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가지고 있던 골드는 모두 강화석을 사는 데에 탕진했고 그렇게 산 강화석은 모두 소진한 지 오래였다. 패치노트가 준 것도 마찬가지다.
이 시점에 앵벌이를 뛰어야 하나. 아니면 진짜 현금으로 골드를 사? 업데이트가 진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친 듯이 날뛰는 시세를 생각하자 현질 할 마음이 사라졌다.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한 나는 한숨을 흘렸다. 이게 이렇게 겹치는구나. 뭐, 아직 이스카리아 장비도 몇 개 없으니 강화 자체는 나중에 해도 괜찮긴 한데, 마음 급한 한국인의 종특 때문에 강화가 하고 싶어서 미치겠다.
“X발… 창고 캐에 있던 강화석은 한참 전에 다 털었는데….”
골드도 다 털었지. 어떡하냐, 나….
(2)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누구............ 강화석 팔아주실 분.....]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골드 말고 현금으로...........ㅎ]
[길드/패치노트: 드리겠습니다]
“뭐?”
요즘 강화석 시세가 장난 아닐 텐데 그걸 팔아 주겠다고? 감격에 양손으로 입가를 가리던 나는 다급하게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얼마면 됩니까]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제시해주세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아니 일단 어디 있어요 제가 글로 갈게요]
[길드/패치노트: 아뇨 저 마침 마을 가려던 참이라 제가 갈게요]
[길드/패치노트: 어디 계세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저 페란트 마을 대장간앞이요...]
패치노트는 말 그대로 바람과 같은 속도로 순식간에 페란트 마을까지 왔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거래를 신청하더니 수천 개에 달하는 강화석을 아무렇지 않게 올려놓았다. 뭔 놈의 강화석을 저렇게 많이 들고 있어. 가진 골드를 싹 다 강화석 사는 데에 썼나?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계좌부르세요 현금으로 쏴드릴게요]
[길드/패치노트: 괜찮아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예?]
[길드/패치노트: 곧 길드전 한다면서요]
[길드/패치노트: 전력 강화는 기본이죠]
그런 이유로 저 많은 강화석을 그냥 준다고? 사람이 양심이 있지!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아니 계좌 귓말로 보내달라니까요]
[길드/패치노트: 현거래 하면 영정먹어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해봤어요?]
[길드/패치노트: 네]
해 봤다니까 할 말이 없어지네. 근데 알게 모르게 현금 거래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냐? 신화 길드 길마는 현금으로 모든 걸 해결하던데? 그가 거래 창을 꽉 채워 가며 올린 강화석은 무려 2,000개에 달하는 양이었다. 한창 시세가 날뛰고 있는 지금 저만한 양을 한꺼번에 판다면 못해도 억 소리 나는 골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억 소리 나는 골드가 나한테는 없는 거지.
[길드/패치노트: 이거 말고도 많으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받으세요]
그렇게 얘기해도 마음은 편하지가 않아요. 그냥 강화를 포기하고 말지. 머리를 싸매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나는 결국 거래 수락을 눌렀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노예처럼 부려주세요]
[길드/패치노트: ㅋㅋㅋㅋㅋㅋ]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쇤네 진짜로 노예처럼 따라다니겠습니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이스카리아에서 제가 부탱 역할도 할까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말씀만 하세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그건 저랑 조율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님은 환영할거잖아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당연하죠.]
정말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한 한놈 님의 채팅에 자음이 우르르 올라왔다. 아, 이번 건 좀 웃겼다. 너무 당당해서 뭐라고 하지를 못하겠네. 끅끅거리며 웃음을 흘린 나는 대장간에 쭈그려 앉아 다시 강화에 들어갔다. 패치노트가 준 강화석으로 못해도 10강까지는 미친 듯이 달리겠다.
“12강… 안 터지고 가능할까….”
10강부터는 강화 확률이 뚝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자칫하면 장비가 파괴될 수도 있었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운명의 주사위를 굴렸다. 강화 성공, 실패, 실패, 실패…또 실패. 겨우겨우 9강까지 올린 나는 다시금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 강화를 돌렸다.
[강화에 실패했습니다.]
[강화에 실패했습니다.]
[강화에 실패했습니다.]
.
.
.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으악! 으아아악! 으악!”
드디어 10강을 찍었어! 이 이상은 그냥 안 하는 게 낫겠다. 똥손이라 10강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강화석을 소모했는데 11강을 하려다가 패가망신할 바에는 여기서 만족하고 마는 게 좋았다. 화려한 이펙트로 감싸인 무기를 보니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달려오기는 했구나. 정말 기쁘다 못해 날아갈 것 같았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패치님..... 딜노예 안 필요하세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아니면 또 부캐를 키우셔서 쩔셔가 필요하다든지....]
