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7. ???, ???, 오메가
겨울이 되었다. 수민은 정 목사와 마지막 상담을 했다.
그간 상담 간격이 점점 넓어지긴 했으나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정 목사는 다른 일로 바쁘면서도 수민과의 상담을 계속 이어 갔다. 그는 여전히 수민의 상태를 불안해했다. 그랬던 정 목사가 ‘마지막’을 언급했다. 수민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정 목사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나 찾아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목사님께서 바쁜 시간을 내주신 거죠. 감사합니다.”
수민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요 몇 달, 정 목사에게 좀 꿍한 감정이 없잖았다. 상담만 하면 인혁을 욕하니 좋은 마음이 생길 수 없었다.
그런데도 티 내지 않은 건, 정 목사를 만나러 갈 때마다 인혁이 잘 다녀오라고 배웅해 주며 당부한 말 때문이었다. 못났어도 어른이니까,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오라고.
인혁의 말 때문에 예의를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정 목사는 인혁을 욕하기 바빴다. 그동안은.
“그런 얼굴로 이런 말도 할 줄 알게 됐는데, 이젠 날 그만 봐야지.”
“…….”
“김 소장, 그 사람 하는 행동이 썩 성에 차진 않아도 설마 제 아들뻘인 아이를 건드리고, 그런 개잡쓰레기일 줄은 몰랐는데.”
“…….”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오늘은 욕하려는 게 아니니까. 지금도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닌데 지금 수민 군 모습 보면, 또, 뭐…… 김 소장, 그 사람이 사람은 나쁘지 않으니까. 속 깊고, 정도 깊고.”
정 목사는 뭔가를 내려놓은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웃어도 웃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수민은 정 목사의 다채로운 표정 변화를 가만히 구경했다.
“잘 살아요, 행복하게.”
상담 후 정 목사가 문 앞까지 배웅 나오며 손을 내밀었다.
“네.”
수민은 그 손을 잡고 악수했다.
정 목사는 빈말로라도 놀러 오라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처음 수민의 상담을 맡았을 때와 다르지 않은 태도였다. 일 년 넘게 봐왔건만, 그는 정 없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관계를 잘라 냈다.
수민은 그게 정 목사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수민 같은 아이가 정 목사를 다시 만나는 건, 사는 평생 다신 있어선 안 될 일일 테니까.
수민은 건물을 나오며 코트를 여몄다. 인혁이 사준 것이었다. 상담받으러 다녀온다고 하니, 따뜻하게 잘 다녀오라고 직접 옷깃을 여며 주기도 했다.
옷깃에 살풋 묻었던 인혁의 냄새는 사라졌지만, 수민은 그래도 코트 깃에 뺨을 문질러 보았다.
하아. 하얀 입김이 났다. 인혁이 보고 싶었다.
수민은 빠르게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수민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양복에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반들반들 윤이 나는 구두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
“잠깐이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접촉하면, 안 되지 않나요?”
“그렇긴 합니다만. 꼭 말씀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수민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선량해 보이는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공익 생활 중에 봤던 공무원이었다. 수민의 취조 담당이었는데, 수민이 말을 할 때마다 자꾸 울었다. 그래서 수민은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이 사람이 내 감시자였던 거구나.
그렇게 울어 줬으면서. 고시원 옆방의 알파가 문고리를 부수고 들어와 수민을 덮칠 때에도, 수민이 사무실에 침입한 괴한에게 습격받을 때에도,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지켜보는 것뿐이라는 듯.
수민은 늘 그의 존재를 느꼈으나 그래서 그의 존재를 굳이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눈앞에 나타난 걸까.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듯 동정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수민은 벌레가 팔과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자리를 옮기실까요?”
“네.”
하지만 순순히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는 근처 카페로 갔다. 평일 낮 시간이라 안은 한산했다. 남자와 수민은 음료를 주문하고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음료를 받아올 때까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커피를 가져와 수민의 앞에 놓고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꼭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어서…… 오수민 씨가 말한 것처럼 원칙대로라면, 저랑 오수민 씨는 절대 마주치면 안 되지만…… 제가 독단으로 저지른 일입니다.”
남자는 할 말을 미리 생각해 두지 않은 건지 횡설수설했다. 수민은 카페를 둘러보고, 탁자 위를 본 후 남자를 티 나지 않게 훑어보았다. 그렇게 만약의 상황을 가정해 어떻게 행동할지 계획했다.
“제가 당신 윗선에 이 사실을 알리면 어떡하려고요.”
다른 생각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숨을 고르고,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 알릴 수단이 없으실 겁니다. 오늘이 정 목사님과 마지막 상담이셨잖습니까. 그리고 설사,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걸 보시면 윗선에 절 찌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실 겁니다.”
남자가 코트 안쪽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에는 두 번 접은 종이가 두툼하게 들어 있었다. 그걸 수민에게 내민 남자는 가타부타 말없이 제 몫의 커피를 마셨다.
