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귓속말/죽으러온놈>나한테명령하지마: 님 드리려고 가져온 건데요ㅠ]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죽으러온놈: 경매장에 팔면 수십억 그냥 찍을 텐데 그걸 제가 어떻게 받아요... 그냥 팔아서 님 장비 맞추세요]
아무리 비주류 직업이라 해도 광전사 유저가 아예 없는 게 아니다. 효율이 쓰레기인 대신 간지 하나만큼은 먹고 들어가는 직업이라 은근히 키우는 유저들이 있었다. 특히 온갖 직업에 통달한 고인물들이 본캐 파밍이 끝나면 간지용으로 광전사를 키웠다. 저렇게 옵션까지 모두 맞춰 둔 장비라면 구매하려는 유저가 없진 않을 거다.
무엇보다 내가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저런 걸 받아. 쓰레기 짓을 하긴 했지만, 이래 봬도 나는 양심이 뭔지 아는 사람이다. 죽으러온놈은 계속해서 내게 거래를 걸어왔고 나는 그것을 모두 거절하며 파티 창이나 확인했다. 당장 고스펙의 장비는 못 구해도 몸에 배어 있는 컨트롤이 있으니 몇몇 레이드는 돌 수 있겠지.
거래가 막히자 연신 모션을 사용하며 진상 부리는 죽으러온놈을 반쯤 무시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양심이고 뭐고 그냥 받고 싶은데 미묘하게 남아 있는 양심이 그러다가 코 꿰인다며 격렬하게 반대를 표했다. 그때, 길드 채팅에 또다시 불이 났다.
[길드/베타: 죽으러온놈님이 전재산 갈아서 얻어온 장비 안 받아줬다던데 실화인가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 먼솔?]
[길드/베타: 우리 죽으러온놈님이 사랑해 마지않는 곧죽을놈님한테 주려고 전재산을 털어서 광전사 장비를 맞췄는데 그걸 안 받아줬다면서요?ㅠㅠㅠㅠ]
[길드/퇴사기원: 곧죽님이 잘못했네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인성;;]
[길드/뚝배기장인: 아아ㅏㅏ아니 어떻게 님한테 주려고 전!!! 저어ㅓ언!!재산을!! 털어서 장비를 맞춰왔는데 그걸!! 안받아줄수가!!!!!!]
[길드/뚝배기장인: 나쁜남자 곧죽을놈!!!!!!11 죽놈님이 불쌍하지도 않나욧?!?!!]
[길드/베타: 우리 죽으러온놈님 어떠캐요ㅠㅠㅠㅠ곧죽을놈이 핔케도 그만두는 바람에 죽지도 못하고ㅠㅠㅠㅠ장비도 성심성의껏 만들어왔는데 빠꾸먹고ㅠㅠㅠㅠㅠㅠ]
전 재산 털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 애초에 남한테 주려고 전 재산을 터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 본인 장비 만들려는 것도 아니고. 구라 아니야? 어이가 없어서 채팅을 치려는데 죽으러온놈이 먼저 선수를 쳤다.
[길드/죽으러온놈: 제 마음인데,,,,,너무 슬프네요,,,,,,,,,,,,쌈짓돈 꼬깃꼬깃 모아서,,,구매한 장비인데,,,,,]
[길드/베타: 앜ㅋㅋㅋ이곸ㅋㅋㅋㅋ아아ㅏㅏㅏ이고!!!! 옵션도 다 맞춰줬다던데!!!!!]
[길드/죽으러온놈: 공속 위주로 장비를 맞추시는 것 같길래,,,,머,,,공속 소켓 좀 박고,,,강화는 12강 정도,,,땡겼죠,,,,,]
[길드/죽으러온놈: 이걸로는,,,제 마음을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거 같아서,,,각성까지 찍엇내요,,,,^^]
[길드/뚝배기장인: 미첫다;;; 완전 최종 장비 풀셋 아닌???]
[길드/뚝배기장인: 님 진짜 정성 장난 없네요 곧죽님에서 저로 갈아타실? 잘해드릴게 ㅎ]
[길드/죽으러온놈: 제가 어찌,,,,곧죽을놈님을,,,배신하겟읍닉하,,,,,제 영혼은,,,저분께 저당 잡혓는걸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저건 또 뭔 컨셉이야 하나만 해요;]
[길드/죽으러온놈: 제가,,,원래대로,,,돌아오길 바라신다면,,,,,,거래를 받윾세요,,,,,,^^]
남이 보면 내가 삥이라도 뜯은 줄 알겠다. 길드 채팅에 도배된 주접들을 보며 한숨을 눌러 참은 나는 결국 죽으러온놈이 주는 장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완전 주객전도 아닌가. 생색을 내는 건 장비를 주는 쪽이어야 하는데 왜 받는 입장인 내가 생색을 내는 것처럼 된 거지. 진짜 쓰레기가 된 기분이잖아.
떨리는 손으로 장비 창에 들어온 장비들을 모두 착용하자 내 캐릭터가 강화 이펙트로 빛이 났다. 이게 12강의 힘인가. 본캐보다 스펙이 좋아진 부캐를 보니 기분이 묘하다. 난 똥손이라 10강도 겨우겨우 찍었는데 어떻게 12강 풀셋을 만들었담. 매물도 없을 텐데.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원하는게뭐예요...]
