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40화 (40/88)

#40

그러나 나 또한 사교성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막상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할 말 없어지잖아.

“근데 이스카리아도 솔클이 가능할까요? 대미지 생각하면 힐러는 있어야 하지 않나.”

“음… 돈 좀 써서 포션 쟁여 가면 가능해요.”

“포션 너무 많이 먹으면 디버프 걸린다는데 그거 진짜예요? 그렇게까지 먹어 본 적이 없어서. 포션 값도 비싸고.”

“어떻게 보면 디버프는 디버프네요. 포션으로 채워지는 힐량이 감소하거든요. 솔클 자체가 득보다는 실이 큰 편이라 저처럼 컨텐츠를 써먹으려는 용도가 아니면 파티 짜서 가는 게 나아요. 물론 공팟보다는 솔클이 훨씬….”

말꼬리를 흘리며 작게 웃은 그는 손끝으로 맥주잔을 두드렸다. 확실히 공팟 갈 바에는 혼자 가는 게 훨씬 낫겠다. 적어도 트롤들 때문에 스트레스성 위염이 도질 일은 없지 않은가.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조금 새삼스러운 눈으로 길드원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전 길드에서 떨어져 나왔다고는 하지만 신생 길드에 이만한 사람들이 모이기 쉽지 않았을 텐데. 특히 저 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한도윤 씨는 왜 저희 길드에 말뚝 박은 거예요? 원래 있던 길드 있잖아요.”

“그건….”

“에이, 길드 갈아타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요. 님들이랑 친해지고 싶었나 보죠!”

뜸을 들이는 한도윤의 말을 자르고 정태원이 튀어나왔다. 왜 친해지고 싶냐고 물어보는 건 좀 그런가. 하기야 친해지고 싶은데 이유가 따로 있는 것도 좀 그렇다.

“그럼 전의 길드는 어떻게 됐어요? 그쪽에서 뭐라하진 않았고요?”

“이걸 뭐라고 할까…. 방송러들끼리 편하게 있으려고 만든 길드인지라 출퇴가 자유예요. 뭐, 친한 사람 생겨서 글로 넘어가겠다는데 막는 것도 좀 그렇죠.”

어깨를 으쓱이는 정태원의 모습에 적당히 납득하고 마저 술을 마셨다. 요즘 들어 대충 납득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근데 저희 2차는 어디로 가요? 아까 세영 님이 말씀하셨던 술집?”

“노래방도 괜찮은데! 제가 이 구역 음치라 여러분들의 귀를 더럽힐 수 있거든요.”

그냥 한곳에서 마실 대로 마시고 집에 가면 안 되나요. 굳이 2차, 3차를 가야 해? 집 떠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돌아가고 싶어졌다. 내가 먼 산을 바라보는 사이 2차로 노래방, 3차로 술집을 가자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 양반들이라면 그걸 그대로 할 확률이 높아도 너무 높다.

노래방처럼 시끄러운 곳은 머리가 아파서 좀 꺼려지는데. 차라리 피시방을 한 번 더 가는 게 낫지. 물론 팟쫑하고 집에 가는 게 최고긴 하다. 머뭇거리며 말이라도 꺼내 볼까 고민하는데 정태원이 손을 들어 올리며 어그로를 끌었… 아니, 발언권을 가져갔다.

“노래방 말고 피시방이나 또 가면 안 되나요? 게임 땡기는데.”

“음주하고 이스카리아 가려고요? 그러다 전멸 나요.”

“내기하면 되죠. 제일 먼저 죽는 사람은 외치기로 ‘나는 빡빡이다’ 50번 어때요? 이러면 어떻게든 살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럼 차라리 2차로 술집을 가고 3차로 피시방을 가죠. 지금 먹은 건 간에 기별도 안 가서 맨정신으로 겜하는 거랑 똑같을 거 같아요.”

“오, 좋다! 벌칙은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이랑 제일 많이 죽은 사람으로 하죠! 한 명이면 재미없잖아요!”

물귀신 작전인가. 아무도 안 죽으면 어쩌려고? 환호하는 길드원들을 보며 얼떨결에 나도 박수를 쳤다. 본인이 걸려 봐야 정신을 차리지. 문득 딜러치고 피통이 큰 광전사의 특성을 살려서 다른 사람들을 암살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패치노트는 몰라도 다른 이들은 죽일 수 있을 것같다.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데? 아니지, 오히려 괜찮은데?

“좋네요. 2차 술집 가시죠.”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다 죽일… 아니, 안 죽을 자신이 있어서.”

나 빼고 다 죽일 자신이 있어서. 아무렇지 않게 말을 흘린 나는 임효린이 결제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자 손 뻗어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녀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단톡방에 계좌 번호 올려요. 나눠서 내야 할 거 아냐.”

“돈도 못 버는 애들은 저리 가라. 으른들끼리 나눠 낼 거니까.”

“맞아. 애들은 저리 가라!”

“왜죠. 내가 먹은 거 내가 내겠다는데.”

“곧죽이는 나온 것만으로 그 값을 했다! 애들은 얌전히 있어라!”

