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36화 (36/88)

#36

그는 손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쬐깐해 보이는 음료를 손에 쥔 채 핸드폰 자판을 느리게 두드리고 있었다. 데자뷔가 느껴지는 장면에 단톡방을 확인한 내 입에서 다시 한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김현호: 도착했습니다.]

[김현호: 흰색 패딩이라고 하셨죠?]

정태원과 한도윤도 패딩으로 찾더니, 사람은 정말 다 똑같구나. 하긴, 얼굴을 모르니 당연한 얘기려나. 한놈 님으로 추정되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나는 손을 흔들며 패딩을 가리켰다. 그는 내가 입고 있는 흰색 패딩을 보더니 작은 감탄사를 흘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멀리서 봤을 때도 크다는 생각을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위압감이 느껴졌다. 탱커라는 직업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혹시 곧… 아니, 박정우 씨 맞으십니까?”

“네, 김현호 씨죠?”

“맞습니다. 아니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네요. 패딩이 한 건 했습니다.”

딱딱한 어조의 김현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내 옆에 앉았다.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커 보이는 사람이 옆에 앉자 괜히 쪼그라든다. 여기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특대 사이즈냐. 나는 스몰인데.

“김현호 씨가 한놈 님이시죠?”

“맞습니다. 그쪽은….”

“얘는 한도윤이고요, 저는 정태원이라고 해요. 연중무휴! 그나저나 저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크시네요! 실례가 아니라면 키가 어떻게 되세요?”

“190입니다.”

그 키, 저한테 5센티만 양보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익살스럽게 박수까지 쳐 가며 신나게 나불거리는 정태원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현 상황이 어색했던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 준다면 멕인 건 봐줄게.

저번에 음성 채팅 했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저 인간은 친화력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아직도 생각나는 따릉따릉 발언에 작게 웃음을 흘리자 한도윤의 시선이 내게 닿아 왔다. 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인지 몸을 들썩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참 생긴 거랑 다르게 노는구나. 세상을 등지고 살 것처럼 생겼는데 말이다.

“현호 씨는 운동이라도 하시는 건가요?”

“아, 네. 직업이 경호원입니다.”

홀리 나이트에 이어서 경호원인가요. 무뚝뚝한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는 직업 선정이 아닐 수 없다. 키가 크니 경호원으로는 딱이겠네. 나름의 진심을 담아서 잘 어울린다 하니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풀어진 인상에 작게 감탄을 흘렸다. 무뚝뚝해 보이던 사람이 웃으면 이런 느낌이구나. 조금 색다르다.

“그…!”

“여긴가? 여기겠지? 여기 맞지? 여기 같은데?”

“그러게요! 딱 봐도 여기가 각인데! 크으으!”

“뭐시여.”

한도윤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니 화려한 인상의 여자 둘이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종소리 못 들었는데 언제 들어왔지.

“여기가 곧 죽을 놈들의 본거지라면서요? 맞나요?”

“뭐라는 거야.”

“쟤가 곧죽이다! 확신할 수 있어! 쟤가 곧죽이라는 데 100만 골드 건다!”

“와, 남정네 넷이 몰려 있으니까 위압감 장난 없네요. 와중에 정우 씨 혼자 뽀짝한 거 봐! 귀엽네!”

뽀짝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다. 상대적 뽀작을 부정할 수 없었던 나는 작은 목소리로 닉네임을 부르지 말라고 일갈했다. 내 말에 그들은 소리 내어 웃으며 자리에 합석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눈치챘지만, 이 둘이 베타 누나와 뚝배기장인이었다. 다들 게임에 미쳐 사는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아 괜히 뻘쭘해졌다. 나만 겜창처럼 생긴 거 같다.

“자자, 이건 장인 세영이의 선물! 크리스마스 기념!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뜻을 담아 만들어 봤어요.”

“와, 맛있는 냄새! 감사합니다!”

뚝배기장인, 이세영이 주먹만 한 포장지의 선물을 나눠 주며 웃었다. 묶여 있는 리본을 살짝 풀자 고소한 냄새가 올라온다. 냄새만 맡아도 맛있는 향이 느껴져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 나는 짧은 감사 인사를 남기고 쿠키를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 처음 오는 정모인데, 나도 선물을 들고 왔어야 했나.

“우리 이제 뭐 해요? 다들 하고 싶으신 거 있나?”

“난 먹을 생각밖에 안 했는데.”

“밥은 해 좀 떨어지고 난 다음에 술이랑 같이 먹고, 일단 겜 얘기나 좀 하죠. 이스터 섭이, 닉변튀 했다던데.”

“아, 맞다. 그 새끼 그거!”

커피를 홀짝이며 오자마자 쉼 없이 떠드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일을 벌일 대로 벌이고 도망간 이스터를 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스카리아 최적의 조합은 무엇인가, 길드원들을 더 받을 것인가, 공대원을 늘릴 것인가까지, 오만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일단 저는 패… 아니, 한도윤 씨 덕분에 강화작이 그럭저럭 끝나서 부탱 역할도 가능하긴 하거든요. 저번에 앵벌이 뛰면서 확인했어요.”

“저도 틈틈이 보호막만 감아 주시면 솔힐 가능해요.”