수민은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펴보았다. 표 안에 영어와 숫자 조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지막 장에는 친절하게도, 결과를 한글로 알아보기 쉽게 써놓았다.
“익명으로 진행한 거라 이름이 다릅니다. 이쪽이 수민 씨. 이쪽이 김인혁 씨입니다.”
남자는 친절하게도 손으로 짚어 가며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인혁이 고용 계약서를 그렇게 설명해 줬을 때만큼 고맙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였다.
왜에는 여러 가지 질문이 덧붙었다.
왜 이런 걸 검사한 거지?
왜 이걸 나한테 보여 주는 거지?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거지?
왜 하필, 지금.
“저 같은 아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런 검사를 필수적으로 하는 건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
그럼, 왜.
수민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수민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상관, 정훈이라는 공무원에 비하면 너무도 유약하고 무른 태도였다. 하지만 수민은 그를 동정하거나 괜찮다는 말로 그의 불편한 마음을 덜어 내주지 않았다.
세상의 죄는 외향적이고 강인한 성품을 지닌 인간만의 특권은 아니었다. 연약하고 여린 사람도 얼마든지 한 사람의 행복을 무자비하게 짓밟을 수 있다. 훨씬 음침하고 치졸하게. 바로 지금처럼.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건은 제 독단으로 진행한 겁니다.”
그저, 독단으로.
“보호 감찰 시에 감시자는 주변의 평판과 소문을 바탕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한과 의무를 지닙니다.”
감시받는 당사자인 수민이 허락한 적 없는 권한이고 의무였다.
“오수민 씨는 김인혁 씨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으셨을 겁니다. 자주 가족이냐고 의심 받으셨었구요.”
“…….”
좋아하면 닮는 거라고 했으니까. 수민은 서 여사에게 말한 것을 남자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저 역시 두 사람이 닮은 것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습니다.”
매일 감시했다. 항상 지켜봤기에 더 눈에 띄었다.
“최근에 특히요.”
웃는 얼굴이, 이전까지 전혀 만난 적 없는 남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닮아 보여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외모가 특출나게 닮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위기나 태도, 행동하는 방식, 식습관 등에서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비슷한 점을 발견했고.”
“그래서, 인가요?”
“네. 확실하게 해둬야겠다는 생각에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설마, 진짜로 이런 결과가 나오랴 싶었다. 당연히 불일치할 거라고 생각했고, 나중에 비용 처리해 올릴 때 정훈에게 딱 걸려 한 소리 들을 각오도 했다.
‘의심할 걸 의심해야지, 피 같은 세금을 이딴 데 낭비해? 넌 공무 집행비가 장난으로 보여? 이게 어디서 막장 드라마를 보고 와서 현실이랑 드라마를 구분도 못 하고 지랄이야, 지랄이.’
생각만으로도 귀가 얼얼해지는 것 같았다. 조직 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겠지. ‘야, 니가 그 빡대가리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기어이 밀어붙였다. 어떤 직감이 들면, 절대 무시하지 말라는 게 정훈의 가르침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가르침은 옳았다.
그러니 두 번째 가르침 ―절대 감시 대상에게 정을 붙이지 말 것― 도 흔들림 없이 따라야 하겠으나, 남자는 그러지 못했다. 남자는 정훈에게 보고하는 대신 수민과 접촉했다.
걸리면 징계감이었다. 남자는 징계를 불사하고 눈앞의 이 청년을 동정했다.
‘함부로 동정하지 마. 그건 우리 몫이 아니야.’
정훈의 목소리가 생생했으나 남자는 애써 외면했다.
“저도 무척 당황스럽고, 어…… 죄송합니다.”
이게 사과해야 할 일인지, 남자는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숙였다.
“…….”
그를 내려다보는 수민의 무표정한 얼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일을 멋대로 저지르고 나서 퍽 미안하게 됐다는 양 얼굴을 구기고 고개를 숙이면, 용서해 줘야 하는 걸까? 이 사람은 너무 착하고 나약해서 제멋대로 일을 저지른 것뿐이니까, 라고?
그럴 수 있을 리가.
나약한 성품과 죄의 무게는 다른 분류였다.
수민은 제게 이딴 걸 내민 주제에 유약한 태도를 내세워 면벌부를 얻으려 하는 남자가,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오수민 씨와 김인혁 씨가 어떤 관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감시하며 지켜봤고, 두 분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걸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수민은 생각했다.
남자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수민은 그 표정이 무척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이걸…… 또 누가 아나요?”
수민이 서류를 움켜쥐며 물었다.
“아직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네. 아직은.”
“그렇군요.”
