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깔끔하게 커스터마이징을 끝내고 그렇게 고민하던 직업으로 결국 광전사를 픽한 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자고로 캐릭터를 신규 생성할 때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역시 닉네임 선정일 터다.
“뭐 하지? 할 만한 게 있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닉네임을 연달아 검색해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다 이미 존재하는 닉네임이었다. 아, 커스터마이징보다 훨씬 어렵고 고민된다. 닉변권은 만 원이나 한단 말이야. 코스튬에 쓰는 만 원은 안 아까워도 닉변에 쓰는 만 원은 아깝다고.
거너만죽이는놈? 아니, 이건 너무 내 부캐 같다. 이왕 만드는 김에 곧죽을놈이랑 관련 없는 닉네임을 하고 싶었다. 하다 하다 녹색 창에 닉네임 추천까지 검색해 가며 뒤졌는데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깊은 빡침에 욕설로 도배된 닉네임을 입력하자 당연히 사용할 수 없다는 안내 창이 떴고, 덩달아 짜증이 치솟았다.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왜 다 안 된대.
“아, 하나 생각났다. 이거 있나?”
문득 떠오른 닉네임 하나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설정하자 곧바로 화면이 프롤로그로 넘어갔다. 된다! 드디어 된다! 커스터마이징에 10분, 닉네임을 고르는 데에 30분. 도합 40분의 시간을 들여 겨우 접속할 수 있었다.
“거지 같네.”
꼴받지만 어쩔 수 없지. 즉흥적으로 떠올린 일인지라 미리 닉네임을 고르지 않은 내 탓이었다. 익숙한 프롤로그를 빠르게 스킵하고 게임에 들어가자 뚜렷하게 적혀 있는 닉네임이 보인다.
[나한테명령하지마]
정말이지 완벽한 닉네임이 아닐 수 없다.
3. 나한테명령하지마
(1)
창고 캐릭터에서 아이템을 나한테명령하지마로 모두 옮긴 후 초보자 마을에서 캐릭터를 이리저리 움직여 봤다. 처음 캐릭터를 생성하면 기존에 건드려 놨던 설정들이 모두 리셋이 되기 때문에 새로 세팅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계정이 다른 계정이기도 하고 말이다.
여태껏 쭉 써 왔던 설정과 똑같이 맞춘 뒤 다시 움직이자 한결 조작하기 편해졌다. 이 맛에 게임하는 거지! 빠르게 레벨링을 하며 메인 퀘스트를 쭉 민 다음 베타 누나에게 길드에 가입시켜 달라고 해야겠다.
차곡차곡 머릿속으로 세운 계획에 맞춰 촌장 NPC에게 퀘스트를 받은 나는 필드로 나섰다. 초반에는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필드에서 사냥한 후 던전에 들어가게 해 주는 퀘스트를 받아야 했다. 무빙도 필요 없는 잡몹을 두들겨 잡으며 퀘스트를 연달아 클리어하자 레벨도 쑥쑥 올랐다. 그때였다. 처음 보는 닉네임의 누군가가 나타나 나를 죽이고 간 것은.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ㄴㄱ?]
[전체/빠삐용: 모하지맨인디요]
PK를 했을지언정 당해 본 적은 처음이라 머리가 얼얼했다. 나한테 죽은 사람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내가 원래 죄책감 같은 게 없는 사람인데 괜히 미안해지네?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ㅇ; ㅅㄱ;]
[전체/빠삐용: 아 역시 뉴비 아니었네]
내가 저지른 일이 있으니 그냥 넘어가련다. 한번 상대하면 우후죽순 늘어나는 게 어그로다 보니 이런 건 빠르게 씹고 넘기는 게 좋았다. 마침 마을로 돌아가야 했는데 귀환할 수 있도록 죽여 주기까지 했으니 오히려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떨어진 경험치? 렙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야 뭐.
코를 매만지며 마을로 귀환 버튼을 누르자 캐릭터가 마을 텔레포트 존에서 나타났다. 와! 공짜 텔포 감사합니다! 잘됐다는 심정으로 냅다 NPC에게 달려가 퀘스트를 클리어하자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새 메인 퀘스트가 주어졌다. 좋았어. 이때를 기다렸다.
“장비도 옮겨 두길 잘했네. 저렙 구간이 아무리 쉬워도 장비빨은 무시 못 하지.”
클리어 타임을 줄이면 줄일수록 그만큼 더 많은 던전을 돌아 빠르게 레벨 업 할 수 있는 건 당연했다. 인벤토리를 열어 장비를 적당량 맞춘 후 경험치 증가 주문서를 찢었다. 이제부터 1시간 동안 경험치 획득량이 30% 증가할 거다.
곧바로 던전에 들어간 나는 익숙한 고인물 무빙을 치며 몬스터를 학살했다. 레벨 대비 좋은 장비에 피지컬이 붙으니 애초에 피할 수 없는 광역 딜을 제외하곤 대미지를 입지도 않았다. 심지어 템빨이 좋긴 한지 맞아도 별로 아프지가 않다.
“이래서 사람들이 부캐를 키우는구나.”
