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 죽으러온놈
(1)
탕탕탕-, 거너의 초반 스킬 중 하나인 ‘트리플 샷’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만든 지 얼마 안 된 캐릭터인 듯 초보자용 장비를 끼고 있는 유저를 향해 채팅을 쳤다.
[전체/곧죽을놈: 뉴비예요?]
[전체/이리나: ?저요?]
[전체/이리나: 아뇨 부캐인데요]
[전체/곧죽을놈: 그렇구나]
그럼 양심의 가책 하나 없이 죽여도 되겠구나. 그러게 왜 본캐로 안 들어오고 부캐를 만드셨어요. 하던 거나 하시지. 나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콤보 스킬을 난사했다. 만렙 캐릭터와 신규 캐릭터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별다른 콤보를 박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너 유저 1의 캐릭터가 순식간에 죽었다.
[전체/이리나: 아니 뭐하는거에요;]
[전체/곧죽을놈: 내 사전에 거너란 없다]
[전체/이리나: 미1친2놈이네 이거;;]
[전체/곧죽을놈: 맞아 난 미1쳤어 너에게 미1쳤지]
채팅으로 쌍욕을 날리는 거너 유저 1을 뒤로한 채 유유히 자리를 떠난 나는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다음 타깃을 찾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발견한 거너 유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 뉴비임을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방금 본 유저처럼 그냥 고인물이 신직업 한번 해 보고자 들어왔단다. 상냥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며 사정을 모두 들은 나는 그렇구나, 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망설임 없이 이 거너 유저도 죽였다.
[전체/디스코엉디팡: 아니 미친놈인가??? 갑자기 왜 죽여요;;;;]
[전체/곧죽을놈: 그거슨 미1쳤기 때문이지]
나는 정말로 미쳤다. 거너를 죽이지 못해서 미쳤다. 눈에 보이는 거너란 거너를 모두 죽이지 않는 이상 성에 차지 않는 걸 어떡한단 말인가. 그렇게 또 하나의 거너 유저를 죽이고 난 뒤 다른 사냥감을 찾아 사바나를 거니는 한 마리의 맹수가 되어 필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찾았다, 사냥감.”
이번에 만난 유저는 놀랍게도 고인물의 부캐가 아닌, 신규 업데이트로 유입된 찐뉴비인 것을 확인했다. 뉴비는 어쩔 수 없지. 나는 조금 전과 달리 상냥하게 거래를 걸었다.
[전체/뉴아룽: 헉ㅠㅠㅠ안 주셔도 괜찮아요!!ㅠㅠㅠ]
[전체/곧죽을놈: 그냥 받으세요 ㅎㅎ]
[전체/뉴아룽: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제가 나중에 꼭 갚을게요ㅠㅠㅠ]
[전체/곧죽을놈: 그럴 필요 없어요 ㅎㅎㅎㅎ]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로 고마워할 필요 없었다. 나는 그래도 너무 감사하다며 연신 인사를 하는 그를 향해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체/곧죽을놈: 잘가요]
그리고, 기본 콤보만을 사용하여 뉴비 거너를 죽였다. 뿌듯하다. 알타니아, 보고 있니? 내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너의 복수를 하고 있단다.
딱히 PK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막상 이렇게 킬을 따고 나니 기분이 상쾌하다 못해 날아갈 것만 같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 같은,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짜릿해, 늘 새로워, PK가 최고야!
***
[Best][자유게시판] 공포의 거너 PK범
작성자: 꾸미아니야
간단하게 세줄 요약 후 내 의견 적겠음
1. 알페 서버에 거너만 노리는 PK범이 나타남 직업 광전사
2. 뉴비 고인물 가리지 않고 죽이는데 이유를 모름
3. 가장 큰 문제 >>파티짜고 덤빈 유저 개처발림<<
아래는 맨 처음으로 PK당한 유저가 얼탱없다고 자게에 올린 스샷
(PK_첫킬.jpg)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미친 거 같음 얘는 대체 뭘 노리고 이러는 걸까? 뭐 업적이라도 주나??? 지금 예상 가능한 건 거너가 신규 업뎃 되면서 광전사가 너프 먹었다 생각하고 거너 사냥 다니는 거 같음
(댓글 34)
- 알고보니 피케만 주구장창하고 댕기던 피케유저였고 막 이래 ㅋㅋ
└ 올라온 글이 없는데 뭔솔
└ 돈으로 입막음 했을 수도
└ 그럼 핔케를 왜하냐 병12신아
- 진짜 뜻밖의 이유일수도있음 거너한테 PK당한적이 있어서 분풀이라던가
└ 이거 가능성있다 요즘 만렙찍기 쉽잖아
└ ㄴㄴㄴㄴ아님 아무리 그래도 장비차이 무시못함 아직 거너 장비 풀린 거 몇 없어서 앵간해선 힘듬
└ 첫댓보다 이게 더 현실성없는듯ㅋㅋㅋ
- ㅋㅋㅋㅋ맞아 난 미쳤어 너에게 미쳤지 왤케 웃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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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엔 어디로 갈까.”
히죽,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은 나는 캐릭터를 조작해 필드로 나갔다. 그리고 필드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닉네임 하나에 손을 멈칫했다.
[죽으러온놈]
“뭐야, 누가 보면 닉네임 맞춘 줄 알겠네.”
