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광전사는 직업 특성상 일대일에 능하지 몰이 사냥에는 약한 편이었다. 정확히는 광역 딜 스킬이 별로 없었다. 있다 해도 대미지가 구더기였고. 솔플이라는 특성 때문에 장비와 컨으로 버텨 왔다고 해도 불편한 게 아예 없지는 않았거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박수에 머쓱해하며 손을 내린 나는 패치노트의 뒤를 따라다니며 경험치를 수급했다. 한 번에 잡는 양이 많은 데다 내 레벨에 맞는 던전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패치노트에게 붙어 있는 ‘전장의 스승’ 칭호 덕분에 추가 경험치가 붙어 레벨이 단숨에 올라갔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정말 감사합니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덕분에 레벨이 빠르게 올랐어요]
[파티/패치노트: 별거 아니에요]
[파티/패치노트: 오랜만에 저렙 던전 도니까 재밌어서 그런데]
[파티/패치노트: 다음 던전도 같이 가실래요?]
그래 주면 나야 감사하죠! 당연히 그러하겠다며 도착한 던전은 내 레벨대의 유저가 혼자 클리어하기에는 힘든 볼카누스 던전이었다. 그곳에서도 패치노트는 몬스터를 단숨에 몰아 한곳에 모은 뒤 폭격 수준의 스킬을 날리며 싹쓸이를 시작했다. 컨트롤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스킬 한 방 발사하면 몹들이 우르르 죽어 나간다.
안락하디안락한 리무진급 버스였지만, 옆에 두었던 과자를 씹다가 문득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도 뭔가 해야 하지 않나? 쩔이라는 게 보통 저렙은 그냥 가만히 있고 고렙이 알아서 처리하는 메타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진짜 뉴비가 아니지 않은가. 은근슬쩍 전투에 끼어들어 몹 몇 마리를 두들겨 패 잡았다. 역시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쪽이 마음 편하다.
[파티/패치노트: 전 광전사 어렵던데]
[파티/패치노트: 본캐도 광전사 쓰시나봐요?]
[파티/패치노트: 컨이 좋으시네]
패치노트의 물음에 뜨끔한 나는 무어라 답할지 머리를 굴렸다. 이미 뉴비 아니라고 말해 뒀으니 상관없으려나.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가만히 있으니 심심해서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찐뉴비도 아닌데 쩔 받는 것도 좀 죄송스럽고...]
[파티/패치노트: 전 진짜 괜찮은데]
[파티/패치노트: 일단 바로 볼카누스 잡으러 갈게요]
[파티/패치노트: 아 지금 장비 안 좋으시니까 나올 때까지 잡아보죠]
[파티/패치노트: 여기서 먹은 장비 한동안 쓸 수 있잖아요]
“뭐지, 천사인가.”
찐뉴비도 아니고 고인물의 탈을 쓴 저렙한테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어 준다고? 보통 이런 일 잘 없는데? 나도 뉴비들에게는 나름 상냥한 고인물이지만 아는 사람이 아니면 부캐 키울 때 뭐 하러 도움을 주냐는 생각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당황스러움에 어버버 하는 사이, 패치노트가 볼카누스를 가볍게 잡고 나온 아이템을 모조리 나한테 쏟아부었다. 개중에는 광전사 전용은 아니지만 팔면 나름 값 나오는 장비도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착해도 돼? 저러다가 나중에 통수 처맞고 우는 거 아냐?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괜찮으세요?]
[파티/패치노트: 뭐가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아니 굳이 따지면 무임금 노동 중이신 건데]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제가 찐뉴비도 아니고...]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불편하지는 않으신가 해서요]
나름 진심을 담아 전한 말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것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파티/패치노트: 상관없어요]
[파티/패치노트: 서로 도우면서 사는 거죠 뭐]
“진짜 천사인가?”
혹시 지상에 내려오면서 날개를 잃어버리셨는지? 아니면 날개를 어디에 숨기고 다니신다거나, 그런 건가요? 인성질만 하는 놈들 사이에서 발견한 한 떨기 백합 한 송이에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제가 이거 나중에 다 갚을게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아니 그냥 쩔비 드릴게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제가 그래도 본캐에서 골드 긁어와서 골드는 많은데]
[파티/패치노트: ㅋㅋㅋ괜찮아요]
[파티/패치노트: 저도 오랜만에 파티플해서 재밌는걸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 빚지고는 절대 못 산다. 비록 그에게는 얼마 안 되는 금액이라도 줘야 내 성이 풀릴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패치노트에게 거래를 건 뒤 가진 골드를 보냈다. 그는 연신 거절을 하며 거래를 회피하려 했으나 내 끈질긴 요청에 결국 골드를 받아들였다.
한창 볼카누스를 잡고 장비까지 챙기고 나니 저렙치고 대미지가 크게 뻥튀기되었다. 이 정도면 한 70까지는 장비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이렇게 빨리 장비를 맞춘 것이 처음이라 그런가. 감개무량함에 촉촉해진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을 때, 패치노트가 축하한다는 말을 하며 곧바로 다음 던전에 가자고 말해 왔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님 시간 괜찮세요?]
