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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22화 (22/88)

#22

-저 새… 아니, 저 님이 넋 놓다가 쫄 제때 못 잡아서 페이즈 넘어갔어요. 미쳤다, 미쳤다 하니까 진짜 미친 건가? 쫄 다 잡기 전까지 광딜 계속 들어오니까 최대한 빨리 쫄 처리해 주시고 베타 님은 저랑 같이 힐업 돌려 주세요. 뎀감은 제가 넣을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쫄을 잡는 게 나았나. 당황스러움에 멈칫한 손을 움직여 광역 콤보기를 사용했다. 하나씩 치는 것보다는 대미지가 낮지만 다수를 상대할 때는 이보다 좋은 게 없었다.

보스의 광역 딜이 들어오고, 전체 HP의 30%가 한 번에 날아갔다. 다르게 말하지면 힐 없이는 네 번, 크리티컬이 터졌을 경우에는 세 번 맞으면 죽는다는 뜻이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듯한 상황에 괜히 초조해져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오! 집중 안 하냐! 지금 빡딜 타이밍인 거 안 보여? 끝나고 나서 얘기해도 되잖아! 일하는 사람 멱살 잡아서 끌고 와 놓고 왜 딜을 못 하니! 딜러 기믹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딜을 못 하니이이!

-…조용히 좀 해 봐. 하고 있잖아.

…괜히 옆에 있던 내가 뼈 맞았다. 쉼 없이 나불거리는 연중무휴의 입은 그의 닉네임이 잘 어울린다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었다. 정말 연중무휴 나불거릴 것 같다. 물에 잠겨도 입만 동동 뜰 상이라고나 할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패치노트가 폭딜을 쏟아붓는 것으로 쫄이 정리되었다. 힐러들의 MP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며 나는 다시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사히 페이즈를 넘긴 건 좋았지만 이다음이 문제다. 힐러들의 MP가 없는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거 마나 괜찮을까요. 지금 힐러님들 마나 없는데.”

-난 좀 아슬아슬할 듯….

-틱택 빡빡하게 굴리면 어떻게든 될 거 같아요.

-죽고 싶지 않아요. 살려 주세요….

-무적기 쿨 도셨어요? 다음 탱버 때 무적기로 버티면 어떻게든 커버 칠 수 있을 거 같은데.

-조금 남았어요. 아마, 음… 탱버 전에는 가능할 거 같네요.

-최대한 살려 볼게요.

힐러들의 MP가 모두 닳기 전에 보스를 죽여야 한다. 무엇보다 이번에 페이즈가 꼬이면서 임계점이 너무 높아졌다. 자칫 전멸이 날 수도 있는 상황에 심장이 쫄깃해졌다. 방금 전 사태 때문인지 패치노트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기계도 아니고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법인데 본인의 실수가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빡딜해서 보스 녹이죠. 저 폭주 쿨 돌았어요.”

-…저도 버프기 쿨 돌았습니다.

타이밍 맞춰서 딜버 꽂으면 되겠다. 보스가 땅으로 내려온 순간 광전사 전용 버프 스킬인 폭주를 쓰며 콤보기를 사용했다. 내 캐릭터 주변으로 붉은 이펙트가 뜨자 뒤이어 패치노트가 압도적인 딜링을 보여 주었다. 타임 리미트가 있는 만큼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다들 집중하는 중인지 레이드의 BGM과 이펙트 소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다른 소리도 하나 들렸다. 키보드 연타하는 소리. 세게 눌러 봤자 키보드만 빨리 망가지고 스킬이 더 세지지는 않으나 습관적으로 키보드를 빡세게 두드렸다. 타다닥 하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누구신지는 모르겠는데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장난 아니시네요.

“…접니다.”

-곧죽 님이셨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곧죽 님이 승리의 주문을 외쳐 주세요!

익살스러운 뚝배기장인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바빠 뒤지겠는데 승리의 주문은 무슨 놈의 승리의 주문.

“지랄이 심하시네요. 듣기 힘드니까 이게 첫트이자 막트 합니다.”

-첫트이자! 막트 가신단다!

-거, 딜러들 빡딜 안 합니까?! 막트 한다잖아요! 딜러 충당 어떻게 하라구요!

-예? 이거 첫트 아닙니까? 이제 시작했는데 벌써 막트를 해요? 아이고, 주님…. 제가 이렇게 몇 놈 보냅니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이겨야 진정한 막트라고 하는 법이죠.

-공팟 한번 다녀오면 저런 말 안 나올 텐데-!

한번 말문이 트이자 쉼 없이 떠드는 이들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시하고 말 걸 그랬나.

(3)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승리의 주문으로 막트를 외쳤다고 클리어할 수 있었으면 개나 소나 다 깼을 것이다. 애초에 미신을 믿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가벼운 해프닝으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한 번 실패한 정도로 포기할 생각은 없다. 한 번이 안 되면 두 번, 두 번으로도 안 되면 세 번, 네 번 도전하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보스의 HP가 5% 밑으로 떨어지고 임계점이 90까지 차올랐다. 이제 정말 시간 싸움이었다.

초조함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스킬을 연타했다. 집중하는 몸이 점점 모니터 쪽으로 쏠리며 허리와 뒷목이 통증을 호소한다. 비루먹은 몸뚱어리야, 조금만 버텨 봐. 이거만 깨고. 이거 깨고 나면 스트레칭해 줄게.

빡딜을 한 보람이 있는지 보스의 HP가 1% 미만으로 떨어졌다. 여기서부터는 백분율로 표시가 되지 않는다. 현재 임계점은 99. 작두를 타도 이것보단 덜 쫄깃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스가 먼저 죽느냐, 전멸이 먼저 나느냐.

