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34화 (34/88)

#34

생각보다 날짜가 너무 일러서 조금 당황했다. 보통 정모라는 건 여유를 두고 잡는 게 아니었던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아르바이트를 뛰는 것도 아니고, 방학 기간이라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아니, 역으로 너무 여유로워서 문제였다. 차라리 일이라도 했으면 바빠서 못 나간다고 했을 텐데. 진짜 나가야 하나. 인게임에서 되도 않는 욕설을 내뱉는 것과 달리 나는 낯을 심하게 가렸다. 아마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 가면 입도 뻥끗하지 못하리라.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좀만 더 생각해보고 연락 줄게]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아랏어!!]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올 수 있으면 말해 단톡에 초대해줄 테니까]

벌써 단톡방을 만들었구나. 패치노트도 단톡에 들어가 있을까.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단톡에 패치노트님도 있어?]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아니? 안 계셔]

당연히 초대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톡을 켠 나는 패치노트의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초대해 볼까. 나는 귓속말로 베타 누나에게 전화번호를 보낸 후 단톡방에 초대해 달라 말했고 그녀는 무척 기뻐하며 곧바로 초대를 해 주었다. 초대되자마자 읽지 않은 메시지가 +300을 찍은 단톡방을 보며 작게 탄식했다. 할 말이 뭐 그리 많아서 한 번에 수백 개가 쌓이냐.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인 나는 패치노트에게 일대일 톡을 보냈다.

[저희 정모 단톡 만들어졌는데 초대해도 돼요?]

[한도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답장 한번 빠르다. 단톡에 들어가 패치노트를 초대한 나는 우르르 올라오는 채팅에 지끈거리는 눈가를 꾹 눌렀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의 채팅이 올라오니까 정신이 다 혼미했다. 올라오는 말 중 대부분은 쓸데없는 말이었다. 정모를 하게 돼서 기쁘다는 둥, 빨리 정모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둥의 얘기들을 보다 공지에 들어가 정확한 날짜와 장소를 확인했다. 내일 오전 10시?

[왤케 급하게 만나냐 번개팅임?]

[이세영: 엥 박정우님 누구세여?]

[임효린: 곧죽을놈이요 ㅎ]

[이세영: ㅋㅋㅋㅋ아 곧죽님이셨구나 저 뚝배기장인이에요 ㅎㅎ]

[반갑습니다]

[근데 왜 하필 내일이에요? 다른 날도 있잖아요]

[임효린: 우리 곧죽을놈은... 백수라서 모르겠지만...... 으른들은 일하느라 빨간날밖에 시간이 안된단다....ㅎ]

“좆됐네.”

핸드폰을 던져 버리고 옷장에 달려갔다. 종강 후에는 귀찮다고 빨래를 안 해서 입을 수 있는 옷이 몇 개 없었다. 대충 깔끔한 옷을 꺼내 입은 나는 충격에 몸을 떨었다. 맞는 옷이 없다. 그동안 살이 쪄서 옷이 작아진 게 아니었다. 반대로 살이 너무 빠져서 하나같이 사이즈가 크다. 심지어 바지는 벨트가 없으면 흘러내리려고 했다. 스스로의 식습관을 떠올린 나는 작게 한탄하며 옷장을 뒤졌다. 여기 어디 보면 입을 만한 게 있을 텐데.

“아무거나 입으면 안 되나….”

어차피 게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거니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터다. 꾀죄죄해 보이지만 않으면 되겠지. 차마 옷을 사러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평소 부모님이 사다 주신 옷을 입었던 나는 혼자서 옷 가게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난이도로 따지면 이스카리아의 절망을 솔플로 뛰는 수준이다.

한참 장롱을 뒤지던 나는 마땅한 옷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작게 한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 놈이 옷 사러 가자 했을 때 따라갈걸.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문영윤에게 밥 사 줄 테니 옷 좀 봐 달라고 톡을 보냈다. 설마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음에도 메시지 옆의 숫자 1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며 욕설과 함께 전화를 걸었다.

자고로 핸드폰이란 빠른 연락을 위한 문명의 이기가 아니었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핸드폰이 장식으로 쓰임새를 바꿨나? 길고 길었던 신호음이 끊기고, 부재중이 떴다. 썩은 표정을 감추지 못한 나는 녀석이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서너 번 시도했을까. 여보세요, 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은 왜 들고 다녀?”

-뭐야, 연락했었어?

“부재중 확인해 봐라. 장식으로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아.”

-사돈 남 말 하네. 너도 저번에 연락 뒤지게 안 받았잖아.

“넌 별거 아닌 일로 연락한 거였잖아.”

시답잖은 얘기로 한참 투덕거리던 나는 잠시 잊고 있던 용건을 꺼냈다. 밥 사 줄 테니 옷 고르는 것 좀 도와 달라고 하자 녀석이 이상한 얘길 들었다는 듯이 답했다.

-너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 어디 데이트 가냐?

“아니, 정모.”

-저어엉모? 저어어엉모오오오? 네가? 정모를? 방구석 폐인이?

“지랄 노.”

