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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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 누나는 연신 마음에 든다며 죽으러온놈을 어떻게든 길드에 영입시키기 위해 온갖 사탕발림을 계속했고, 죽으러온놈은 한결같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너무 단호한 거절에 내가 다 민망해졌다.
[전체/베타: 어떻게하면 우리 길드 들어올래요ㅠㅠㅠㅠ??]
[전체/죽으러온놈: 어떤 거든 들어주실 수 있는 건가요?]
[전체/베타: 당근빠따죠!!!!! 아 근데 너무 말도 안 되는 건 안됨ㅎㅎ]
죽으러온놈은 베타 누나의 채팅에 한동안 말이 없더니 캐릭터를 움직여 내 캐릭터 옆에 조신하게 앉고는 모션을 날렸다.
[죽으러온놈 님이 곧죽을놈 님에게 애정을 표합니다.]
[전체/죽으러온놈: 곧죽을놈님이 PK를 계속 해주신다면 들어갈게요]
[전체/베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빨리 가서 핔케 하고 와라]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ㅇㅖ?]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저 핔케 비활성화 해놨는데요]
레벨링 중에 방해받기 싫어서 설정해 둔 거라 나중에 풀까 생각하긴 했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지. 무엇보다 이제 막 PK 관련 시스템이 정착한지라 언제 어떻게 또 바뀔지 몰라서 지금은 존버하는 게 제일 나았다.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저 잊제 손 털었다니까요?]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한대도 지12랄 안 한대도 지12랄..]
[전체/죽으러온놈: 그럼 이건 어떤가요?]
[전체/죽으러온놈: 제가 곧죽을놈님 전용 타살 거너가 되겠습니다]
[전체/죽으러온놈: 빡칠 때마다 죽이시면 됩니다]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진짜 미1친23놈이신가 경찰아저씨여기예요;;;]
눈앞에 죽으러온놈이 있으면 뒤통수 한 번 거나하게 후려치고 싶다. 왜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만드는 거야. 설마 그건가? 마조히스트?
[전체/베타: 그냥 해주면 안돼? 개꿀잼인뎈ㅋㅋㅋㅋㅋㅋ]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악명 쌓이잖아]
[전체/베타: 고오오오작 악명에 사리는 거야?!! 너 그런 곧죽이엇어?!!!!]
[전체/뚝배기장인: ㅋㅋㅋㅋㅋㅋㅋㅋㅋ곧죽님 야마도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닼ㅋㅋㅋㅋ]
[전체/퇴사기원: ㄹㅇㅋㅋㅋㅋ죽으러온놈님 진짜 길드 들어오심 안 돼요??ㅠㅠㅠ놈놈케미 보고 싶은데ㅠㅠㅠ]
놈놈 케미는 또 뭐야. 곧죽을놈이랑 죽으러온놈이라서 놈놈인 거야? 둘을 아예 콤비로 보고 있다고 못을 박는 듯한 채팅에 헛웃음을 흘렸다. 뭐라 말로 설명은 못 하겠다만, 난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수다 삼매경에 빠진 이들을 뒤로하고 텔레포트를 쓰기 위해 창을 열었다. 그러나 텔레포트가 막 시전되려던 그 순간, 갑자기 거래 창이 뜨더니 텔레포트가 취소되었다. 뭔가 하고 확인을 하자 내 캐릭터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죽으러온놈이 보였다.
[전체/죽으러온놈: 어딜도망가]
[죽으러온놈 님이 나한테명령하지마 님을 향해 수줍어합니다.]
[전체/뚝배기장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베타: 인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치겠네.”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님 너무 질척여서 부담스러워요]
[전체/죽으러온놈: 님을 향한 사랑이에요]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로그아웃하겠습니다 모두 자리를 비켜주세요]
[전체/죽으러온놈: 잘ㄹ못했습ㅂ니다]
[전체/죽으러온놈: 안그럴게요ㅛ]
[죽으러온놈 님이 나한테명령하지마 님을 향해 엉엉 웁니다.]
진짜 웃기긴 하다. 딱 봐도 컨셉 잡고 치는 드립이라 화도 안 나고. 전에는 좀 짜증 났는데 그러려니 하게 된다고 할까. 즐기자고 하는 게임에 과몰입하는 건 거너 PK 건이면 충분하다.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만렙 찍어서 공대 짤 건데 같이 하실래요?]
[전체/죽으러온놈: 공대요?]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조만간 신규 레이드 뜰 게 뻔하니까 미리 공대 짜두려고요]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막 만렙이라 파밍도 해야 하고]
나는 죽으러온놈의 부탁을 거절했지만, 막상 그가 내 제안을 거절하면 좀 민망할 것 같긴 했다. 콧잔등을 긁적이며 죽으러온놈의 채팅을 기다렸다. 솔직히 여기서 똑같은 얘기가 더 나오는 건 바라지 않았다. 시간 아깝단 말이야. 그냥 초대할 거면 초대하고 말 거면 말고 끝냈으면 좋겠어. 당장 파밍 하러 노가다 뛰어야 한다고.
