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6. 오수민, 24세, 오메가 (6)
달라진 모습이 일상이 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채 열흘이 지나기도 전에 박 씨와 서 여사는 인혁과 수민이 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에, 수민에게서 인혁의 페로몬이 묻어나는 것에도 더는 놀라지 않게 되었다.
인혁은 퇴근길에 굳이 수민의 아파트 앞에 차를 대지 않았다. 그러기까지 여러 날 실랑이를 벌였고, 인혁은 수민을 당해 내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인혁과 수민은 여전히 수민의 집으로 배달되고 있는 반찬을 떠올리지 못했다.
성실한 반찬 가게 부부는 매번 반찬통이 연 흔적도 없이 돌아오는 걸 보곤 인혁이 남긴 번호로 연락했다. 인혁은 그제야 반찬 배달 서비스 계약을 기억해 냈다.
반찬 가게에서 전화가 왔을 때 두 사람은 막 배달 온 베트남 국수를 식탁에 차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밖에서 사 온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인혁은 요리를 손 놓은 지 20년이 다 되어 갔고, 수민은 요리에 능숙하지 않았다.
수민은 제가 식사 준비를 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으나 인혁은 그럴 시간에 책이라도 한 자 더 보라며 말렸다. 8월 검정고시 시험 날짜를 물어보면 수민은 요리에 대한 의욕을 잃고 얌전해졌다.
인혁은 반찬 배달 서비스를 해약하려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혹시 이쪽으로 배달이 가능한지 물었다. 다행히 가능했다. 인혁은 1인분 추가금을 더 내고, 이쪽 집으로 배달 반찬을 돌렸다.
다음날 새벽부터 바로 반찬이 배달 왔다. 매일 아침, 수민에게 아침을 먹이려고 식빵을 굽고 계란국을 끓이던 인혁은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수민은 자신이 머물던 집으로 가서 옷을 챙겼다. 차에 짐을 싣고 올 겸 따라갔던 인혁은 수민의 책상 위에 쌓인 검정고시 교재를 대신 챙겼다.
손님방은 수민의 방이 되었다. 빈 옷장에 수민의 옷이 걸렸다. 빈 책상엔 검정고시 교재들이 빼곡히 꽂혔다.
그 방은 수민이 옷을 갈아입을 때나 이용되었다.
수민은 매일 밤 인혁과 함께 잤다. 인혁이 거실에서 일하거나 책을 읽으면 옆에 나란히 앉아 교재를 뒤적였다. 손님방에 둔 책상과 침대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인혁의 집은 점점 사람 사는 집 같아졌다. 화장실에는 칫솔이 두 개 꽂혔고, 주방 찬장에는 둘이 함께 마트에서 사 온 식재료가 쌓였다.
인혁은 수민을 차마 굶길 수 없어 아침, 저녁 식사를 챙겼다. 집밥다운 밥상을 차려 내지는 못했지만, 흉내는 낼 수 있었다. 요즘엔 세상이 좋아져서 돈만 제때 내면 반찬을 배달해 줬다. 먹을 만한 완제품을 마트에서 종류별로 팔았다. 사 와 끓이고 데우기만 하면 됐다.
음식을 밖에서 사 먹는 횟수가 점차 줄었다. 두 사람은 되도록 집에서 아침, 저녁을 먹었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인혁은 출근 시간을 가늠하며 전기밥솥에 밥을 안치다가 그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언제부터 내가, 집에서 밥을 해 먹었지?
인혁은 혼자 살 때 집에서 뭔가를 해 먹지 않았다. 지난번에 집에 햇반이 있었던 것도 의사가 사다 놓고 가서 그나마 있던 것이었다. 햇반이 무언가, 냉장고에 생수나 남아 있으면 다행이었다. 주방은 물과 약 보관소였다. 지난 20년간 그 의외 용도로 써본 적 없었건만.
어느새 인혁은 10kg짜리 쌀을 사서 잡곡과 섞어 밥을 안치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어 쌀이 빨리 없어지니 다음번엔 20kg을 살까 고민했다. 인혁은 그런 자신이 신기했고, 죄스러웠으며, 좀 웃겼다.
“…….”
인혁과 비슷하게, 수민도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민은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크지 않았다. 매운 걸 못 먹고 콩자반을 싫어하는 게 특이 사항이었다. 그 외엔 주는 대로 잘 먹었고, 잘 토했다.