“다들 주요 파츠 정도는 얻으셨으니 강화만 땡기면 딜도 부족하진 않을 거 같고….”

“저희가 굳이 스피드런을 할 필요는 없죠. 빠르게 끝내려는 이유도 장비를 빨리 파밍하고 싶어서잖아요.”

활발하게 오고 가는 수다를 들으며 남은 커피를 마셨다. 다들 할 말이 많네. 원래 이런 건가. 습관적으로 빨대를 잘근 씹으며 눈동자를 굴리는데 한도윤과 시선이 마주쳤다. 계속 날 보고 있던 걸까.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 떠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저… 실례면 말씀 안 해 주셔도 되긴 한데,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요?”

“네… 아, 저랑 정태원은 올해로 스무 살이에요. 곧 스물하나가 되겠지만.”

뭐? 저 얼굴로 스물이라고? 나도 모르게 입을 헤벌리며 한도윤과 정태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 또래라며?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군대도 안 갔다 왔잖아? 믿기 힘든 발언에 의견을 주고받던 이들의 시선이 한도윤에게로 쏠렸다. 마치 사실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들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댁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 저는 스물다섯이에요….”

“예?”

“정말요? 스물다섯이요?”

저 두 사람이 스물이라는 것보다 내가 스물다섯이라는 게 더 놀라운 모양이다. 내가 어려 보인다는 건 알고 있다. 자주 가는 편의점에서조차 술을 사려고 하면 민증 검사를 당했으니까. 덕분에 내 핸드폰 케이스에는 카드와 더불어 민증이 함께 들어 있다.

“제 친구들은 군대만 갔다 왔다 하면 하나같이 삭아서 돌아오던데….”

“현호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요?”

“저는 서른입니다.”

“와, 이건 다른 의미로 반전. 저랑 동갑이네요. 까짓거 말 까죠?”

“안 됩니다.”

베타 누나, 임효린의 장난스러운 말에 김현호가 정색했다. 듣는 사람이 다 머쓱할 정도로 단호한 말에 그녀가 뒤통수를 긁적이자 김현호는 그 무뚝뚝하고 진중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제 컨셉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예? 컨셉이요?”

“닉네임도 그렇고 직업도 그렇고 나름 컨셉을 잡은 겁니다. 반말하는 순간 의미가 없어져요. 제가 왜 채팅에서 하나하나 온점을 찍었는데요.”

“그거 컨셉이었어요?”

“이런 데서 길드 닉값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정상인은 어디 갔죠?”

“뒤졌어요.”

“아깝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총체적 난국으로 짓는 건데!”

“저희 길드에 정상인이 존재하긴 했나요? 없었던 거 같은데.”

임효린은 그대로 자기는 말을 놓고 싶다며, 놓아도 되겠느냐 물었다. 그 모습을 심드렁하게 응시하던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호를 보고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여러 의미로 골 때리는 사람들이다. 게임에서만 그런 줄 알았는데 현실에서도 이러는 걸 보니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의미로 한결같다.

“경호원은 출퇴근 시간이 달라서 겜 접속하기 애매하지 않아요?”

“아, 괜찮습니다. 저번에 짜증 나는 일이 있어서 퇴사했거든요. 나오기 전에 걔들도 주님 곁에 보냈어야 했는데….”

“네? 아니 그런…. 큰일인 거 아니에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별일 없이 나와서 상관없습니다. 나중에 다시 구직해도 받아 줄 곳은 많아요.”

이 키와 피지컬을 보고도 안 받아 주는 곳이 이상한 거예요. 당당하게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기야 딱 봐도 경호원 하면 잘할 상인데 경력까지 있으니 재취직에 어려움은 없겠다. 그때, 임효린이 테이블을 탕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꺾으러 가죠. 가서 상사 욕도 좀 하고 영자 욕도 좀 하고!”

“콜! 갑시다! 저 좋은 데 하나 알아봐 뒀어요!”

“뭘… 꺾어요…?”

“도윤 씨는 왜 저렇게 아련하게 말하지? 음성 채팅할 때랑 너무 다르시네! 당연히 술을 꺾으러 가는 거죠!”

“이 시간에요?”

해가 뜨다 못해 쨍쨍한데? 어떤 미친 사람들이 대낮부터 술을 마시죠?

“낮술이 진리인 거 몰라?! 이래서 요즘 것들은!”

“옳소! 낮술도 하고 밤술도 하고 새벽 술도 하는 게 진정한 음주러 아니겠습니까!”

“미친 건가.”

“저야 술을 좋아해서 괜찮은데 얘는 좀 봐주세요. 얘가 생긴 건 안 그래도 엄청난 알코올 쓰레기라.”

“야.”

“양주 먹을 거같이 생긴 사람이 꽤 퓨어하시네요. 괜찮아요. 술은 먹다 보면 는다고요!”

당황한 한도윤이 정태원의 팔을 붙잡았다. 일그러진 낯과 살벌한 눈빛에 저게 바로 눈으로 욕하는 거구나 싶어졌다. 얼마나 술을 못하면 저럴까. 조금 궁금해져 나는 찬성의 의미로 손을 들어 올렸다. 한도윤을 제외한 모두가 마시러 가길 원했고 결국 그는 허탈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커피를 정리한 우리는 이세영의 뒤를 따라 술집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문을 열었을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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