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5. 오수민, 23세, 오메가 (4)
“내 아들보다 세 살 많네.”
뒤늦게 수민의 이력서를 펴본 인혁이 중얼거렸다.
아들 또래의 아이를 보면 나이부터 확인하는 게 버릇이었다.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이제 스물이나 되었나 싶게 생겼건만, 국방의 의무도 마친 스물세 살이라니. 스물이나 스물셋이나 거기서 거기지만, 인혁은 묘한 실망감을 느꼈다.
아쉽거나 절망스럽진 않았다. 오며 가며 마주치는 아이마다 다 내 아들일까 설레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까. 그동안 수없이 기대했으며 실망했고 또 실망하지 않았던가.
20년분의 굳은살이 박인 심장에 다시 한번 피딱지를 얹은 게 승원의 죽음이었다. 인혁은 더 이상 섣불리 기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음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아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고야 말았지만.
하지만 실망감도 환멸도 한숨 한 번으로 털어 버릴 만한 무게였다. 인혁은 금방 마음을 추스르고 이력서를 마저 훑어보았다.
수민이 사무실에서 일한 지 삼 주째였다. 이제 와 이력서를 펴보는 건 늦은 감이 없잖았다.
그동안 수민이 제출한 이력서를 확인하지 않은 건 그럴 필요성을 못 느껴서였다. 제가 주워 온 아이이지 않은가. 우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의심할 거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전 아르바이트 이력이나 자격증 같은 건 더더욱 확인할 의미가 없었다. 여기가 뭐 대단한 곳도 아니고. 한글만 읽을 줄 알고 컴퓨터만 좀 다룰 줄 알면 충분했다. 아니, 설령 수민이 한글을 읽을 줄 모르고 컴퓨터를 다루지 못했어도, 인혁은 수민을 고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학원을 보내 한글과 컴퓨터 활용법을 가르쳤을 것이다.
성범죄 전적이 있거나 연쇄 살인마라든가 어떤 이단 사이비 단체에서 사무실을 노리고 침투시킨 스파이가 아닌 이상, 수민이 누구든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든 전혀 상관없었다.
굳이 이단 사이비를 떠올린 건 인혁이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거의 모든 사이비 종교 집단과 척을 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대한민국에 사이비 종교 교주 연합 같은 게 있다면 인혁을 공공의 적 제1호로 선포했으리라.
혹시나 싶어 고용 계약서를 쓸 때 성범죄 이력 조회 동의서를 함께 받긴 했다. 딱히 그런 범죄를 저지를 거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성범죄자가 얼굴에다 나 성범죄자요, 하고 써 붙이고 다니는 건 아니니까. 조회해 봤는데 깨끗했다.
그거면 됐지 싶어 이력서는 펴보지도 않고 서랍에 처박아 뒀다. 그런데 이제 와 수민의 이력서를 펴보는 건, 새삼 그럴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수민은 순하고 착했다. 성실했다. 잘 웃지 않고, 말수가 적었지만 그건 흠이 되지 않았다. 서 여사와 박 씨가 금방 마음을 열고 수민을 예뻐할 만했다.
수민이 착하고 성실한 것과는 별개로 인혁은 수민이 종종 딴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구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나하나 놓고 보면 별건 아닌데, 계속 지켜보다 보면 뭔가 좀 묘했다. 의외의 면에서 상식이 부족했고, 의외의 상황에서 서툰 모습을 보였다.
기초 지식이 부족하다거나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개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로봇에게 인간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학습시킨 뒤 사람들 틈에 던져 놓은 것 같달까. 단지 고등학교 중퇴고, 가족이 없고, 아르바이트로만 생활을 연명해 온 청년의 어리숙함이라고 보기엔 뭔가, 뭔가 미묘했다.
그래서 새삼 이력서를 찾아본 것이었다.
「20XX. 서울 강서구 XX 보육원 퇴소
20XX. 고등학교 자퇴
20XX-XX. 사회복무요원(XX구 행정복지센터) 근무
……」
이력서 하단을 빼곡히 채운 건 편의점, 쇼핑몰, 피시방, 호프집, 고깃집, 뷔페 등에서 일한 아르바이트 경력이었다.
“뭐 이런 걸 다 정직하게 써놓냐. 안 그래도 될걸.”
인혁은 혀를 찼다. 이러니 별 시답잖은 새끼들이 만만하게 보고, 후려쳐서 일 시키려고 한 거겠지.
“이거 봐라, 이거 봐.”
아르바이트 경력만 봐도 그랬다. 처음 몇 개는 반년 이상 오래 근무한 거라 괜찮았지만 나머지가 문제였다. 길면 3개월, 짧으면 한 달. 일한 동네도 제각각.
한 곳에 진득하니 오래 일하지 않았으면서 그 경력은 숨기지 않는 이 성실함을 보라지. 수민의 서툴고 솔직한 태도가 이력서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돌아오면 이력서 적는 법을 가르쳐야 하나. 일단 우리 사무실에서 한 1년 일하게 해서 경력부터 만들어 주는 게 나으려나. 근데, 우리 사무실에서 일한 게 경력이 되나? 뭐, 1년 정도 일했다 치면 이력서에 쓸 거리는 되겠지.’
그보단 검정고시를 합격시키고 수능도 보게 해야 하는데. 그래서 대학까지 보내면 우리 사무실에서 일한 경력은 필요 없어지지 않을까.
아니지, 어디 번듯한 회사 취직하려면 자기소개서를 잘 써야 하는데. 우리 사무실에서 일한 걸 잘 녹여 내 쓰면 좋지 않을까? 내가 추천장을 써주면 좀 도움이 되려나? 아니지, 내 추천장을 어디에 써먹어?
어느새 인혁의 머릿속에서의 수민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대기업 면접 대기실에 뻣뻣하게 앉아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고 있는 정장도,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도 당연히 인혁이 사준 것이었다.
‘저 합격했어요! 다음 달부터 출근하래요!’ 함박 웃으며 뛰어 들어오는 수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곧 입 안이 씁쓸해졌다.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이런 성실한 듯 불성실한 이력서를 보며 애써 수민을 두둔하고, 대학에 보내 취직시킬 생각까지 하다니. 정작 당사자는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정작 공부해야 할 녀석은 전혀 공부에 관심이 없는 거 같은데 말이야.’
인혁은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빈 책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서 여사와 수민의 자리였다.
조금 전, 서류를 등기 보낼 게 있다고 하니 수민이 얼른 일어났다.
“제가 다녀올게요.”
“나도 같이 가, 수민 학생.”
서 여사가 기다렸다는 듯 따라붙었다.
“안 그러셔도 괜찮은데.”
“내가 가고 싶어서 그래. 수민 학생이 귀찮은 일을 다 해주니까, 내가 책상에서 일어날 새가 없어. 삼 주 만에 1.5kg이나 는 거 있지. 이러다가 맞는 바지가 없겠어. 바람 쐴 겸, 같이 가자. 응?”
서 여사가 진드기처럼 수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떡볶이 먹으러 가자는 말씀이시죠?”
수민이 소곤거렸다. 서 여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민이 수줍게 웃으며 서 여사와 나갔다. 30분 전의 일이었다.
우체국은 길 건너편에 있었다. 사람이 많지 않으면 20분 만에도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고, 그 우체국은 언제나 한적했다.
그런데도 아직 안 돌아오는 걸 보면.
‘또 딴 길로 샜군.’
아마 우체국 옆 골목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으리라.
