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어허! 멍 때리다 죽어 놓고 어찌 그리 당당하단 말이냐! 좀 더 공손하게 부탁하지 못할까!
-옳소! 힐러님의 부활을 바란다면 공손하게 부탁드리시오!
베타 누나와 뚝배기장인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죽은 건 내 잘못이긴 한데… 지금 뭐라고요? 공손하게 부탁을 하라고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나는 마이크를 톡톡 두드리며 산뜻하게 말했다. 어디 한번 해 보시지.
“아, 몰라. 살리지 말든가. 누워서 클할 수 있겠네요. 안락하다, 안락해!”
-빨리 곧죽을놈 님 부활시키세요. 탱레기 죽게 생겼습니다.
-힝!
-다 큰 어른이 뭐 하는 겁니다. 어른스럽게 말하세요.
-힝입니다.
베타 누나와 한놈 님의 드립이 끝난 순간 부활이 들어왔다. 죽어 있느라 딜량이 뚝 떨어졌으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두들겨 패야 임계점 전에 깰 수 있을 것이다. 손가락에 불이 날 정도로 키보드를 두들기며 열심히 딜을 넣었다. 그러다 키보드 부서지겠다며 누군가가 웃는 소리가 들렸으나 한창 집중하고 있어 대답하진 못했다.
-어, 나도 죽음….
-죽었대요! 죽었대요! 거기서 실수했대요!
-나를 놀려?! 싸우자! 결투장으로 따라와!
-콜!
새삼 함께 플레이하는 파티원이 중요하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토당토않은 실수를 저지르고 전멸기에 쓸려 나가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트라이를 진행했을 때보다 수월하게 느껴졌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안정감이 남다르다고 해야 할까? 장비가 맞춰져 있지 않아 실수 한 번이 곧 전멸이나 다름없었으나 그것을 커버 치는 능력이 좋아 전멸까지 간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더불어 레이드가 진행되면 될수록 파티원들이 기믹에 점차 익숙해져, 후반에 가서는 실수 하나 없이 클리어할 수 있었다. 그 안락함에 순간 ‘이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서 공팟에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 공팟 가면… 사사게 가려나.”
마이크가 켜져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은 중얼거림이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파티원들이 의아해하며 왜 그러느냐고 물어 왔다.
-엥? 왜죠? 잘하고 계시면서.
-부탱? 요즘은 광전사가 대세죠!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지금처럼 손발 맞는 사람들이랑 하다가 공팟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 그러네…….
-나, 나는 공팟 안 갈래….
-…상상만 했는데 속 아프다. 우욱!
다들 이해한 모양이다. 실력이 부족해 사사게에 간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렇게 손발 잘 맞고 실력 좋은 파티원들과 함께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트롤 칠지 모를 공팟에 가게 된다면, 인성질로 사사게에 올라갈 것 같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상대방이 먼저 트롤 쳤다고 한들, 이스카리아의 절망은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규 레이드가 아닌가. 가장 많은 것이 초행팟이고 그다음이 미숙팟이다. 아직까지 제대로 파밍팟을 꾸린 사람은 소수였다. 미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플레이를 한다면, 과한 욕설로 계정 정지까지 당하지 않을까.
“꼭… 우리 꼭 공대 해요.”
이 꿀 같은 안락함에 길들여져 버린 이상, 공팟에 갈 수 없게 되었다. 차라리 게임을 접었으면 접었지 공팟은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아, 앵벌이 뛸 때 빼고. 그래도 골드는 벌어야지 않겠는가.
(4)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같이해요!
-고생하셨습니다. 즐프하세요!
공대 아닌 공대가 드디어 끝이 났다. 다들 흥이 올랐는지, 끝낼 시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가 먼저 가 봐야 한다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스카리아에 들어가게 되었다. 도대체 몇 판이나 돌았는지 모르겠다. 몰려드는 피로감에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패치노트의 채팅이 보였다.
[길드/패치노트: 저도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가볼게요]
[길드/패치노트: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 잠깐만요. 할 얘기 있는데….”
[친구 패치노트 님이 로그아웃하셨습니다.]
[길드원 패치노트 님이 로그아웃하셨습니다.]
이런, 음성 채팅을 먼저 나갔나? 한발 늦어 버렸네. 별일 아니니까 다음에 따로 얘기해야겠다. 음성 채팅을 끄고 파티를 탈퇴한 나는 다시금 공대에 대해 생각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딜러가 하나 정도는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트라이를 진행하는 도중 퇴사기원에게 넌지시 물어봤으나 그는 회사 일 때문에 공대에는 참여하지 못할 것 같다며 아쉽다는 말을 건네왔다. 그렇다는 건 길드원이 아닌 다른 사람을 데려와야 한다는 건데,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단 말이지.
“그 형 아직도 게임 하나?”
