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38화 (38/88)

#38

주문한 아이스커피를 받으며 장터 게시판으로 향했다. 서브 장비를 먹게 될 경우 쓸 강화석을 미리 사 두기 위함이었다. 게시판 창이 화면에 떠오르고, 강화석의 시세를 확인한 나는 나직이 혀를 찼다. 시세가 올라도 많이 올랐다. 이러면 노가다 뛰는 수밖에 없는데. 아이템이라는 건 결국 던전에서 나오는 법, 강화석 또한 던전을 돌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인다. 확률이 거지 같아서 그렇지.

“아, 강화석이 어디에서 많이 나오더라….”

“강화석 필요하세요?”

“지금 말고 서브 장비 맞추면요. 시세가 많이 올랐기도 하고…. 어차피 뭉텅이로 쓸 게 뻔하니까 미리 모아 두려고요.”

“그럼 저랑 같이 파달 가실래요?”

파달은 ‘푸른 달의 속삭임’이라는 서정적인 이름의 던전이었다. 배경은 주로 푸른 빛의 보름달이 높게 떠 있는 밤인데, 요정이 나올 것 같은 이름과 달리 듀라한과 데스 나이트가 제일 많이 등장하는 이름값 못하는 던전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파달에서 강화석이 나왔던가. 파달은 만렙 던전이기는 하나, 쓸 만한 장비가 나오지 않아 퀘스트용으로 스쳐 지나가는 던전이기 때문에 나도 몇 번 가 본 적이 없었다.

“파달에서 강화석이 제일 많이 나와요. 믿어 보세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믿어요. 파티 걸게요.”

“…네!”

어쩐지 상기된 한도윤의 표정에 의아해졌다. 믿기야 믿는다. 나보다 고인물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는가. 한도윤이 나한테 거짓말하면서 뒤통수 후려치는 사람도 아니고.

“바로 들어갈게요.”

“네, 전 준비 됐어요.”

푸른 보름달이 떠 있는 배경이 화면에 담기고, 땅을 뚫고 튀어나오는 듀라한을 보며 키보드를 달칵거렸다.

“몰이 할 거예요?”

“네. 아, 형은 안 움직이셔도 돼요. 어려운 던전도 아닌걸요.”

그렇기야 하지. 나도 파달을 솔클할 정도는 된다. 파달에서 제일 짜증 나는 것은 몬스터들이 디버프를 건다는 건데, 하필이면 이동 속도 감소 디버프라는 거다. 안 그래도 느려 터진 광전사인데 이동 속도 감소까지 걸리면 혈압 오르기 쉬웠다.

떨떠름하게 몬스터를 후려치며 패치노트의 뒤를 졸졸 따라간 나는 어느새 수두룩하게 모인 몬스터의 수에 광역기를 난사하며 딜을 넣었다. 무의미하게도 말이다. 지팡이를 높게 치켜든 패치노트의 캐릭터 주변에 슈퍼 아머의 이펙트가 나타나더니 과거 투명과 신화 길드원들을 쓸어버렸던 스킬이 발동되었다. 화려하게 터지는 이펙트를 보며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박수 쳤다. 정말 말 그대로 혼자 다 해 먹는구나.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5)

패치노트가 내내 판을 이끌어 가서 나는 할 일이 없었다. 그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가 얼마나 압도적인 딜량으로 몬스터를 학살하는지 지켜볼 뿐이었다. 화면을 꽉 채울 듯이 올라오는 대미지 이펙트를 보며 속으로 감탄을 계속했다. 사람이 얼마나 게임에 투자를 했으면 저런 딜량이 나올 수 있는 걸까. 내가 가진 걸 다 털어도 저만한 딜량은 못 뽑을 것 같았다.

“파달에서 강화석 나오는 건 어떻게 안 거예요?”

“예전에 강화석 위주로 판매하는 유저가 있었는데 그 유저한테 강화석 사면서 들었어요. 채굴하는 사람들은 다 파달에서 모은다고 하더라고요.”