인혁은 어렵지 않게 서 여사의 꾐에 넘어가 매운 떡볶이를 먹으며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을 수민을 상상해 낼 수 있었다. 저번에 한정식 먹을 때처럼 눈물 콧물 다 빼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매운 거 못 먹는다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지.’
떡볶이 좋아하냐고 서 여사가 묻자 수민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잘 모르면 안 되지!”
그 대답이 서 여사의 호승심을 자극했다.
서 여사는 진짜 맛있는 떡볶이 맛을 알려 주겠다며 수민을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수민은 싫다는 말 한마디 안 하고, 서 여사를 잘도 따라다녔다.
서 여사는 드디어 참다운 떡볶이 친구를 만났다며 기뻐했다.
인혁은 매운 걸 아예 못 먹으니 탈락. 박 씨는 너무 잘 먹어 탈락. 박 씨와 같이 가면 혼자서 5인분 정도는 쓱싹 해치우니, 떡볶이가 남아나질 않는다며 서 여사가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홀로 떡볶이를 먹으러 다녔던 서 여사에게 드디어 수민이 강림한 것이었다. 매운 걸 잘 못 먹어 떡볶이 한 점에 물 세 잔을 기본으로 비우면서도, 떡볶이 먹으러 가자고 하면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사무실 막내.
“걔 매운 거 못 먹어요, 서 여사님. 적당히 데리고 다녀요.”
둘이 나갔다 들어오면 매번 수민의 입술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인혁은 보다 못해 나섰다가 서 여사에게 아주 혼쭐이 났다.
“매운 걸 좋아하는데 못 먹을 수도 있지. 좋아한다는데 왜 못 먹게 해! 수민 학생이 김 소장 같은 줄 알아?”
매운 걸 못 먹는다고 천하의 역적 취급이었다.
“이참에 김 소장도 같이 먹으러 다니자. 자꾸 먹다 보면 먹을 만해진다니까.”
“이 나이까지 못 먹으면 못 먹는 거예요. 난 빼줘요.”
“서 여사님, 저요! 저요!”
“박 씨는 빠져.”
“아, 왜에. 맨날 나만 빠지래?”
“박 씨랑 가면 떡볶이를 제대로 음미할 수가 없단 말이야.”
“서 여사님, 저렇게 좋아하는 박 계장님이랑 다니고, 수민이는 고만 괴롭히라니까요.”
“김 소장, 말귀 못 알아들어? 수민 학생은 떡볶이를 좋아한다고! 그치?”
“네? 네에.”
“수민아. 너 솔직하게 말 안 해?”
“김 소장, 지금 수민 학생 협박하는 거야? 왜 떡볶이를 못 먹게 해!”
“아니, 쟤가 매운 걸-.”
“떡볶이를 좋아한다잖아. 수민 학생이!”
서 여사는 겨우 얻은 떡볶이 친구를 어미 닭처럼 감싸고 돌았다.
“너 정말 떡볶이 좋아해? 이거 마지막 기회야. 제대로 대답해. 다신 안 물어볼 거야.”
인혁이 협박하듯 물었다. 수민이 서 여사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싫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다. 그 어정쩡하고 순진한 모습이라니.
인혁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 순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한 30분 정도 더 있으면 돌아오려나. 매운 걸 먹다 울었는지 눈가가 빨개져선 쿨피스를 쪼르륵 빨며 들어오는 수민이?
맨날 우는 걸 보면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긴 했다.
‘분식집 사장한테 떡볶이 좀 덜 맵게 만들라고 로비나 할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인혁이 멈칫했다.
“잠깐. 뭐야, 이거.”
인혁은 다시 수민의 이력서를 들여다보았다.
「20XX. 서울 강서구 XX 보육원 퇴소」
“강서구 XX 보육원?”
이름이 낯익었다.
인혁에게 낯익은 곳이라는 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인혁은 긴 아르바이트 경력을 훑어 올라갔다. 제일 첫 아르바이트 두 곳. 그러니까 제대한 후에 반년 정도 일했던 편의점과 쇼핑몰. 편의점은 그렇다 치고 쇼핑몰 이름이, 은근히 낯익었다.
“박 계장님. 바빠요? 바빠도 잠깐 이리 좀 와 봐요.”
인혁이 박 씨에게 손짓했다.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하나하나 누르고 있던 박 씨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했다.
“나 지금 집중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알았으니까, 얼른.”
“뭔데, 별일 아니기만 해봐. 오늘 내가 써야 하는 서류 김 소장이 다 써 줘야 돼. 어?”
박 씨가 슬렁슬렁 걸어왔다.
“그나저나 나 언제까지 계장이야? 에이씨, 딱 세 명뿐인 거 소장, 부소장, 부부소장 하자니까. 계장 명함 하나 딱 찍어 주고 10년째 이러기야? 이젠 못해도 이젠 부장까지는 승진시켜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병아리도 한 마리 들어왔는데.”
박 씨는 마침 잘됐다는 듯 눈을 번뜩였다.
“딴말 말고 얼른 좀 와보라니까.”
“뭔데. 부장 명함 찍어 줄 거 아니면…… 뭐야, 수민 학생 이력서? 수민 학생이 여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는데, 지금 그걸 들여다보고 있어요? 김 소장님?”
박 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김빠지는 소릴 냈다. 인혁은 변명하는 대신 손끝으로 이력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좀 봐봐요, 여기.”
“응? 이거? 수민 학생 가족 없는 거야 우리 이미 다 알고 있…… 강서구 XX 보육원? 수민 학생이 여기 나왔어? 근데 어째 이름이 익숙하다? 어서 많이 들어 본 거 같은데…….”
“여기랑 여기도.”
인혁이 편의점과 쇼핑몰을 가리켰다. 박 씨가 눈으로 인혁의 손가락을 쫓았다. 귀찮아 죽겠다고 투덜대던 얼굴이 심각해졌다.
“잠깐, 잠깐만.”
박 씨가 재킷 안쪽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표지가 다 닳아 반들반들했다. 종이 끝은 우글우글해져 있었다. 딱 봐도 한두 해 된 수첩이 아니었다. 박 씨는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수첩을 팔랑팔랑 넘겼다.
박 씨의 손이 어딘가에서 멈췄다. 박 씨는 눈을 찌푸리고 수첩과 인혁이 가리킨 이력서를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허어. 박 씨가 탄식했다.
“맞네, 맞아.”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죠?”
“여기 그쪽에서 운영하는 곳이잖아. 주로 피해자들 신변 보호용으로 신분 세탁해 줄 때 가져다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여기도. 사회 적응 훈련 시켜서 다른 곳으로 보내는 데야. 얘네가 보통 일 년에 한 번씩 장소를 갈아치우는데, 이번에 만든 데가 여기 두 군데라고 알고 있어. 맞아, 내가 저번에 확인했어. 김 소장한테도 저번에 알려 줬잖아. 잊지 않고 있었네?”
“역시.”
하, 인혁이 숨을 내쉬었다.
“뭐야, 그럼, 수민 학생이…….”
“…….”
인혁은 말없이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건 뭐, 인연이라 할 수도 없고 뭐라고 해야 하나.”
박 씨가 혀를 차며 수첩을 덮었다.
“인연은 무슨.”
“김 소장. 개코는 내가 아니라 김 소장이네.”
“일단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뭐야, 솔직히 불어. 어디서 데리고 온 거야.”
“말했잖아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고.”