스물다섯, 곧 해가 지나면 스물여섯이 되는데 어떻게 내가 애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임효린의 뒤를 따라간 나는 알바생에게 영수증을 달라 권했고 그는 별생각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영수증을 건네주었다. 금액을 확인한 나는 당황스러움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1차니까 가볍게 마시기로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안 나왔다. 문제가 있다면, 그 짧은 사이 맥주만 20잔을 넘게 비웠다는 것 정도? 저 중 내가 두 잔을 마시고 한도윤이 한 잔 겨우 비웠는데, 아무리 머릿수가 있다고 해도 많긴 많았다. 이거 배불러서 2차 갈 수나 있겠어?

“돈을 번다는 게 헤프게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이래서 애들은 안 된다니까!”

“맞습니다. 돈이란 쓰기 위해 버는 겁니다. 요즘 과로로 주님을 영접하러 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쓰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죽어도 돈은 못 가져가요. 지상에 두고 올라가야 한다고요.”

“근데 한놈 님 불교라고 하지 않았어요? 불교는 환생을 믿지 않나?”

“나무아미타불.”

“하나만 해요, 하나만.”

이세영의 타박에 김현호는 컨셉이니 이해해 달라며 말을 돌렸다. 투덕거리면서도 할 말 다 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거… 정말 유쾌한 사람들이다.

(2)

“장난 그만하고 2차 가시죠! 지금은 열었으려나.”

“지금 몇 시죠? 해 저물어야 열 텐데.”

“너무 일찍 만났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늦게 만날 걸 그랬나 봐요.”

다음에는 아예 제대로 날을 잡아서 1박 2일로 먹고 마시자는 말에 식겁했다. 뭐 그리 할 말이 많다고 1박 2일씩이나 한단 말인가. 적당히 놀고 빠이 하면 되지. 결제는 이미 마쳤음에도 부족하다며 추가로 맥주를 주문하는 이들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이러다가 여기에 아예 눌러앉겠다.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았고, 멀리서 치킨집 주인의 웃음소리와 알바생의 곡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알바생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언제 마셨는지 모를 소주병들을 회수해 가기 시작했다. 몇 병이나 마신 거야. 황당해져서 주변을 훑으니 취기가 오르는 듯 얼굴이 점점 발갛게 달아오르는 이들이 늘어 있었다. 마시고 새로 주문하고 또 마시고 새로 주문하고. 이제는 말하는 시간보다 마시는 시간이 긴 수준이다.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냐고.

“아, 어른이 주는 건 마셔야지! 안 그래?!”

“그렇죠, 네… 네…….”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꼰대같이 왜 그래요.”

“어허! 누가 꼰대라는 거야! 나느은! 아직 창창한 서른이라고!”

그럼 꼰대 같은 말을 말던가. 딴짓하는 사이에 강제로 술을 마셨는지 한도윤이 잔을 쥔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붉게 물든 얼굴은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러다 죽겠다 싶어 잔을 뺏자 한도윤이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아련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술 뺏었다고 울려는 건 아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잔을 돌려줬음에도 그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얘가 왜 이러는지 알기 위해 정태원을 부르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또한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뭐야, 얼마나 마신 거야.

“아, 선생님들! 한 잔 더 들어갑니다!”

“마셔라! 마셔라!”

“우와아아아! 잘한다, 잘한다! 이거 놀 줄 아는 놈인데!”

“제가 한 놀음 하죠! 자자, 다음 잔 갑니다!”

지랄들 한다. 심지어 컨셉에 몰두하던 김현호조차 술은 이기지 못했는지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사용하며 임효린에게 붙들리고 있었다.

“야, 찐으로 친구 먹는 거다? 알간?”

“알간.”

“내일 가서 친구 먹은 적 없다고 하면 뒈지는 거야. 알간?”

“알간.”

그 와중에 이세영은 안주가 다 떨어졌다며 정태원과 함께 알바생을 붙잡고 소시지 모둠을 시키고 있었다.

“이거 감자튀김도 같이 나오죠? 이거랑 또… 이거 주문이요. 아, 그리고 빨간 뚜껑 세 개도요!”

“저는 이거 먹고 싶어요.”

“그럼 얘도 추가!”

“와아아! 달립시다!”

그렇게 많이 시키면 누가 다 먹을 건데? 다 먹을 배는 있으시고? 이마를 부여잡으며 메뉴판을 인터셉트하려던 나는 내 어깨를 붙잡아 끌어당기는 손길에 힘없이 끌려갔다. 주정뱅이 새끼들은 하나같이 힘이 세서 연약한 내가 감당할 수 없었다.

“곧죽이이! 너도 마셔야지! 왜 혼자 그러고 있어?! 누나가 주는 술을 못 마시겠다, 이거야?!”

“아니, 이건 또 뭔 지랄이야….”

“넌 벌칙 해야 해! 혼자만 술 빼고 그러는 거 아니야! 이게 다 사회생활이라고!”

“이런 꼰대를 다 봤나.”

짜증스러움을 참고 무슨 벌칙을 시키려는 건지 지켜보던 나는 입을 헤벌리며 넋을 놓았다. 비어 있는 500cc짜리 맥주잔에 소주가 한가득 따라졌다. 그렇다. 저게 내 벌주였다. 아무리 그래도 과하지 않냐고 물으려는 찰나, 심금을 울리는 임효린의 대사에 맥주잔을 들었다.

“쫄?”

허, 참! 하, 참! 내가 술이 약해서 뺀 게 아니라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난장판이 되어 있어서 수습하려고 안 마시고 있던 거거든? 날 뭐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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