[파티/패치노트: 네 저 내일 아무것도 안해요]
[파티/패치노트: 잘만 하면 오늘 안에 80 찍을거 같은데]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네?]
[파티/패치노트: 함께 달려요]
[파티/패치노트: 괜찮으시죠?]
아니, 나는 괜찮긴 한데… 괜찮으신가요? 저는 이제 겨우 40따리라 80까지 찍으려면 한참 걸릴 텐데요?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고 채팅을 쳐 버렸다. 이제 또다시 빡렙을 위한 몰이 사냥 가는 건가요? 어쩌지, 나 좀 설레려고 해. 고인물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단 말이야.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다음 던전으로 향했다.
(2)
던전에 들어가면 필드에서보다 경험치를 10% 정도 더 준다. 그만큼 몬스터들의 피통도 크고 강하다. 이 차이가 생각보다 큰 편이라 파티 플레이를 할 때는 보통 필드보다 던전 사냥을 많이 간다. 나는 패치노트의 뒤를 따라다니며 안정적인 학살력을 멍하니 구경하기만 했다. 좀이 쑤시는 기분에 잠깐 나서려고 하면 혼자 하는 게 더 빠르니 기다리라는 패치노트의 채팅에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가면 완전 짐덩어리나 다름없는데, 그건 싫다.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얻어먹기만 하란 말인가. 그러나 중간중간 꼽사리 딜을 낑겨 넣으려고 해도 패치노트의 압도적인 딜량 때문에 하나 마나인 수준이었다. 내가 진짜 뉴비였더라면 크나큰 차이에 슬퍼서 눈물로 밤을 지새웠을 것 같다. 나는 쓰레기야, 게임 접어야 해, 이러면서 말이다.
쉬지 않고 사냥을 지속하는 패치노트 덕분에 내 레벨은 어느새 60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시간을 뺏는 건 아닌가 싶어서 미안했던 감정이 점점 희석되어 가며 안락한 리무진에 마음이 홀려 버렸다. 처음 뵙는 분이지만 정말 쩔을 잘하시네요. 사냥하는 틈틈이 수다도 떨었더니 이제는 그냥 사람 자체가 좋아졌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님 진짜 딜 쩌시네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완전 굿]
[파티/패치노트: 감사합니다 ㅎㅎ]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저도 한 고인물하는데 님은 더 쩌는 거 같아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덕분에 편하게 렙업했어요]
빈말이 아니고 진심이었다. 이렇게 쩔 잘하는 사람 살다 살다 처음이야! 레벨 업을 알리는 이펙트와 함께 내 레벨은 60이 되었고 동시에 2차 전직이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직한다고 직업 이름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지만 전직 후에만 사용 가능한 주력 스킬들이 새로 생기고, 더불어 전반적인 대미지가 크게 상승한다. 빨리 전직 마치고 장비 파밍하러 가야지.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저]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덕분에 60 찍어서 2차전직하러 가야할 거 같아요]
[파티/패치노트: 광전사는 뭐 잡아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천공의 영혼이요]
[파티/패치노트: 그럼 천공탑에서 봬요]
2차 전직까지 같이 해 주려고? 나는 이 기회를 놓치기 싫어 패치노트에게 빨리 퀘스트를 받아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곧바로 마을로 이동했다. 내가 뉴비였던 시절에는 텔포 값이 아까워서 드넓은 맵을 걸어 다니고 그랬는데. 본캐에서 긁어 온 골드의 양이 상당해서 패치노트에게 쩔비를 주고도 한참 남았다. 심지어 패치노트가 플레이 중 나온 드랍템과 골드를 모두 내게 양보했기 때문에 역으로 더 많이 벌기도 했다. 진짜 이 사람은 천사야!
전직용 NPC에게 달려가 퀘스트를 받은 나는 곧바로 천공 탑으로 이동했다. 보통 천공 탑의 보스인 ‘천공의 영혼’이라는 몬스터는 솔로로 잡기 어려웠다. 적정 레벨이면 못해도 넷 이상의 공격대가 모여야 상대할 수 있다고나 할까. 다르게 말하자면 이 레벨대의 레이드 보스인 셈이다.
[파티/패치노트: 바로 잡을게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넵]
보스까지 가는 길을 패치노트의 압도적 딜량으로 시원하게 뚫으며 마주한 천공의 영혼은 참으로 작게 느껴졌다. HP 바가 30줄이 넘어가는 보스지만, 이제 저 녀석도 패치노트의 밥이 되겠죠.
값비싼 버프 아이템을 아무렇지 않게 써 재낀 패치노트가 스킬을 쓰자 한 방에 보스의 HP 바가 4줄 남은 것을 보며 감탄을 흘렸다. 이래서 사람들이 버스, 버스 하는구나. 순식간에 삭제된 보스 덕에 경이로운 속도로 2차 전직을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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