“그냥 버스 정류장에? 여기가 사람 관리를 그렇게 허술하게 한다고?”
“난들 압니까.”
인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그냥 눈에 띄었다. 처음엔 고등학생인 줄 알았다. 가까이 갈수록 향이 짙어져서, 날이 어두운데 위험하게 왜 저러고 있나 싶었다. 멍하니 길을 보는 그 얼굴이, 어쩐지, 그냥 두고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밥이나 먹이고 하룻밤 재운 다음, 갈 곳이 있다고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없다 하면 센터에 연락해 연결해 주거나.
설마 이런 과거가 있을 줄은, 그 당시엔 생각도 못 했다.
“여기, 이 편의점이랑 쇼핑몰. 올해 만든 곳이면 수민이가 연관된 사건이 최근 일이라는 건데. 그쪽에서 최근 건드린 사건이 뭐 있었죠?”
“글쎄. 좀 됐긴 했는데, 오메가제일교 사건이 있었잖아. 그거 때문에 한동안 난리 났었지. 그거 말곤 딱히, 뭐 딱히 없었던 거 같은데……. 아, 확실하진 않지만. 몇 달 전에 뉴스에 떠들썩하게 났던 거 있잖아.”
“뉴스에 나오는 게 뭐 한두 갠가.”
“그 왜, 베타 우월주의자인 기업인들이랑 국회의원들이 무슨 사이비 교단에 몰래 지원해 줬다고.”
“아, 그거. 예. 들어 본 거 같네요.”
“알파랑 오메가는 구원을 못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이비였다나 뭐라나. 그래서 그 기업들 불매 운동 일어나고 그 국회의원들 출당되고, 재판 들어가 국회의원 자격 박탈당하네 마네 시끄러웠지. 그걸 그쪽에서 건드렸다는 얘기가 좀 돌긴 했는데. 근데 그쪽에서 건드렸다기엔 규모가 너무 작지 않나? 사건 터트린 것도 검찰 쪽이었고. 어디 기업 비리 장부 조사하다가 후원 내역을 발견했다나. 거기서 타고 올라간 거 같던데.”
박 씨가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모르게 사건이 처리됐을 가능성은요?”
“완전 가능하지. 내가 아무리 개코여도 그곳에서 작정하고 숨기면 알 길이 없으니까.”
“하긴.”
대통령 직속의 기밀 부처로 국정원보다 더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정말 실재하는지조차 확실치 않아 이쪽 업계에서도 진짜 그런 조직이 있다 없다 말이 무성했다.
인혁과 박 씨야 현장에서 몇 번 부딪쳐 본 적이 있어 그 조직이 실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지만, 그것 말고는 이 바닥 정보통인 박 씨도 그 조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곳에서 사람을 빼돌리는 루트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정보 터는 솜씨가 업계 최고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다. 인혁이 그만큼 이쪽 일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왜, 한 번 알아봐 줘?”
박 씨가 인혁의 표정을 살피며 슬쩍 물었다.
“쉽지 않겠죠.”
“음, 아무래도. 솔직히 자신은 없어.”
“그럼 됐어요.”
인혁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수민의 이력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반차 쓸 수 있냐고 물어보던데.”
“누가, 수민 학생이?”
“네. 어디 상담을 받으러 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공익 때 자길 돌봐 준 공무원이 소개해 줬다면서요. 한두 달에 한 번씩 상담을 받으러 다닌다고.”
사회 복무 요원. 명칭이 바뀐 지 한참 되었건만, 아직도 공익이 입에 익었다.
“그거, 혹시?”
박 씨가 주먹으로 가볍게 책상을 내리쳤다. 쿵.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요?”
인혁이 고개를 들어 박 씨를 바라보았다.
“돌아오면 어디서 누구한테 상담받는지 물어봐야겠네요.”
“솔직하게 말해 줄까?”
“상관없어요, 뒤를 밟으면 되니까.”
“어? 어, 그러면 되지, 되는데…… 저기, 김 소장?”
박 씨가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 순한 청년이 대체 무슨 일로 그 조직이랑 엮였을꼬. 거기가 웬만한 일로는 안 움직이는 곳인데. 참 안타까운 일이구나. 그러고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다니. 세상이 넓은 것 같아도 참 좁네 싶기도 하고.
인간적인 도리로 생각할 수 있는 선은 거기까지였다.
그 조직에서 수민을 구하든 빼내든 했고 사건이 마무리됐으니까 신분 세탁까지 해서 사회에 내보낸 것 아닌가. 보아하니 상담한답시고 정기적으로 불러서 잘 살고 있나 관리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굳이 더 파볼 필요가 있나?’
그냥 앞으로 좀 더 잘 대해 주고, 밥 한 번 사줄 거 두 번 사주고. 그 정도로 챙겨 주면 될 일이지.
“상담받는 데를 왜 따라가?”
월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해 봐야죠. 누구한테 무슨 상담을 받는지.”
“그러니까 그걸 왜. 그리고 거기서 어련히 알아서 잘 관리하려고?”
“우리 사무실 사람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알아야지요, 내가.”
인혁이 무슨 소릴 하느냐는 표정으로 박 씨를 올려다보았다. 박 씨는 순간, 자신이 무척 매정하고 정 없이 군 건가 반성할 뻔했다.
“김 소장, 우리가 다 구하고 돌봐 줄 순 없어. 알지?”
박 씨가 망설이다 말했다.
“모릅니다.”
인혁은 수민의 이력서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대답했다.
“김 소장. 고집 부릴 일이 아니야.”
“왜요?”
인혁이 되물었다.
“왜냐니, 그걸 말로 해야 알아?”
“왜 안 되는데요.”
인혁이 박 씨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박 씨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김, 소장?”
“난 마음 같아선 다 구하고 싶습니다. 한 명 한 명 다, 남김없이 행복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어요.”
인혁이 눈을 돌려 수민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그러면 어딘가에 있을 내 아들도, 행복할 테니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다.
“…….”
그럼에도 박 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우체국 업무는 15분 만에 끝났다. 두 사람은 인혁의 예상대로 샛길로 샜다.
“우리 떡볶이 먹고 갈까? 조금만 먹고 가자, 조금만. 응?”
“네.”
서 여사와 수민은 분식집으로 들어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분식집 주인이 “어제 먹은 데로요?”하고 물었다. 손은 이미 떡볶이를 뜨고 있었다.
“오늘은 조금만 먹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네.”
서 여사가 냉장고에서 쿨피스 두 개를 꺼내며 방긋 웃었다. 분식집 주인도 마주 보며 방긋 웃었다.
떡볶이 1인분에 순대 1인분, 튀김 1인분, 오뎅 국물 서비스. 조그만 테이블에 떡튀순 세트가 풍성하게 차려졌다. 떡볶이의 매운 냄새가 화악 퍼졌다. 서 여사는 입맛을 다셨고, 수민은 서둘러 쿨피스를 한 모금 마셨다. 냄새만 맡아도 입 안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너무 매우면 헹궈서 먹어요. 알았지?”
서 여사가 빈 접시에 물을 떠 수민의 앞에 놓아 주었다.
서 여사는 매운 걸 좋아하나 못 먹는 수민을 나름 배려해 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수민은 사양하지 않고 물그릇을 받았다.
처음에 멋모르고 양념이 듬뿍 묻은 떡볶이를 그냥 먹었다가 호되게 고생한 뒤로 함부로 객기 부리지 않고 떡볶이를 물에 씻어 먹고 있었다. 그래도 매워서 쿨피스를 물 마시듯 마셨지만.
