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추진력이 남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지 자리를 정리하는 것도 순식간에 끝이 났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군대를 이끄는 장군인 양 호기롭게 앞장서는 이세영의 뒤를 따라 술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 이것은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피시방에 가기 전에 들렀던 가게는 아직도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이세영은 꿋꿋하게 닫혀 있는 문을 보고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혹시 전에는 몇 시쯤에 왔었어요?”
“새벽… 1시……?”
그러니까 문을 안 열지. 말 그대로 밤과 새벽에 여는 가게가 아닌가. 가게 문을 붙잡고 울상을 짓는 이세영을 데리고 차선책으로 근처에 있던 치킨집에 들어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한산한 내부에 목소리를 줄이기도 잠시, 치킨에는 역시 맥주라며 메뉴판을 들고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이 적으니 남에게 피해는 안 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1인 1닭 가능하죠? 그럼 몇 마리 시켜야 하지?”
“술 들어갈 배도 필요하니까 일단 세 마리만 시키고 부족하면 더 시키죠. 어떤 걸로 할까요?”
“다 먹고 노래방도 가요! 노래로 소화시킨 다음에 3차 가는 거야!”
“3차는 제가 말했던 곳으로 가요! 거기 칵테일이 진짜 맛있거든요! 님들한테 꼭 먹이고 싶어요!”
어떻게 오자마자 3차 갈 생각을 할 수 있지. 노래방 갈 때 슬쩍 빠질까. 주문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500cc 잔에 담긴 맥주가 테이블을 채웠다. 여섯 잔을 한꺼번에 들고 오는 알바생의 팔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밟힌다. 아무렴, 액체가 든 유리잔인데 무겁겠지. 임효린이 익살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잔을 잡으며 말했다.
“언제 또 모일지 모르니까 분위기도 띄울 겸 건배사나 하나 정할까요?”
“오, 저는 좋아요.”
이런 일로 건배사씩이나? 잠시 당황한 나는 호응하는 이들을 보며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로 할까요? 망겜을 위하여?”
“에이, 망겜을 위하여라니. 이 게임이 위할 게 있는 게임이었나요?”
“우리 망겜한테 왜 그래요! 아직 명줄은 남았다고요!”
“자템을 위하여는 어때요? 여기서 자템 먹은 사람 곧, 아니 정우 씨밖에 없잖아요.”
“좋다! 나도 주세요! 자템!”
건배사는 ‘자템을 위하여’로 결정 났다. 길드 마스터인 임효린이 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사를 외치자 따라 잔을 들어 올린 이들이 흥겹게 답사를 외쳤다. 쪽팔림에 얼굴에 열이 올랐으나 노란빛을 띠는 조명에 가려졌다.
아직 치킨도 안 나왔는데 맥주를 원샷한 김현호가 추가로 맥주를 주문했고, 그에 질 수 없다며 이세영 또한 곧바로 잔을 비웠다. 하나둘 잔을 비우고 새로 주문하는 이들을 보며 고민했다. 나도 비워야 하나?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내가 순식간에 잔을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추가 주문을 하는 임효린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야, 곧죽이 술 잘 먹네!”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몇 년을 곧죽으로 불렀더니 입에 익어서 그래.”
그러게 진작 정모에 나오지 그랬냐며 장난스럽게 타박하는 말에 괜히 멋쩍어졌다. 그때는 뭐, 지금보다 훨씬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다.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저 단체 활동보다 혼자 있는 것을 선호했을 뿐이다. 아무래도 남 눈치 보며 행동하는 것보다 혼자 알아서 하는 게 더 편하고 말이다. 공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래도 막상 나와서 보니 후회는 들지 않았다. 게임에서 만났을 때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들의 모습에 약간 안도감이 들었다. 왜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적어도 이들은 그러지 않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치킨이 나오자 환호하는 이들 사이로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조용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기울이던 나는 알바생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저… 민증 한 번만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네….”
설마 했는데 역시인가. 표정을 일그러뜨릴 수도 없어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데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니, 소곤거린다고 하기에는 크니까 그냥 떠들고 있는 거려나.
“야야, 막내도 안 받는 민증 검사를 쟤가 받는다.”
“막내가 누구… 아 맞다. 저 둘 스무 살이랬죠? 그러네. 막내가 따로 있었네.”
“완전 애기들 아니냐.”
민증을 확인한 알바생이 떠나고 어려 보여서 좋겠다는 놀림을 한 귀로 듣고 흘려넘겼다. 성인이 되고 나서 민증 검사를 받으면 좋다고들 하는데 나는 별로 즐겁지 않았다. 민증 들고 다니는 게 얼마나 거추장스러운데.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 자리에서 원샷을 때리고 추가 주문을 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한도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왔다.