수민은 다시 서류를 확인했다. 그새 종이에 새겨진 글자가 바뀔 리 없건만. 수민은 마지막 장 하단의 붉은 글씨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남자는 그런 수민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내근직이던 그가 굳이 수민의 감시자가 된 것은, 그의 의지이기도 했다. 어차피 한 번은 돌아야 하는 외근직. 계속 눈에 밟혔던, 피해자 아이를 지켜보고 싶었다. 이미 그때부터 마음이 흔들렸던 건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방관자여야 했기에 수민이 여기저기 떠돌며 험한 일을 겪어도 지켜만 봤다. 세상이 넓고도 좁다더니. 하필이면 인혁과 엮여 그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을 땐, 사무실 사람들을 의식해 좀 더 거리를 두고 감시하면서도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오범연과 남자가 속한 조직은 사이가 안 좋았다. 조직은 은밀하게 움직이는 편이었다. 때문에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며 일을 크게 벌이는 오범연을 잔칫집에 찾아드는 비루먹은 개쯤으로 여겼다. 오범연 쪽은 아마 자신들을 세금이나 축내는 게으름뱅이 정도로 여기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수민이 인혁의 사무실을 다니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인혁과 동거하게 됐을 때는,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그로 인해 수민이 이제야 정착하고 사람답게 사는 것 같아서.
그런데 하필, 하필이면.
남자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수민이 고개를 들어 그런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남자는 조직에 끌려와 취조받던 수민, 아니, 진영을 떠올렸다. 딱 그때의 모습이었다. 요즘 계속 웃고, 표정이 밝아져서 안심했는데.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만들어 버렸다.
차라리 모른 척 넘겼더라면. 멋대로 유전자 검사 따위 하지 말고 그냥 찜찜한 기분을 흘려보냈더라면 어땠을까. 후회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나요.”
“신변을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가실 생각이라면 거기까진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남자는 오로지 선의로 말했다.
“…….”
수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 역시 당장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기에 섣불리 보채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수민이 서류를 다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남자는 진심으로 수민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동정심은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 숙인 수민의 눈이 어떤 빛을 띠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김인혁 씨에게는…….”
남자가 말을 흐렸다.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럴 거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할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수민 씨만 더 괴로워질 겁니다.”
“네.”
수민이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검은 눈이 남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눈가에 반짝이는 건 분명 눈물이리라. 남자의 마음은 한없이 약해졌다.
“이 서류는,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그러세요.”
“사본이 따로 있거나 하지는 않나요?”
“없습니다. 그게 유일한 증거니까. 안심하십시오.”
“…….”
수민은 말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런 수민을 이해했다.
“이 일은 윗선에 보고하지 않을 겁니다.”
“네.”
수민은 서류를 챙겨 일어났다. 남자는 망설이다 한마디를 더 건넸다.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위에서 곧 보호 관찰 해제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수민이 남자를 돌아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네.”
***
수민은 카페에서 나와 근처 편의점에서 라이터와 담배를 샀다. 그리고 화장실이 어딨는지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어보았다.
일인용의 좁은 화장실엔 아무도 없었다. 수민은 문을 잠그고 서류를 태워 변기에 흘려보냈다. 굳이 다시 펴보지 않았다. 라이터와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담배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왔던 길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갔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인혁이 보이지 않았다. 수민은 인혁이 평소 신는 신발이 현관에 놓여 있는 걸 확인했다. 신발장을 열어 다른 신발이 없어졌는지도 확인했다. 그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혁은 소파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책을 보고 있었던 건지 가슴에 책이 엎어져 있었다. 한 손은 머리 뒤로 두른 채로 얇은 담요 한 장 걸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수민은 어렵지 않게 상황을 이해했다. 아마 자신을 기다리며, 소파에 기대 누워 책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잠든 거겠지.
맛있는 냄새가 났다. 주방을 들여다보니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국그릇, 밥그릇만 비워져 있었다. 수민이 도착하면 바로 따뜻한 밥과 국을 퍼서 저녁을 차려 줄 생각이었던 걸까.
수민은 코트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지고 인혁에게 갔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잠든 인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인혁이 숨을 내쉴 때마다 인혁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편안하게 잠든 인혁을 보고 있자니 어깨가 내려앉았다. 수민은 자신이 내내 긴장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수민은 책을 치우고, 책을 덮고 있던 인혁의 손을 잡아 뺨에 문질렀다. 따뜻하고 거칠었다.
“으음. 다녀왔어?”
인혁이 눈을 떴다. 완전히 잠에서 깬 건 아닌지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네. 다녀왔어요.”
“내가…… 깜빡 잠들었나 보다.”
“괜찮아요.”
“괜찮긴, 기다렸는데.”
인혁이 하품하며 수민의 뺨을 어루만졌다.
“차갑네. 추웠겠어.”
인혁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음…….”
“네. 그러니까 따뜻하게 해주세요.”
수민은 인혁의 팔에 매달리며 그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인혁이 작게 웃었다.