뭔가를 좋아해서 매일 먹고 싶다거나 찾아 먹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주5일 떡볶이를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이 구는 서 여사가 신기했다.
공익 생활 이후 혼자 살 땐 굳이 세 끼를 굳이 챙겨 먹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삼각김밥 두어 개로 한 끼를 때울 때도 있었고, 그게 하루 동안 먹은 전부일 때도 있었다. 웬만한 고시원에선 김치, 밥, 라면을 무료로 주었기에 식사할 시간이 있으면 주로 그걸로 끼니를 때웠다.
인혁이 집을 주고 반찬 배달 서비스를 시켜 주고 나선 가끔씩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일을 사주는 바람에 그걸 썩혀 버리지 않기 위해 꼬박꼬박 먹곤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의욕적으로 음식을 해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인혁의 집에 살게 되면서부터는 달라졌다.
수민은 가끔 TV를 보다가 음식 만드는 방법이 나오면, 그걸 만들어 인혁과 먹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그래서 핸드폰으로 레시피를 찍거나 검색해 보았다. 가끔 인혁이 바빠 보이면 먼저 주방에 들어가 그걸 만들어 보았다.
대개 오므라이스나 볶음밥류였다. 고기볶음 같은 거나 야채 조림 같은 것도 해봤는데, 특출나게 맛있지는 않았다. 반찬 가게에서 배달 오는 것보다 맛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냥 그럭저럭 먹을 만한 정도였다.
인혁은 수민이 요리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맛의 문제라기보단 수민이 그 시간에 차라리 공부하길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돌렸다. 수민이 제 옆에서 고장 난 로봇 청소기처럼 앉아 있는 걸 보느니, 차라리 요리를 하게 놔두는 쪽으로.
먹고 나면 인혁이 설거지를 했다. 수민은 매번 식탁에 엎드려, 설거지하는 인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삼각형의 상체가 허리 부분에서 가늘어졌다가 엉덩이와 허벅지로 굵어지는 선을 수천 번 수만 번 눈으로 덧그렸다. 인혁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수민은 그 천 쪼가리 안에 얼마나 탄탄하고 뜨거운 맨살이 숨겨져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뒤통수 뚫리겠다. 그만 봐.”
“뒤통수만 보고 있지는 않았는데요.”
“더 큰일 날 소릴 하네. 차라리 뒤통수만 봐라.”
“뒤통수 뚫리면 어떡해요.”
“네가 다른데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
인혁은 허리에 묶은 앞치마를 푸르며 비로소 수민을 돌아보았다. 수민은 인혁이 걷어붙인 소매를 다시 내리는 걸 보며, 그의 손목에 시선을 집중했다.
넥타이에 묶인 자국이 옅어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제가 만든 흔적이 사라지는 걸 볼 때마다 수민은 목이 탔다. 씻을 때마다 어느새 깨끗해진 제 몸을 볼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저녁 8시 20분 되면, 인혁은 한참 일하는 데 몰입해 있다가도 잠시 멈췄다. 수민이 TV를 켜고 볼륨을 높이면, 둘은 같이 저녁 일일 드라마를 봤다. <큰일 났네 왕형제들>은 아직도 절찬리 방영 중이었다.
인혁은 처음 며칠간은 드라마에 큰 흥미를 못 느꼈다.
“이게 재밌어?”
“아뇨.”
“재미없어? 근데 왜 봐.”
“그냥 보는 거예요. 하니까.”
“그냥, 보는 거라고.”
인혁이 피식 웃으며 수민을 봤다. 말과 달리 TV를 보는 수민의 눈은 초롱초롱했다. 그런 수민의 모습 때문에 인혁은 수민이 보는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방영한 지 반년이 넘었다는 드라마는 지금 줄거리가 기-승-전-결 중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반년 정도 방송했으면 슬슬 끝날 때가 된 거 아닌가 싶은데, 오메가, 베타, 알파인 세 명이 겪는 갈등은 단 하나도 해결된 게 없어 보였다.
아니, 매회마다 갈등이 해결되긴 하는데 끝나기 30초 전에 새로운 갈등이 생겼다. 그리고 한 사람의 얼굴을 화면 가득 클로즈업하고, 놀란 얼굴을 빠방! 보여 주며 끝났다.
“아, 안 돼!”