놀랍다. 강화 확률을 올려 주는 주문서 같은 경우에는 캐시 샵에서 판매를 한다. 가끔가다 이벤트로 뿌릴 때도 있고. 그러나 강화할 때 주력이 되는 강화석은 의외로 캐시 샵에서 판매하지 않았다. 오로지 유저에게 골드로 구매하거나 던전 뺑이를 돌며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곧죽을놈으로 플레이했을 당시에는 강화석을 모을 필요가 없었다. 그 계정이 뜻밖의 축계라서 10강까지는 한 방에 찍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상은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고, 강화에 실패하는 순간 장비가 날아갈 수도 있는 일이라 하지 않았고 말이다.

반면 나한테명령하지마는 쓰레기여도 과하게 쓰레기였다. 분명 전과 똑같은 확률임에도 불구하고 1강 하나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덕분에 창고 계정에 뒀던 강화석을 모두 꼬라박았지만 결국 잘해 봐야 7강이 끝이었다. 한도윤 덕분에 고강 장비를 얻긴 했지만 말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더니….”

강화에 필요해서, 혹은 판매해서 돈을 벌기 위해 무한 노가다를 한 사람들이 존재해서 이런 정보도 알려진 거겠지. 강화석이 필요 없던 시절에는 몰랐던 내용이었다. 패치노트가 몹을 쓸어버리면 내가 나서서 아이템을 주웠는데, 그중 강화석의 비율이 무려 30%나 되었다. 다른 던전이었다면 강화석의 비율은 10%도 안 됐을 거다.

“여기가 노다지긴 하네요.”

“그쵸?”

뿌듯하게 웃는 한도윤을 보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나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아이템 줍기에 몰두했다. 한 번에 처치하는 양이 많아서 그런지 아이템이 그야말로 쏟아졌다. 이럴 때 자동으로 템 먹어 주는 펫이 있으면 좋은데. 펫은 하나같이 캐시로 사야 했기 때문에 굳이 구매하지 않았다. 나중에 곧죽을놈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아깝지 않은가.

“뭐야, 곧죽이 펫 없어? 왜 그걸 일일이 줍고 있어?”

“아까워서.”

“그냥 곧죽 계정 버리고 이거 키우지? 곧죽으로는 이스카리아 못 깼잖아. 멘퀘도 귀찮게 다시 봐야 하고.”

“알타니아가 주인공인 내용은 언제 봐도 재밌거든?”

“친구야, 네 최애는 죽었단다. 더는 나오지 않아요!”

이런 씨…. 욱한 마음에 입 안에 맴도는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채팅으로는 마음 편히 욕하고 다녔는데, 막상 대면하니 장난이라도 욕을 하기 쉽지 않았다.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상대방이 장난이라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더 이상 장난이라 부를 수 없지 않은가.

“…….”

“너 혹시 삐졌…니?”

“…….”

“야아, 사람이 장…난칠 수도 있지!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무 심했다! 나중에 알타니아 그려 줄게!”

입술을 비죽 내밀며 불만을 표하자 효린 누나가 슬슬 내 눈치를 보며 사과를 건네왔다. 그녀는 종종 게임 NPC 캐릭터들을 그려 팬아트 게시판이나 자신의 SNS에 올리고는 했는데 그중에는 알타니아도 있었다. 애초에 누나와 친해진 것도 인터넷에서 알타니아를 서치하다 우연히 그녀의 그림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누가가 그린 알타니아를 보고 주접이란 주접은 다 떨었거든.

“환하게 웃는 걸로.”

“알았어. 알았어.”

“착장은 에피소드 7에 나오는 전투복으로.”

“손님, 그 옷 그리기 얼마나 까다로운지 아시나요?”

“누구세요? 저 아세요? 아, 길드 실수로 잘못 들어왔네. 나가야겠다.”

“해 드리겠습니다….”