“진짜, 많이 추웠구나.”
“네.”
“이리 와.”
인혁이 수민을 잡아끌어 제 몸 위에 눕혔다. 그리곤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다. 수민은 인혁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소파는 두 사람이 몸을 겹쳐 눕기엔 좁았다. 그래서 좋았다. 떨어지지 않으려면 서로를 꽉 끌어안아야 하니까.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점점 느릿해지더니 멈췄다.
“주무세요?”
“아니…….”
“정말로요?”
“…….”
숨소리만 들렸다.
수민은 고개를 들어 잠든 인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깨워서 입을 맞추고, 더 세게 안아 달라고 조르고 싶었다. 아니, 굳이 깨우지 않아도 된다. 아래로 내려가 인혁의 바지를 벗기고 성기를 입에 물면 인혁은 금방 눈을 뜰 테니까. 놀라겠지만 이내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달려들겠지.
온몸을 핥아 주고 성기를 아래에 넣어 줄 것이다. 몸을 맞대고, 성기를 넣었다 빼며 기분 좋은 곳을 찔러 주고, 안에 잔뜩 싸줄 것이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아니면 진땀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 것이다. 버린 게 아니라고, 말해 주겠지. 사랑한다고,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내 지난 20년은 오직 널 위한 거였다고.
그 끝나지 않을 속죄는, 사실 제 것이었다는걸. 수민은 깨달았다.
밤중에 꿈에서 깨 괴로워하는 인혁도, 절 안고 성기를 박아 대며 더운 숨을 내뱉는 인혁도, 모두 다 수민의 것이었다.
수민은 이제 더는 인혁이 제 아들을 찾고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영원히 못 찾을 테니까.
그는 지난 20년간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평생, 가족을 찾아 헤맬 것이다. 그래야만 할 것이다.
수민은 인혁이 계속 그러기를 바랐다.
자신과 인혁은 이제 그만하자는 인혁의 말 한마디면 쉽게 끊어질, 얄팍한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수민과 인혁은 그 누구보다 깊은 관계였다. 누구도 훼방 놓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설사 신이라 할지라도 끊어 낼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인혁은 앞으로도 계속 가족을, 아들을 찾아 헤맬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제나 수민이 함께할 것이다.
그 사실에, 수민은 전율했다.
한 번, 단 한 번 외면했을 뿐이다.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버리는 줄도 모르고 버렸을 뿐이다.
그 대가로 인혁은 영원히, 자신의 아들을 찾지 못할 것이다. 수민은 그의 갈구와 절망, 슬픔과 일상, 그의 영혼과 정신, 그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고.
수민은 어쩌면 자신이 아직도 인혁을 원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만큼, 그 이상으로 인혁을 사랑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계속, 어제와 같은 오늘이, 오늘과 같은 내일이 이어질 것이다.
앞으로도 인혁은 계속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간혹 자다 깨어나 괴로워할 것이고 평생 가족을 찾아 헤맬 테고.
그래서?
그게 무슨 문제가 될까?
자신이 계속 옆에 있을 텐데. 괜찮다고 말해 주며 안아 주고 다시 재워 줄 건데.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인혁은 언제나 헤맬 것이고, 자신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을 테니까.
수민은 인혁의 턱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다시 그의 가슴에 엎드렸다. 인혁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수민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웃었다.
***
두 사람은 애매한 시간대에 눈을 떴다. 잠에서 깬 인혁은 제 위에 얌전히 누워 눈만 깜빡이고 있는 수민을 보고 웃음 지었다. 수민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늦은 저녁을 먹고,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뭘 해야 하나 고민했다. 언제 날 잡아서 보기로 했던 영화를 한 편 보고도 시간이 남았다.
또 뭘 할까? 묻는 인혁에게 수민이 입을 맞췄다. 인혁은 제가 할 필요 없는 질문을 했음을 인정했다.
“내일, 출근해야 되는데. 괜찮겠어?”
걱정되는 건 그거 하나였다. 그마저도 정말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이미 수민을 다 벗겨 침대 위에 올려놓고, 다리를 벌리게 해 성기를 빨아 주고 있으면서. 인혁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수민이 얄밉다며 인혁의 목을 늘씬한 두 다리로 감쌌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물고 빨다 천천히 아래를 벌리고 삽입했다. 수민은 여전히 버거워했다. 인혁은 몇 번이고 깊게 키스하며 느릿하게 허리를 털었다.
인혁과 수민은 서로의 달뜬 숨을 받아먹으며, 장난스럽게 코를 비볐다. 뺨에 뽀뽀하고, 말랑한 엉덩이를 주물렀다. 탄탄한 가슴을 더듬고, 상대방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몸 여기저기에 입 맞췄다.
인혁이 깊게 성기를 박으며 수민의 목을 핥았다. 수민은 몸을 움츠리듯 떨며 신음했다.
