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광역기를 연달아 사용하며 쫄의 어그로를 가져온 뒤 연속기를 사용해 하나씩 쫄을 잡아 갔다. 총 세 마리가 되는 쫄한테 얻어맞아 피통이 출렁이는 걸 보는데 이렇게 짜릿할 수가 없다. 힐러가 한 번이라도 실수하는 순간 죽는 건 내가 될 것이다.
다행인 것은 예전 공대 때부터 이런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베타 누나가 내 힐업을 확실히 해 줬다는 것 정도. 쫄을 다 잡자마자 부탱을 살린 힐러가 빠르게 부탱의 피통을 채웠다. 아슬아슬하게 깰 것도 같은데 확신할 수 없어서 슬프다.
[파티/주님한놈갑니다: 아...]
탱커의 교대가 필요한 시점에서 부탱이 또 드러누웠다. 저 새끼 보스 HP가 40% 남을 때까지 벌써 5번이나 누웠다. 슬슬 혈압 오르는데. 멘탱이 죽는 순간 전멸은 불 보듯 뻔해 한놈 님이 어그로를 내게 돌렸다.
부탱이 없으니 그나마 딜러 중에서 피통이 제일 큰 나한테 어그로를 옮긴 것이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출렁이는 피통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문 나는 연달아 콤보를 이으며 어그로를 확실하게 잡았고, 그런 내 힐업을 하는 베타 누나는 평소 여유롭게 치던 채팅을 일제히 멈춘 채 힐업에만 집중했다.
“트롤도 저런 트롤이…. 게임 거지같이 하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어글 가져가세요]
부탱이 살아난 걸 확인한 순간 채팅을 쳤으나 녀석은 어그로를 가져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딜만 넣었다. 죽어 있느라 낮아진 DPS를 올리겠다는 심보에 짜증이 났다. 누가 보면 딜러인 줄 알겠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아니 어글]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가졎ㅈ가라공ㅇㅅ]
이어서 탱교를 한 후의 부탱에게 떨어지는 보스의 탱커 버스터가 어글자인 내게 들어왔다. 아무리 장비 세팅을 잘해 놨어도 엄연히 딜러이기 때문에 보스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내 캐릭터의 피통이 그 자리에서 녹으며 죽었다. 아무리 장비가 좋아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빡침에 샷건을 내리친 나는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부활을 받았다. 레이드 이름값 하네. 발할라의 분노가 아니라 딜레기의 분노다.
“아, X발.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개ㅒ빡]
[길드/뚝배기장인: ?? 뭔일이에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개트롤 있어요.]
그 한마디에 모든 상황을 파악한 뚝배기장인이 트롤의 닉네임을 물어봤고 나는 열심히 기믹을 피하며 닉네임을 알려 주었다. 연속으로 세 번 들어오는 광역기에 힐러만 바빠졌다.
[길드/뚝배기장인: 앜ㅋㅋㅋㅋㅋㅋ이 새끼 사사게 스타잖아?]
[길드/뚝배기장인: 존12나 못해서 사사게 단골임ㅋ.. 왜 하필 그딴애 잇는 파티 들어갔어요..]
[길드/베타: 몰ㄹ삿음]
[길드/뚝배기장인: 베타님 오타내는거봨ㅋㅋㅋㅋ탱커가 지12랄하면 개바쁠텐데 채팅 치는 것만 해도 대단;]
사사게 스타였구나. 어쩐지 너무 못하더라. 전멸하는 순간 바로 파티를 쫑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딜을 넣는데 돌연 잘하고 있던 죽으러온놈이 채팅을 쳤다.
[파티/죽으러온놈: 대체 몇 번을 뒤지는거?]
[파티/죽으러온놈: 마나 낭비 탱봘 ㄴㄴ]
[파티/죽으러온놈: 명령님이 부탱 좀요]
쟤가 탱 보는 것보다 내가 보는 게 낫다는 건가. 잠시 뜸을 들이며 고민한 나는 이내 채팅을 쳤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ㅇㅋ]
내가 생각해도 쟤보다 내가 더 잘할 거 같았다. 부탱을 살리지 않고 진행하는데 보스의 HP가 부탱이 살아 있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닳기 시작했다. 심지어 부활에 들어가는 마나를 아낄 수 있어 힐러들이 딜할 여유까지 생겼다. 이게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
허허롭게 웃던 나는 무빙으로 기믹을 피하며 빡세게 딜을 넣는 죽으러온놈의 모습에 작게 감탄했다. 저 사람 되게 잘하네.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부탱을 눕힌 채 클리어를 마치고 아이템 분배에 넘어갔다.
[파티/죽으러온놈: 카르마 나갈 때까지 버팀]
[파티/죽으러온놈: 그렇게 했으면서 템이 먹고 싶어요? 놀부도 님보다 양심 있을 듯]
단호한 죽으러온놈의 말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나한테 말할 때랑 완전 딴판인걸? 하기야 누워서 깬 유저한테 줄 바에야 다른 사람한테 넘기는 게 낫긴 하지. 그러나 저 탱커가 그걸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파티/카르마: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제가 죽고 싶어서 죽었나요?;]
[파티/카르마: 부활도 안 해줬으면서;]
[파티/죽으러온놈: 님아 님이 몇 번 죽었다고 생각해요?]