“입맛이 은근 김 소장이랑 똑같아.”
“…….”
“뭐 좋은 거라고 웃어? 그 초딩 입맛 닮아서 어떡해.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
“그래, 웃어요, 웃어. 웃으니까 보기 좋네.”
튀김에 떡볶이 국물을 살짝, 아주 사알짝 찍는 둥 마는 둥 하게 찍어 먹을 때였다. 벽에 붙어 있는 TV에서 꺄아악!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 우주민 나오네.”
서 여사가 튀김에 떡볶이 국물을 듬뿍 묻히며 말했다. 수민은 고개를 들어 TV를 보았다.
인터뷰형 예능 프로였다. 관객이 몰려든 거리 한복판에 동그란 테이블이 놓여 있고, 남녀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큐카드를 들고 있었고, 남자는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누가 MC이고 누가 게스트인지 분명해 보였다.
남자는 수민도 무심코 한 번 더 들여다볼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었다. 그냥 미남이라는 단어로만 표현하기 미안할 정도였다. MC를 보는 여자가 평범하다 못해 밋밋해 보일 정도였다.
그래 봤자 연예인, TV 속 사람이었다. 수민은 금방 흥미를 잃고 고개를 숙였다.
-네, 오늘은 화제의 드라마! <베타 피쉬 데드>에서 여범석 소장 역을 맡은 우주민 배우님께서 함께해 주셨습니다. <베타 피쉬 데드>는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제작된 범죄 드라마로, 주인공 여범석 소장 역시 실존 인물인 김인혁이란 분을 모티브로 따온 캐릭터로 알려져 있는데요.
수민은 다시 TV를 바라보았다.
-실존 인물, 그것도 아직 생존해 계신 분을 모델로 한 역할을 맡아 훌륭히 극을 이끄셨습니다. 그렇죠, 여러분?
꺄아악! 몰려든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우주민 형 사랑해요! 누군가의 외침이 군중의 함성을 뚫었다. 우주민이 웃으며 그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 바람에 함성이 더욱 커졌다.
MC는 함성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베타 피쉬 데드>는 방영 내내 화제의 드라마로 손꼽히며 최고 시청률이 매화 갱신됐는데요. 누가 뭐래도 높은 시청률의 주인공은 우주민 배우님이죠! 주인공인 여범석 소장 역을 정말 실감 나게 연기하셨잖아요. 크으, 그 카리스마!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하죠. 그런 연기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요. 어린 딸을 되찾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음지의 해결사가 된 아버지 역할을 어쩜 그렇게 잘 연기하시는지……. 아직 미혼이신 배우님께서 연기하실 때 쉽진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질문인지 찬양인지 모를 MC의 말이 끝나자 우주민이 답했다. 감독님의 디렉팅이 훌륭했고, 역할의 실제 모델인 김인혁 소장님을 직접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고. 아직 미혼이지만 내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 많이 고민했다고. 답변은 특이할 게 없었다. 그럼에도 우주민이라는 배우의 아우라가 그 말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었다.
화면이 바뀌며 드라마 <베타 피쉬 데드>의 명장면이 흘러나왔다. 수민은 떡볶이를 먹는 것도 잊고 영상에 집중했다.
어린 딸이 실종되고 모두가 죽었을 테니 잊으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아니라고, 내 딸은 분명 살아 있을 거라고 말하며 부와 명예를 모두 내려놓고 세상에서 사라진다.
몇 년 후 경찰조차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범죄 현장마다 나타나는 주인공. 웃음이 사라진 싸늘한 얼굴로, 범죄자들을 소탕한다. 그러다 여성형 우성 오메가인 열혈 신참 형사과 엮여 콤비 아닌 콤비를 맺고, 대한민국의 밤을 지배한다고 알려진 범죄 조직의 뒤를 쫓던 중, 딸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발견한다.
주인공 여범석 소장은 긴 코트를 입고 늘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 하지만 담배에 불을 붙이지는 않는다. 콤비를 맺은 형사가 왜 담배를 피우지 않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딸이랑 약속했거든, 금연하기로. 다시 만났을 때 나한테서 담배 냄새가 나면 딸이 싫어할 거야.”
사실 물고 있는 건 담배가 아니라 하얀 막대 사탕이었다. 딸이 실종되기 전날 “아빠, 정 담배를 못 끊겠으면 이걸 물고 있어.”라고 말하며 학교 앞 슈퍼에서 사다 준 막대 사탕.
거기에서 영상이 끊기고 광고가 흘러나왔다. 수민은 서 여사를 보았다.
서 여사는 아무렇지 않게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떡볶이 접시엔 국물만 남아 있었다. 튀김과 순대 접시도 반 이상 비워져 있었다.
“저 드라마 봤어요?”
“아니요.”
“그래요? 나중에 시간 되면 한 번 봐봐요, 잘 만들긴 했더라고.”
서 여사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수민도 아무렇지 않게 물어볼 수 있었다.
“저 드라마에 나온 내용대로인가요?”
“뭐가?”
“소장님 아드님이요.”
“글쎄.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요. 드라마는 드라마잖아요.”
서 여사 순순히 답했다. 딱히 숨기려는 기색도, 불편해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인터넷 찾아보면 알겠지만 대충 알려져 있기도 하고 김 소장이 숨기려 하지도 않으니까 말 못 할 건 없는데. 남의 집 가정사를 내 입으로 말하는 게 좀, 그렇긴 하네.”
으음. 서 여사는 튀김을 뒤척거리며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한테 듣는 게 낫겠지? 괜히 인터넷에 자극적으로 부풀려진 내용으로 보는 것보다?”
“네.”
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 여사도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20년 전에, 음, 그러니까 수민 학생이 지금 스물셋이라고 했나? 그럼 한 서너 살 때 일이네. 어렸을 때 일어난 일이라 기억 못 할 수도 있는데, 들어 봤을 수도 있고. 혹시 여성-베타 임산부 대규모 실종 사건 있었다고 들어 본 적 있어요?”
수민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래요? 요즘도 가끔 TV에서 언급되던데. 뭐, TV를 잘 안 보면 모를 수도 있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TV 잘 안 보고 그런다면서.”
“…….”
일일 저녁 드라마를 열심히 챙겨 봤던 사람으로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 질문이었다.
“여기 떡볶이 한 접시 더 줘요.”
서 여사가 떡볶이를 추가 주문했다.
“안 좋은 이야기 할 때는 매운 걸 먹어 줘야 돼. 그래야 속 아픈 게 매운 떡볶이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아, 고마워요, 사장님. 여기 떡볶이 진짜 맛있네.”
서 여사는 떡볶이를 가져다준 분식점 사장님을 보내고는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아, 그 사건. 들어본 적 없다고, 거기까지. 그쵸?”
“네.”
“모를 만도 하지. 모를 수도 있는데, 좀 슬퍼지네. 이대로 그렇게 잊히는 건가 싶어서.”
서 여사가 씁쓸하게 웃으며 떡볶이를 삼켰다. 그렇게라도 속 아픈 걸 숨겨야겠다는 듯이.
“20년 전에 전국에서 갑자기 임산부들이 사라졌어요. 한둘이 아니라 수백 명. 그래서 난리가 났지. 그런데 결국 한 명도 못 찾았어요.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고.”
“소장님 부인분도요?”
“몰라요.”