땀에 젖은 몸이 부딪칠 때마다 달라붙는 것 같았다. 수민은 제가 아예 녹아내려 인혁의 몸에 달라붙으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무슨 이유에서든, 아무도 제게서 인혁을 떼어 내지 못할 테니까.
“갑자기, 조이면…… 수민아.”
인혁이 이를 악물더니 빠르게 허리를 털었다. 수민은 발꿈치로 바닥을 밀며, 인혁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수민이 참지 못하고 몸을 뒤집었다. 인혁의 몸 위에 올라타 위아래로 허리를 흔들며, 인혁의 어깨에 난 손톱자국을 혀로 핥았다. 인혁이 낮게 신음하며 퍽퍽 성기를 쳐올렸다.
절정의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얼굴을 움켜쥐고 키스했다.
수민의 배 속에 뜨거운 열기가 퍼졌다. 그래도 인혁은 계속 허리를 쳐올렸다. 수민은 몸서리치며 몇 번째인지 모를 절정에 몰려 사정했다.
“더요, 더 해줘요. 소장님.”
수민은 자꾸 인혁에게 매달렸다. 인혁은 그런 수민을 끌어안고 계속 입 맞췄다.
침대를 엉망으로 만들고 나서야 열기가 지나갔다. 인혁은 축 늘어진 수민을 안고 욕실로 데려가 씻겼다. 아래쪽에도 손가락을 넣어 정액을 긁어냈다. 수민이 예쁘게 울었다. 우는 소리가 욕실 가득 울렸다. 인혁은 참지 못하고 수민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둘은 한참 뒤에야 수민의 방 침대에 누웠다.
수민이 추울까 봐 두꺼운 이불로 돌돌 감싸 껴안으며, 인혁은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애매하게 푹 자서 다시 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수민을 안고 있으니 다시 잠이 솔솔 밀려왔다. 인혁은 먼저 잠든 수민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수민을 등 뒤에서 꽉 끌어안은 채 잠들었다.
인혁의 숨이 깊고 느려지자 수민이 눈을 떴다. 자다 일어난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수민은 꾸물꾸물, 이불 밖으로 몸을 빼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보다 훨씬 쉽게 이불을 벗었다.
어둠 속에서 맨몸이 희게 빛났다. 협탁에 켜져 있는 무드 등이 은은하게 수민의 몸을 비춰 주었다. 수민은 제 몸에 난 인혁의 흔적을 손으로 더듬더듬 만져 보다가,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엔 두 사람이 벗어 던진 옷이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다.
수민은 그것들을 도로 주워 입었다. 셔츠와 바지, 양말까지 꿰입었으나, 바닥에 떨어진 코트는 줍지 않았다.
얇은 차림을 한 채로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에 붙어 있는 화장실엔 작은 창문이 나 있었는데, 바로 밖으로 통했다. 창문 밖은 큰 나무로 시야가 가려져 있었다. 겨울이라 가지가 앙상해 몸을 완전히 가릴 순 없지만, 근처에 CCTV가 없어 벽을 타고 내려가기 좋았다.
찬 바람이 얇은 옷을 뚫고 파고들었다. 몸에 묻어 있던 인혁의 냄새와 온기가 한순간에 날아갔다.
수민은 뼛속까지 시린 추위를 가르며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CCTV를 피해 움직이며, 늘 거슬렸던 기척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시간이 없었다. 빨리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저쪽에서 알아채지 못하게 접근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했다. 수민은 조급해지지 않으려 애쓰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오수민의 이력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어떤 기억.
038은 화려한 걸 좋아했다. 늘 타깃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죽였다. 그 화려함에 매료된 교단은 진영에게도 그 방법을 강요했다. 그래서 진영은 명령을 따랐다. 하지만 진영은 그런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굳이 타깃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걸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진영은 늘 의문이었다.
진영이 선호하는 방식은 조용히, 은밀히 죽이는 것이었다. 타살이지만 타살인 줄 모르게. 필연적인 고의로 인한 것이나 우연적인 사고처럼 보이게. 그건 진영이 가장 자신 있어 하고,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은 제 등 뒤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른 채 전방만 주시하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
화장실에 갔다 돌아왔다. 입었던 옷은 도로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맨몸이 차가웠다. 수민은 인혁이 깰까 봐 바로 침대에 눕지 못하고, 그 앞에 섰다.
그런데도 찬 기운이 기어이 닿은 걸까. 인혁이 뒤척이다 제가 속 빈 이불을 안고 있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곤 서 있는 수민을 발견하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거기서, 뭐하니.”
“화장실 다녀왔어요.”
“그래?”
인혁이 수민을 잡아끌었다. 품에 안자 서늘한 기운에 몸이 오싹해졌다.
“왜 이렇게 차가워.”