[파티/죽으러온놈: 부활을 넣어주면 뭐해 계속 뒤지는데]
[파티/죽으러온놈: 끝물 레이드에서 이렇게 뒤지는 것도 대단;]
[파티/죽으러온놈: 아까 살려줬을 때 뭐했는지 기억 안나요?]
[파티/죽으러온놈: 님이 뒤져서 딜러가 어글 대신 가져갔는데 딜하겠다고 탱버를 딜러한테 넘겼잖아요ㅎㅎ;]
[파티/카르마: 탱번줄 몰랐어요;]
[파티/죽으러온놈: ㅋㅋㅋㅋㅋㅋㅋㅋㅋ본인 기믹도 모르는게 자랑인가? 기믹도 모르는데 파밍팟을 왜 옴? 초행이나 미숙팟을 가지]
그렇긴 하지. 부탱은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신고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파티를 탈퇴했다. 부탱이 사라지자마자 죽으러온놈은 나를 비롯한 탱힐들에게 고생했다고, 괜히 이상한 놈 때문에 욕봤다면서 나온 아이템을 모두 길드원들에게 양보했다. 자연스럽게 딜러 장비를 받게 된 나는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딜러 장비 님이 가지세요]
[길드/죽으러온놈: 저 장비 있어서 괜찮아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그래도 가져가서 팔기라도 해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본캐 있으신 거 같은데 팔아서 본캐한테 줘요]
내 단호한 말에 죽으러온놈은 한동안 채팅을 올리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트롤 짓을 한 부탱에 대한 분노가 채팅 창을 채웠다.
[길드/베타: 탱색ㄱ히 존12나 못해]
[길드/베타: 한놈님 멘탱 본 건 ㄹㅇ 신의 한수엿다;;;]
[길드/주님한놈갑니다: 딜러한테 탱버 맡기는 탱을 보고 오늘도 인류애를 상실했습니다.]
[길드/퇴사기원: ㅋㅋㅋㅋㅋㅋㅋㅋㅋ다들 고생 많았어요 하필 이상한놈을 만나서ㅠㅠ]
하나둘 길드원들이 나타나 고생 많았다며 위로의 말을 건네왔다. 고생이 많기는 엄청 많았다. 특히 힐러 라인. 아 이제 죽겠구나, 싶을 때마다 타이밍 맞춰 들어오는 힐에 속으로 믿지도 않는 신을 부르짖었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피통이 어찌나 서늘하던지. 제 역할도 제대로 못해 딜러에게 어그로를 떠넘긴 부탱을 떠올리니 이가 절로 갈렸다.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상이라도 찍어둘 걸 그랬네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아까 걔 나갈 때 부들거리는 거 보니까 자게나 사사게에 글 올릴 거 같던데.]
[길드/베타: ㅋㅋㅋㅋㅋㅋㅋㅋㅋ올리라고 해요 그따위로 해놓고 염ㅁ병첨병ㅋㅋㅌㅋㅋ]
[길드/뚝배기장인: 양자 말 다 들어봐야 한다곸ㅋㅋㅋㅋㅋ걔가 백날 글 올려도 거기 있던 파티원들 싹다 등판해서 욕하면 백퍼 역풍이에요 맘 놓고 겜하셔도 될 듯]
만약 정말 부탱이 게시글을 올리게 된다면, 죽으러온놈이 등판해서 탈탈 털어 버리지 않을까. 여태껏 컨셉 때문에 몰라봤지만 막상 입 터는 거 보니까 성격 장난 없던데. 평소 자게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부탱이 죽으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이 나였으니 이번 일은 확인해 볼 생각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써 놨으면 조져 놔야지.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왜 아무도 죽놈님 딜 오지는 얘기는 안해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저거 본캐 분명 있다니까]
[길드/베타: ㄹㅇ 딜 엄청 잘하더라]
[길드/베타: 본캐 뭐에요??]
[길드/베타: 아 닉넴 까는 건 좀 그럴 수도 있으니까 직업만 알려줌 안대려나....]
아, 비밀이면 말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본캐로 다른 길드를 가입해 뒀으면 종종 문제 되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 길드는 신생 길드라 마음만 맞으면 딱히 가입에 제한이 없는 반면, 조금 크다 싶은 길드들은 이중 가입을 못 하게 제지를 가하고는 했다. 전에 있던 길드도 그랬고 말이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불편하면 말씀 안하셔도 되는데]
[길드/죽으러온놈: 곧죽님이 저한테 관심을 주시니 너무 기쁘네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ㅋㅋㅁ12ㅊ]
이 양반, 이런 관종적 모먼트 보일 때마다 웃기단 말이야. 현웃이 터져 끅끅거리며 웃던 나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걸친 채 채팅을 쳤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그렇게까지 궁금하진 않네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계속 비밀로 하시면 될 듯]
[길드/죽으러온놈: ㅠㅠ]
죽으러온놈은 애정이 식은 거냐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였으나 나는 그것을 한눈으로 보고 흘리며 다시 파티원을 모집했다. 부디 이번에는 전과 같은 트롤 사건만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딜러지 탱커가 아니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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