수민은 무심코 ‘왜?’라고 물으려다 입을 닫았다.
인혁은 우성 알파라고 했다. 그렇다면 ‘임신’한 인혁의 아내는 오메가여야 한다. 알파와 베타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니까.
“방금 베타 임산부들만 실종됐다고…….”
“그래요, 그래서 김 소장 부인의 실종은 그 사건에 포함되지 않았어요. 부인이 오메가란 이유로.”
전국적으로 수백 명의 여성형-베타 임산부가 실종되었다. 같은 시기에 실종된 ‘오메가’ 임산부는 수사 대상이 아니었다.
부인 혼자만 실종되었다면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 시기에 여성형-오메가 임산부도 몇몇 실종 사례가 신고 접수되긴 했으니까. 나중 일이긴 하지만 경찰은 수사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여성형-오메가 임산부 실종 건도 같은 범주에 넣고 조사해 주긴 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역시나 인혁의 아내가 실종된 건은 포함되지 않았다. 인혁의 아내는 혼자 실종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종된 건 인혁의 아내와 처남. 두 명이었다.
처남은 남성형 베타였고 입양아였다. 목사인 장인, 장모님께서 사고사한 친구의 자식을 입양해 제 자식처럼 키운 것이라고 했다. 인혁의 아내와 처남은 어릴 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둘은 친남매처럼 자랐다. 치열하게 싸우고 또 싸우고, 때리고 맞고, 여느 평범한 남매와 다르지 않게.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두 사람이 실종되자마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색안경을 끼고 추잡한 말을 지껄여 댔다.
‘혹시 나중에 잘살고 있다고 연락 올지도 모르니까요. 뭐, 그런 경우가 없진 않으니까요. 아내 분이 오메가라면서요. 피 안 섞인 남자 형제랑 한집에서 살았다고? 뻔하죠, 뭐.’
경찰은 해달라니까 실종 접수를 해주긴 하는데 너무 힘 빼지 말라고 징그럽게 웃어 댔다. 그 경찰의 얼굴을 피떡이 되도록 뭉갠 것이 인혁의 첫 벌금형 기록이었다.
누가 작정하고 소문을 퍼트린 것처럼 동네에 이상한 말이 떠돌았다. 결혼을 앞둔 임산부가 피 안 섞인 남동생과 바람이 나 둘이 도망갔다고. 그 남매가 그 큰 교회 목사 부부의 자식들이라고.
장인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목사직을 내려놓았다. 둘뿐인 자식이 실종된 것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만한 일이건만, 평생 봉사하는 마음으로 섬겨 왔던 교회가, 그 교회 교인들이 제 자식들을 가지고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지어내 떠들어 대다니.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장인은 평생 해왔던 일에 회의를 느끼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장모는 저러다 사람이 잘못되겠다 싶을 정도로 울다가 쓰러져 입원했다.
하나 장인도 장모도 오래 누워 있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였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어나야 했다. 내 새끼들을 찾아야 하니까.
그들의 옆엔 늘 사위인 인혁이 함께였다.
인혁이 진정서를 넣고 민원을 제기하고 변호사를 껴가며 지랄한 덕인지, 경찰이 미적미적 조사에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조사 초반에 유력한 용의자로 거론된 건, 인혁이었다. 경찰들은 자신들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던 인혁에게 보복이라도 하듯 강압 수사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인혁에겐 알리바이가 있었다.
아내와 처남이 실종된 그 시각. 인혁은 회사에서 면접을 봤고, 교통 카드를 찍고 버스에 올라탔으며, 두 정거장 앞에 내려 빵집에서 카드를 긁은 뒤 집까지 걸어갔다. 근처 CCTV와 도로변에 세워져 있던 차 블랙박스에 그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다. 커다란 빵 봉지를 들고 행복해 어쩔 줄 몰라 하며 걷는 20대 초반의 인혁이.
인혁은 무혐의로 풀려났고, 곧 여성-베타 임산부 대규모 실종 사건에 경찰 인력 대부분이 투입되며 사건 조사는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비극이었다. 하나 딱히 인혁만의 비극은 아니었다.
여성-베타 임산부 대규모 실종 사건에 모든 관심과 인력이 집중되다 보니 다른 사건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도 인력도 한정된 자원이었다. 한쪽에 집중되면 다른 쪽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뒷전으로 밀린 사건의 피해자와 가족들은 피멍이 생기도록 가슴을 치고 울부짖었지만, 그들의 소리는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묻혔다.
인혁은 실종된 두 사람 역시 여성-베타 임산부 대규모 실종 사건의 피해자들일 거라 주장했으나, 피해자 모임에서도 국가 기관에서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온 나라가 그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온 국민이 그 사건의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걱정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동안 인혁과 장인, 장모, 세 사람은 그 세상과 격리되어 스스로 실종된 가족을 찾아다녀야 했다.
전단을 뿌리고,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전화 한 통을 믿고 전국을 돌아다니기를 3년. 장모가 뇌출혈로 쓰러져 얼마 앓지도 못하고 세상을 떴다. 아내의 장례가 마무리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이어 장인마저 쓰러졌고. 인혁은 혼자 남게 되었다.
“그 뒤로 사무실을 연 걸로 알고 있어요. 박 씨는 사무실을 연 초반에 합류했다고 들었는데, 나는 나중에 합류해서 초반엔 어땠는지 잘 몰라요. 이런 사정도 대충 들어서만 알고 있지.”
“…….”
“뭐, 예전엔 다 그랬어요. 알파나 오메가 대상으로 별별 범죄가 다 일어났고, 경찰 인력은 항상 부족하고 피해자 가족들 꼴은 다 그랬지. 요즘이라고 뭐 다른가. 자식 잃은 부모 모습은 더더욱 똑같고.”
서 여사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수민은 제 앞에서 떡볶이를 포크로 찔러 대는 여성 또한 그 부모 중 하나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부모는 다 자식을 그렇게 찾고 그리워하는 건가요?”
“그럼. 사고로든 범죄로든 내 새끼 먼저 보낸 부모 속은, 그 썩어 문드러진 속은 정말 아무도 몰라. 당사자 말고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부모 잃은 사람, 남편 잃은 사람, 자식 잃은 사람 부르는 단어는 있어도 자식 잃은 부모 부르는 말은 없다고. 너무 참담하고 불쌍해서, 차마 부를 말이 없다고.”
서 여사는 포크로 난도질한 떡볶이를 꿀꺽 삼켰다.
“……저도, 그런 부모님이 있었을까요?”
문득 든 생각이었다. 말을 하고도 딱히 별다른 느낌이 들진 않았다. 부모, 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닿지 않아서였다.
그럼에도 이런 말이 튀어나온 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자식을 위하는 게 부모라면. 내 부모는 어디에 있을까. 왜 날, 찾지 않을까? 인혁처럼.
‘그건 걱정 없어. ……부모는 모두 죽었으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확신에 차 있고 기뻐하는 목소리. 이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 내 부모는 죽은 건가? 이미 죽었겠지? 수민은 이유 없이 그 목소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수민 학생. 아이고, 내가 괜한 말을 해서…….”
고개를 드니, 어쩔 줄 몰라 하는 서 여사가 보였다.
그녀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승원이라는 아이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한 번. 그리고 이번이 두 번.