[길드/베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받음? 한방에 풀셋을 받은 기분이 어떠신가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개째지네요... ㅋ... 양심도 좀 찢어진 거 같고요;]
[길드/죽으러온놈: 잘 어울리십니다]
[길드/뚝배기장인: 잘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뚝배기 찢어버리기 전에 그만 웃어요ㅠ]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그래서 저한테 원하는게 뭐예요... 비싼 선물 받으면 탈난단 말이에요...]
[길드/죽으러온놈: 전에 말씀드린 적 있는데요]
전에 말한 적이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의문을 표하자 곧바로 죽으러온놈의 채팅이 이어졌다.
[길드/죽으러온놈: 그건 바로 님의 사랑...♥]
“아이고야.”
이마를 탁, 치며 앓는 소리를 절로 내었다. 그놈의 사랑. 저런 드립은 왜 치는 거야, 대체.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ㅋㅋㅋㅋㅋㅋㅅ1ㅂ 틈만 나면 그소리;;]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고작 그거에요....? 돈을 이렇게 쓰고...? 고작....?]
[길드/죽으러온놈: 고작이라뇨 어떻게 님의 사랑을 고작으로 치부할 수 있어요;]
[길드/죽으러온놈: 당장 님의 사랑한테 사과하세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ㅅ12ㅂ.... 제 사랑을... 고작으로... 치부해서.... 거 참... 죄송합니다...]
[길드/베타: 싴ㅋㅋㅋㅋㅋ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사과했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뚝배기장인: ㅋㅋㅋㅋㅋㅋㅋㅋㅋ스샼ㅅㅋㅋㅋㅋㅋㅋㅋ직엇어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황금만능주의라고... 원래 돈 주는 사람 말은... 잘 듣는 거예요..ㅎ]
저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라고.
4. 업데이트
(1)
죽으러온놈 덕분에 장비도 제대로 맞췄겠다, 이제 레이드를 뛸 때가 됐다. 발할라의 분노는 죽으러온놈이 준 장비가 나오는 던전이자 내가 게임을 접기 직전에 막 나왔길래 잠깐 플레이해 본 레이드였다. 즉, 다른 사람에 비해 숙련도가 부족한 편이다. 공략 영상도 보고 곧죽을놈으로 클리어까지 해 본 레이드긴 하지만 그때 당시에도 아슬아슬했던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거의 찍먹 수준이었단 말이야.
발할라 풀세트를 가지고 있음에도 레이드를 뛰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복귀 후 PK하겠다고 돌아다니느라 레이드에 대한 감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손에 익은 게 있다 보니 컨트롤이 박살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음 업데이트를 대비해서 미리 감을 되찾아야 했다. 겸사겸사 서브 장비도 얻을 수 있으면 좋고.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근데 우리 공팟가나요?]
[길드/베타: 장비가 되면 우리끼리 가도 되긴 한데...]
[길드/베타: 어제 강화 하다가 장비가 터져서 공팟 가야 합니다...^^]
[길드/베타: 아시다시피 힐러 장비가 구리면 내가 죽는 게 아니라 님들이 죽어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왜 장비를 터트려서 절 힘들게 하시나요.]
[길드/베타: 누가 터질 줄 알았남? 히히!]
공팟 지옥인데. 어느 게임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끼리 손발을 맞춘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게 난이도가 높은 던전이라면 더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며 파티를 모집했다. 진짜 다음 업데이트 전에 꼭 공대 만들어야지. 안 되면 늦게라도 만들 거다.
돌리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금세 꽉 찬 파티원을 보며 준비 확인을 마친 후, 곧바로 발할라의 분노에 들어갔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맵을 보자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 이거 진짜 긴장되네.
[파티/주님한놈갑니다: 제가 메인 서겠습니다.]
메인 탱커 조율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멘탱인 한놈 님이 앞장서서 보스의 어그로를 끌고, 딜러들이 동시에 딜을 넣었다. 다들 장비를 어느 정도 파밍한 모양인지 빠르게 닳는 보스의 피통을 보며 긴장했다. 보스의 HP가 10% 깎이자 페이즈가 넘어가며 광역 대미지가 들어왔다. 힐러들이 빠르게 힐업을 하는 동안, 딜러들은 이후 추가로 들어올 기믹에 대비해 산개하며 딜을 쏟아부었다.
광전사는 근딜이었기에 보스의 공격 범위 안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딜을 넣었다. 한창 열을 올리던 그때, 보스의 스킬 시전 바가 눈에 들어왔다. 아, 저거 넉백이구나. 본능적으로 넉백 방지 스킬을 사용해 기믹을 처리하자 내 옆에 있던 부탱이 자유롭게 저 멀리 날아갔다. 실소가 절로 나온다. 뭐랄까, 잘 있다가 시야에서 훅 하고 사라지는 부탱의 모습이 꽤 웃겼다.
[파티/카르마: 아; 죄송합니다]
[파티/베타: 제가 부활 땡길게요]
본능적으로 이 판은 글렀다는 것을 느꼈다.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죽는 사람이 생겨. 초행이나 미숙 파티도 아니고 끝물 파밍 파티인데. 이건 글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딜러들의 딜이 워낙 좋아 보스의 HP를 깎는 속도가 빨랐다는 것이었다.
딜러들이 목숨 갈아서 딜하면 어찌어찌 깨긴 깰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쫄이 나오는 순간 녹아 버리는 부탱을 보며 짜게 식은 미소를 지은 나는 빠르게 타자를 쳤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제가 어그로 잡을게요 힐업좀요]
[파티/닐리리맘보: 부활으ㅡㄴ]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부활 땡기다 다 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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