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머리가 얼얼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곧장 브라우저를 켜 스트리머의 방송 페이지에 들어가 닉네임을 확인했다.
[패치노트]
“…진짜네?”
동일 인물이었네? 닉네임을 안 봐서 이제 알았네?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그분 자게에서 팁장인으로도 유명함 ㅇㅇ]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공략 영상같은 것도 많이 올리고]
베타 누나가 패치노트가 올린 배메 팁글이라며 링크를 보내왔다. 또다시 홀린 듯 링크에 들어간 나는 배틀 메이지에 대해 상세하게 적혀 있는 설명들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닉값쩌네]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ㅇㅇㅇ그분 닉값 오진다고 유명함]
“이런 사람이 쩔 해 줬으니 그렇게 렙이 올랐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던 경험치 바를 생각하며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따가 접속하면 오늘도 같이하자고 해 볼까. 아니, 아니지. 바쁜 사람 붙잡고 늘어지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다. 오늘은 솔플을 뛰고자 마음을 먹으며 곧바로 던전에 들어갔다. 패치노트와 함께할 때보다는 느리지만 나도 나름 고인물 중의 고인물이었기에 효율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던전 하나를 클리어하고 나올 때마다 레벨이 하나씩 올랐다. 그렇게 같은 던전을 돌고 돌고 또 돌고 다시 돌았다. 적어도 이 던전에서 뽑을 수 있을 만큼의 레벨은 뽑고 난 다음 다른 던전으로 갈 생각이었다. 한창 무빙을 치며 보스를 잡고 있을 때, 베타 누나한테서 귓속말이 왔다.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곧죽 길드 가입은 여전히 생각없어?]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만렙찍고생각해봄]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길드 드갈거면 꼭 울길드 와야한다]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알것지?!!?!]
거참, 알았어요, 알았어.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목표가 있는 이상 그 밖의 일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목표는 바로 만렙이지. 솔플을 뛰느라 조금 심심했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던전만 돌았더니 어느새 85레벨을 찍었다. 앞으로 15업만 더 하면 드디어 만렙이었다.
같은 던전을 하도 많이 돌았더니 기가 다 빨린다. 어제 패치노트랑 할 때는 수다 떠는 맛이 있어서 재밌었는데. 뻐근한 몸을 등받이에 기댄 나는 팔을 쭉 들어 올려 스트레칭을 했다. 요즘 게임 한다고 컴퓨터 앞에만 있었더니 허리가 너무 아팠다.
“이 레벨대에 효율 좋은 던전이 뭐가 있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해 패치노트가 올렸다는 팁 글을 확인했다. 85에서 100까지 올릴 때 갈 만한 던전은… 붉은 용병 개미굴인가. 거기에 몬스터가 좀 많이 있긴 하지. 목적지를 정한 나는 곧바로 개미굴로 향했다.
붉은 용병 개미굴은 패치노트를 만났던 유크리아의 동굴처럼 필드 던전이라 중간에 다른 유저를 만날 확률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PK 걱정을 안 해도 된다죠. 업데이트 노트를 확인해 본 결과 PK 비활성화 옵션을 키면 레벨링 중 다른 유저들 때문에 빡칠 일은 없을 터였다. 만렙 이후에 풀면 되겠지.
입구부터 우르르 몰려 있는 몬스터들이 모두 경험치로 보였다. 손바닥을 비비며 스킬을 쓰려는 찰나, 근처에서 공격 이펙트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화면을 돌린 나는 익숙한 닉네임에 멈칫했다.
[죽으러온놈]
저 사람도 여기서 레벨링 중이었던 건가. 모르는 척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죽으러온놈이 내 캐릭터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전체/죽으러온놈: 솔플이세요?]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네]
[전체/죽으러온놈: 아 그럼 파티하실래요?]
[전체/죽으러온놈: 저도 솔플이라]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그러죠 뭐]
죽으러온놈과 파티를 하게 될 줄이야.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해져 몬스터를 잡는 틈틈이 죽으러온놈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는 정말 레벨 업이 목적이라는 것처럼 몬스터를 잡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냥 혼자 사냥하기 심심해서 파티하자고 한 건가. 한창 사냥을 지속하던 나는 짧은 하품을 하며 베타 누나에게 얼결에 파티하게 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채팅 창을 켰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누나 나 죽으러온놈 만남]
[파티/죽으러온놈: ?]
[파티/죽으러온놈: 저요?]
“아, X발.”
미쳤다. 귓속말을 보낸다는 게 파티 창에다가 써 버렸다. 이미 엎어진 물을 어떻게 주워 담아야 하나 뇌에 힘을 주고 고민했다. 뭐라고 하지. 님이 자게에서 유명하길래 유명 인사 만났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무슨 글 봤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실제로 본 글은 하나도 없잖아. 키보드에서 손을 놓고 머리를 싸맨 나는 힐끗 눈동자를 굴려 채팅 창을 확인했다.