난 오지랖이 넓고 입이 너무 가벼워서 문제야. 서 여사가 가끔 사무실에서 한탄하듯 말했던 게 생각났다.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서 여사는 본인 말대로 오지랖이 넓고, 착했다. 아이 앞에서 부모가 죽었다고 기쁘게 말하는 사람보다는 고아 앞에서 부모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하곤 뒤늦게나마 미안해하는 사람이 더 착한 사람이겠지.
“전 괜찮아요.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해서.”
“아니야, 아니야. 내가, 내가 말을 잘못 꺼냈어.”
“아니요. 여사님 말고 제가요. 제가 질문한 거잖아요.”
같은 말을 비틀어 반복하기, 공감하기, 약간의 자기 생각 더하기. 대화의 패턴은 이 세 가지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세 가지 기술만 적절히 반복하면 공감 없이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 수민은 그 기술을 충분히 학습했다.
“그냥 제 부모님 생각이 나서요. 두 분 모두 죽었다고 했거든요.”
“……돌아가셨다고?”
“네.”
“그걸, 어떻게 알게 됐어요?”
“예전에 어떤 분께서 알려 주셨어요.”
“이런…….”
서 여사가 울상지었다.
“그래서 그냥, 그런 생각을 해본 거였어요. 제 부모님도 살아 계셨다면, 날 찾으려 애쓰셨을까.”
“당연하지. 꼭 그랬을 거예요.”
서 여사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세상 모든 부모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듯이.
“감사해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수민은 순대 간을 포크로 쿡 찍으며 말했다. 서 여사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한숨 쉬는 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
두 사람은 분식점에서 나와 편의점에 들러 초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었다. 2+1 행사 중이라 아이스크림이 하나 남았다.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사는 대신, 사무실에 있는 두 사람 중 누구에게 줄까 진지하게 토론했다. 서 여사는 박 씨한테 주자고 했고 수민은 인혁에게 주고 싶어 했다.
“김 소장이 그렇게 좋아요?”
“…….”
수민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섣불리 대답하면 6개월의 유통 기한이 더 짧아질 것 같았다.
“아이고, 큰일 났네. 이를 어쩌면 좋아.”
서 여사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수민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니까 가서 박 씨 줘요. 김 소장, 아주 얄미워서 더 주기 싫어지네.”
“…….”
수민은 아까완 다른 의미로 대답을 피했다.
사무실에 돌아가니 다행히도 박 씨가 외근을 나가 자리에 없었다. 서 여사는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어 놓으라고 했지만, 수민은 못 들은 척하며 인혁의 책상 위에 슬쩍 올려놓았다.
“김 소장, 단 거 안 좋아하지 않아?”
서 여사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인혁은 그제야 제 책상 위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발견하곤 서 여사와 수민을 보았다.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는 서 여사와 괜히 어색해하는 수민. 바로 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곤 악당처럼 웃었다.
“아니요, 나 단 거 잘 먹는데. 왜요, 언제는 초딩 입맛이라면서요?”
인혁이 보란 듯이 포장을 까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그리곤 입 안에 확 퍼지는 단맛을 견디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순간 후회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수민의 얼굴이 확 밝아졌으니까.
“언제 입맛이 바뀌었어?”
서 여사가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부터?”
인혁은 어깨를 으쓱이곤 수민에게 말했다.
“고맙다, 잘 먹을게.”
“네.”
수민은 그제야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어 타닥, 타닥. 키보드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인혁은 보는 척하던 서류에 급히 끼워 넣은 수민의 이력서를 슬쩍 빼내 서랍에 넣었다.
***
금세 한 달이 지났다. 수민은 월급이 입금됐다는 핸드폰 알림을 받고야 벌써 한 달이 지난 걸 알게 되었다.
월급이 입금된 건 금요일이었다. 박 씨는 주말 내내 화끈하게 마시다 죽어 버리겠다며 6시가 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말은 저렇게 해도 전화하면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으리라, 아주 멀쩡한 목소리로. 수민은 이제 박 씨의 허풍을 어렴풋이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월급날이라 기분이 좋은 건 서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종일 싱글벙글 웃더니 퇴근 시각 한 시간 전부터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보다 못한 인혁이 별일 없으면 일찍 가보라고 손짓할 정도였다.
“이런 날은 일찍 퇴근하는 거야. 봐봐, 사장님도 괜찮다고 하잖아? 수민 학생도 이렇게 구린 데 앉아만 있지 말고 일찍 퇴근해서 친구들이랑 밥도 먹고, 영화도 보러 가고 놀러도 가고 그래요.”
서 여사는 6시까지 자리는 지켰으나 박 씨가 뛰쳐나가자 수민의 팔을 잡고 뒤이어 사무실을 탈출했다. 혼자 나가기 미안하니까 괜히 수민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수민은 서 여자에게 붙잡혀 끌려 나가면서 사무실을 돌아보았다. 금요일이어도, 월급날이어도, 인혁은 여전히 서류가 가득한 책상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수민은 서 여사와 버스 정류장 앞에서 헤어졌다. 서 여사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수민은 집으로 갔다. 갈 곳이 거기밖에 없었다.
불을 켜고, 냉장고를 열어 배달 온 반찬을 꺼내고 밥을 퍼 저녁 식사를 했다. 씻고 나와 소파 앞에 웅크려 앉아 채널을 의미 없이 돌리다가 8시 20분에 시작하는 일일 저녁 드라마를 봤다. 그리고 그대로 거실 바닥에 누워 까무룩 잠들었다.
눈을 뜨니 토요일 아침이었다.
평소라면 거실에 웅크리고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밥을 챙겨 먹고, 씻었고. 어서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잠들고, 일요일을 맞이하고.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는 주말은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었다. 수민은 할 일이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욕도 없었다. 그냥 월요일만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첫 월급을 받은 다음 날이었다. 수민은 인혁이 시킨 대로 청약 통장과 적금 통장에 월급의 60%를 집어넣고, 남은 돈을 체크카드와 연결된 통장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가장 최근에 산 옷을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할 일이 있었다. 첫 월급을 받으면 꼭 해야 하는 일.
<사랑이 별거>에서 재벌 3세의 도움으로 취직한 주인공이 첫 월급을 받자 재벌 3세에게 선물을 사줬다. <큰일 났네 왕형제들>에서 내내 백수로 지내던 둘째도 드디어 취직해 첫 월급을 받자마자 부모님과 첫째, 셋째에게 선물했다.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다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조연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첫 월급을 받으면 주변 사람들한테 한턱 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수민은 그 당연한 일을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
처음엔 빨간 내복을 살 생각이었다. <사랑이 별거>에서 주인공이 빨간 내복을 사서 재벌 3세에게 선물했으니까.
드라마에서 재벌 3세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으며 엄청 좋아했다. 주인공은 얼굴이 새빨개져선 “싫으면 내놔라! 그냥 내가 입겠다!”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한 번 준 빨간 내복을 도로 빼앗으려고 했다.
재벌 3세는 필사적으로 빨간 내복을 지켜 내곤 다음날, 그 빨간 내복을 입고 출근했다. 그리곤 회사에서 우연히 마주친 주인공에게만 자신이 빨간 내복을 입고 있는 걸 보여 줬다가 변태 소리를 들으며 얻어맞았다. 재벌 3세는 맞으면서도 좋아서 실실 웃었다.
수민은 이번 주 내내 사무실 사람들 주변을 얼쩡거렸다. 청소하는 척하며,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 주는 척하며 사무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의 사이즈를 확인했다.
그런데 목요일에 방영된 <큰일 났네 왕형제들>에서 문제의 그 장면이 나왔다.