고렙 구간으로 가면 솔플이 힘든 경우가 많은데 저렙 구간이 쉽긴 진짜 쉽다. 오랜만에 오는 던전이라 기믹이 기억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충 보면 무슨 공격이 날아올지 훤해서 기믹을 처리하는 것도 참 쉬웠다.
나직한 감탄사를 흘리며 바람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확실하게 던전을 클리어했다. 퀘스트를 진행하고 던전을 클리어한 후 잡화점에 들러 잡템을 팔고 수리하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 3시간가량 플레이를 계속하니 어느새 35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와, 진짜 빠르다.”
경험치 주문서 덕인가? 프리지아가 100레벨이 만렙인 게임이라는 걸 생각하면 기함을 토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쑥쑥 오르는 레벨 덕분에 퀘스트도 레벨 제한에 걸리는 일 없이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이번 퀘스트는 유크리아의 동굴이네.”
이 던전은 다른 던전과 달리 특이한 구조를 띠고 있다. 일반적인 던전이 인스턴스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달리 유크리아의 동굴은 필드 던전으로 중간에 다른 유저가 난입할 수 있었다. 즉, 누군가가 들어와 PK를 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어떡할까….”
클리어하는 것 자체야 어렵지 않다. 문제는 누가 먼저 던전에 들어가 있을 경우, 혹은 내가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 들어오는 경우다. 아직 저레벨 축에 들어가는 터라 고레벨이 따라 들어와 PK를 걸면 레벨 차이와 장비 차이로 인해 죽을 테니까.
혹시 모르니 베타 누나한테 도움을 청할까. 이왕이면 만렙 찍은 후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고민은 길었으나 결정은 짧았다. 일단 근처 마을을 귀환 포인트로 잡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운 좋으면 혼자 깔끔히 끝내고 나올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유크리아의 동굴에 들어간 나는 어려울 것 하나 없이 몬스터를 두들겨 패며 잡았다. 필드 던전과 인스턴스 던전의 또 다른 차이점. 필드 던전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몬스터가 리젠된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보스를 잡고 텔레포트를 타서 귀환해야 했다.
그나마 아직까진 장비가 받쳐 주기 때문에 몹을 잡는 것은 무척 수월했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부터려나. 이제 막 중간 보스가 있는 구역에 들어온 나는 화면에 뜬 메시지 창 하나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 이 타이밍에….
[패치노트 님이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왜 많고 많은 던전 중 여길 온 거야. 여기서 나오는 건 경험치 아니면 재료템밖에 없는데. 그것도 하우징용 재료템이었다. 설마, 그거 먹으려고 온 건가? 가끔 시간이 남아도는 제작 고인물들은 재료를 장터에서 구매하기보단 직접 발로 뛰며 구한다고 들었다. 나야 제작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적 없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상대가 뉴비라 퀘스트 겸 들어온 건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있는 곳에 도착한 유저를 본 순간 그 생각은 사라졌다. 입고 있는 옷의 꼬락서니가 아무리 봐도 고인물의 그것이었다. 무기는 강화를 얼마나 처발랐는지 은은한 이펙트를 풍기고 있었고, 착용 중인 장비도 이번 레이드가 나오면서 생긴 최종 장비였다.
[전체/패치노트: 안녕하세요]
[전체/패치노트: 솔플 뛰시나요?]
그냥 귀환했다가 저 양반 가면 돌아올까 하고 고민하는 사이, 그 유저가 나를 향해 채팅을 걸어왔다. 저런 건 왜 물어보지. 의문 가득한 머리를 털어 내고 순순히 답을 보냈다.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네 맞는데요]
[전체/패치노트: 그럼 저랑 같이 하실래요?]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왜요?]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의문이었다. 풀파밍한 고인물이 저렙 던전에서 처음 보는 쪼렙이랑 같이 게임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던전 보스가 솔플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마무지하게 센 것도 아닌데. 내 질문에 패치노트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내 채팅 하나를 올렸다.
[전체/패치노트: 뉴비 같으셔서 쩔해드리고 싶어서요]
[전체/패치노트: 쩔비는 안 받을 테니까 걱정마시고요]
[전체/나한테명령하지마: 저 뉴비아니에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순순히 사실을 말했다. 레벨이 쪼렙이지만 뉴비는 아닙니다. 부캐입니다. 그러나 뉴비가 아니라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렇지 말했다.
[전체/패치노트: 괜찮아요]
[전체/패치노트: 여기 맵 길어서 힘들잖아요 도와드릴게요]
패치노트가 내게 파티 초대를 보내왔다. 머뭇거리며 파티를 받자 그가 웃는 모션을 취하더니 이내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공대할 때 빼고는 거의 솔플만 뛰어서 다른 사람과 파티를 하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라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어색함은 이어지는 패치노트의 쩔에 사라졌다.
“와…. 뭐지? 이거 겁나 편한데?”
패치노트는 캐릭터를 이리저리 움직여 주변에 있던 모든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었다. 그렇게 몬스터를 한곳에 모은 다음 광역 스킬을 사용해 그것들을 한순간에 녹였다. 펑 하고 터지는 이펙트 하나에 몬스터가 모두 죽으며 경험치가 되어 들어왔다.
진짜 편안하고 안락한 버스, 아니 리무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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