수민은 매번 그 왕 큰 얼굴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인혁은 그런 수민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고장 난 줄 알았던 우리 집 로봇 청소기가 사실은 하루에 23분씩만 작동되는 최첨단 인간 감성 AI 로봇?
인혁은 저 드라마의 무엇이 수민을 이렇게 만드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드물게도 인터넷으로 줄거리를 찾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감상도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스토리와 관계성이 이해되지 않았다.
인혁은 드라마를 같이 보며, 간간이 등장인물의 관계와 이전 스토리를 물었다. TV 시청에 방해된다고 귀찮아하거나 화낼 거라고 생각했으나 수민은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드라마를 보는 중에는 짧게 설명했으나, 드라마가 끝나면 공부하라고 사준 공책을 가져와 인물들의 이름과 관계도를 그려 가며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이렇게 검정고시 공부를 했으면 지난 4월에 바로 합격하지 않았을까.’
인혁은 입이 근질거렸으나 참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을 줄 아는 게 어른의 미덕이었으니까.
자러 들어가면 수민은 너무 당연하게 넥타이를 챙겨 들고 뒤따랐다. 늘어날 대로 늘어난 넥타이는 이제 그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함께 산 지 2주 정도 되었을 때, 인혁은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고 제 손을 꽁꽁 묶는 수민에게 물었다.
“이제 이거 안 해도 되지 않아?”
“왜요?”
수민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굴었다.
“왜라니. 이 정도면, 내가 자는 중에 널 두고 어디 도망가지는 않을 거란 믿음이 생겼을 텐데?”
“아니요.”
“아니야?”
“제가 방심할 때를 기다리는 걸 수도 있잖아요.”
“내가?”
“네.”
“하, 그 드라마에 나오는 둘째처럼?”
“네.”
“맙소사.”
인혁은 조금 전 본 드라마 내용을 떠올렸다.
동네 백수인 척하는 재벌 4세와 투닥투닥 싸우던 둘째가 결국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둘째와 사귀게 된 게 이틀 전이었다. 반년 만에 드디어 사귀는구나, 본 지 2주밖에 안 된 인혁마저도 감개무량했건만.
어제, 동네 백수인 줄 알았던 애인이 사실은 재벌 4세, 그것도 우성 알파라는 걸 알게 된 둘째는 베타인 자신이 애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도망갔다. 취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회 초년생이 애인 때문에 모든 걸 다 버리고 도망가? 직장은? 가족은?
그렇게 도망갔으면 멀리 도망가서 몇 년 뒤 사실은 베타가 아니라 오메가였고 애인의 아내를 낳아 키우고 있었다, 정도의 근황을 전할 줄 알았는데.
오늘, 재벌 4세는 비서에게 시켜 1분 만에 둘째가 어딨는지 알아냈다. 그리곤 중역 회의를 회의 5분 전에 취소시키고, 바로 기차역으로 달려가 무궁화 열차를 타고 둘째를 찾으러 갔다.
재벌 4세는 기차를 타고 가는 15분 동안 지난 반년간 둘째와의 험난했던 썸을 회상했다. 이후 4분 동안 꽃 핀 산책로를 헉헉대며 올라가 제주도 둘레길인 게 분명한 언덕에서 운명처럼 둘째와 마주쳤다. 무궁화 열차를 타고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갈 수 있다니. 비행기는 어따 두고?
지갑도 없이 핸드폰만 들고 무작정 도망가 주머니에 5,500원 밖에 없었던 둘째는, 어디서 났는지 새하얀 셔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도망갈 땐 분명 저 복장이 아니었다.
-아니, 여길 어떻게!
둘째의 깜짝 놀라는 얼굴 한 번 클로즈업.
-내가 방심한 틈에 내게서 도망가다니. 그런다고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거 같아?
오만상 찌푸리며 외치는 재벌 4세 얼굴 한 번 클로즈업.
두 사람의 얼굴이 화면을 절반씩 차지하며 콰광! 드라마가 끝났다. 참고로 남은 2분은 미국에서 온 재벌 4세의 약혼자가 텅 빈 재벌 4세의 회사 자리에 앉아 그의 크리스털 명패를 손끝으로 훑는 데 사용되었다.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서일까. 수민이 미소 지었다.
“네. 소장님도 저 버리고 가봤자 하루 만에 붙잡히실 테니까 포기하세요.”
“수민아, 너무 집요하면 매력 없어.”