둘째가 가게에서 빨간 내복을 사서 나오는데, 둘째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악당 조연이 갑자기 나타나선 요즘 촌스럽게 누가 그런 걸 선물하냐고 비꽜다. 충격을 받은 둘째는 한강 둔치로 가 소주를 마시며 엉엉 울었다.
그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침 한강 둔치를 산책 중이던 재벌 4세가 둘째를 발견했다. 재벌 4세는 슬픈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신분을 숨기고 동네 백수 행세를 하는 중이었다.
재벌 4세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며 둘째를 일으켜 세우고는,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당당하게 제 소유의 백화점에 가서 첫 월급 기념 선물 쇼핑을 도왔다. 빨간 스카프와 넥타이.
수민은 드라마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유행이 빨리 바뀌는구나.’
주인공의 짝이 재벌 3세에서 재벌 4세로 세대교체가 될 만큼.
‘빨간 내복 말고 스카프랑 넥타이를 사야겠어.’
수민은 버스를 타고 백화점으로 갔다. 저번에 인혁과 함께 갔던 곳이었다.
백화점은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다. 어디에서 스카프와 넥타이를 파는지 모르겠어서, 수민은 지하 1층부터 한 층씩 둘러보았다. 그러다 1층 입구 쪽 매대에 잔뜩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양산을 세일하고 있었다. 서 여사와 비슷한 나이대 사람들이 양산을 고르고 있었다.
수민이 기웃거리자 판매 직원이 잽싸게 붙어 찾으시는 물건이 있냐고 물었다. 선물을 사러 왔다고 말하자 직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수민은 그 눈빛을 본 적 있었다. 이 백화점에서 말고 대형 전자샵에서. 인혁과 함께 가전 구매 목록을 추가해 나가던 직원의 눈빛이 분명 저랬던 것 같은데.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늦었다. 수민은 직원에게 붙잡혀 선물용으로 가성비 최고인 양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직원이 쉼 없이 폈다 접었다 하는 양산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눈이 핑그르르 돌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직원이 골라 준 양산을 결제하고 있었다. 직원은 양산을 예쁜 상자에 넣어 포장해 주고는, 해당 브랜드 남성복 매장이 위층에 있는데 거기서 넥타이도 팔고 있으니 한 번 꼭 들르시라 말했다. 1층 매대에서 추천받아 왔다고 하면 알아서 잘해 줄 거라고.
수민은 예쁘게 포장된 양산을 들고, 직원이 말한 남성복 매장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현란한 설명을 들으며 수십 점의 넥타이를 구경하고, 직원이 추천해 준 것 중 인혁과 박 씨에게 어울릴 만한 것을 두 점 구매했다. 선물할 것이라고 하니, 매장 직원은 추가금도 안 받고 넥타이를 각각 예쁘게 포장해 줬다.
“누구한테 주시는 거예요? 아버지? 아우, 너무 좋아하시겠다. 이렇게 잘생긴 아들이 첫 월급 받은 선물로 이런 걸 사 오다니.”
“아, 그게…….”
“부끄러워하는 것도 너무 귀엽고. 아우, 어쩜 좋아. 진짜 연예인 아니에요? 연예인 지망생도 아니고?”
“네, 네. 그런 거 아닌데…….”
“아쉽다. 이렇게 잘생긴 분들이 TV에 나와 줘야 눈이 호강하는 건데. 아무튼 이 넥타이 둘 다 이번 신상으로 나온 거고, 인기 많아서 딱 한 장씩만 남아 있었던 거거든요. 정말 잘 선택하셨어요. 받으시는 분이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혹시 색깔이나 디자인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면 교환도 되니까, 걱정 마시구요. 교환하려면 원래 영수증이 필요한데, 선물에 영수증을 넣으면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저희 매장에서는 교환권을 넣어드려요. 여기, 금박도 두르고 명함처럼 생겨서 완전 폼 나죠?”
직원은 말이 너무 빠르고 또 많았다.
“네, 네, 감사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이미 쇼핑백이 두 개나 들려 있었다. 스카프와 넥타이.
직원들의 화술에 말려들어 산 거지만 어쨌든 만족스러웠다. 수민이 보기에도 양산과 넥타이는 세련되고 예뻐 보였다.
선물 예산을 생각해 보고 온 게 아니라 자신이 산 게 비싼 건지 싼 건지 알지 못했다. 이번 달 용돈을 전부 썼으니 이 정도면 사무실 사람들이 싸구려라고 싫어하지는 않겠지, 기대할 따름이었다.
‘요즘 누가 이런 싸구려를 선물하냐?’
<큰일 났네 왕형제들>에서 악당 조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괜히 긴장됐다.
백화점에서 샀으니 싸구려는 아니겠지. 직원들도 다 예쁘고, 잘 샀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수민은 쇼핑백 끈을 꽉 움켜쥐었다.
긴장한 탓에 길을 잘못 들어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찾느라 남성복 층을 반 바퀴 더 크게 돌아야 했다.
수민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한적한 남성복 매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인혁이 입고 다니던 것과 비슷한 코트를 발견했다.
매장 앞에 세워 놓은 마네킹이 그 코트를 입고 있었다. 수민은 걸음을 멈추고 코트를 바라보았다.
코트를 내건 매장은 옆의 다른 매장들보다 고급스러워 보였다. 들어가는 손님이 다른 매장보다 적어 한적했다. 매장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은 수민을 힐끔 보고는,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민은 편하게 코트를 구경할 수 있었다.
소매를 만져 보니 기억하는 것과 질감이 비슷했다. 색은 인혁이 입고 다니던 코트보다 조금 밝았다.
경찰서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피해자가 변호사를 통해 연락해 왔다. 코트를 변상하고 싶다고. 그 말을 들은 인혁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듯 “버리라고 해. 어차피 올해까지만 입고 버리려고 했던 거라고.”라고 말했다.
그 뒤로 인혁은 좀 더 짧고 두꺼워 보이는 코트를 입고 다녔다. 짙은 색의 그 코트도 잘 어울렸지만, 아무래도 수민은 이런 코트를 입은 인혁이 보기 좋았다.
이걸 사고 싶다고는 생각이 들었다.
수민은 소매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확인했다. 그리고 당황했다.
“어?”
이거, 0이 몇 개지?
수민의 월급을 통째로 여러 달 모아도 살까 말까 한 금액이었다. 인혁이 한 달 용돈으로 쓰라고 정해 준 금액으로 계산하면 꼬박 이 년을 모아도 살 수 없었다.
월급을 너무 많이 주시는 거 아니냐고 말했을 때 이게 뭐가 많은 거냐고 코웃음 치던 인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혁의 말이 맞을지도. 옷 한 벌을 살 수도 없는 금액이라니.
수민은 금전 감각의 혼란을 느꼈다.
코트 가격표를 보고 충격받은 덕분에 선물을 준다는 행위에 대한 부담감을 덜 수 있었다. 조금. 아주 조금.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산 것은. 수민은 주말 내내 그 행위의 무게에 짓눌렸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불현듯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거실을 여러 번 왔다 갔다 걸어 다니다가 찬물을 한 잔 마시고 도로 소파 앞에 웅크려 앉았다. 그 과정을 끝없이 반복했다.
그때마다 소파 위에 올려 둔 쇼핑백에 눈이 갔다.
괜히 부끄러웠다. 참을 수 없이 초조해졌다. 자꾸 입 안이 말랐다.