죽으러온놈의 캐릭터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거절하려는 걸까. 하긴, 베타 누나가 제안했을 때부터 거절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내가 전체 채팅에서 죽으러온놈에게 공대 얘기를 꺼낸 순간부터 길원들은 흥미진진하다며 길드 채팅에서 따로 수다를 떨었다. 대화 창은 계속 스크롤이 올라갔지만 막상 당사자가 말이 없어 나는 점점 초조해지기만 했다. 무슨 답변이 돌아올까,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데 죽으러온놈의 채팅이 올라왔다.
[전체/죽으러온놈: 그럼 조금 수줍지만....잘부탁드립니다]
[죽으러온놈 님이 폭주기관차 길드에 가입했습니다.]
[길드/베타: 곧죽을놈의 마이펫 죽으러온놈님이 오셨습니다~~~!!다들 환영의 밖수@@@]
[길드/죽으러온놈: 안녕하세요 죽으러 왔습니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마이펫 뭔데;;;]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어서 오세요, 죽으러온놈님.]
[길드/퇴사기원: 와 우리 길드에 자게 유명인이 둘이나 있엌ㅋㅋㅋㅋ어서오세욬ㅋㅋㅋㅋ환영합니다!!]
[길드/죽으러온놈: 길드 이름이 마음에 드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길드 분위기는 원만하게 흘러갔다. 죽으러온놈은 나한테 난리 칠 때를 빼면 꽤 점잖은 편이었고 길드원들도 하나같이 사교성이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친해지는 속도는 빨랐다. 순식간에 반모를 하자며 떠드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레이드 파티 창을 켰다.
이제 막 만렙을 찍어 갈 수 있는 레이드가 한정되어 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장비 때문에. 현재 95렙 때 몬스터 잡다가 나온 장비를 입고 있다 보니, 상위 레이드는 뛸 수 없었다. 곧죽을놈 계정에 있는 장비는 옵션 올리겠다고 귀속으로 만들어 놔서 가져오지도 못하고 말이다.
어딜 가야 하나. 딱히 쓸 일이 없어 묵혀 두고 있던 듀얼 모니터를 켜고 한동안 가지 않아 가물가물한 레이드 공략 영상을 확인했다. 현재 내가 보고 있는 레이드의 이름은 ‘발할라의 분노’로 최종 난이도의 레이드였다. 분위기는 중세풍인데, 스토리는 ‘파라오의 분노’ 짝퉁으로 보인다. 그렇게 할 게 없었나. 얘들도 진짜 가지가지 한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발할라 가고싶은데 저 못가겠죠?]
[길드/주님한놈갑니다: 탱 서드릴까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어... 저 지금 장비 1도 없는데 괜찮으세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물몸에 딜도 안 나올텐데]
[길드/죽으러온놈: 장비 뭐 필요하세요?]
죽으러온놈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뭐가 필요하냐니, 굳이 따지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방금 만렙 찍어서 지금 장비가 하나도 없어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곧죽계정에 있는 장비는 귀속템이라 못 가져오고]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걍 제작템 둘둘해야 하나?]
[길드/뚝배기장인: 어... 광전이면 제작 물량 없을걸요... 너무 비주류라]
[길드/뚝배기장인: 강화까지 생각하신다면 걍 던전 장비 구매하시는게..?]
그건 그렇지. 광전사는 관짝에 들어간 지 한참 된 직업이라 제작 아이템은 물량이 별로 없다. 던전 드롭 장비는 상대적으로 많긴 한데, 가격에 쓸데없는 거품이 끼어 있는 상태라 골드가 아까웠다. 강화석 구매할 골드를 남겨 두고 사면… 한두 파츠 맞출 수 있으려나?
[길드/죽으러온놈: 이때를 기다렸습니다]
예? 깜짝 놀라 모니터를 바라보자 죽으러온놈으로부터 거래 신청이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게 뭔가 싶어 거래 내역을 보던 나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광전사 장비들에 입을 떡 벌렸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아니... 이거 장비...]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사신 거예요???? 언제????]
[길드/죽으러온놈: 님을 향한 제 마음이에요]
[죽으러온놈 님이 나한테명령하지마 님에게 애정을 표합니다.]
너무 놀라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장비의 옵션을 확인했다. 본캐인 곧죽을놈의 것보다 뛰어난 스펙의 장비들을 보니 머리가 다 아찔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비주류 직업군이라지만 장터 게시판에서 구하려고 하면 수억 골드는 가볍게 깨질 텐데, 이걸 나한테 그냥 준다고? 이게 제 마음이라고?
심지어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작 장비가 아니라 던전 뺑이를 돌아야 얻을 수 있는 던전 장비였다. 현재 최종 레이드인 발할라의 분노 풀세트. 서브용 장비를 파밍하려는 게 아닌 이상 레이드를 뛸 필요도 없는, 말 그대로 최종 장비였다.
그 때문에 쉽사리 수락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본캐에서 긁어 오긴 했다지만 PK를 하며 풀어 댄 골드 양도 만만치 않다 보니 가진 걸 다 털어 줘도 죽으러온놈이 준 장비를 구매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길드 채팅을 치려던 나는 이내 생각을 바꾸고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죽으러온놈: 제가 받을 건 아닌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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