버리지 않을 거라는 대답 대신 이런 농담을 할 정도가 되었다. 걸린 시간은 고작 2주였다.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다니, 인혁은 말을 하고 나서도 떨떠름해했다.
“소장님도 너무 튕기면 매력 없어요. 이쯤 되면 저한테 넘어오실 때도 되었잖아요.”
수민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드라마엔 안 나오는 거 같던데.”
“<사랑이 별거>요.”
“그건 또 무슨…… 아, 끝났다던 그거?”
“네. <큰일 났네 왕형제들>하기 전에 했던 드라마요.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재벌 3세랑 술김에 잤는데, 그 뒤로 재벌 3세를 계속 피했거든요. 그러니까 재벌 3세가 자신한테 이러는 건 네가 처음이라면서, 계속 주인공한테 들러붙고 가는 곳마다 나타났어요.”
“그게 가능할 리가…….”
“재벌 3세잖아요. 사람을 붙여 감시할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핸드폰으로 위치 추적을 할 수도 있겠죠.”
수민이 진지하게 답했다.
“그건 스토커 짓이야. 범죄.”
인혁도 진지하게 지적했다.
“드라마잖아요.”
드라마에 현실을 끌고 오지 말라며 수민이 대꾸했다.
“아무튼 그래서 둘은 계속 붙어 다니게 되고, 주인공은 결국 재벌 3세를 좋아하게 돼요. 둘이 결혼하면서 드라마가 끝나거든요. 그런데 소장님은 제가 아무리 붙어 다녀도 주인공이 재벌 3세를 좋아하게 된 것처럼 저를 좋아하지 않고 있잖아요.”
“네 말대로 그건 드라마니까 그렇지.”
“현실은 더하다고 서 여사님이 항상 말씀하셨어요.”
방금 드라마니까 괜찮다고 한 사람이 어디의 누군지? 인혁이 할 말 많은 눈으로 쳐다봤지만 수민은 꿋꿋했다.
“그래, 드라마라 치고. 거기 나오는 재벌 3세는 위치 추적을 해서 주인공을 쫓아다닐망정.”
“우연히 마주쳤다고 나와요.”
“우연이라니 그래, 잘됐네. 수민아. 우리랑 상황이 완전 다르지 않아? 거기 나오는 재벌 3세가 주인공 집에 쳐들어가서 손을 묶고 한 침대에서 자고 그러진 않았잖아. 그런데 같은 결말을 바라?”
인혁이 가당치 않다는 듯 말했다. 수민은 제 손에 넥타이를 묶고 난 다음 큰 눈을 들어 인혁을 쏘아보았다.
“소장님,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지 마세요.”
“억지?”
“<사랑이 별거>랑 <큰일 났네 왕형제들>을 방영하는 방송국은 공영 방송국이에요. 공영 방송국에서 그런 노골적인 내용을 내보낼 리 없잖아요. 국민 정서에 맞지 않으니까 생략한 걸 거예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우리 관계와 다르다고 단정 짓다니. 수민은 인혁의 안일함에 화냈다.
“……어제 보니까, 묵은지로 뺨 싸대기 때리고, 냄비로 뒤통수 쳐서 사람을 기절시켜 시멘트 발라 동해에 수장시키려고 하던데. 그런 내용은 국민 정서에 맞고?”
“그건 드라마니까 그런 거죠.”
수민이 바로 대답했다. 허? 인혁이 헛웃음 지었다.
“드라마 내용을 너무……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니?”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인걸요. 소장님이야말로 드라마에 너무 몰입하지 마세요. 이래서 드라마 처음 보는 사람들은 너무 위험해.”
“그런 말은 또 어디서…… 아니, 됐고. 드라마에 나온 커플이랑 우리 사이를 비교한 건 네가 먼저잖아.”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거죠. 소장님이 자꾸 저를 거기 나오는 주인공처럼 좋아해 주지 않으려고 하니까.”
“말을 말자.”
인혁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저도 잘래요.”
수민이 먼저 누워 인혁을 올려다봤다. 그 태도가 어쩐지 얄미워서, 인혁은 수민을 옆으로 쑥 밀었다.
“네 방 가서 자. 그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4세는 안 이러잖아.”
“전 재벌이 아니니까 괜찮아요. 소장님은 그것도 모르세요?”
수민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생각해 보니 이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까부터 계속, 말을 길게 늘이고 토를 달았다.