8. 총체적 난국
(1)
“저… 괜찮으세요? 그렇게 많이 드시면 속 안 좋지 않아요?”
“아, 술 못한다고 하셨나. 괜찮아요. 저 술 잘해요.”
걱정 어린 한도윤의 눈빛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패기로 그러는 게 아니고 진짜였다. 원리는 모르겠다만 나는 알코올이 잘 받는다고 해야 할지, 안 받는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잘 취하지 않는 체질이었고 남들보다 덜 취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러 갔었을 때 나를 제외한 모두가 쓰러졌으니 말 다 했지.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새로 나온 맥주를 마시던 나는 아직 반도 채 안 마신 한도윤의 잔이 눈에 들어오자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못하길래 아직 한 잔도 비우지 못한 걸까? 잔에서 시선을 떼고 정태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저기 있다.
“아까 한도윤 씨가 술을 못한다고 했잖아요. 얼마나 못하는 거예요?”
“쟤요? 음… 일단 500cc 두 잔이 많은 거라고 보시면 돼요.”
진짜? 도수가 낮은 맥주 두 잔에 회까닥할 정도면 얼마나 알쓰인 거야. 술의 묘미를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안타깝다는 눈으로 한도윤을 바라보니 그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입가를 가렸다.
특이하게도 내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괴짜거나 말괄량이 스타일이었기에 냉랭해 보이는 그가 쑥스럽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조금 신선하게 다가왔다. 세상은 넓고 여러 성격의 사람이 있는 법이지. 물론 행동은 쑥스러워하고 있었으나 정태원을 향한 눈빛만큼은 살벌했다. 입으로 욕하는 것보다 눈으로 욕하는 걸 즐기는 타입인가 보다.
“게임에서 뵀을 때랑 많이 다르시네요.”
“…그런가요?”
“네. 게임에서는 약간… 으음.”
또라이 같았죠. 할 말 다 하는 또라이. 사실 첫인상부터 쎄 보였다. 트롤을 팩트로 두들겨 팬 것도 그렇고 투명에게 했던 ‘거슬리는데 죽여도 돼요?’ 발언까지. 만만치 않았지.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면전에 대놓고 입 밖으로 내뱉기는 좀.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들어 올리자 그 또한 나를 따라 잔을 올렸다. 짠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나도 모르게 한도윤을 향해 잔을 내밀자 당황한 그가 잘게 떨리는 손으로 잔을 부딪쳤다. 맥주잔이 무거운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떤담. 수전증인가. 겜창이 수전증인 건 좀.
“엄멈머, 여기 사람이 몇인데 둘이서만 얘기하고 있네. 잔도 부딪치고 눈도 부딪치고?”
“참신한 개소리 잘 들었습니다. 벌써 취했어?”
“훗, 여기서 맥주에 취하는 사람은 도윤 씨 하나뿐이야.”
“팩트로 후려치네. 그러다 마상 입겠어요.”
“틀린 말도 아닌데요, 뭐. 쟤 술버릇 골 때리니까 너무 먹이지는 마세요.”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궁금하다! 어떤데요?”
“성가셔요.”
해맑은 미소와 함께 흘러나온 정태원의 목소리는 고저 하나 없었으나 내용은 심상치 않았다. 나도 나름 온갖 술버릇을 봐 왔는데 도대체 어떻길래 성가시다는 말까지 나온단 말인가. 힐끗 눈동자를 굴려 한도윤을 보니 여전히 눈으로 욕하고 있었다. 얘는 그냥 말로 욕하지 왜 자꾸 눈으로 욕할까. 안 답답한가.
대신 욕을 해 줄까 고민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둘이야 친하니까 저런 말도 스스럼없이 한다지만 나는 제삼자가 아닌가. 여기서 나서면 보기 안 좋겠지. 네가 뭔데 나서냐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러고 보니 죽으러온놈이 도윤 씨잖아요? 본캐도 있는데 왜 갑자기 곧죽이를 따라다닌 거예요?”
“맞아! 이거 엄청 궁금했어요!”
“아, 그건…….”
한도윤이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냥 재밌어 보여서 한 거 아닐까. 워낙 고인물이라 할 게 없었다든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기에는 말 그대로 즐기는 느낌이었다. 그때, 정태원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냥 또라이라 그래요.”
“그렇구나!”
“난 또. 정말 사랑해서 그런 줄 알았지 뭐예요!”
“그럴 리가 있나.”
저렇게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뭣 하러 나를 좋아하겠나. 뭐, 기껏해야 친한 지인으로서는 좋아할 수도 있겠지. 물 흐르듯 흘러가는 대화에 적당히 대꾸하며 술을 마시는데 한도윤의 시선이 느껴졌다. 뭘 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 내가 말꼬를 터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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