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44화 (44/88)

#44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저 스토리 보러 갈게요]

[파티/퇴사기원: 맞다 스토리 깜빡했네]

[파티/퇴사기원: 다음에 또 썰 풀어주세요^^ 개잼네요^^]

이제 더 없는데.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었던 정태원 개새끼 일화를 빼면 별거 없었다. 2차는 안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대충 알았다는 말을 남긴 채 파티를 탈퇴했다. 이제 그동안 잊고 있던 스토리를 볼 차례다.

내 최애, 알타니아와 관련 있는 스토리인 만큼 이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 방에 몰아서 보고 자게에 스토리 발로 썼냐며 욕 써야지. 곧바로 메인 퀘스트 NPC에게 달려간 나는 줄줄이 튀어나오는 텍스트를 한 자 한 자 곱씹으며 훑었다.

[헤일리: 이건… 율리아나의 목걸이군요. 역시 그녀는….]

[헤일리: 혹시 방주에서 율리아나를 보셨나요?]

그런 게 있었나. 클리어에만 신경 써서 기억이 안 난다.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텍스트를 넘기자 동시에 영상이 흘러나왔다. 영상 속 헤일리는 목걸이를 손에 쥔 채 흐느끼고 있었다. 헤일리가 율리아나 또한 훌륭한 전사였다며 그에 대해 온갖 좋은 말을 하고 있는데, 중간에 화면이 바뀌더니 멀리서 붉은 장발의 NPC가 헤일리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미친?”

붉은 장발의 NPC는, 알타니아와 똑같은 커스터마이징을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얼굴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대각선의 흉터가 있다는 것 정도. 아팠겠는데? 아무래도 얘가 알타니아와 쌍둥이라는 율리아나인 모양이다. 똑같아도 너무 똑같은 외형에 죽어 버린 내 최애가 생각나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X발… 이렇게 똑같이 생겼다는 말은 안 했잖아….

[헤일리: 율리아나….]

[???: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 그 여자와 같은 얼굴, 닮은 이름, 무엇하나 내 것이 아니니.]

쟤 뭐래? 뒤늦은 중2병에 걸린 건가? 율리아나는 표정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리며 무기를 꺼내 헤일리를 공격했다. 총격음이 터지고, 슬로 모션으로 날아오는 총알에 맞아 헤일리가 쓰러졌다. 느리게 눈을 깜빡인 나는 뇌에 버퍼링이 걸려 버렸다. 지금.머선.일이.일어나고.있나요?

[???: 헤일리, 너 또한 그 여자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구나.]

[헤일리: 율, 리아나……. 설마….]

[???: 그 여자와 관계된 모든 것을 내 손으로 끝낼 것이다.]

[???: 너도, 그리고 저 모험가도.]

[???: 방주의 끝에서 기다리마.]

그 대사를 마지막으로 영상이 끝났다. 본래의 맵으로 돌아온 캐릭터를 보며 흐릿하게 웃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뒤졌다.

“아, 내가 소주병을 어디에 뒀더라.”

화염병 만들어서 본사에 던져야지. 대체 스토리 짠 새끼가 누구냐? 율리아나가 악역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최애의 쌍둥이 동생이 악역일 수도 있지. 그런 유의 스토리는 생각보다 많다. 근데 저건 아무리 봐도 율리아나가 알타니아를 죽였다는 내용이 아닌가. 시나리오 라이터,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X나 당당하게 패륜을 저지르네?

율리아나의 이름은 끝까지 ‘???’로 나왔다. 아마 스토리가 진행되며 바뀐 이름이 등장하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치솟는 혈압에 뒷골을 부여잡으며 다음 퀘스트를 확인했다. 그러나 마을 NPC들이 다친 헤일리를 보살피며 몇몇 대사를 날린 후 모든 메인 퀘스트가 끝이 났다. 더 이상 메인 퀘스트의 표시가 뜨지 않았다. 이게 끝이라고? 진짜?

허망함에 키보드 자판에 손을 올린 채 넋을 놓았다. 동네 사람들, 메인 퀘스트가 여기서 끊긴대요. 끊기 신공 장난 없네. 길드 채팅으로 돌아온 나는 분노를 삼키며 채팅을 쳤다. 스포는 자제하고 싶은데, 여기서 스토리 안 본 사람은 없겠지?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시나리오 라이터 죽이러 갑니다]

[길드/퇴사기원: ㅋㅋㅋㅋㅋ보셨구나...]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다들 멘퀘 스토리 다 보셨나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쟤랑언제싸워요?]

[길드/패치노트: 그거 다음 업데이트에 나올걸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미쳤네?]

알타니아를 일회성 NPC로 쓴 것도 짜증 나는데 죽은 이유도 참으로 거지 같다. 기껏해야 몇 마디 남기고 사라져서 율리아나가 어떤 캐릭터인지는 확신은 못 하겠다만, 아무리 봐도 잘나가는 쌍둥이 누이에 대한 열등감으로 저 지랄한 거 같단 말이지. 대사 하나하나가 딱 그 짝이 아니던가. 열불 터진다.