드라마를 좋아하니까, 드라마 내용을 지적하니 진심으로 반박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뭐가요?”
수민이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너 입꼬리 올라갔어. 수민아,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어?”
인혁은 수민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는 척하면서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고 아프지 않게 흔들었다.
“네.”
수민이 바로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가?”
“소장님이 저랑 길게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
인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마터면 수민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자신이 수민을 방치했었나 반성할 뻔했다. 하지만 수민의 눈이 여전히 반짝거리는 걸 보곤, 그게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
인혁은 손바닥으로 수민의 눈을 덮어 버렸다.
싫으면 치울 법도 한데.
“네.”
수민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손바닥에 쓸렸다. 그 바람에 인혁은 바로 손을 치우지 못했다.
이 정도면 잠들었겠지, 싶을 즈음에야 손을 치웠다. 그리곤 넥타이가 허락해 주는 한 거리를 두고 누웠다.
인혁은 눈을 감고 수민의 숨소리를 듣다가 함께 잠들었다.
수면제를 먹지 않고 잠들게 된 지 벌써 이 주째였다. 잠드는 것에 거부감이 줄어들었다. 졸음에 쉽게 몸을 맡기게 되었다.
인혁은 이 안락함에 익숙해지는 자신이, 싫어야만 했다.
***
수민은 눈을 떴다.
어두운 침실. 침대 누운 건 인혁과 자신, 둘 뿐이었다.
인혁은 잠들었다. 수민은 인혁의 숨소리를 들으며 인혁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한 침대에서 잤다. 가끔, 아니, 자주 인혁은 꿈에 시달렸다. 꿈 내용을 모르니, 수민은 악몽이라 함부로 단정 짓지 않았다.
자다 깬 인혁은 땀 범벅이었다. 누군가를 찾았고,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했고, 오열했다. 때론 말조차 못 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수민은 그런 인혁을 제 품에 끌어안고 등을 도닥여 주었다. 그러면 인혁은 구명줄 붙잡듯 수민을 끌어안고 알아듣기 힘든 말을 쉼 없이 중얼거렸다.
한참 그러다가 겨우 다시 잠들었다. 인혁은 다시 잠들어서도 수민의 목과 어깨에 얼굴을 묻고 떨어지지 않았다.
인혁의 냄새는 숨 막힐 정도로 진해졌다. 수민은 인혁의 냄새가 커다란 뱀이 되어 절 칭칭 감싸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인혁이 매일 그러는 건 아니었다. 오늘처럼 조용한 날도 있었다. 이런 날은 수민의 날이었다.
수민의 성기는 이미 뜨겁게 열이 올라 있었다. 인혁이 옆에 누워 있는데, 괜찮을 리가.
수민은 언제나 발정했다. 낮이든 밤이든, 인혁의 곁에 있으면 몸이 달았다. 인혁이 싫어할 걸 아니까 아닌 척하는 것뿐이었다.
수민은 엎드려 침대 시트에 다리를 비볐다. 고개는 옆으로 돌려 인혁을 보았다. 수민은 한참 끙끙대다 인혁 쪽으로 몸을 돌리고, 다리 사이에 손을 댔다.
“……읏.”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이 샜다. 수민은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며 다리 사이를 문질렀다.
“흣, 읍…….”
금세 숨이 거칠어졌지만, 원하는 쾌감은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손으로 만지는 것만으로도 찌릿했다. 하지만 그건 수민이 아는 쾌감 중 가장 약한 것이었다.
수민은 제게 이보다 더한 쾌감을 알려 준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잠들어 있는 건 아니었다. 잠들어 있을 때도 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눈꺼풀이 떨리는 게 보였다.
수민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넥타이로 묶인 손을 잡아당겼다.
인혁이 딸려 왔다. 수민은 그 손을 잡아 제 다리 사이에 가져다 댔다.
“아…….”
그저 닿기만 했을 뿐인데, 눈앞이 하얘졌다. 인혁의 손이 흠칫 놀라는 것마저 좋았다.
인혁의 숨소리가 끊겼다가 이어졌다. 잠에서 깨면 숨소리 자체가 달라지는데. 인혁은 수민이 알아차린 것도 모르고 계속 자는 척했다.
민망해할까 봐, 이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배려해 주고 외면하는 거겠지. 수민은 그런 인혁이 좋았다.