신화 길드에 있었을 때 언제나 빡딜 넣어 주던 형 하나가 생각났다. 내가 알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지인이었다. 현생이 바빠서 한동안 접속을 못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어떠려나. 나도 조별 과제다 뭐다로 발등에 불 떨어진 듯 달리다가 방학을 하고 나서야 겨우 돌아왔으니.
무엇보다 따로 받은 연락처가 없어 내 쪽에서 연락할 수단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하기야, 내가 좀 그런 면이 있긴 하다. 굳이 게임상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랑 연락처를 교환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나 할까. 지금 와서 이렇게 후회할 바에는 그냥 교환할 걸 그랬다. 사실 별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귀찮아서 그랬던 건데.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베타누나 푸딩형이랑 연락돼?]
[길드/베타: 김푸딩? 걔는 왜?]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그 형 딜 잘하잖아]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딜러 하나 더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길드/베타: 아 글킨 하지 내가 한번 물어볼게]
베타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부탁한다고 대답한 뒤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한창 열심히 달려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버로우를 타게 된다. 모아 둔 기운을 이스카리아에 전부 꼬라박은 느낌적 느낌.
“이제… 뭐 하지…?”
공팟은 가기 싫고. 이제 막 레이드가 끝난 찰나에 같이 가 줄 사람도 없고. 의미 없이 인벤토리를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냥 잠이나 자러 갈까. 결국, 할 것을 찾지 못한 내가 게임을 종료하려던 찰나였다.
[길드/베타: 김푸딩 지금 자나봄 연락 안됨]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당장 급한 거 아니니까 괜찮]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혹시 모르니까 다른 공대원도 함 생각해봅시다]
내 말에 베타 누나는 동의하는 듯싶더니 이내 채팅을 올리며 다른 제안을 건네왔다.
[길드/베타: 근데그냥 우리끼리 가도 되지 않음?]
[길드/베타: 연중님한테 뎀감기만 맡기고 전체 힐 나 혼자 보면서]
[길드/베타: 딜해달라 하면 딜부족할 일도 없을 거 같은데]
솔직히 저건 나도 동감하는 바다. 어쭙잖은 사람 하나 끼워 넣을 바에는 우리끼리 가는 게 낫긴 하지. 다만 이스카리아의 절망이 아무리 높은 난이도의 레이드 컨텐츠라 해도 기본적으로 메인 퀘스트에 연결되어 있는 던전이다. 유저들이 스피드런을 할 정도의 최종 컨텐츠까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나중에 하컨 난이도 나오면 스런하고 싶어서 그래]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우리도 스런작 할 때 됐잖아]
[길드/베타: 아]
[길드/베타: 하긴... 스런하려면 딜러 더 있어야 하긴 하지]
[길드/베타: 신화에선 스런 꿈에도 못 꿨는데 드뎌 할 수 있게 되나?!!]
어쩌겠어. 공대장이자 길드 마스터가 게임을 뒈지게 못했는걸. 대충 시간이 늦어 이만 자러 가겠다고 채팅을 보낸 나는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신화 얘기를 꺼내서 그런지 옛날 생각이 났다. 주로 떠오른 건 길드 마스터와 있었던 트러블이었다. 음, 다시 생각해도 겸사겸사 길드를 나오길 잘한 거 같아. 지금 길드가 훨씬 낫다.
***
[자유게시판] 패치노트 이스카리아의 절망 공략 방송 후기
작성자: 이불밖은위험해
(방송_영상_링크)
최근에 방송 켰다 하면 타겜만 하던 패치노트가 웬일로 파티원들이랑 같이 공략하는 방송을 킴 오올 뭐지? 하고 봤는데 한 명이 요즘 유명한 나한테명령하지마더라구요ㅋㅋㅋㅋ보니까 패치노트랑 연중무휴 빼면 다 그쪽 길드원인 것 같았음ㅇㅇ
조합은 아래와 같음
탱커 홀나
힐러 드루이드 비숍
딜러 배메 광전사 레인저
초반에 리딩할 때 목소리 장난 없더랔ㅋㅋㅋㅋㅋㅋㅋㅋ개섹시;; 형 절 가져요...;; 싫다고? 으응... 그래... 어쩔 수 없지...ㅎ
이스카리아 처음 나왔을 때 화상 뎀지로 고생고생개고생을 했는데 12시 방향 늪에 들어가면 디버프 해제된다는 새로운 사실이 발견됨.... 패치노트 왈 ‘다른 사람 방송 보고 알았다’ 파문, 정작 그 방송러 왈 ‘나는 그런 기믹 발견한 적 없다, 다 쟤가 알아낸 것’
솔탱 홀나도 잘 했긴 했는데 힐러 라인이 장난 없었음 무빙힐 지리고 오지고 레릿고 수준; 심지어 광역딜 타이밍 맞춰서 뎀감기 감는데 저렇게 딱딱 맞춰서 뎀감기 넣는 사람 처음 봄; 여윾시 우리의 매니저 연중무휴.... 그에게 휴가를 줘라!!!
