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1화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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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곧죽을놈

이번 학기는 유난히 지옥 같았다. 조별 과제 멤버의 과반수가 잠적을 하기도 하고, 시험 중 졸다가 답안지를 다시 작성해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당황스러운 건 간만이었지. 그렇게 겨우 시험을 치르고 종강한 후, 오랜만에 컴퓨터를 켰다. 한동안 컴퓨터를 켜도 과제만 하다 보니, 부팅되는 소리가 이렇게 즐거운 줄 잊고 있었다. 부팅이 완전히 끝나고, 곧바로 인터넷 창을 연 나는 익숙하게 게임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온라인 MMORPG 프리지아. 5년 전 오픈 베타부터 시작해 꾸준하게 해 온 게임이었다. 한 달 만에 들어간 홈페이지는 여전하였으나, 어쩐지 감회가 새롭게 느껴졌다. 어디, 얼마나 바뀌었는지 볼까.

“한번 똥캐는 영원한 똥캐라는 건가. 또 하향 먹었네.”

패치 노트를 확인하자마자 보이는 내 주력 직업, 광전사의 하향 소식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것도 유일하게 믿고 있던 스킬의 대미지가 너프를 먹은 것이다. 안 그래도 낮은 방어력과 HP로 물몸 소리를 듣는 직업인데, 주력 스킬까지 너프 먹이는 건 너무하지 않나. 이게 관짝에 집어넣어서 더 이상 소생시키지 않겠다는 뜻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애정으로 키웠지만 심각해도 너무 심각한 상태에 슬슬 새 직업을 찾아야 하나 고민하게 됐다.

새로 한다면 어떤 직업을 고를까, 그런 고민을 하며 그인을 마친 나는 곧장 게임에 접속했다. 프리지아의 로고가 나오고, 내 캐릭터인 ‘곧죽을놈’을 선택하자 로딩이 시작되었다. 수 초 정도 되는 로딩이 끝나자 광활한 맵에 캐릭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드디어 게임에 돌아왔구나. 내 마음의 안식처!

들뜬 마음으로 밀린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 이동하던 나는 띠링, 하고 울리며 들어온 귓속말을 확인하고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귓속말/베타>곧죽을놈: 뭐야뭐야]

[귓속말/베타>곧죽을놈: 곧죽이 복귀하는 거야??]

[귓속말/곧죽을놈>베타: ㅇㅇ 오늘부터 복귀]

[귓속말/베타>곧죽을놈: 멘퀘 엄청 나왔던뎈ㅋㅋㅋ고생 좀 하겠네 다 하고 던전 가자]

[귓속말/곧죽을놈>베타: ㅇㅋㄷㅋㅇ]

메인 퀘스트가 많이 나왔다고? 밸런스 패치 쪽만 확인하고 들어와서 업데이트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복귀하자마자 해야 할 정도로 스토리가 잘 나왔나? 아니면 메인 퀘스트를 깨야 열리는 던전이 생긴 건가?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메인 퀘스트 위치를 확인한 후 곧바로 진행에 나섰다. 퀘스트 난이도 자체는 쉬운 축에 속했다. 아무렴, 라이트 유저들을 생각했다면 쉬워야 정상이지.

1인 인스턴스 던전까지 완료하며 차례차례 퀘스트를 진행해 나가던 나는 이윽고 나타난 한 장면에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스토리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최고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NPC 캐릭터인 알타니아가 주력으로 나오는 스토리라니. 최애가 나오는 스토리가 최고지 다른 게 최고겠는가.

붉은 장발에 오로지 능력 하나만으로 연합군장 자리에 오른 여전사 알타니아는 시도 때도 없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부려 먹기만 하는 여타 NPC들과 달리 플레이어를 배려해 주고 받쳐 주는 최고의 NPC였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녀를 좋아하는 유저가 수두룩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알타니아가 처음 등장했을 때 팬아트 게시판이 그녀로 도배가 되었을까. 비록 0과 1로 된 그래픽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스토리상 나오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멋있었다.

[귓속말/곧죽을놈>베타: 아니 미쳤나??? 하ㅜㅜㅠ알타니아가ㅠㅠㅠㅠㅠㅠㅠㅠ메인 스토리였냐고ㅠㅠㅠㅠㅠㅠ!!!!!]