인혁의 손은 크고 거칠었다. 수민은 그 손을 도망치지 못하게 꼭 잡았다. 인혁이 깨어 있다니, 더 흥분됐다.
“아, 흐…… 소장, 님.”
바지 위로 말고, 안에 손을 넣어 인혁이 만져 주면 얼마나 더 좋을까. 뒤에서 껴안고 수민아, 하고 귓가에 속삭여 줬는데. 다리 사이에 손을 넣고 계속 만져 줬는데. 더는 안 나온다고 울어도, 괜찮다고 속삭여 주면서 만져 줬으면서.
수민은 인혁이 가르쳐 준 대로 허리를 움직였다.
‘그래, 그렇게. 착하다.’
인혁의 속삭임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으음…….”
인혁이 잠결에 뒤척이는 척하며 손을 빼내려고 했다. 수민은 허벅지에 힘을 주어 인혁의 손을 가두고 허리를 흔들었다.
인혁이 당황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힘을 주어 손을 빼려다 성기를 쥐게 되자 어찌할 바 모르고 머뭇거리는 손길.
“읏…….”
수민은 그 손에 사정했다. 속옷과 바지를 입고 있어 인혁의 손에 직접 사정한 것은 아니지만.
수민은 작게 헐떡이며 물기 진 눈을 깜빡였다.
인혁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이불로 덮인 몸 아래쪽이 불룩해져 있었다. 굳이 이불을 들춰 보지 않아도, 인혁의 성기가 발기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민이 손을 대려 하자.
“으음…….”
인혁은 끝까지 자는 척하며 수민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수민은 손에 묶인 넥타이 때문에 끌려가는 척 인혁의 등에 달라붙었다. 인혁의 등이 단단하게 굳었다.
수민은 인혁의 등에 뺨을 대고, 입을 맞췄다. 셔츠 위로 살짝, 단단해진 살갗을 깨물어 보기도 했다. 인혁이 흠칫 떠는 게 느껴졌다.
인혁의 냄새가 짙어졌다. 수민은 제가 깨문 곳을 혀로 핥았다. 셔츠가 혀에 달라붙었다.
“소장님, 소장니임…….”
수민은 인혁의 몸에 제 몸을 비볐다. 다리 사이가 다시 뜨거워졌다.
하아. 뜨거운 숨이 나왔다.
기분 좋았다.
“좋아, 너무 좋아요……. 기분 좋아.”
수민은 인혁의 냄새에 취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계속 비비적거렸다. 얼마 안 있어 수민은 다시 사정했다.
“흣, 으…… 으응…….”
인혁의 셔츠를 두 손으로 꽉 움켜잡으며 몸서리쳤다. 바짝 긴장했던 몸이 이내 나른해졌다.
다리 사이가 축축했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찝찝했지만, 일어나 씻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넥타이에 손이 묶여 혼자만 화장실에 갈 수 없었다. 또한 잠든 척하는 안혁과 몸을 맞댈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수민은 인혁의 등에 새끼 코알라처럼 달라붙어 계속 몸을 비볐다. 그러다 그대로 잠들었다.
잠이 들락말락 할 때, 인혁이 참았던 숨을 내쉬고, 조심조심 소리 안 나게 움직여 거리를 벌리려는 게 느껴졌다. 수민은 인혁의 셔츠를 움켜잡고 몸을 웅크렸다.
한숨 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같았다.
“도망 안 가. 안 갈 테니까 자, 걱정 말고.”
귓가에 닿는 낮은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수민은 완전히 잠들었다.
무서울 정도로 몸이 바닥으로 훅 꺼졌다. 하지만 더는 깊게 잠드는 게 무섭지 않았다. 두 손으로 꽉 움켜잡고 있으니까, 안심됐으니까.
누가 안아 주는 것 같았다. 등을 다독여 주고, 잘 자라고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한데.
수민은 믿지 않았다.
그럴 리 없으니까.
***
아침이 되자 둘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행동했다.
“이거 풀고 가서 씻어.”
인혁은 푸석한 얼굴을 넥타이에 묶인 반대쪽 팔을 흔들었다. 수민은 익숙하게 넥타이를 풀고, 인혁의 말대로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
인혁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수민은 씻고 속옷과 옷을 갈아입었다. 수민은 씻고 나온 인혁의 말끔한 턱을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두 사람은 같이 아침을 먹고 출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