한탄과도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는… 당사자 붙잡고 앞담한 등신인 거잖아….”

그걸 이제 알았나. 나는 슬쩍 고개를 뒤로 빼며 녀석이 빼먹은 한 가지를 정정해 주었다.

“거기에 당사자한테 당사자 죽여 달라고 한 등신이기도 하지.”

“뒈질래요?”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시든지.”

어깨를 으쓱이며 적당히 대꾸하자 문영윤이 제 잔에 술을 따른 뒤 곧바로 들이마셨다. 아니, 너 진짜 적당히 먹어라. 뒤처리 내가 해야 한다고.

“꼴받네? 결투장으로 따라와.”

“이길 자신은 있으시고?”

“개새끼….”

네, 다음 1평으로 개발린 듀블. 낄낄거리며 웃은 녀석이 내 잔에 술을 따랐다. 녀석의 닉네임처럼 투명한 소주를 보니… 속이 더부룩해진다. 아, 그냥 안 마실까 봐.

“표정 풀어라.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인다.”

“아, 들킴.”

내 표정이 막 그렇게 읽기 쉬운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아채셨을까. 히죽 웃으며 문영윤과 술잔을 부딪쳤다. 맑게 울리는 유리 소리에 비틀렸던 입꼬리가 풀어졌다.

“투명아.”

“아, 밖에서 닉네임 부르지 말라고! 뭔 매너냐고!”

“너 공대 없으면 같이 할래?”

“어? 공대?”

무슨 공대? 녀석의 눈빛이 그렇게 묻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길드원끼리 공대를 짜서 이스카리아 파밍을 지속해 왔다. 이번에 퇴사기원이 공대에 들어오긴 했으나 그들은 일단 기본적으로 회사원이 아닌가. 나중에 재취업을 하게 될 시 공대에서 나갈 확률이 컸다.

“정확한 기간은 몰라도 두세 달 안에는 신규 레이드 나올 거 같지 않냐? 근딜 하나 더 데리고 가고 싶은데, 공대 들어올래?”

“개발린 듀블을 데리고 뭘 하신다고요?”

“아, 이 새끼 뒤끝 장난 없네.”

쪼잔하다, 쪼잔해. 그렇게 쪼잔해서 인생 살겠어?

“야, 우리 공대 딜 하나는 쩔거든? 이만큼 캐리 가능한 공대 몇 없다. 개발린 듀블한테 이 정도면 완전 개이득인 부분 아닌지?”

“제 의견은 어디 갔죠?”

“제가 왜 네 의견을 챙겨야 하죠? 굳이?”

“이 새끼 양심 없네?”

그 양심, 옛날 옛적 고릿적에 팔아먹었답니다. 나한테 양심이라는 게 있었으면 알타니아 죽였다고 거너 대학살을 벌이지 않았겠지. 스스로 느끼기에도 개매너 짓이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유저한테는 죄가 없었잖아? 운영자가 개새끼였지.

결론만 말하자면 투명, 아니 문영윤은 내 제안을 거절했다. 이미 공대로 활동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속마음을 생각하면 인게임 내에서의 내 캐릭터, 곧죽을놈이랑 같이 게임을 하기 싫어서가 아닐까 싶다. 가볍게 넘어가서 그렇지, 쌓인 게 많긴 했잖아.

문영윤과 나는 술을 한 잔씩 주고받으며 불판 위에 삼겹살을 구웠다. 한동안 라면을 주식으로 삼다가 기름진 음식을 먹으니 속이 영 더부룩하다. 이래서 사람이 평소에 잘 챙겨 먹어야 하나 보다. …아닌가. 투명이랑 먹어서 속이 안 좋은 건가.

“야, 너 핸드폰에 뭐 온다.”

“단톡이니까 씹으면 됨.”

“아니, 아이콘 보니까 문자 같은데?”

문자? 갠톡도 아니고 문자로 연락할 사람은 딱히 없는데. 문영윤과 대충 술잔을 부딪친 뒤 잔을 들지 않은 빈손으로 핸드폰을 두드려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정여사: 어디야]

[정여사: (사진)]

[정여사: 콩 너보고시퍼해]

“어…. 이건 생각 못 했는데.”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사진을 확대했다. 자그마한 고양이 한 마리가 현관문 앞에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보니 손이 근질거린다. 못 본 사이 꽤 많이 컸네.