[귓속말/곧죽을놈>베타: 와 씨 ㄹㅇ 오진다 봤냐? 이게 내 최애임;;;]

[귓속말/베타>곧죽을놈: ㅋㅋㅋㅋ끝까지 보셈 개쩜 ㅇㅇ 님 진짜 지12랄한다에 올인할 수 있음ㅇㅇㅇ]

그 정도란 말이야? 베타 누나의 말에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끌어안고 스토리를 마저 진행했다. 퀘스트가 진행되는 내내 대활약을 펼치는 알타니아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정말,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구나. 알타니아 최고.

제 몸보다 큰 대검을 꺼내든 그녀의 녹안이 붉게 빛났다. 광전사의 주력 스킬인 ‘폭주’였다. 내가 얘 때문에, 오로지 이 모습 때문에 그 구리다고 욕먹는 광전사에 올인했지. 알타니아가 폭주를 쓰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홀린 듯 픽했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때, 돌연 화면이 전환되며 웬 총을 들고 있는 처음 보는 스타일의 NPC가 튀어나왔다. 시커먼 가면에서부터 꺼림칙한 기운이 풀풀 풍긴다. 저 새끼 아무리 봐도 뭔가 있는 새끼인데? 나중에 굵직한 역할을 맡는다든가, 뭐 그런 건가? 그나저나 우리 알타니아가 본격적으로 활약을 한다는데 왜 갑자기 화면 전환을….

“아, 잠깐만. 설마… 아니지……?”

누가 그저 헛된 망상이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거라고, 네가 본 건 환상이니까 어서 잠에서 깨어나라고 멱살을 붙잡고 흔들어 줬으면 좋겠다. 키보드에서 손을 뗀 나는 양손을 뻗어 모니터를 붙잡았다.

총을 장전한 가면의 NPC는 딱 봐도 야비한 미소를 짓더니 정확히 알타니아를 노리고 총을 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슬로 모션으로 날아갔다.

하필이면 저격수가 숨어 있는 장소가 확인되지 않는 사각지대에 위치하던 알타니아는 총알이 날아오는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그대로 총에 맞아 쓰러졌다. 경악한 표정의 곧죽을놈이 무기를 버리고 달려가 쓰러진 알타니아를 부축했다. 알타니아는 그런 곧죽을놈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힘없이 늘어지며 생을 마감했다. 곧죽을놈이 오열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눈을 깜빡일 수가 없었다. 아니, 일순간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입술이 잘게 떨린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언어를 상실한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순간 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며 키보드를 적셨다. 그렇게 한 방울이었던 눈물은 한 줄기가 되었고,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진짜 내가, 엄청 아꼈는데. 알타니아 하나만 보고 이 게임을 했던 건데, 이걸 이렇게 뒤통수를….

[외치기/곧죽을놈: 스토리 누가 짰냐]

[외치기/곧죽을놈: 스토리짠새12끼당장튀어나와]

[외치기/Angel: 저거저거 그거 봤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외치기/본좌: 님 아직 스토리 안 본 사람 있으니까 스포 자제좀;;]

[외치기/곧죽을놈: 닥치고 스토리 짠 새ㅐ12끼 밤길 조심해라]

[외치기/곧죽을놈: 길가다 뒤통수 치면 난 줄 알어 시ㅣ12바라마]

[외치기/베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너 나 우리 모두의 첫사랑 알타니아가 그렇게 떠나가 버렸는데 지금 웃음이 나온다고? 나랑 싸우자는 거야?

[외치기/곧죽을놈: 웃어? 웃음이 나와?]

[외치기/영용융앵양: 아 스포하지 말라고요;;;]

[외치기/영용융앵양: 안 본 뉴비 잇다고;;]

[외치기/곧죽을놈: 웃은 새ㅐ기 다 나와 결장에서 붙자]

[외치기/베타: ㅅ12ㅂ 저 힐러인데 결장에서 붙는 건 에바 아닌지용]

[귓속말/베타>곧죽을놈: 너 찐으로 화났니???? 아니... 난 걍...]

[귓속말/베타>곧죽을놈: 님 반응이 웃겨서...]

[귓속말/곧죽을놈>베타: 하...나 지금입에서말이안나와말이안나온다고말이]

[귓속말/곧죽을놈>베타: ㅇ게어떻게이렇게될수있어어떠헤알티니아가그렇게돼]

“아니, 어떻게! 알타니아를! 그 인기 많고 멋있는 알타니아를! 어떻게 내 최애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 있냐고! 어떻게! 어?!”

