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톡에는 몇 개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한놈 님에게 헤드록을 걸며 병나발을 부는 베타 누나의 사진, 빈 병에 숟가락을 꽂고 노래를 부르는 뚝배기장인. 여기까지는 평범했다. 하나, 양손에 술병을 하나씩 들고 제 머리 위에 붓고 있는 한놈 님의 사진이 올라온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그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술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것과 연결되는 마지막 사진은 마치 화보의 한 장면처럼 술에 젖은 머리를 털고 있는 한놈 님의 모습이었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예? 뭐가 말입니까?]
[길드/베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응 이미 갠톡으로 사진 보냄ㅎ]
[길드/주님한놈갑니다: 미쳤습니까, 휴먼?]
[길드/베타: 맞아 난 미쳤지 너한테 미쳤어]
진짜 돌았나 봐. 쉼 없이 올라오는 채팅과 아직 지우지 않은 사진을 번갈아 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이 사람들 만담하러 나가도 되겠다. 하도 웃어서 욱신거리는 양 볼을 매만지다 팔꿈치로 옆에 두었던 물컵을 쳐 넘어뜨린 나는 다급하게 그것을 닦으면서도 계속 웃음을 흘렸다.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라 뇌리에서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길드/베타: 곧죽이 오해할까봐 말해주는 안물안궁tmi 1편^^]
[길드/베타: 2차 장소는 무려 한놈의 집! 고로 뒷정리는 한놈이 했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어쩌다 저렇게 됐어요]
[길드/베타: 바니바니 당근당근^^]
[길드/베타: 한놈이가 좋아하는 랜덤~~~게임~~~~~~!!!^^]
술 게임 져서 그랬던 거냐고. 벌칙 낸 사람도 그렇지만 졌다고 그걸 또 지킨 한놈 님도 대단하다. 다른 의미로.
[길드/주님한놈갑니다: 눈웃음치지마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pk하기전에.]
[길드/베타: 이 구역 일짱을 가릴 때가 왔다 얼마든지 덤벼라]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요즘 누가 일짱이란 말을 쓰죠? 노티남]
[길드/베타: 아;뼈맞았어;]
물에 젖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마른안주를 씹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2차를 안 가서 정말 다행이다. 만약 갔더라면 우리 집이든 남의 집이든 마지막까지 깨어 있었다는 이유로 뒷정리를 하는 사람은 내가 됐을 거다.
할 일 없이 채팅만 치고 있으니 정말 모하지맨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빌어먹을 망겜은 컨텐츠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니까. 여전한 피곤함에 길게 하품을 때리며 눈동자만 굴려 올라오는 채팅을 확인했다. 대부분 별 영양가 없는 수다들이었다. 그러던 중, 패치노트에 대한 얘기가 올라왔다.
[길드/베타: 그러고보니 패치님 방송켰더라]
[길드/베타: 지금 결장 뛰시던데?]
패치노트와 결투장이라니. 어쩜 그리 무서운 단어의 조합이 있을 수 있을까. 슬쩍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어 패치노트의 방송에 접속한 나는 화려한 컨트롤로 상대방을 씹어 먹는 장면에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최애가 죽었다는 분노로 PK를 하고 다녀서 그렇지, 나는 원래 대전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고인물이라 할 게 없기도 하고, 이번에 랭킹이 업데이트되어 갔던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결투장은 건드리지 않았을 터였다.
“나도 결투장이나 갈까.”
현재 내 랭킹은 300대 초반 정도. 이왕이면 100위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PVP의 랭킹을 올리기 위해 결투장에 들어간 나는 매칭이 끝남과 동시에 보이는 대전 상대의 닉네임을 확인하고 이마를 감싸 쥐었다. 왜 하필, 많고 많은 놈 중 이놈이랑 매칭이 되는 거냐고. 한두 번도 아니고 이게 몇 번째야. 양심적으로 생전 본 적 없는 놈이랑 만나야 하는 거 아니냐.
[전체/투명: ㄷ또너냐진ㅉㅏ짜증난ㄴ다]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왜 또 너냐]
과거였다면 갖가지 아가리 털기 신공으로 비꼬면서 시작했겠지만, 투명이 문영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으로서는 놈에게 함부로 아가리를 털 수 없었다. 무엇보다 평소 오타를 잘 안 내던 녀석이 저리 오타를 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접속하기 전에 또 술자리를 가졌던 모양이다. 쟤는 대체 어디서 저렇게 처먹고 다니는 거지?