“왜? 누군데?”

“콩.”

“콩? 뭐야, 콩이 어떻게 문자를 보내?”

요즘 식물은 폰도 다룰 줄 아냐? 문영윤의 쌉소리를 깔끔하게 씹어 먹은 나는 조만간 놀러 가겠다는 답장을 보낸 뒤 다시 술을 퍼마셨다. 원래 개소리는 씹어 줘야 제맛이지. 특급 안주나 다름이 없네.

“나중에 사진 보여 줄게.”

“콩을? 굳이?”

“진짜 지랄 작작 좀. 그냥 고양이야. 한 살짜리.”

“뭐? 너…!”

문영윤이 탁 소리 나게 술잔을 내려놓더니 이내 나를 불공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양 노려보았다. 뭐야, 고양이 싫어했나? 아닌데. SNS에서 고양이 짤 공유 엄청나게 하던데.

“어떻게 고영느님을 모시고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할 수 있어?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그게 문제였냐.”

그냥 흔한 랜선 집사였구나. 왜 저 지랄하나 했네.

“어디! 보여 줘, 사진! 나도 고양이!”

“네가 키우지 그러냐.”

“뭐래. 고영님을 모실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막 데려오면 그건 나한테도 고영님한테도 못 할 짓이거든?”

뜻밖의 정상적인 발언이었다. 나는 정 여사가 보낸 사진을 문영윤에게 보여 주었고 녀석은 감격 어린 표정으로 내 핸드폰을 꽉 쥐었다.

“부럽다. 진짜 부럽다…. 나도 고양이……. 나만… 고양이 없어….”

“진짜 어쩌라고네.”

그럴 거면 너도 집사 하든가. 나는 슬슬 취기가 올랐는지 점점 붉어지는 문영윤의 상판을 최대한 보지 않으며 열심히 고기를 먹었다. 일단 시킨 건 다 먹어야지. 내가 언제 또 고기를 먹으러 밖에 나오겠어. 웬만해선 안 나온다에 올인할 수 있다. 내가 좀 집돌이거든.

(4)

문영윤이 완전히 꽐라가 되기 직전, 계산을 마친 뒤 휘청이는 녀석을 붙들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에 입김이 퍼지고, 허탈한 마음이 불쑥 솟았다. 이 이상으로 술 먹이면 개 될 거 같아서 나온 거였는데, 이미 개가 되어 버렸네.

“너, 이, 곧죽을놈 새끼! 너어어, 결투장으로 따라와!”

“그래, 뜨자. 누가 이기나 한번 붙자고.”

“개애애쳐발린 듀블이라 만만하다 이거지?! 죽여 주마!”

“네, 다음 광전한테 1평으로 넉다운 당한 듀블.”

“진짜 죽여야 해…. 이거 진짜 죽여야 해!”

“제발 집에 가라. 제발.”

내 멱살을 붙잡고 짤짤 흔들어 대는 뇌가 투명한 새끼를 보니 혈압이 치솟는다. 싸울 거면 부디 인게임 내에서 해 주지 않을래? 현실에서 싸우면 내 필패란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헬스라도 다닐 것을.

“투명아, 집에 가자. 넌 네 집. 난 내 집.”

“싫다! 네 집 갈 거다! 가서 2차까지 달리는 거야!”

“진짜 죽었으면….”

“어어, 죽으면 안 돼. 너 죽으면 과제 공지 누가 알려 줘….”

수업을 들어, 이 새끼야. 잠만 쳐 자지 말고.

“그으은데, 진짜… 진짜 네가 곧죽을놈이야…?”

“오냐.”

“곧죽이는 싸가지가 없는… 아, 너도 싸가지 없었지 참. 내가 깜빡했네.”

문영윤이 실수했다며 제 이마를 팍하고 때리며 웃었다. 하하, 이 녀석도 참. 녀석을 따라 소리 내어 웃은 나는 그길로 녀석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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