신규 캐시 아이템 나왔다 하면 호갱처럼 다 사 재꼈는데! 내가 지금까지 여기에 지른 돈이 얼만데! 내가 너네 회사 기둥을 세 개는 세워 줬을 거다! 알바 뛰면 받은 돈 다 여기다 꼬라박으며 정작 나는 라면만 먹고 살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나는 죄 없는 책상을 내리치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후……. 여러 차례 숨을 내뱉으며 화를 누르려 애썼지만 도무지 가라앉질 않았다. 아니, 어떻게 진정할 수가 있어. 내 최애가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요단강을 건넜는데 어떻게 진정을 해. 내가 이 상황에서 진정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진작 머리 밀고 절간에 들어갔지, 현생을 살고 있겠어? 그때, 핸드폰이 울리며 톡이 날아왔다.

[김재형: 똑똑?]

[김재형: 박정우씨?]

[김재형: 종강기념술ㄱ?]

[김재형: 애들 모이기로 했는데]

[ㅗ]

[김재형: 싫으면 싫다 하지 왜 욕을 ㅎㅎ;]

[김재형: 인성파탄낫내 ㅎㅎ^^]

술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지금 술이 들어가게 생겼…기는 한데, 집에서 혼자 깡소주를 깠으면 깠지 밖에 나가서 동기들이랑 하하 호호 웃으며 마실 기분은 아니었다.

“아아아… 진짜 X발…….”

마지막에 나왔던 NPC가 뭐였더라. 총 쓰는 새끼. 그래, 그 총 쓰는 새끼가 제일 문제였던 거다. 그 새끼만 아니었으면 알타니아는 아직도 그 붉은 장발을 휘날리며 전장에 서 있었을 거라고. 고로 총 쏘는 새끼가 나쁜 거다.

[귓속말/곧죽을놈>베타: 누나]

[귓속말/베타>곧죽을놈: ㅇ??]

[귓속말/곧죽을놈>베타: 총쏘는 새12끼 누구임?]

[귓속말/베타>곧죽을놈: 아 그거 거너 이번에 새로 나온 직업임 ㅇㅇ...]

거너, 거너라. 나는 재빠르게 홈페이지에 들어가 직업 페이지를 확인했다. 떡하니 나와 있는 거너라는 두 글자에 혈압이 급격히 치솟기 시작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랬다고, 일단 뭐 하는 직업인지부터 확인한 다음 다 죽이고 다닐 것이다.

글자 하나하나를 곱씹고 스킬 영상을 돌려 보며 성능을 파악했다. 평소 들어가지 않는 자게까지 들어가서 확인하니 신규 직업이라 버프를 받아서 밸런스 파괴범 수준의 딜량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괜찮아. 쟤도 어차피 너프 먹어. 그리고, 거너의 딜이 좋아 봤자 그냥 안 맞으면 되는 일 아닌가? 애초부터 공격에 맞지 않는다면 뛰어난 딜량도 쓸모가 없어지기 마련이다. 나는 거너들이 사용할 법한 무빙 스킬들을 쭉 훑으며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페이지 정독을 마친 나는 깊게 숨을 마시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미 나온 스토리는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대로 납득하고 넘어가자니 속에서 울화통이 터지다 못해 화산이라도 폭발할 지경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무엇이냐.

“거너 새끼들, 다 죽었어.”

치졸하다고 해도 상관없다. 졸렬하다고 욕할 거면 욕해라. 내 최애를 죽인 놈을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는데 어떡하라고? 범인이 메인 스토리에 나오는 NPC라 죽일 수 없다면 차선책으로 같은 직업군이라도 죽여야 내 속이 좀 풀리지 않겠는가. 그냥 새로 나와서 한번 해 보게 된 유저들은 뭔 죄냐고? 알타니아를 죽인 직업을 픽한 죄다. 눈에 보이는 거너란 거너는 싸그리 싹싹 PK해 버리겠어.

그리고… 겸사겸사 떠날 때도 됐지. 알타니아가 죽길 바란 적은 없지만, 여러모로 타이밍이 절묘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버튼을 클릭했다.

[곧죽을놈 님이 신화 길드를 탈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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