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37화 (37/88)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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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이 말했던 술집은 안타깝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이 시간까지 문을 안 열 수 있냐며 분개했지만 보통 술집은 대낮에 열지 않는다. 문이 닫혀 있는 건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럼 우리 이제 어디 가요?”

“그러게…. 갈 데 있는 사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닫힌 가게 앞에 서서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계획도 짜지 않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즉흥적으로 나오면 안 된다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들을 보며 슬쩍 손을 들었다.

“그냥 피시방이나 가죠.”

“결국 겜창은 피시방밖에 갈 데가 없는 거였나.”

“겜창이란 뭘까….”

글쎄. 게임 좋아하는 사람? 임효린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그녀는 마치 나라 잃은 충신 같은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이스카리아에서 빠져나가나 했더니만….”

“돌고 도는 레이드의 늪….”

이세영이 임효린의 말을 받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눈빛만 봐도 통한다고 하던가. 그들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서로를 향해 아련한 눈빛을 보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두 사람, 좀 많이 닮은 것 같다.

“곧죽이의 의견에 따라 피시방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군들! 나를 따르라!”

“와아아! 겜창은 결국 게임을 해야 겜창인 법이죠! 가면 뭐부터 할까요?”

“이스카리아는 오늘 각이 영 아닌데, 다른 거 뭐 할 거 없으려나?”

“결장 갈까요? PVP 점수 올려야 하는데.”

방금 전까지 축 처져 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뭘 할지 고민하는 이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나는 들어가면 뭐 하지. 부캐를 키울까, 아니면 앵벌이나 뛰러 갈까.

“곧죽, 아니 정우 님은 뭐 하실 거예요?”

“님은 무슨….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그럼… 그… 정우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한도윤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예의가 과하게 바르네. 저런 것도 하나하나 물어보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귓가를 매만졌다. 형 소리가 영 익숙하지 않았다.

“정우 형은 뭐 하실 거예요?”

“음… 글쎄요. 고민 중이에요.”

“도윤 씨는 뭐 할지 정했어요?”

“저는… 아뇨. 아직 안 정했어요.”

역시 레이드 아니면 할 게 없긴 하지?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피시방에 도착했다. 다들 처음 오는 피시방이라 아이디를 만들며 끊이지 않는 수다를 떨었다. 요즘 골드 시세가 어떻다는 둥, 결투장 물이 안 좋다는 둥, 입 열 때마다 나오는 건 게임 얘기들이었다.

프리지아에 접속한 나는 나한테명령하지마, 라고 적혀 있는 캐릭터를 보며 턱을 괴었다. 다른 직업을 키워 볼까. 패치노트 보니까 직업별로 캐릭터가 다 따로 있는 거 같던데. 저 정도는 되어야 고인물 이름값 하는 것 같아서 나도 해 보고 싶단 말이지.

“허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뇨. 별거 아니에요.”

옆자리에 있던 한도윤이 의아한 듯 물어 왔고 나는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남을 따라 하는 사람이었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정신 차려야지.

나한테명령하지마로 접속한 나는 피시방이라 초기화된 시스템 설정과 캐릭터 설정을 손에 맞게 만진 뒤 곧바로 결투장으로 향했다. 스트레스나 제대로 한번 풀어 보자.

“결투장 가실 분 모십니다. 한 판 뜨죠.”

“호오, 내가 오늘 위계질서 바로 세운다. 결투장으로 따라와.”

“콜. 갑시다.”

히죽, 웃으며 베타 누나와 함께 결투장 매칭을 넣었다. 기본적으로 랜덤 매칭 시스템인데, 아무리 낮이라 사람이 적다 해도 과연 만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이윽고 매칭이 된 이는 베타 누나가 아닌 패치노트였다.

“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당황하는 사이 준비가 모두 끝나고, 거리를 벌리며 스킬을 꼬라박는 패치노트의 모습에 이를 꽉 깨물었다. 아니, 베타 누나랑 뜨기로 했는데 왜 갑자기 패치노트가 나오느냐고!

“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

“어… 저도 한번 해 보고 싶어서요.”

뭐를? 내 복장 뒤집는 일을? 빠득, 이를 갈며 돌진기를 사용해 패치노트에게 다가가 스킬을 꼬라박았다. 콤보기가 연달아 터지고, 가장 딜 계수가 높은 스킬이 발동하려는 찰나, 패치노트가 스턴기를 걸었다.

“미친, 이게 돼? 어떻게 돼? 알고 썼어요?”

“당연하죠.”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어찌나 재수 없는지. 이래서 잘생긴 것들은 안 된다니까.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며 마저 공격을 감행했으나 장비에 회피를 얼마나 처바른 건지, 제대로 된 대미지가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렇게 이번 PVP는 패치노트의 승리로 넘어갔다.

“와… 나도 어디 가서 컨 딸린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이건 진짜….”

“형도 되게 잘하시는걸요. 스킬 하나라도 실수했으면 제가 졌을 거예요.”

