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26화 (26/88)

#26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나는 냉장고에 묵혀 뒀던 소주와 맥주를 꺼냈다. 문영윤이 순식간에 뻗어 버리는 바람에 방금 깔짝인 건 마신 것 같지도 않았다. 감질난다고 할까. 유리잔에 눈대중으로 맥주와 소주를 부은 뒤 젓가락으로 탁 소리 나게 치자 거품이 위로 올라왔다. 혼술이라 폭탄주는 에바인 것 같으니 대신 소맥을 말겠습니다.

올라온 거품 하며 목 넘김까지 깔끔해 스스로에게 박수를 날렸다. 내가 원래도 소맥을 끝내주게 말긴 하는데 이번 건 진짜 잘 말렸다. 그래, 이 맛에 술을 마시는 거지! 그렇게 한 잔을 비우고 다시 술을 부으며 컴퓨터를 켰다. 조금이든 많이든 술이 들어갔다면 게임을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로그인 창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캐릭터 선택 창이 나왔다. 나한테명령하지마의 닉네임이 뚜렷하게 보인다. 덜 말라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며 잔을 들었다. 광전사 외에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었기에 자연스레 나한테명령하지마로 접속했다.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어서 오세요.]

[길드/베타: 곧하~ (곧죽을놈 하이라는 뜻ㅎ)]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ㅎㅇㅎㅇㅇ]

벌써 직장인들 퇴근 시간인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베타 누나와 한놈 님을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길드/베타: 타이밍 좋게 왔네]

[길드/베타: 안 그래도 너 오면 말하려고 기다렸거든]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

무슨 말? 누나의 채팅에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술을 들이켰다. 뭐, 저렇게 얘기하는 걸 보니 별일은 아닐 터다. 큰일이 벌어지는 거였으면 길드 채팅이 아니라 귓속말을 보냈겠지. 그러나 채팅이 이어지자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길드/베타: 조만간 신화길드랑 길드전 할듯ㅎ]

“…예?”

갑자기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왜..?]

[길드/베타: 이스터 새기가 지럴을 해대서 ㅎ...]

[길드/베타: 우리 길드가 신화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끼리 모여서 만든거잖아]

[길드/베타: 그거 때문에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아무리 채팅을 읽어도 이해를 못 하겠다. 나와서 새 길드를 파든 말든 그쪽에서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나. 걔가 뭐라고 그걸로 지랄을 해?

[길드/베타: 뭐랬더라]

[길드/베타: 메인 공대원들 다 빠져나갔으니 한물갔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나]

[길드/베타: 이스터가 돈이 욜라 많아서 자게에서 유명하잖음]

[길드/베타: 우리 없어도 자기네 길드 잘나가는 걸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던데?]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게임에서 그런 것도 챙겨야함?]

[길드/베타: 내말이!!!]

베타 누나가 분노에 찬 채팅을 휘날렸다. 나는 그런 누나의 채팅을 읽는 한편, 다시 소맥을 말았다. 길드전이야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던 콘텐츠라 당연히 참가하겠다만, 문득 재미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걔네 메인 공대원들 다 빠져나가서 허접일 텐데.”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나와 베타 누나, 한놈 님이 길드를 나왔다. 심지어 탱 하나, 딜 하나, 힐 하나로 조합도 맞춰서 나오지 않았던가. 과거 신화 길드의 전력과 현재 폭주기관차의 전력을 떠올린 나는 술을 마시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좃밥일듯?]

[길드/베타: 나도 글케 생각함ㅎㅎ]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저희 쪽수가 너무 밀리잖아요.]

이어진 한놈 님의 채팅에 아, 하고 나직한 감탄사를 흘렸다. 인당 전력만 생각하다가 이 부분을 깜빡했네.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오면 못 이겨요. 걔네가 다른 건 몰라도 쪽수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많아서... 열에 아홉은 인해전술로 들어올 거에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아..... 아.... 음...... 양보다 질....?]

[길드/베타: 패치님 있으니가 괜찮지 않을까?]

[길드/베타: 그분 이번에 실수하셔서 그렇지 딜량만 따지면 일당백이잖어 ㅎ]

“그건 좀….”

관련도 없는 사람을 무작정 끌어들이는 건 그렇지 않나? 어쩌다 보니 같이 레이드도 뛰고, 공대도 함께 만들고, 같은 길드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패치노트는 신화 쪽 일이랑은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홀리스터 조졌던 거 생각하면 존12나 세긴 한데 좀 글치 않나]

[길드/베타: ? 홀리스터가 왜 나옴?]

