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X나 어쩌라고네.”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진지하게 들어 주면 안 돼?”
응, 안 돼. 나는 술이 가득 찬 잔을 손에 쥔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그런 얘기를 하려고 이 추운 날에 불러냈단 말이냐? 고작? 사뭇 심각한 낯짝을 하고 있었으나 결국 똥컨이라 PVP에서 처발린다는 뜻이잖아. 이게 어디서 분위기를 잡아. 문영윤은 단숨에 잔을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며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쯧쯧, 저거 저러다 한 방에 훅 가지.
“이번에 결투장 랭킹 시스템이 생겨서 랭킹이나 따 볼까 했단 말이야…. 근데 자꾸 같은 애랑 만나고, 막… 계속 져…….”
“걔가 너보다 게임을 잘하나 보지.”
“그럴 리가 없어… 아니, 나는 절대 그런 놈한테 질 수 없단 말이야…!”
게임하느라 밥을 안 먹어서 빈속이라 그런가, 오늘따라 술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잔을 내려놓은 나는 끊이지 않는 문영윤의 뒷담 아닌 뒷담을 들어야 했다. 됐다. 그냥 고기나 굽자. 나 배고파.
“그 인성 터진 새끼를 못 이겨서 끙끙거리는 게 너무 빡쳐.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
“그냥 씹으면 되잖아.”
“자꾸 아가리를 턴단 말이야! 내가 아니라 걔가!”
“어어, 그러냐.”
“심지어 예전에는 우리 길드 뉴비를 PK한 적도 있다고! 그래서 따지려고 갔지!”
응, 그렇구나. 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다? 나는 지글지글 익어 가는 고기를 뒤집으며 안면 근육을 떨었다. 아니, 들어 본 게 아니라 내가 겪은 일 같은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처럼 구겨진 내 낯을 눈치채지 못한 문영윤이 병나발을 불었다. 적당히 해라. 그러다가 술병 들겠다.
“크으으으! 오늘도 걔랑 결장에서 만났거든? 사람 인성은 그리 쉽게 안 변하는 모양이더라. 입 한번 X발, 기깔 나게 털어 대요!”
“야,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집게로 고기를 잡아 들어 올려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먹음직한 고기가 불판 위에 떨어지며 부드러운 육질을 뽐내는데, 침이 절로 넘어가는 냄새가 솔솔 났다.
“너 투명이냐?”
“엄메, 네가 내 닉네임을 어찌 아냐.”
“돌겠네.”
대한민국 땅덩어리가 좁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좁을 줄은 몰랐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놈 중에 문영윤이 투명이야? 저렴한 지능의 소유자인 데다 광전사한테 일대일 PVP에서 개 처발린 것도 모자라서 길드원 우르르 끌고 왔다가 패치노트한테 광역기 처맞고 드러누운 게 얘라고?
“너무 투명해서 투리구슬인 줄.”
“아니, 네가 어떻게 아냐니까? 내가 닉네임 말해 줬던가?”
“그러게. 내가 왜 알아야 할까.”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나는 삼겹살이 타 버리기 전에 앞 접시로 옮겨 문영윤의 앞에 내려놓았다. 계속 죽여서 미안하게 됐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럼 조금 봐줬을 텐데. 평소 학교에서 게임 얘기 할 때마다 완전 장인이라고 뻐기길래 진짜 잘하는 놈인 줄 알았지 뭐냐.
“살면서 처음으로 현피 뜨게 생겼다.”
“왜? 뭔 짓 했어?”
글쎄. 너네 길드원을 PK하고 네 멱을 땄지.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문영윤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술을 따랐다. 눈치가 이렇게 없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짠한 마음에 안타깝다는 듯이 녀석을 바라보았다. 내가 곧죽을놈이라고 친절하게 쐐기를 박아 주려 했는데,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헤헤 웃고 있는 놈을 보니 차마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없어졌다.
“야, 너도 술 좀 마셔라. 왜 빼고 그래.”
“빈속이라 속 쓰려.”
“우리 아직 젊잖아. 빈속 정도는 별것도 아니라고! 마셔! 얼른!”
내 속을 왜 네가 별거 아니라고 해? 술도 약한 새끼가 뭘 믿고 저리 처먹는지 모르겠다. 문영윤은 술에 취해 시뻘게진 얼굴로 내가 곧죽을놈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뒷담을 시작했다. 정확히는 당사자인 내가 앞에 있어서 앞담이 되겠지만.
“거너만 PK하고 다니던 미친놈이 하나 있는데 걔 때문에 우리 길드 뉴비가 죽었거든. 그래서 빡쳐서 싸우러 갔는데 비아냥거리면서 시비를 걸잖아! 지가 선빵 쳐 놓고!”
“그렇구나.”
“그래서 결투장 들어가서 PVP를 했는데 이놈이 핵을 쓰는 거 있지? 다들 핵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거 분명 핵이야! 그게 아니면 어떻게 선후딜 긴 광전사로 듀블을 이겨!”
“그렇구나.”
“게임에 현질 옴팡지게 하는 40대 아재일 게 분명해! 아니 뭐… 말하는 거 보면 젊은 놈 같은데 게임하는 거 보면 아재 같단 말이지. 걔는 몇 살일까?”
“그렇구나.”
“어떻게 뉴비를 죽일 수 있지? 고작 거너라느은 이유로오오! 너무한 거 아니야?! 뉴비는 아끼고 사랑해 주고 보듬어 줘야 한다고!”
“그렇구나.”