안쓰러워하며 수민의 몸 위로 이불을 잔뜩 덮어 주었다. 수민은 가만히 있었다.
“더 자자.”
인혁이 수민을 안은 채로 등을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본인이 먼저 잠들었다.
수민은 눈을 감고 인혁의 숨소리를 듣다가 한참 뒤,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는 짜장면이 먹고 싶어요.”
인혁이 제일 먼저 사준 것.
그것이면 족했다.
***
반십교 피해자 #.008의 감시자가 사고사했다.
업무 중 일어난 사고사기에 담당 부서가 파견되어 조사했으나,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늦은 밤중 일어난 일이라 목격자 확보가 불가능했고, 정황상 타살의 가능성은 없었다. 부검 결과도 깨끗했다. 감시 대상의 알리바이도 명확했다.
담당 부서는 해당 요원을 순직 처리했다. 순직하기엔 이른 나이였다.
정훈은 담당 부서에서 올린 보고서를 받고 며칠간 저기압 상태로 조직을 누볐다. 누구도 기분이 다운된 이 구역 미친개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반십교 피해자 #.008에겐 임시 감시자가 붙었다. 어차피 보호 감찰 해제 예정이었기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임시 감시자가 붙고 한 달 뒤. 반십교 피해자 #.008에게 정식으로 보호 감찰 해제 명령이 떨어졌다. 임시 감시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보호 종결을 알리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정훈은 제가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섰다.
정 목사에게서 마지막 상담 때 두고 간 물건을 찾았는데 가지고 가라는 연락이 왔다. 수민은 놓고 간 것이 없었고, 정 목사는 다음번의 만남을 기약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수민은 조직에서 절 호출한 것임을 알아챘다.
수민은 정해진 날, 정해진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서울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한 3층짜리 프랜차이즈 카페는 평일 오전에도 손님들로 가득했다.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붐비는 그곳에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여어!”
정훈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수민이 다가가자 맞은편에 앉기를 권하곤 지갑을 들고 일어섰다.
“일단 마실 것 좀 시키고 이야기하자. 여긴 한 사람당 한 잔씩은 시켜야 해서.”
“네.”
“뭐 마실래?”
“뭐든 좋아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제일 곤란하던데. 아메리카노, 괜찮지?”
“네.”
수민이 따라 일어서려고 하자 자리나 지키고 있으라며 말렸다. 수민은 도로 자리에 앉아 정훈을 기다렸다.
“커피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네.”
“축하해. 보호 감찰 해제 명령이 떨어졌어.”
“…….”
“안 놀라네?”
“놀라야 하나요?”
“뭐, 보통은.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으면 다들 그러지 않나?”
“그쪽에서 저를 찾아올 정도면, 큰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연락을 받았을 때 이미 놀라서 지금은 별로 놀랍지 않아요.”
수민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 보고서 대로네. 많이 좋아졌어.”
정훈은 사람 흉내를 곧잘 내는 남의 집 로봇 청소기를 보듯 감탄했다.
“이제 진짜 사람 같은데?”
그럼 그 이전엔 사람이 아닌 걸로 보였다는 걸까? 수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서류를 주고 나중에 천천히 읽어 보라고 하면 좋을 텐데, 우린 그런 거 남기면 안 돼서 말로 하니까. 잘 들어 둬.”
정훈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아 말을 이었다.
이제 전담 감시자가 붙진 않지만, 그래도 완전히 남들과 똑같아진 건 아니다. 만약 거주지 주변에서 범죄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용의자로 의심받을 것이며, 보통의 경찰 수사에 용의자로 잡혀 들어가지는 않지만, 이쪽 조직에 소환되어 따로 조사를 받게 된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거나 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도 다들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기 바빠, 남에게까지 관심을 두진 않았다. 가끔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수민을 힐끔힐끔 돌아보긴 했으나 그건 외모에 대한 단편적인 관심일 뿐이었다.
그래서 정훈은 이런 장소를 선호했다. 어설프게 조용한 곳이 오히려 위험했다.
“그러니까 긴장 늦추지 말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착하게 살라는 말이야. 잔소리는 여기까지고.”
때마침 진동벨이 울렸다.
“잠깐만.”
정훈이 일어나 쟁반을 들고 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차가운 건 정훈의 것, 따뜻한 건 수민의 것이었다. 수민은 뜨거운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정훈은 두 모금 만에 커피를 다 마시고, 뚜껑을 열어 얼음을 씹었다.
“여기서부터는 제안. 절대 강요가 아니고, 그냥 의사를 물어보는 거야.”
“네.”
“불의의 사고로 오메가 기관을 다치거나 적출한 오메가들의 페로몬과 장기를 이식 수술을 통해 되살리는, 그런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출생률과도 관련 있는 문제라 오랫동안 국가에서 공들여 온 거고, 최근에 동물 실험은 안전하게 다 통과했대. 이제 임상 실험만 남았다는데. 원한다면 참여할 수 있는 우선권을 줄 수 있어. 어때?”