전에도 말했지만… 문영윤과 내가 진심을 다해 현피를 뜨게 된다면 열에 열은 내가 필패다. 허약하기 짝이 없는 내 몸뚱이로는 문영윤의 킥복싱으로 다져진 육체를 이길 수 없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지금부터 운동을 시작한다 한들, 10년 이상 운동을 배워 온 녀석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본능적으로 콤보를 날리는 한편으로 묵직하게 가라앉은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PVP의 결과만 놓고 보면 이긴 건 나였다. 녀석이 백날 날뛴다 한들, 술에 취해 있는 데다 원래부터 놈보다 내 컨트롤이 좋았기 때문에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PVP가 아니었다. 게임이 끝나기 전, 투명이 한 말이 문제였다.
[전체/투명: 내ㅐ칭구가 너 조져준댂거긍? 각오햐줘라ㅣ]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어... 그래.......]
쟤가 말한 친구가 나라는 게 문제가 된다. 내 몸이 두 개도 아니고, 빌어먹을 동기 놈의 징징거림 하나 때문에 내가 내 자신이랑 PVP를 뛰어야 한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나.
여전히 술에 취해 채팅 창에 온갖 오탈자를 남발하는 문영윤을 바라보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 들켜서 현피를 뜨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새로 부캐를 하나 파야 하나. 아니면 남들에게 공개하지 않은 또 다른 부캐가 하나 있긴 한데…. 차라리 그걸 키우는 쪽으로 가 볼까? 어느 쪽이든 심란하기 짝이 없다.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곧죽님]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왜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그...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뭔데? 갑작스러운 패치노트의 채팅에 고개가 절로 기울여졌다. 이 사람이 나한테 부탁할 만한 일이 있었나? 마땅히 떠오른 것이 없어 무엇이냐고 묻자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게임에서도 형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뭘 그런 걸 가지고,...]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그러세요....]
이놈이고 저놈이고 시답잖은 거로 뜸을 들이는구나. 내가 게임에 미쳐 사는 사이에 나온 요즘 트렌드인가? 아니면 말고.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그럼.. 형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던전 가지 않으실래요?]
아까 방송 중 아니었나? 브라우저를 위로 올려 확인하자 어느새 방송이 꺼져 있다. 끄고 나서 연락한 거였구나. 이건 또 몰랐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오늘은 조금 그렇고... 나중에 길드원들이랑 다 같이 가죠]
[귓속말/패치토느>나한테명령하지마: 아... 바쁘신가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아뇨 저 자려고요]
솔직히 이제 슬슬 잘 때 되지 않았냐? 잠도 안 자고 게임할 수는 없잖아. 패치노트를 비롯한 길드원들에게 이만 가 보겠다는 말을 남긴 뒤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또 뭘 해야 하나.
(2)
그렇게 정모 사건이 끝나고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따로 벌어진 사건은 없었다. 그나마 하나 꼽아 보자면 퇴사를 한 퇴사기원이 공대에 들어와 딜량이 충분해졌다는 것 정도?
“오늘은 또 뭐 하냐.”
느긋하게 하품을 하며 캐릭터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찰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힐끗, 눈동자를 굴려 액정 화면에 떠 있는 내용을 확인하자 문영윤의 이름이 보였다.
“얜 또 무슨 일이야.”
머리를 벅벅 긁으며 개인 톡을 확인했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내가 곧죽을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녀석이 언제 프리지아를 시작할 것인지 물어 온 것이다.
[질긴놈]
[문영놈: 함께!!!]
[문영놈: 프리ㅣㅣㅣ지아아아!!!!!!]
[문영놈: 하지 않겠는가?!!!!]
[아 알았다고]
아오, 이걸 진짜 어떻게 수습하지? 처음부터 시작하는 건 귀찮은데. 닉네임 정하는 것도 고민되고. 솔직히 게임 하면서 가장 힘든 게 초반 닉네임 정하는 거 아니었던가.
손끝으로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나는 결국 나한테명령하지마 캐릭터 접속을 종료한 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준 적 없는 부계정에 들어갔다. 닉네임은 무려 ‘부적절한닉네임’. 원거리 직업을 한번 해 보고 싶어서 만든 계정이었다. 로딩이 끝나고, 마을이 보이자마자 문영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부적절한닉네임>투명: 야]
[귓속말/부적절한닉네임>투명: 문영]
[귓속말/투명>부적절한닉네임: ?]
[귓속말/투명>부적절한닉네임: 아 뭐냐ㅋ닉네임 보소ㅋ]
귓속말을 보내자마자 투명의 캐릭터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PK가 하고 싶지? 어차피 쪼렙이라 싸워 봤자 지는데. 투명이 문영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놈을 줘 패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지를 않는다. 약간 본능 같은 건가?
[투명 님이 부적절한닉네임 님에게 친구 추가를 신청하셨습니다.]
[투명 님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내가 투명이랑 친추를 하다니.”
이 사실을 길드원들에게 말해 줘도 아무도 안 믿어 줄 거다. 투명은 내 주위를 돌며 방방 뛰어다녔다. 그럴 시간에 던전이나 돌러 가면 안 되냐. 시간 아까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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