그는 내가 답을 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지 몬스터도 잡지 않고 가만히 내 캐릭터 앞에 서 있었다. 이런 젠장. 뭐라고 변명을 하란 말인가. 그냥 내가 곧죽을놈이라 님이랑 파티한 게 신기해서 그랬다고 깔까? 속 답답한 거 X나 싫단 말이야. 깊게 심호흡을 한 나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잘못 쳤어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죄송합니다]
[파티/죽으러온놈: 아뇨 그건 괜찮은데]
[파티/죽으러온놈: 저를 아시나 해서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모르는데요]
[파티/죽으러온놈: 방금 저 만났다고 귓말하시려고 했던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요. 그렇게 말하니 반박을 못 하겠네? 내가 다리를 달달 떨며 변명할 거리를 찾는 사이 죽으러온놈의 채팅이 올라왔다.
[파티/죽으러온놈: 사실 님이 마이 달링♥이랑 직업이 같아서 파티하자고 했던 거예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누가 니 달링이에요 시12발]
[파티/죽으러온놈: 역시 곧죽을놈님이 맞으셨군요]
설마, 나 낚인 건가? 진짜로?
[파티/죽으러온놈: 직업 보고 혹시나 했는데 진짜일 줄은 몰랐어요]
[죽으러온놈 님이 나한테명령하지마 님에게 애정을 표합니다.]
“허, 허허허허……….”
이딴 식으로 낚일 줄은 몰랐는데. 한 방 먹었다는 생각에 허허롭게 웃었다. 생각보다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로구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한 손으로 채팅을 쳤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원하는 게 뭐예요....]
[파티/죽으러온놈: 그건 바로 님의 사랑...♥]
“돌았나 봐.”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고작 그거예요?]
[파티/죽으러온놈: 고작이라뇨 어떻게 님의 사랑을 고작으로 치부할 수 있어요;]
[파티/죽으러온놈: 당장 님의 사랑한테 사과하세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자음으로 채팅 창을 도배하던 나는 일시 휴전을 요청했다. 던전이 코앞인데 우리 이런 쓸데없는 일로 기력을 소모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냐?
(4)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일단 렙링부터 하죠]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님도 렙링하러 온 거잖아요]
[파티/죽으러온놈: 저랑 계속 파티 해주시는 거에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네]
[파티/죽으러온놈: 그것만으로도 전 충분해요]
진짜 알다가도 모를 사람. 그 채팅을 끝으로 죽으러온놈은 온 힘을 다해 몬스터를 학살하며 뛰어난 컨트롤 실력을 보여 주었다. 전에도 한 번 느낀 거지만, 이 사람 정말 잘한다. 굳이 죽여 달라고 쫓아오는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죽으러온놈의 컨트롤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 한다. 사방을 뒤덮는 장판에서 미약한 틈 하나를 발견해 그 안에 들어가서 딜을 넣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나 죽으러온놈 만남...]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제가 곧죽인 것도 들켰습니다...]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아닠ㅋㅋㅋㅋ어쩌다갘ㅋㅋㅋㅋㅋ]
죽으러온놈이 경험치를 벌고 있는 사이 베타 누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확인한 다음에야 안심하며 보낼 수 있었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누나한테 귓하다가 실수로 팟챗 쳐버림;]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 지금 둘이 파티임???]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베타: ㅇㅇ...]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아 헐 나 거기 갈랰ㅋㅋㅋ나도 파초해줰ㅋㅋㅋㅋ]
[귓속말/베타>나한테명령하지마: 힐러의 쩔셔 간다 ㅇㅇㅋㅋㅋㅋㅋ]
장소를 알려 주자마자 텔레포트로 날아온 베타 누나는 곧바로 파티 초대를 받았다.
[파티/베타: 안녕하세요~~]
[파티/베타: 곧죽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욬ㅋㅋㅋ]
[파티/죽으러온놈: 안녕하세요]
[파티/죽으러온놈: 곧죽을놈님이 제 얘기를 해주셨나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일단 던전 마저 하죠 쩔해준다며]
[파티/베타: 수줍어하기는ㅋㅋㅋㅋ몰이들어갑니다]
확실히 만렙 하나가 끼니 사냥의 속도가 달라졌다. 아무리 좋은 장비를 착용하고 있어도 넘지 못하는 레벨의 벽을 단박에 부숴 버리는 안정적인 버스에 새삼 패치노트가 떠올랐다. 베타 누나의 쩔셔도 안정적이기는 했으나 속도로 보나 딜로 보나 패치노트에는 미치지 못했다.
괜히 신경 쓰여 친구 창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던 나는 여전히 로그아웃으로 표시되어 있는 그의 닉네임을 확인하고 창을 완전히 닫았다. 그래 봤자 하루 같이 게임했을 뿐인데, 말이 잘 통했어서 그런가? 인상이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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