“…….”
수민은 손으로 왼쪽 골반을 감싸 쥐었다. 정훈이 눈으로 그 모습을 훑었다. 눈빛이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젯밤에도 이곳에 인혁의 입술이, 혀가 닿았다. 그 흉한 상처 아래엔 망가진 장기가 있다. 아니, 어쩌면 전부 다 적출당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건 그곳은 처참하게 헤집어졌다. 그래서 수민은 오메가이나 베타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히트 사이클을 겪지도 않고, 알파 페로몬을 맡아도 아래가 젖지 않는다. 그래서 인혁은 러트 사이클 때에도 어떻게 해서든 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시간을 들여 수민의 구멍을 빨아 주고 넓혀 주었다.
만약 임상 실험에 참여해서 다시 평범한 오메가가 될 수 있다면.
인혁의 페로몬만 맡아도 구멍이 젖어 흐물대겠지. 그러면 러브젤 같은 걸 사용해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히트 사이클의 열에 달떠 인혁에게 안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혁이 피임약을 먹지 않으면,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생길지도 모른다.
정훈의 제안은 다른 오메가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기회였다. 수민의 처지에 놓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혹할 만한 제안이었다.
왜 이런 달콤한 과실을 내주는 걸까?
그동안 사고 치지 않고 얌전히 사회에 잘 적응한 보상 같은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감정을 흔들어 속을 들여다보려는 속셈일 수도 있겠지.
“…….”
수민은 속지 않았다.
사람은 예상치 못한 행운이나 기회 앞에서 쉽게 방심한다. 방심은 독이다. 마음속에 숨기고 있던 비밀을 쉽게 드러내게 만든다.
수민은 정훈이 저를 감시자의 살해범으로 의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사 정훈이 그런 의도로 제안한 게 아니라 하더라도, 혹은 그 제안만큼은 진실이라 하더라도.
“…….”
수민은 고개를 돌려 근처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가 기운 넘치는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아이는 두 사람을 꼭 닮아 있었다.
남자가 바나나와 마카롱 따위로 시선을 끌며 아이를 돌볼 동안 여자는 편안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면서 남자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남자가 여자에게 빙긋 웃어 보이고는 도망치려는 아이의 뒷목을 잡아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수민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정훈은 수민이 보는 광경을 함께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 젊은 부부의 모습을 보며 제 아내와 아이를 떠올린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것도, 여러 평범한 삶 중에 하나의 선택지야. 힘들지만 나쁘지 않아. 더없이 행복한 삶이지. 좀 빡세긴 하지만.”
유부남으로서의 진지한 조언이었다.
수민은 정훈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제안에 답했다.
“전 괜찮아요.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수민은 절 살피는 정훈의 시선을 느끼고 덤덤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
정훈은 더 권하지 않았다.
“그러면 내 용건은 끝.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고 끝낼게.”
“네.”
“오수민 씨,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
수민이 고개를 갸웃하자, 정훈의 얼굴이 좀 더 부드러워졌다.
“예전에 우리 쪽에 남아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려나?”
“네.”
“그 마음, 변했지?”
“네.”
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러면 정말 내가 해줄 말은 하나뿐이야. 행복하세요, 오수민 씨.”
“…….”
“오수민 씨는 모르겠지만, 내 후배가 네 감시자였어. 얼마 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렇군요.”
수민은 적당히 식은 커피를 마시며 눈을 내리깔았다.
“걔가 좋은 보고서 많이 올려 줘서 보호 감찰이 일찍 풀린 거야. 뭐, 정 목사도 괜찮을 거 같다고 소견서를 써주기도 했고.”
“…….”
“그러니까 오수민 씨는 특별히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 후배도 저 하늘 위에서 행복할 거 같거든.”
“저, 위에서요?”
수민이 눈을 들었다. 까만 눈이 정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녀석이 예수님 믿었어서.”
정훈이 쓰게 웃었다.
그렇게 사이비들을 때려잡고 다녔으면서도, 그의 후배는 신앙을 잃지 않았다. 정훈은 그 믿음 깊은 후배에게 농담 삼아 ‘니네 하나님 예수님은 뭘 하시기에 이 땅에서 인간들이 자신들 이름 팔아 사기 쳐대도 가만 두고만 보는 거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후배는 왜 그걸 자신에게 묻느냐고 억울해했다. ‘제가 하나님 뜻을 알면 여기 있겠습니까? 고만 좀 물어보세요.’ 그러면 정훈은 이렇게 대꾸했다. ‘하긴, 내가 다음번에 잡아들일 사이비 종교 교주가 너였을 수도 있겠구나.’