마우스를 딸깍이며 해당 유저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직업은 거너에 레벨은 1. 방금 만든 따끈따끈한 캐릭터가 점프를 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붕붕방방이라는 단어가 이럴 때 쓰는 거던가. 연신 점프를 하던 죽으러온놈은 내 캐릭터를 향해 쓰잘데기없는 모션을 날렸다.
[죽으러온놈 님이 곧죽을놈 님에게 애정을 표합니다.]
미친놈인가? 신종 또라이? 예상치 못한 죽으러온놈의 반응에 당황한 나는 평소 잘 타이핑하지 않던 채팅을 쳤다.
[전체/곧죽을놈: 님 뭐세요?]
[죽으러온놈 님이 곧죽을놈 님을 향해 놀랍니다.]
[전체/곧죽을놈: 아니 님 뭐냐고요ㅋㅋ모션만 하지말고 채팅좀;]
[전체/죽으러온놈: 죽으러 왔습니다]
[전체/곧죽을놈: 굳이요?]
[전체/죽으러온놈: 죽을 준비 했습니다]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단단히 미친놈이었구나. 그렇게 스스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키보드를 조작해 평타를 날렸다. 레벨 1짜리에게 화려한 콤보는 필요 없었다. 그냥 평타만 몇 대 쳐도 죽으니까.
광전사의 기본 평타는 총 3타이다. 그리고 마지막 타격의 경우 상대방을 다운시키며 중간에 딜 로스가 나게 된다. 때문에 나는 딜 로스를 최대한 줄이고 상대가 스킬 쓰는 것을 막기 위해 1평이 들어간 이후 스킬을 캔슬하는 방식으로 계속 한 대씩만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으러온놈이 죽었다. 닉값 제대로 하네. 녀석은 만족스러운 듯 누워 있는 채로 다시 모션을 날렸다.
[죽으러온놈 님이 곧죽을놈 님에게 최고라고 합니다.]
[전체/곧죽을놈: 변태세요?;]
[죽으러온놈 님이 곧죽을놈 님을 향해 고개를 젓습니다.]
말을 해라, 말을. 답답함에 가슴께를 두드리던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이미 죽인 거 한자리에 계속해서 있을 필요는 없지. 그럴 시간에 거너를 찾아 씨를 말리는 게 우선이다. 알타니아를 죽인 종간나 새끼들 내래 가만두지 않겄어. 그렇게 필드에서 몬스터 대신 유저를 사냥하고 있을 무렵, 놈이 또 나타났다.
[전체/죽으러온놈: 죽으러 왔습니다]
[죽으러온놈 님이 곧죽을놈 님에게 윙크를 날립니다.]
“진짜 돌았나?”
왜 사서 죽으려고 하지? 시간 안 아깝나? 아무리 PK 페널티랄 게 경험치 떨어지는 것밖에 없는 망겜이라고는 하나 시간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그 때문에 이번에는 스킬을 써서 한 번에 죽였다. 순식간에 자리에 누운 캐릭터를 뒤로하고 다른 타깃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내게 죽은 거너 유저들이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 가는 것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이러다가 정지 먹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에서 하라고 만들어 둔 PK를 했을 뿐인데 정지씩이나 먹을까?
턱을 쓰다듬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트북을 꺼내 프리지아 홈페이지에 들어가 새 계정을 만들었다. 익숙한 손길로 커스터마이징까지 마친 뒤 캐릭터에 접속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 중 값이 나가는 것들과 캐시 아이템, 돈 등을 새 캐릭터에 모두 옮겼다.
본래 창고 캐릭터는 한 아이디로 만드는 편이지만, 캐릭터뿐만 아니라 계정 자체가 정지될 경우를 대비했다. 한참 시간을 들여 가며 아이템을 모두 옮긴 나는 뿌듯한 마음을 담아 노트북을 끈 후 다시 데스크탑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체/죽으러온놈: 죽으러 왔습니다]
“X발, 이게 미쳤나. 몇 번째야.”
죽으러온놈이 또 나타났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아오는 건데?
나는 연신 모션을 날리며 죽으러 왔다는 놈을 향해 마음속으로 욕을 날리며 이마를 팍팍 쳤다. 원래 어그로에는 먹이 주는 거 아니랬는데. 맨 처음 받아 줬다고 계속 이러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봤을 때 무시할 것을.
1레벨이면 당장 레벨 업 하기에도 바쁠 텐데 뭣 하러 쫓아오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죽고 싶나? 죽고 싶으면 적당한 사냥터 가서 몬스터 어그로 끌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계속 보이니까 이제는 거슬려 죽겠다. 나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으며 쪼렙이 오지 못할 곳으로 텔레포트를 탔다. 고레벨 필드이니 여긴 못 오겠지.
물론 내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체/죽으러온놈: 죽으러 왔습니다]
“아니, 왜! 왜왜! 왜! 대체 왜!”
죽으러온놈은 내 생각보다 훨씬 끈질겼다. 이런 지긋지긋한 새끼! 참다못한 나는 결국 분노를 담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이 새끼가 왜 이러는지는 좀 알아야겠다.
[전체/곧죽을놈: 왜 자꾸 쫓아옴?]
[전체/곧죽을놈: 아니 그전에 어떻게 옴? 여기 고렙존이라 쪼렙은 못 올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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