너한테는 뉴비가 미취학 아동으로 보이는구나. 컴퓨터를 다룰 줄 알고 거기서 게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면 어느 정도 머리통이 굵어진 상태일 텐데. 여전히 흐릿하게 웃으며 문영윤의 뒷담 아닌 앞담을 들었다.
쉬지도 않고 욕을 하는 걸 보니 나한테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한동안 숨겨야지. 현실에서 문영윤이랑 싸우면 열에 열은 내가 진다. 게임 속에서는 미친 듯이 날뛸 능력이 되었으나 현실의 나는 너무도 연약하고 허약했다. 이제 막 교복을 입은 중딩과 싸워도 내가 질 게 분명하다.
“근데 그게 그렇게 열불 낼 일이야?”
“뭐? 뉴우우비를 PK했는데! 당연히 화나지!”
“아니, PK당해도 손해 보는 건 딱히 없잖아.”
PK가 비매너 행위로 통하긴 하지만 이놈의 게임은 PK를 왜 만든 건가 싶을 정도로 손해도 이득도 없었다. 타 게임에서는 PK를 당하면 경험치가 줄어들고 아이템을 떨구는 등의 일이 있는 모양이지만 프리지아는 그런 게 없었다.
지금은 악명이라는 게 생겼지만 기존에는 기껏해야 장비 내구도가 줄어서 수리를 해야 하고 마을로 돌아가서 다시 필드에 나와야 한다는 번거로움 정도? 그러니까 마음 놓고 PK하고 다녔지. 만약 경험치나 아이템 중 하나라도 손해를 보는 시스템이었다면 자게에서 욕 좀 먹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뭐… 그렇긴 한데,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가 거너를 키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었다고! 얼마나 무서웠겠어!”
“어, 그래…. 일단 술병 내려놓자. 까딱하다가는 그걸로 사람 대가리 깨겠다.”
“울 뉴비 불땅해서 어뜩해! 겜 접으면 어떡하지?! 아직… 아직 망겜의 참맛을 보여 주지 못했는데…!”
망겜의 고인물들은 왜 뉴비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취급을 할까. 내가 진짜 뉴비였으면 기분 더러웠을 거 같은데. 네가 뭔데 날 애 취급하냐고 말이야. 문영윤은 한 손으로는 고기를 굽고 다른 손으로는 병나발을 부는 신기를 보여 주며 입으로는 쌍욕을 내뱉었다.
“내애애가 올해 가기 전에 무조건 그 새끼 잡아다 족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 도움이 필요해!”
“갑자기? 왜 그렇게 돼?”
“너 게임 잘한다며. 함께 프리지아 하지 않겠는가.”
“미친 건가?”
문영윤은 내가 곧죽을놈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아니, 애초에 프리지아를 할 거란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자 문영윤이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크으으으… 끅…. 너 게임, 끅, 잘한다고 했잖아. 프리지아 정도는 가뿐하지 않겠어?”
“어쩌라고… 아니, 그렇구나.”
“나 훈련하는 것 좀 도와줘어어어…. 내가, 끄윽, 장비는 싸아아악 다 지원해 줄게!”
“내 장비가 너보다 더… 아니, 그렇구나.”
“그 망할 놈을 이기는 거야! 아주 개쪽을 줘 버리는 거야!”
“투명 주제에… 아니, 그렇구나.”
술이 들어가면 남의 말을 제대로 안 듣는 놈이라 다행이다. 숨기려고 했는데 말하는 게 같잖으니까 본심이 불쑥 튀어나온다. 와중에 잘 익은 고기를 내 앞 접시에 올려놓는 문영윤을 보며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1평 무콤 쓰지 말고 적당히 상대해 줄걸…. 투명아, 내가 듀블 무콤 알아 와서 알려 줄게.
“그래서 있잖아아… 걔가 뭐랬냐면! 나한테 지능이 저어렴! 하다고! 했다고!”
“어, 그래. 목소리는 좀 낮추자. 가게에 민폐다.”
“나 별로 큰 소리! 안! 냈어!”
“어, 그래. X나 크니까 낮추자.”
“닉네임도 줠라… 웃겨! 곧죽을놈이래액! 완전 웃기지 않냐? 내가 걔 조만간 니익값 하게 해 준다!”
“어, 그래. 알았어. 기대하고 있을게.”
그러니까 병나발 좀 그만 불어라. 옆에 가게 직원이랑 손님들이 수군거리면서 쳐다보잖아. 쪽팔려 죽겠다. 참다못한 나는 녀석의 손에서 술병을 뺏으려다가 한 대 처맞고 나동그라졌다. 차디찬 바닥에 누워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는 왜 술만 먹으면 개가 되냐. 멍멍으르렁컹컹, 개새끼야. 좀 사람답게 살자.
6. 길드전
(1)
결국, 문영윤은 만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 꼬장을 부리며 헛소리를 늘어놓는 녀석을 뒤로하고 근처에 사는 동기에게 이 녀석 좀 주워가 달라고 연락을 넣었다. 처음에는 질색하던 동기는 내 끝없는 설득에 결국 삼겹살집에 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오늘부터 저 쓰레기 더미를 집으로 삼게 해 주고 싶은데.”
“이 날씨에 그러면 애 죽어….”
“그래서 널 불렀잖아.”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하자 동기가 한숨을 내쉬며 문영윤을 주워 갔다. 녀석의 등 뒤로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것을 마지막으로 나 또한 집으로 돌아왔다. 어으, 날씨 한번 춥다. 문영윤 무겁던데, 잘 챙겨 들어갔으려나.
“둘이 친하니까 괜찮겠지.”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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