‘아, 진짜. 팀장님!’하고 소리 지르던 후배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그래서 정훈은 후배의 믿음처럼, 정말로 신이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착하게 살고,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다 갔으니 분명 천국에 갔겠지? 그러니까 저 위에 있을 거야.”
“…….”
수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한 태도를 보며 정훈은 아차 싶었다.
‘내가 사이비 종교 피해자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훈은 작게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다신 보지 맙시다. 잘 살아요. 행복하게.”
짧게 인사하고 쟁반과 빈 컵을 들고 돌아서는데 수민이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감사해요.”
“뭐가?”
정훈이 돌아보았다.
“알려 주신 거요, 행복을 붙잡는 방법.”
“내가?”
“네.”
“내가 언제…….”
정훈은 되물으려다 말았다. 애 앞에서 또 뭔 헛소리를 했겠지 싶었다. 정훈이 기억하기로 반십교 피해자 #.008은 우연히 흘린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잘 기억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러려니 싶었다.
“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행복해지는 데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네. 도움이 됐어요.”
“그래요, 붙잡은 행복. 절대 놓치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행복해요.”
정훈은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리고 카페를 나설 때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수민은 혼자 남아 다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한참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자리를 잡지 못한 커플이 혹시 일어설 예정이시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 사무실로 돌아갔다. 수민이 갈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인혁이 있는 곳.
사무실엔 인혁만 남아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수민은 꾸벅 인사하며 서 여사와 박 씨의 빈 자리를 둘러보았다.
“정 목사 만나고 온 거 아니야?”
“맞는데요.”
“그런데 뭘 하다가 이렇게 늦게 와. 밥은 먹었어?”
인혁은 기분이 조금 나빠 보였다.
“아뇨.”
수민은 인혁의 말을 듣고야 벽에 걸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점심 식사 시간이 반 이상 지나가 있었다. 그런데도 배고픈 줄 몰랐다. 인혁의 말을 들으니 허기가 지는 것도 같았다.
“다들 어디 가셨어요?”
“밥 먹으러 갔지.”
“소장님은요?”
“널 기다렸지.”
“아.”
“아는 무슨. 이 추운 날에 밥도 안 먹고 다니고 뭘 한 거야. 그 영감탱이는, 사람 오라 가라 지 맘대로 부르고는 밥도 안 사줬어?”
인혁이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밥 먹으러.”
“…….”
수민은 밥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왜 인혁이 화났는지 알 것 같았다. 수민은 인혁을 따라나서며, 망설임 없이 그의 팔에 매달렸다.
“소장님.”
“왜.”
“우리 짜장면 먹으러 가요.”
“짜장면? 또?”
“네.”
“요즘 툭하면 짜장면 먹고 싶다고 그러네. 짜장면이 그렇게 좋아?”
“네. 좋아요.”
“내가 탕수육 정도는 시켜 줄 수 있거든? 더 비싼 거 먹어.”
“아니요. 짜장면이면 돼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요즘 왜 그렇게 짜장면만 찾을까. 중국집 하나 사줘?”
인혁이 놀리듯 말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건물을 나서기 전 멈춰 섰다. 수민도 따라 멈췄다.
“잠깐만. 감기 걸리겠다.”
인혁이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러 수민의 목에 둘둘 감아 주었다. 그리곤 앞서 걸으며 손짓했다.
“가자.”
수민은 인혁의 냄새가 가득 밴 머플러에 코를 묻으며, 인혁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더 멀어지기 전에 서둘러 따라잡았다.
다시 겨울이었다.
혼자 앉아 있던 버스 정류장이 저 앞에 보였다. 하지만 수민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수민은 슬쩍, 인혁의 코트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인혁의 웃으며 깍지를 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버스 정류장을 지나쳤다.
버스 정류장이 멀어졌다.
톡.
콧등에 하얀 게 떨어졌다.
“눈이 오나 봐요.”
수민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려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가 죄로 더럽혀진 세상을 하얗게 덮으려는 듯. 눈이 내렸다.
수민은 빈손으로 눈을 잡아 보았다. 눈은 손에 닿자마자 바로 녹아내렸다. 죄를 덮기엔 너무 연약한 눈물이었다.
수민은 금방 흥미를 잃고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아 냈다. 대신 자신이 붙잡은 행복에 매달렸다.
“소장님.”
“응.”
인혁이 다정한 얼굴로 수민을 내려다보았다.
“전, 그래도 짜장면 먹고 싶어요.”
“비싼 거 먹으라니까.”
“짜장면 사주세요.”
“그래, 대신 딴 것도 먹어.”
“딴 거 뭐요?”
“글쎄. 가서 제일 비싼 거 뭔지 보고.”
기어이 비싼 걸 먹이겠다는 인혁의 말을 들으며, 수민이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의 발자국 위로 소복소복 흰 눈이 쌓였다. 이르게 뜬 달이 아직 환한 하늘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조용히.
<논 마라나타(non marana tha)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