“그 실수를 하냐, 안 하냐가 실력을 가르는 거죠. 진짜 게임 잘하시네. 나중에 저 강의 좀 해 주시면 안 돼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야 얼마든지요.”

예쁘게 웃는 한도윤의 모습에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내가… 얼빠였나? 아닌데. 여태껏 그런 일은 없었는데.

다시금 매칭을 기다리는 사이 아이스커피를 주문한 나는 옆자리에 다가오는 피시방 알바생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손에 들린 음식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라면만 세 개에 음료가 네 개, 심지어 핫도그와 떡볶이까지…. 저걸 어떻게 다 먹나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뭐야, 뭘 저리 많이 시켰어? 피시방에 배 채우러 왔어?”

“원래 피시방에 왔으면 이것저것 시켜 먹어야 하는 법이야. 피시방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데.”

“맛있기야 하겠지. MSG 범벅인데 맛없을 리가 있나.”

이따가 술 마시러 가쟀으면서 벌써 저렇게 배를 채워도 되는 건가? 어쩐지 심란한 기분에 멍하니 임효린을 바라보던 나는 매칭이 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 곧죽이 덤벼!”

“곧죽이라 하지 말라고!”

드디어 베타 누나와 매칭이 되었다. 한도윤의 패치노트야 워낙 넘사벽이니 질 수 있어도 베타 누나의 힐러한테는 지고 싶지 않다. 세상에 그래도 내가 딜러인데 힐러한테 지면 쓰나!

“아…. 하필 저 새끼랑….”

“좋았어! 오늘 위계질서 세워 보자!”

“동갑에 위계질서가 어디 있어. 미친놈인가.”

나와 베타 누나가 한창 PVP를 즐기는 사이 옆자리에서 투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하고 힐끗 확인하니 패치노트와 연중무휴가 PVP 결투장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두 사람도 매칭이 저렇게 됐구나. 나는 눈동자를 잠시 굴리다 베타 누나를 향해 스킬을 꼬라박으며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나는 패치노트 님이 이긴다에 만 원.”

“어? 내기하는 거예요? 저도 패치노트 님이 이긴다에 만 원!”

“그럼 저도 패치노트 님이 이긴다에 오만 원 걸겠습니다.”

“다 같은 데에 걸면 의미가 없잖아요!”

“제 편은 없어요…?”

정태원의 아련한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길드원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웃음을 참으며 다시 PVP에 집중하려는 찰나, 옆에서 들리는 한도윤의 목소리에 고개를 획 하니 돌렸다. 예? 뭐라고요?

“그럼 저는 베타 님이랑 정우 형 중에 정우 형한테 걸게요.”

“뭐야! 그럼 나는 베타 님! 그래도 길마 가오가 있는데 곧죽 님 때려잡으실 수 있죠?!”

“저 힐런데요?”

“그렇게 따지면 저도 힐런데요?”

“까짓거 한번 해 보죠! 각오해라 곧죽을놈! 닉값하게 해 주지!”

곧죽을놈이라고 하지 말라고. 닉네임으로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도 들어 처먹지 않는 두 사람을 향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니 어쩔 수 없지. 아껴 둔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야! 너 얌생이구나?! 1평 실화냐!”

“꼬우면 1평 쓰세요. 힐러도 1평 있잖아요?”

“아니, 와, 이런! X바아아!”

“조용히 해요.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예요.”

아껴 뒀던 비장의 무기는 바로 투명을 처바를 때 썼던 1평캔, 무콤이었다. 내가 그래도 의리가 있어서 이건 안 쓰려고 했는데 먼저 아가리 터셨잖아요. 그러니 감내하고 받아들여라. 그렇게 길드 마스터와 일반 길드원의 장렬한 PVP는 내 승리로 끝이 났다.

“봤냐. 봤어? 내가 그래도 힐러한테 처발릴 정도로 X밥은 아니시다 이거야.”

“젠장… 곧죽을놈 이 녀석……. 폭주기관차의 길마로서 너에게 부길마 형을 선고하노라!”

“…예? 뭐요?”

“여러분 오늘부터 부길마는 곧죽입니다. 내가 이때를 위해서 자리를 비워 뒀지!”

[나한테명령하지마 님께서 폭주기관차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로 임명되었습니다.]

떡하니 화면을 채우고 있는 알람 창에 멍하니 넋을 놓았다. 뭐지? 이게 이렇게 된다고? 뿌듯하게 미소 짓는 효린 누나를 보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X부럴….”

“이제부터 부길마 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낄낄, 싫은데? 넌 이제 우리 길드에서 못 나가. 나가게 둘 거 같아?”

PVP에서 이긴 대신 목줄을 얻은 거구나. 한숨을 푹 내쉬며 결투장을 나왔다. 뭐, 어차피 프리지아를 접기 전까지는 이 길드에 있으려 했으니 상관없겠지. 부길마라고 해야 할 게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냥 감투 하나 쓴 거라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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