-내가 너보다 옷을 잘 입긴 하지? 걱정 마. 칼라풀 핫핑크로 골라 드릴게.

“그때 그냥 버리고 갔어야 했는데.”

-너 나 쓰레기 더미 위에 두고 가려 했다며. 재형이가 다 말해 줬다.

익살스러운 웃음을 흘리던 문영윤은 알았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급하게 몇 시까지 안 나오면 너희 집에 쳐들어갈 거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 패딩을 꺼내 입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저번에 내렸던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게 시야에 보였다.

눈을 뽀득뽀득 밟으며 번화가에 도착한 나는 문영윤을 기다렸다. 그나마 약속 시간은 잘 지키는 녀석이니 제때 올 것이다. 안 오면 진짜 쳐들어가서 멱살 잡고 끌고 나와야지. 아니나 다를까, 약속 5분 전에 도착한 녀석을 보며 헤드록을 걸었다.

“제대로 골라 주면 고기 사 준다.”

“쇤네는 소고기가 먹고 싶습니다.”

“대학생이 소고기는 뭔 놈의 소고기? 가볍게 양념갈비로 퉁치자.”

“혼자서 3인분 먹어도 돼?”

“이 새끼는 뱃속에 거지가 들었나. 마음씨도 넓어라. 세도 안 받고 거지한테 방을 다 내주네.”

“너도 내 위장에서 살래?”

“돌았나 봐.”

문영윤의 헛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옷가게로 향했다. 자신이 자주 가는 데가 있다며 호언장담을 하는데 썩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그래도 후드와 한 몸이 된 나보다는 낫겠지. 나는 녀석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귓가에 속삭였다.

“부디 돌만 안 맞게 해 다오.”

“칼라풀 핫핑크?”

“야, 저기 주먹만 한 돌 있다. 우리 뚝배기 한번 열어 볼까?”

“너는 허여멀겋게 생겼으니까 깔쌈하게 블랙으로 가자.”

다급하게 말을 돌린 녀석은 내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소리를 들으며 찜찜함을 가슴에 안고 녀석을 뒤따라간 나는 이것저것 옷을 골라 온 녀석에게 양념갈비 3인분을 갖다 바쳤다. 누군가가 그랬지,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네 겉모습을 보니까 영 신뢰가 안 갔다. 미안하다. 이런 날 용서해 줄래? From 양념갈비.

(2)

불편하지 않게 넉넉한 사이즈의 검은색 목폴라에 청바지, 마지막으로 평소 입고 다니던 흰색 패딩까지 갖춰 입은 뒤 거울을 바라보았다. 평소 입고 다니던 후드티와 비교하면 당연히 불편했으나 부러 큰 사이즈를 산 덕분인지 크게 답답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밖에 있는 동안은 패딩 때문에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았다. 순식간에 얼어 버린 뺨을 매만지며 패딩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후드를 쓰니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는 기분이다. 발걸음을 조금 빨리 해 지하철로 이동한 나는 생각보다 북적이는 열차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말이라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다들 어디로 놀러 나가는 모양이다. 날도 추운데 그냥 집에 있지.

어영부영하다 보니 어느새 역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린 나는 깊게 숨을 내쉬며 역을 빠져나왔다. 이 근방에서 기다리면 찾아온다고 했던가. 핸드폰을 꺼내 톡방을 확인해 보니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출구 바로 옆에 있는 카페 사진을 찍어 톡방에 올렸다.

[(사진)]

[카페에 있을게요]

[김현호: 곧 갑니다.]

[이세영: 저도 한 10분이면 도착할 거 같아요~]

[임효린: 나 차막힘ㅠㅠㅠㅠ]

[한도윤: 저도 차가 막혀서... 조금 걸릴 거 같아요]

막히는 게 싫었으면 지하철을 탔어야지. 지하철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네들이 불쌍해요. 나는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진동벨을 들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뒤 어서 빨리 다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연중무휴도 오는 걸까. 이왕 만나는 김에 만나서 공대 얘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연중무휴님도 오세요?]

[한도윤: 네 일단 데려왔어요]

[이세영: 일단 데려왔댘ㅋㅋㅋㅋㅋ]

[이세영: ㅋㅋㅋㅋㅋㅋ연중님 취급ㅋㅋㅋㅋ]

같이 오는구나. 그나마 어색하지는 않겠다며 작게 안도한 나는 커피를 받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니 걸음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졸업하면 나도 저렇게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는 걸까.

어렸을 때는 무작정 대학을 잘 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과제에 치여 사느라 졸업 후의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중간에 군대도 다녀왔고. 여기서 나이를 더 먹으면 어떻게 될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딸랑, 카페 문에 달려 있던 종이 울렸다. 습관적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방금 들어온 이들의 모습에 작게 감탄했다. 모델이라 해도 믿을 만큼 잘생긴 남자 둘이 우월한 기럭지를 뽐내며 카페에 들어오고 있었다. 차가운 인상의 남자와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는 상반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꽤 친밀한 사이인 모양인지 무어라 투덕거리며 카운터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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