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매너는 밥 말아 드셨죠? 뚝배기 한 사발 하셨는지?]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개개인으로는 쪽도 못 쓰니까 몰려다니냐?ㅋㅋㅋㅋㅋㅋ]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능지에 이마를 탁!! 칩니다]
분노의 채팅을 친 보람이 있는지, 아니면 저들의 목적이 애초부터 나였는지 어그로가 확실하게 끌렸다. 몇몇 유저가 쌍욕을 내뱉으며 내 어그로에 화답을 해 준다. 친절하기도 하네, 고마워라.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패치님 딜ㄱㄱㄱ]
저들의 실수, 그 첫 번째는 우리 길드에 신입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고, 둘째는 둘이 같이 왔는데 나한테만 모든 어그로가 끌렸다는 것이며, 셋째는 딱 봐도 폭주기관차 길드 마크를 달고 있는 패치노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뒤쪽에서 화려한 이펙트가 터지며 불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저거 스킬 이름이 뭐더라.
(3)
그래. 스킬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스킬 하나에 신화 길드원들이 우후죽순 쓰러졌다는 게 중요한 거지. 이런 광역 딜이 한순간에 날아올 줄은 예상 못 했는지 우왕좌왕하는 놈들을 보며 작게 웃었다.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오더를 내려 줄 명령 체계만 잡혀 있었더라도 이렇게 쉽게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광역 딜은 한 번에 여럿을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단일 딜에 비해 대미지가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즉, 몰려온 신화 길드원의 대부분은 살아 있었다. 나는 다시금 스킬을 캐스팅하는 패치노트의 캐릭터를 힐끗 쳐다보곤 근처에 있는 신화 길드원을 향해 달려갔다. 돌진 스킬을 사용해 거리를 좁히고 콤보기를 몇 개 사용하자 패치노트의 스킬에 피가 깎여 있던 녀석은 내 콤보기가 끝나기도 전에 다운됐다.
우선 하나. 대충 눈대중으로 세어 보니 열댓 명 정도 되는 수가 남아 있다. 한놈 님에게 가 있는 녀석들까지 포함하면 대충 서른? 적으면 스물 정도 되겠다. 참 많이도 끌고 왔네. 길마의 미친 짓 하나 때문에 몇 명이나 손해를 보고 있는 거야.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한놈님 살아있어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뒤지기 직ㄱ전이에요ㅕ...]
[길드/주님한놈갑니다: ㅍ포션ㄴ도 없어]
[길드/베타: 나짐감]
베타 누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텔레포트를 타고 나타났다. 아직 전투 상태로 돌입하기 전인 그녀는 곧바로 탈것을 소환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길드/패치노트: 전 여기 정리하고 갈 테니까 두분은 먼저 한놈님께 가세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가능하시겠어요?]
[길드/패치노트: 장비 꼬라지만 봐도 만만해서 괜찮을 거 같아요]
[길드/패치노트: 지들이 모여봤자 거기서 거기죠]
가끔가다 허당끼를 보여서 그렇지 이럴 때만큼은 든든하기 그지없다. 나는 빠른 이동을 위해 키보드를 눌러 캐릭터를 달리게 했다. 바로 탈것을 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전투 상태에서는 탈것 소환이 불가능한 터라, 전투 상태가 풀리는 곳까지 뛰어가야 했다.
적당히 날아오는 스킬들을 무빙으로 피하며 한놈 님이 있는 곳으로 달리자 뒤쪽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이 게임이 PC게임이 아니었다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곡소리가 들렸으리라. 불쌍한 새끼들.
전투 지역에서 일정 수준 멀어지자 전투 상태가 풀렸고, 탈것을 소환한 나는 그것을 타고 날아올랐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하늘로 빠르게 날아가 도착한 곳에서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시간이 꽤 지난 걸로 아는데, 쟤들은 정석적인 8인 공대를 들고도 탱커 하나를 못 잡고 있었다. 진짜 무슨 자신감이었던 거지. 탈것을 소환 해제하고 밑으로 내려오자마자 눈에 보이는 신화 길드원 하나를 두들겨 잡았다. 순식간에 하나가 죽자 어그로가 내 쪽으로 쏠린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베타누나 한놈님한테 힐ㄱ]
[길드/베타: 너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뎀지 허접 회피 가능]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포션 있]
[길드/베타: ㅇㅋ]
[길드/주님한놈갑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허접도 ** 맞으면 아파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그리고 개빡칩니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피차면 와요 힐러 먼저 죽이고옴]
주변을 쭉 둘러보며 딱 봐도 힐러같이 생긴 놈을 찾았다. 흰색 로브에 스태프를 들고 있는 놈이 두 마리. 룩템 꼴이 아무리 봐도 힐러다. 돌진기를 사용해 지척에 다가가자마자 온갖 스킬을 꼬라박았다. 그러자 뒤쪽에 포진해 있던 딜러들이 힐러를 지키기 위해 하나둘 몰려왔다.
나는 내게 한창 얻어맞던 힐러가 힐을 캐스팅할 때마다 스턴기를 걸어 시전을 끊었고, 무빙으로 딜러들의 공격을 피했다. 안타깝게도 공격이 워낙 다채롭게 쏟아지는지라 전부 피하는 신기는 보이지 못했다. 딜러 견제만 가능했어도 진작 힐러를 자르는 건데. 쪽수가 부족하다는 게 이렇게 걸리네.