이번 방송 보면서 좀 띠용했던 부분인데.... 패치노트 잘하다가 실수하더라 평소에 실수 1도 안해서 사람인가 싶었는데 오늘은 사람으로 느껴졌음
근데 문제는ㅋㅋㅋㅋㅋㅋㅋ하필 실수 타이밍이 거지같아서 전멸 날뻔 했다는거... 마이크 안 키고 있던 광전사가 쫄 제가 가져갈게요 하니까 말 더듬더니 실수함ㅋㅋㅋㅋㅋㅋㅋX나 이유는 모르겠는데 뻘하게 웃기더라... 형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 갑자기 웨글애....? 광전사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연중무휴 패치노트 욕하면서 니가 실수했으니까 니가 커버하라고 하는데 X나 웃겼ㅋㅋㅋㅋㅋㅋㅋㅋ맞아 형이 실수했으니까 형이 커버해야지^^; 와중에 찐텐으로 폭딜 꼬라박는 거 보고 개놀람 힐러진들 뎀감에 광힐 치면서 힐업하는 거 보는데 오늘 처음 같이한다는 사람들이 맞았나 의심; 원래 처음 하는 사람들이면 손발 안맞아서 삑내는데 얘네는ㅋㅋㅋㅋX나 한 1년은 같이 게임한 사람 같았던;; 걍 둘 다 사람이 아닌걸로;
딜러진은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 무빙이랑 콤보기 넣는 거 보면 한 게임 하는 건 맞는데 다른 사람들이 눈에 띄어서 딜러진은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음 유일하게 들어왔던게 광전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키보드 두드리는 소맄ㅋㅋㅋㅋㅋㅋX나컼ㅋㅋㅋㅋ타탙ㅌ탙타ㅏ타타타탙타타타타ㅏㅏ탂!!!!!!!!!111
패치노트 실수 때문에 아 딱봐도 이거 리트각이구나 했는데 딜러들 똥꼬빠지게 딜해서 어찌저찌 깨긴 함 저만한 딜량 뽑으려면 템도 좋ㅇ아야 하고 손가락 불나게 딜해야 하는데 이들은 그 모두를 갖췄다..^^ 마지막에 자템 떠서 개난리치는 광전사 좀 귀여웟음 ㅎ... 제가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ㅎ.ㅎㅎㅎ아 미안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줄래?ㅎㅎ
원트클한 후 파밍하겠다고 이스카리아만 주구장창 도는 거 넘 쩔었음... 왜냐고? 나는... 레이드를 저렇게 오래 돌 기력이 없어서... 이게 젊은 피인가 싶엇자너... 물론 본인은 아직 창창한 20대인데 그래도 저런 기력이 없다... 와중에 기믹 숙련도 와장창쿵창 올라서 판당 시간도 얼마 안 걸림ㅋㅋㅋㅋㅋ 부럽다... 나도 저런 사람들이랑 공대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세줄 요약함
1. 패치노트 안 하던 실수로 개트롤해서 판 터트릴 뻔함
2. 힐러들의 오지는 커버력
3. 그래서 이 사람들 공대를 짜겠다던데? 스런 가나요?
평소엔 내가 못하는 플레이 대리만족용으로 봤는데 이번 방송은 개꿀잼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모여서 방송 켜줬으면 하네요^^
(댓글 52)
- 다른 사람 방송 봤다 파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개웃기네 근데 진짜 안 하던 실수 왜 한거?
└ 명령이 마이크 켜서 실수한 듯; 둘이 사이 안좋은가
└ 암만 사이 안좋아도 마이크 하나 켰다고 트롤치냨ㅋㅋㅋㅋㅋ다른 사람도 아니고 패치노트가?ㅋㅋㅋㅋㅋㅋㅋㅋ
- 마지막 자템 반응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와아아앆ㅋㅋㅋㅋㅋㅋㅋㅋ쟤 곧죽이잖앜ㅋㅋㅋㅋㅋ이야 곧죽이가 저렇게 귀여운 애엿냨ㅋㅋㅋ핔케 하고 돌아다니던 패기 어디갔어!!!
└ ??? 저 광전사가 곧죽을놈임???
└ 들어보면 광전사한테 곧죽을놈님 하면서 부르는 거 있음 ㅇㅇ
└ 곧죽을놈이 ㄴㄱ?
- 얘도 이제 한물갔내ㅋㅋ
└ 머래 빡추삑추 색기가;
- 힐러들 커버치는 거 지리긴 하더라;; 비숍도 잘했는데 연중무휴 드루이드 오져버려;;; 첨 도는 던전에서 첨 보는 사람들이랑 뎀감 타이밍 탂탂타타탂 다 맞는 거 개쩔었음
- 지금 sns에 클립 떠서 돌아댕김ㅋㅋㅋㅋㅋㅋㅋ당황하는 패치노트하면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나 이거 봄ㅋㅋㅋㅋㅋ
- 다음에 또 모여서 방송해줫음 좋겠다22222
└ 3333
└ 44444444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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