[길드/주님한놈갑니다: 그거 투명이네 길드 아닙니까?]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멘퀘 밀 때 투명이 나 잡겟다고 자리 잡아서 대기 까고 있었는데]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거슬리니까 죽여도 돼요? 하더니 혼자서 8인팟을 쓸어버리심]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3분 안에 끝낼게요 하더니 찐으로 3분만에 끝냄 걔네 길드 이름 3분 카레로 바꿔야 할 듯]

[길드/주님한놈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베타: ㅋㅋㅋㅋㅋㅋㅋ야야야ㅑㅑ 함 물어보기라도 하자 된다고 할 수도 있잖아?!?!!!1]

허락을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민폐 끼치기 싫어서 그렇지. 절대다수가 한번 말이라도 꺼내 보자며 찬성표를 들었기 때문에 소수에 불과한 내 반대 의견은 묵살당했다. 소수의 의견도 존중해 달라. 소수는 사람도 아니란 말인가.

연신 불만을 토로하는데 하필이면 또 패치노트에게 말을 꺼내는 사람으로 선정된 것이 나였다.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가 나를 따라다녔던 죽으러온놈의 본체라는 이유였다. 아니, 내가 친하다고 생각했으면 그냥 도와 달라고 했겠지. 알게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런단 말인가.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아 왜 나야]

[길드/베타: 그님이 죽으러온놈님이잖아ㅎㅎㅎ님 맘에 들어하는 거 같던뎋ㅎㅎㅎㅎ]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프리지아 접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길드/베타: ㅅ12ㅂ 안돼 가지마 못가 히힠히히힠ㅋ]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왜 이러세요; 저 아세요?;;]

[길드/뚝배기장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기 위해 온갖 말을 지어내는 베타 누나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진짜 총대를 메야 하나. 개인적인 일로 폐 끼치기 싫었는데. 나는 까맣게 꺼져 있는 패치노트의 닉네임을 보며 뜸을 들였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뭐.... 일단 그분 자리에 없으니까 나중에 들어오면 말하지 뭐.....]

[길드원 패치노트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아 X발, 타이밍 봐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타이밍일세. 어디서 듣고 온 거 아니야? 내가 이마를 부여잡으며 인생을 한탄하는 사이, 길드원들은 호들갑을 떨며 패치노트를 반기는 채팅을 보냈다. 그 광경을 응시하며 초조함에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역시 내가 말을 꺼내는 게 나으려나.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패치노트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님 혹시 시간돼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ㄴ네 당연하죠]

“아씨, 답은 또 왜 이렇게 빨라.”

귓속말을 보내자마자 답이 돌아오는 것을 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부터 말해야 할까. 조만간 길드전이 벌어질 거 같은데, 님이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그 정도면 되나?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저희가 이번에... 그....]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길드전을 할 거 같거든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언제부터요? 시간 빼둘게요]

“콜록….”

언제, 어느 길드와 하는지만 알려 달라고 하는 패치노트의 모습에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아니 어쩌다 길드전을 하게 된 건지 전후 사정을 묻는 게 먼저 아닌가. 막말로 우리가 먼저 잘못해서 길드전이 일어난 거면 어쩌려고? 당신 스트리머라서 이런 데 예민한 거 아니었어?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그... 방송하는 사람들은 이런 데에 예민하다던데]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취미로 하는 거라 상관없어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그리고 저도 같은 길드원인데 길드전에 빠질 수는 없죠]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한 말이었다. 그에 내가 잠시 침묵하는 사이, 패치노트가 길드 채팅으로 넘어갔다.

[길드/패치노트: 저희 쟁 언제 걸어요?]

[길드/베타: 아마 저쪽에서 먼저 걸 거 같길래 쫌 기다리려구요^^]

[길드/베타: 팿놑님 와주셔서 맴이 든든헙니다^^]

[길드/뚝배기장인: 그렇습니다 한겨울에 뜨끈한 국밥 한그릇 한 기분입니다^^]

[길드/베타: 엄머머머 장인님도 그렇습니까? 저도랍니다^^]

숨 쉬듯 흘러나오는 주접 멘트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니까. 처음 패치노트에게 귓속말을 보낼 때부터 미묘하게 가슴께에 내려앉았던 걱정이 사라졌다. 어차피 막상 길드전이 벌어지면 말은 저렇게 해도 베타 누나가 앞장서서 다 죽이고 다닐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지.

본격적으로 쟁을 시작하기 전에 강화작이나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현재 착용 중인 장비에 쏟아부은 강화석과 골드를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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