상대 힐러의 HP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내가 마지막 스킬을 쓰려고 하자 나한테명령하지마 캐릭터가 돌연 경직을 하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렉? 아니면 스턴? 당황스러움에 키보드를 연타하자 자판 하나가 뚝, 하고 빠졌다. 망했네.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뭐했냐?]
[전체/국어9등급: 스턴 등ㅇ신아ㅋㅋㅋㅋ]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지1랄 ㄴ 뭔 놈의 스턴이 이렇게 길어 ㅅ1ㅂ아]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욕을 내뱉었다. 진짜 스턴이었던 건지 경직이 풀리고 캐릭터가 움직였다. 그러나 버벅거림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새끼가 무슨 짓을 한 거 같은데 X발, 이거 뭐 증거가 없네.
자판 하나가 빠진 채로 딜을 넣어 힐러 하나를 마무리했다. 이제 남은 건 일곱 마리. 아직 힐러 하나가 남아 있으니 그놈을 먼저 자르고 딜러를 잡을 것이다. 백날 두들겨 봐야 질기게 살아남는 탱커는 견제만 좀 해 주고 마지막에 잡아도 늦지 않는다.
“아, X발.”
그러나 뜬금없이 내 캐릭터가 다시 한번 멈칫하며 적의 공격을 허용했다. 무빙만 칠 수 있으면 충분히 피하고도 남는 공격을 곧이곧대로 처맞는 걸 보니 울화통이 터질 것 같다. 아니, 내가 뭔가에 맞고 경직에 걸린 거면 할 말 없다만 맞은 것도 없는데 스턴이 어떻게 걸린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지! 컴퓨터 사양도 높아서 핑 문제도 아닌데!
치솟는 짜증을 꾹 누르며 어떻게든 움직이고자 키보드를 연타하려던 손을 잠시 멈칫했다. 그동안 쓸 일이 없어 잊고 있던 버그 하나가 떠올랐다. 오픈 베타 초창기에 있었던 경직 버그. 설마 그건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국어9등급을 향해 버그를 유발하는 공용 스킬을 사용했다. 놈의 캐릭터가 멈칫했다. 와…이게 몇 년 전에 있던 버그인데 아직도 안 고쳤냐? 진짜 망겜 클라스.
[전체/국어9등급: 너 뭐했냐 ***아]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스턴 등ㅇ신아ㅋㅋㅋㅋ]
제 꾀에 넘어간 기분이 어떠냐.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멈추지를 않는다. 초창기부터 있던 버그가 아직까지 안 고쳐졌다니. 쟤는 이걸 어떻게 알고 썼냐. 나도 깜빡 잊고 있던 건데. 이 버그를 푸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동 키인 wasd에서 위아래 키인 ws를 연타하면 풀린다. 국어9등급은 버그를 쓸 줄만 알았던 모양인지 경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체/국어9등급: 시1발 핵사용으로 신고할거야]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ㅇ ㅖ? 제가 언제 핵을 썼죠? 저는 그저 게임에 있는 시스템을 이용했을 뿐 불법 프로그램은 일절 사용하지 않았답니다 로그 뜯어보든가]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국어가 9등급이라 그런가? 이쓲타가 헛소리 지껄일 때 하는 말이 똑같네? 거기 뇌트워크는 좀 빵빵하니?]
국어9등급이 버그에 허덕이고 있을 때 나머지 힐러를 잘라 내었다. 이걸로 저 녀석들은 포션 외의 HP 회복 방법이 사라졌다. 내가 놈과 투덕거리는 사이 다른 딜러를 잡고 합세한 베타 누나와 한놈 님이 나머지 딜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점점 정리되는 상황을 보며 나는 깔끔하게 국어9등급을 죽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국어9등급은 온갖 욕을 내뱉으며 제가 쓰던 버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이었다. 이런 걸 바로 닉값이라고 하던가.
[길드/패치노트: 여기 정리 끝났어요 거기는 어때요?]
[길드/베타: 여기도 정리 완료^^]
[길드/베타: 아따 명색이 길드전인데 이렇게 쉬워도 되나요?ㅎ]
[길드/뚝배기장인: 저만 다른 데서 싸우고 있었네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내기하실 분 구합니다 누가누가 더 많이 죽이나]
[길드/베타: 오 좋은데? 길드원 전원 참가인 걸로^^]
[길드/주님한놈갑니다: 근데 쟤네 이렇게 발렸는데 길드전 취소하지 않을까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취소못해요 길드전을 거지같이 만들어놔서 정해진 기간 끝나기 전엔 안 끝나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이제 저희는 눈에 보이는 신화 길드원들 족치면서 포인트 모으면 됨ㅇㅇ덜 죽고 많이 죽이기]
아마 이번 길드전이 끝나고 난 다음에 대대적으로 패치가 들어갈 것이다. 재정비를 이유로 길드전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 그 전에 뽕을 뽑아야지. 마을로 귀환한 나는 신화 길드원이 보일 때마다 죽이며 그 수를 셌다. 한놈 두이 석삼 너구리 오징어 육구 칠개 팔다리 구들장 쨍그랑! 아, 속 시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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