순간 화면이 검게 점멸했다.

설마 임계점이 먼저 찼나. 허탈한 마음에 온몸에서 힘을 푼 나는 찌뿌둥한 몸을 바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내쉬는데, 귓가에 우렁찬 비명이 들려왔다.

-야아아아! 이거 진짜! 야! 아아아악!

-야씨, 외쳐! 승리의 주문! 막트!

-크아아아아! 이걸 깨네, 이걸! 이렇게 깨네! 마지막에 딜 넣은 거 누구야?! 잘했어!

-허어어… 죽겠어요….

“…깼어요?”

-깼어요! 깼어!

-이게 다 승리의 주문 덕분이라니까요? 이거 내가 한 건 했다!

-그렇게 따지면 승리의 주문을 외친 곧죽이 덕분이죠! 해냈다, 해냈어! 곧죽을놈이 해냈어!

뒤늦게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화면에 떠 있는 영상을 확인했다. 대검을 치켜들며 승리의 포즈를 짓고 있는 나한테명령하지마의 캐릭터가 보였다. 그것은 클리어 영상이 맞았다.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비명을 지르며 모니터를 붙잡았다.

“으아아아아아! 원트클 미쳤다!”

-아따, 반응이 한 박자 느린 거 아뇨?

-그르게 말이여. 왜 그리 반응이 느려. 딴짓하고 있었는감?

-오올, 놀 줄 모르는 놈인가?

장난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뭐가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장난을 치고 싶으면 치시고 비아냥을 걸고 싶으면 거세요. 클리어 is 뭔들.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으나 이어진 상자 깡에서 2차 비명을 질렀다. 레이드 보상으로 나온 것이 광전사 전용 무기였다.

“으어아악! 잠깐! 이거! 얼마예요?! 얼마면 돼!”

-첫클에 자템 나오기 오졌죠? 진짜 부럽다….

-근데 곧죽을놈 님 강화석 사느라 돈 없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 뭘 돈을… 아, 여기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지, 참.

“현질이 왜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직 제 통장에는 총알이 넉넉하게 들어 있습니다. 골드? 현금으로 해결하겠어!”

한동안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까르르 웃는 이들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지금 자템이 떴는데 돈이 중요한가. 지금 못 얻으면 나중에는 더 얻기 힘들어질 거라고. 시세도 미친 듯이 날뛰겠지. 서랍 속에 고이 모셔 두었던 통장을 꺼내려는 그때, 나직이 웃는 패치노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웃어?

-저희도 괜찮아요. 자템 축하드려요.

-맞아요. 곧죽 님 고생하셨는데 자템이면 당연히 드려야죠.

“제가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푸하하학! 하학!

-…웃지 마.

그까짓 웃는 게 중요하겠습니까. 웃고 싶은 만큼 웃으십쇼. 쇤네는 괜찮습니다. 입찰을 누르자 다들 포기를 눌렀는지 장비 창으로 무기가 들어왔다. 겜창에게 있어 이보다 기쁜 일이 있을까. 감격에 가득 차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레이드 나가기를 눌렀다. 너무 고마워서 뭐라도 좋으니 갚고 싶어졌다.

“혹시…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기쁘긴 한데 그냥 받기에는 조금 죄송해서….”

-괜찮습니다.

-아, 그러면…. 공대 없으시면 저희랑 공대 하나 만드실래요? 레이드 나오면 같이 뛰고?

-어?

연중무휴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대? 안 그래도 공팟이 너무 팍팍해서 아는 사람 모아다 공대나 만들까 했는데 이렇게 선뜻 얘기를 꺼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한 분이 아닐 수 없다. 내 마음을 어찌 알고.

“저야 환영이죠.”

-와, 정말요? 그럼 저희 공대 하는 거로 알고 있어도 돼요?

-저도 끼워 주세요!

-여기 탱커가 있는데 말입니다.

-힐러도 준비됐답니다!

환호하는 길드원들의 모습에 연중무휴가 유쾌한 길드라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당연하죠. 나중에 단톡이나 하나 파서 얘기해요. 지금은 다음 판이나 돌립시다! 다들 장비 먹어야죠!

맞는 말이다. 어차피 이 멤버로 공대를 만들 거라면 손발도 맞출 겸 장비를 파밍하는 게 옳았다. 나는 연중무휴의 말에 긍정하며 순순히 다음 판을 돌렸다.

-자, 이제 다들 기믹은 대충 아셨을 테니까 특별한 일 없으면 리딩 안 하고 빡집중할게요. 오늘 아주 그냥 이스카리아를 털어 버립시다!

-좋습니다! 저 깡패 놈을 조집시다!

-아따, 이제 라면 먹으면서도 클리어할 수 있어요.

한 방에 클리어했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흥분한 파티원들을 보며 작게 웃음 지은 나는 레이드를 진행하는 내내 공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지금 있는 게 탱커 하나, 힐러 둘, 딜러 셋이다. 탱커는 구하기 힘드니 둘째 치고, 딜러 하나만 더 충당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공대가 8인이니까.

그러고 보니 그 형은 지금도 게임하나. 그 형도 딜 잘 넣는데.

“어….”

-곧죽이 죽었다고 합니다. 글 내려 주세요.

-혼자 있고 싶으니 다들 로그아웃해 주세요.

“이 양반들이….”

이제 겨우 한 번 클리어한 미숙한 레이드에서 너무 과하게 다른 생각을 했나 보다. 아차 하는 사이 피해야 할 장판을 피하지 못해 그 자리에서 드러눕게 된 나는 쪽팔림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니,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크, 크흠.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빨리 부활이나 땡겨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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