[길드/패치노트: 성공하셨어요? 축하드려요 ㅎㅎ]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님이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거예요......]
현 최종 레이드인 이스카리아 무기를 10강까지 찍었으니 이제 어지간한 유저보다 딜을 더 잘 뽑을 수 있다. 앵벌이라도 뛰어서 골드를 모은 다음 그걸 모두 패치노트에게 주는 건 어떨까. 솔직히 저 양반이 보통 컨트롤을 지닌 유저면 딜 노예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저만한 유저한테 딜 노예가 웬 말이란 말인가. 그러니 돈으로 해결해야지. 그리고 그 다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일에 묻혔다.
[<시스템> 신화 길드가 폭주기관차 길드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길드/베타: 뭐임?]
[길드/주님한놈갑니다: ㅋ]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이렇게 빠르게 쟁을 선포한다고? 아니, 미리 얘기가 나오긴 했지만 걸기 전에 말은 해 주는 게 예의 아니냐? 나는 채팅 상단에 선명하게 떠올라 있는 시스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길드/뚝배기장인: 이스카리아 파밍 좀 때린 것 같네요]
[길드/뚝배기장인: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당당하게 쟁을 걸까ㅋ,ㅋ,ㅋㅋㅋ]
뚝배기장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컨트롤로는 이기지 못할 테니 차선으로 장비를 빵빵하게 맞췄을 확률이 높다. 안 그래도 돈 많은 프저씨이니 현질로 해결했을 수도 있고.
[외치기/자퇴지망생: 호우!!!! 첫 길드쟁 ㅊㅊㅊㅊ]
[외치기/코리안킴치: 폭주기관차는 첨 들어보는데 머하는 곳임?]
[외치기/양꼬치먹고싶다: 신화 vs 듣보]
[외치기/머머리망토: 폭주가 길드는 듣보인데 길드원들이 탈주한 신화 메인 공대원들]
[외치기/행복회로: 이스카리아의 절망 가실분@@@@@ 탱힐 두자리@@@@@@@]
[외치기/이미테이션: 신화길마:잃어버린 메인 공대원을 찾습니다]
[외치기/stellar: 누가 이스카리아를 공팟으로 가죠?누가 이스카리아를 공팟으로 가죠?누가 이스카리아를 공팟으로 가죠?누가 이스카리아를 공팟으로 가죠?]
급격하게 변한 상황에 혀를 찼다. 이런 어그로는 싫은데.
“노린 건가.”
신화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이스터는 관심종자였다. 남에게 받는 관심을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아하는 놈이라는 거다. 아마 이번 길드전을 벌인 것도 아직까지 다른 길드들이 눈치 보느라 서로 쟁을 걸지 않는 사이, 첫 길드전이라는 이름을 가져가기 위함도 있을 터였다. 그 왜, 겜창들은 최초 타이틀 같은 데에 눈이 돌아가지 않던가.
이스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매번 최초 타이틀을 먹고 싶다며 빌어먹을 컨트롤을 지닌 주제에 퍼스트 클리어를 하겠다고 지랄을 해 댔었다. PK를 하는 김에 겸사겸사 신화 길드를 나온 이유의 8할이 저 양반 때문이니 말 다 했지.
첫 길드전의 포문은 열고 싶은데 길드전을 할 길드는 마땅찮고, 어쭙잖은 길드를 건드리기도 애매하니 폭주기관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것이다. 그 양반, 관종 주제에 속은 옹이구멍보다 좁으니까 자신의 길드를 나가 새 길드를 만들어 이스카리아 퍼클을 달성해 낸 우리에 대한 질투심도 만만찮을 거다. 짧은 고민을 마친 나는 길드 채팅에 글을 올렸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일단 신화길드 보이면 다 죽이죠]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선시비 걸었으면 그 정도는 예상했겠지]
[길드/뚝배기장인: 개미떼가 몰려다녀봤자 개미떼죠ㅋ;]
[길드/베타: 이슦따 졸렬함에 키ㅣ분이 나쁘네요; 학살로 풀어야겟네;]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저 여기 신화 애들 몰려오는데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개많은데? 쪽수가 장난 없는데? 이ㅣ러다 뒤지겠는데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좌표 ㄱㄱ]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패치노트님 파티 걸테니까 받고 탈것좀]
[길드/베타: ㅅ12ㅂ 지금 죽이러 갑니다]
한놈 님이 올린 좌표를 확인하자마자 패치노트에게 파티를 걸고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저 위치면 가까운 장소로 텔레포트한 후 탈것을 타고 이동하는 게 빠르다. 로딩이 끝나고 패치노트와 함께 좌표 쪽으로 이동하려는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대미지가 들어왔다. 도착하자마자 공격이라니. 나는 캐릭터를 뒤로 살짝 물리며 공격한 이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신화 길드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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