효린 누나의 패배 선언에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그린 나는 다시 아이템 줍기에 집중했다. 던전 한 판이 끝나고 모은 강화석은 총 21개. 이 정도면 다른 던전 네다섯 번 돈 거나 다름없는 숫자였다. 아주 그냥 짭짤하구만.

“나도 강화석작 돌아 줄 친구 있었으면 좋겠다아! 이왕이면 탱킹이 튼튼해서 내가 따로 힐을넣어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살아남을 수 있는 친구!”

“…그거 지금 저한테 하는 말입니까?”

“그럼 누가 있겠습니까? 힐 안 줘도 알아서 살아남는 탱커가 어디 흔한 줄 아십니까?”

“지금 제 흉내 내는 겁니까? 따라 하지 마세요.”

“떄럐 햬쟤 먜섀얘.”

두 사람의 만담에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잘들 논다.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나와 패치노트는 마저 파달을 돌았다. 아이템을 하나하나 줍는 건 확실히 귀찮은 일이었으나 어차피 딜은 패치노트가 다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일거리 삼기 딱 좋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넋 놓고 있는 건 별로란 말이지.

멍하니 아이템 줍기만 열댓 판을 뛰고 나자 슬슬 결투장 쿨타임이 돌았다. 실제로 쿨타임이 있다는 건 아니고, 그냥 던전은 이제 그만 뛰고 PVP를 하러 가고 싶어졌다. 역시 질릴 땐 다른 걸 하다 돌아오는 거라니까.

한도윤에게 PVP 좀 돌고 오겠다 말한 뒤 파티에서 탈퇴한 나는 곧바로 결투장으로 향했다. 매칭이 잘 되려나 모르겠네. 정확히 매칭을 넣은 그 순간, 조용히 게임하고 있던 이세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우리를 향해 외쳤다.

“이거 알아요? 뭘 했다고 벌써 4시라는 놀라운 사실! 게임 몇 판 했을 뿐인데 세상에 마상에 벌써 오후 4시!”

“벌써?”

“와, 시간 엄청 빨리 가네요. 몇 판 안 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겜창의 감각에 어이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저들과 달리 충분히 많이 하지 않았냐며 뭐라 했을 텐데, 이번에는 나도 몇 판 안 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어 그동안 모았던 강화석의 양을 확인한 나는 어느새 수백에 달하는 숫자에 조용히 인벤토리를 닫았다. 언제 이렇게 했지?

“이제 적시러 갈 차례라고요! 자, 다들 일어나요! 어차피 피시방 시간도 거의 다 됐잖아요!”

“아쉬운데 조금만 더 하고 가면 안 돼요? 조금만!”

“하하, 안 될걸요? 저 장인님이 왜 저러시는지 알아요.”

이세영의 호기로운 말에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정태원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냥 슬슬 오후니까 가게가 열었을 거 같아서 저러는 게 아니었나? 의아하게 정태원을 바라보던 나는 이어진 그의 대답에 조용히 컴퓨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PVP 진행 도중에 피시방 이용 시간이 끝났다면서 컴퓨터가 꺼졌거든요. 조용해서 그렇지 되게 빡치셨던데. 주먹도 부들부들 떠시고.”

“…그걸 말하면 어떡해요! 내 이미지가!”

“그런 게 있긴 했어요?”

“어, 그렇긴 하죠!”

저 두 사람도 만담을 즐기는 모양이다. 결국, 나를 포함해 전원이 이세영을 따라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깔끔하게 비워져 한쪽에 쌓여 있는 식기들을 보니 술이 들어가기는 할까 싶어졌다.

“원래 밥 배 따로, 디저트 배 따로, 술배 따로 있는 법이야.”

“위장이 어떻게 세 개나 돼. 누나가 무슨 신인류야?”

“오, 신인류! 뭔가 멋진데?”

어이없어서 한 말에 좋다고 박수까지 친다. 피시방에 오기 전, 내가 한 건 아니지만 정상이 없냐는 질문이 떠올랐다.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이 희한하고도 독특한 파티원들은 비정상인 사람한테 미안할 정도로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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