빡침에 머리를 부여잡은 나는 그대로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통수를 맞아도 거나하게 맞아서 이마보다 뒤통수가 더 아팠다. 지금 당장이라도 던전에 들어가 알타니아의 복수를 해 주고 싶었다. 이번 업데이트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하는 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때까지 내 빡침은 누가 해결해 주죠? 또 거너들을 죽이러 다녀야 하나? 이러다간 본캐 닉네임을 곧죽을놈이 아니라 거너만죽이는놈으로 바꿔야 할 판이다. 새로 판 캐릭터까지 똑같은 일로 또 사사게 올라가는 건 좀. 길드쟁까지 함께했는데 팍 씨 나갈 수도 없고.

책상에 엎어진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서 그런지 오만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동시에 고작 게임 캐릭터 하나에 멘탈이 털려도 너무 털린 건 아닌가 싶어졌다.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겠어. 생각을 마친 나는 길드 채팅을 남기고 곧바로 게임 종료 버튼을 눌렀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저 할 일이 생각나서 로그아웃해볼게요]

[길드/패치노트: 곧죽님 괜찮으시면]

“아.”

급한 마음에 답도 못 하고 그냥 나와 버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을 따라 무작정 게임 종료를 눌렀더니 패치노트를 무시한 것처럼 되어 불편해졌다. 좀 미안한데 톡이라도 남길까. 핸드폰을 매만지며 고민한 나는 깊게 숨을 내쉬며 톡을 보냈다.

[죄송해요 겜종료 누르고 봤어요]

[한도윤: 아 괜찮습니다]

[한도윤: 혹시.. 실례가 아니면 무슨 일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순간 알아서 뭐 하려는 건가 싶었으나 정말 별거 아니었기 때문에 순순히 답했다.

[밥 먹으러 가요]

내가 아는 한 가장 생산적으로 완벽한 일이었다. 한국인은 역시 밥심이지.

[한도윤: 아....]

[한도윤: 맛있게 드세요!]

[님도요]

뻐근한 몸을 이끌고 스트레칭을 하며 밥을 먹으러 갔다. 오늘 저녁은 라면이다. 그것도 봉지 라면 끓이기 귀찮다는 이유로 컵라면 하나를 끓여서 빠르게 해치웠다. 역시, 뭐든 빠른 게 최고라니까.

9. 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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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메인 스토리를 확인한 후로 며칠의 시간이 더 흘렀다. 요즘 들어 한참을 게임에 집중한 터라 그런지 피곤함이 몰려왔다. 길게 하품을 하며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푸는 사이, 채팅 창에 접속 알람이 떠올랐다.

[친구 베타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원 베타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베타: ㅎㅇㅎㅇ]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ㅎㅇ]

일이 끝난 건가? 예상보다 빠른 베타 누나의 접속에 고개를 기울이면서 채팅 창에 손을 올리던 찰나였다.

[친구 주님한놈갑니다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원 주님한놈갑니다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안녕하세요.]

[길드/베타: ㅎㅇ...ㅋ.....]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웃지 마십시오.]

“뭐야?”

베타 누나의 인사에 화답하는 한놈 님의 모습에 안 그래도 기울어졌던 머리가 더더욱 기울어졌다.

[길드/베타: 곧죽 이슼 가실?? 파밍해야지ㅎ]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오늘 ㅈ12ㄴ 뛰어서 피곤함]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일찍 자려고]

[길드/베타: 그럴수가ㅠㅠㅠㅠ]

[길드/베타: 이슼 끝나고 썰 풀랫는데ㅠㅠㅠ]

[길드/베타: 곧죽이는 썰 못 듣겟네?ㅠㅠㅋㅋㅋㅋ]

썰? 무슨 썰? 문득 생각난 정모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나직이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혹시 주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술은 적당히 마시라고...]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영험하네요]

한놈 님의 말에 키읔으로 도배된 베타 누나의 채팅이 올라왔다. 역시 2차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길게 이어진 자음 사이 사이에 끼워진 단어들을 하나씩 확인하던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길드/베타: 젘ㅋㅋ겈ㅋㅋㅋㅋㅋㅋㅋㅋ술ㅋㅋㅋ롴ㅋㅋㅋㅋㅋ샤워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베타: 뎈ㅋㅋㅋㅋ낄라ㅋㅋㅋㅋㅋ샤워어어어어어ㅓㅓ!!!!!ㅋㅋㅋㅋㅋㅋㅋ]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아 그만ㄴ해요]

비유적 표현인가? 설마 진짜 술로 샤워를 했다는 건 아니지? 만약 그렇다면 길드 내에서 그나마 진중해 보였던 그의 이미지가 완전히 부서지게 될 거다. 버퍼링이 걸린 머리를 흔드는 사이 베타 누나에게 갠톡을 확인하라는 귓속말이 왔다. 이 시점에서 갑자기? 동시에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톡을 확인한 나는 충격에 입가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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