계속 물을 마시는 바람에 배고프지 않아 점심 식사를 걸렀다. 그 바람에 저녁에 두 끼 분의 과일을 먹어야 했다. 먹으면서 체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밤중에 편의점에 가서 소화제를 사 먹었다.
월요일엔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수민은 일찍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 앞에 서서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양산과 넥타이를 쇼핑백 하나에 담았다. 다시 두 개로 나눠 담았다가, 결국 하나에 담았다. 그러다 그냥 가지고 가지 말자는 생각이 울컥 치밀어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첫 월급 선물은 꼭 하는 거라고 그랬어.” 변명하듯 말하며 다시 쇼핑백을 손에 들었다.
결국 쇼핑백을 들고 집을 나섰다. 평소보다 30분이나 이른 시각이었다.
버스 안이 한적해 앉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수민은 굳이 손잡이를 잡고 섰다. 앉으면 더 긴장될 것 같았다. 깜박하고 쇼핑백을 두고 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앉고 싶지 않았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아직 출근하기에 이른 시간이었다. 수민은 쇼핑백을 책상 제일 아래 서랍에 숨겨 두고는, 아니, 넣어 두고는 청소를 시작했다.
사무실엔 저 혼자뿐인데도 혹시나 누가 훔쳐 갈까 싶어, 걸레질을 하면서도 계속 책상을 돌아보았다.
청소를 다 해도 사무실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9시가 되려면 아직 30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수민은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지 못하고 계속 이리저리 서성였다.
“어머, 오늘도 일찍 왔네. 수민 학생, 주말 잘 보냈어요?”
드디어, 아니 벌써. 서 여사가 왔다. 수민은 바짝 얼어붙어선 삐걱삐걱 소리가 날 정도로 어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 하, 세요.”
목소리가 국어책 읽는 로봇 같았다. 하지만 서 여사는 수민이 평소와 다른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응, 나야 늘 안녕하지. 어우, 벌써 월요일이야. 그래도 요번 주말엔 별일 없어서 푹 쉬었지. 계속 조용해서 불안하긴 한데, 몸이 편해서 좋기도 하네요. 뭐, 이런 날도 있어야지. 아, 내가 반찬 좀 만들어 왔어. 우리 이따 점심엔 나가서 사 먹지 말고 새 밥 해서 먹어요. 소시지도 볶아 왔는데. 수민 학생, 저번에 보니까 이거 잘 먹던데. 응?”
서 여사는 커다란 가방에서 크고 작은 반찬통을 한가득 꺼내 냉장고에 착착 쌓느라 바빴다.
평소라면 얼른 다가가 도왔을 수민이 오늘은 책상 앞에 서서 손만 꼼지락거렸다.
지금 꺼내도 되나? 수민은 고민했다.
서 여사는 자신에게 호의적이다. 그러니 이걸 주면 받기는 할 것이다.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일단 겉으로는, 고맙다고 말하고 좋아해 줄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서 여사의 반응을 먼저 확인해 보면, 이후 상황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수민은 망설이다 서랍에 손을 댔다.
그때였다.
“아이구, 죽겠다아아아. 속 쓰려어어.”
박 씨가 앓는 소리를 내며 쭈글쭈글하게 걸어 들어왔다. 수민은 흠칫 놀라며 서랍에서 손을 뗐다.
“아아, 굿모니이잉. 수민 학새앵, 아이고 나죽는다아아.”
박 씨는 수민을 쳐다보지도 않고 제 자리로 가 철푸덕, 엎어졌다. 수민은 저도 모르게 박 씨를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또 주말 내내 술 퍼먹었어? 적당히 좀 마시라니까. 아이구, 내가 못 살아. 술 냄새!”
서 여사가 득달같이 달려와 박 씨의 등을 퍽퍽 내리쳤다. 아이고, 나 죽는다아아! 박 씨가 꿈틀댔다.
“어디서 병 걸린 돼지 잡는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우리 사무실이었네.”
설상가상 인혁까지 도착해 버렸다.
“으, 술 냄새.”
인혁이 인상을 쓰며 수민의 앞을 지나쳤다.
그렇게 말하는 인혁도 술 냄새만 안 난다뿐이지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주말 내내 한 시간도 못 잔 사람처럼 얼굴이 푸석했다.
인혁은 코트를 벗는 둥 마는 둥 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아. 한숨 소리가 오늘따라 무겁게 들렸다.
딱 봐도 선물 주기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적어도 수민의 판단으론 그랬다.
“…….”
잔뜩 긴장해 있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오전 내내 언제 주지, 어떻게 주지 고민만 하다가 끝나 버렸다. 무슨 정신으로 밥을 떠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수민은 이런 식의 스트레스에 취약했다. 경험한 적이 없어 면역력이 없었다. 그래서 쉽게 자포자기했다.
그냥 집에 다시 가져가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우체국 가는 김에 또 떡볶이 먹으러 가자는 서 여사의 제안에 평소처럼 따라나섰다. 책상 서랍에 넣어 둔 쇼핑백 따위에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반나절 만에 수민에게 버림받은 선물이 빛을 본 건 느지막한 오후, 예상치 못한 인물의 예상치 못한 행동 때문이었다.
“아, 이 연락처 어제 수민 학생한테 타자 좀 쳐달라고 부탁했던 거에 적혀 있을 텐데.”
박 씨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수민의 책상으로 건너왔다. 책상 위를 쭉 훑어보았으나 찾는 서류는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삭막하구만.”
수민의 책상은 일한 지 고작 한 달밖에 안 되었다는 걸 감안해도 참 볼 게 없었다. 서류와 검정고시 교재, 메모지. 볼펜 몇 자루 꽂힌 연필꽂이. 그게 전부였다.
또래 애들이 모을 만한 조그만 피규어라든가 장난감은 바라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아이스크림 사 먹고 받은 영수증 한 장 정도는 굴러다녀야 하지 않나?
수민의 책상엔 수민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물건이 전혀 없었다. 수민의 책상을 보고 수민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박 씨는 그게 영 거슬렸다.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었다.
하루에 1/3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자리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 자리는 그 자리의 주인을 닮는다.
박 씨의 책상 위엔 술 깨는 약과 빈 헛개수 음료 캔이 굴러다닌다. 반쯤 빈 목캔디 통도 있고, 껌 종이도 제법 쌓여 있다. 서랍을 뒤져 보면 속도위반이나 불법 주정차로 걸려 날아온 벌금 딱지가 한 뭉텅이는 나올 것이다. 비용 처리하려고 챙겨 와선 까먹고 제출하지 않은 영수증도 꽤 있을 것이고.
누군가 박 씨를 뒷조사하려고 밤중에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들어온다면, 박 씨의 책상을 보곤 바로 견적을 낼 것이다. 이 새끼 이거 술 좋아하고, 운전 습관이 더럽고 성격이 칠칠찮네.
서 여사의 책상도, 인혁의 책상도 각자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자질구레한 사무용품과 거울, 핸드크림, 어린 딸과 찍은 젊은 시절의 사진, 삼색 볼펜과 양 끝에 묶은 자국이 선명한 면 손수건.
20대 초반 남성형-오메가 연관 범죄 사건이 정리된 파일철. 구겨진 담뱃갑. 사용한 흔적이 없는 라이터. 급히 휘갈겨 쓴 글씨가 잔뜩 적혀 있는 수첩. 서랍 속에 굴러다니는 피 묻은 목장갑, 법원 소환 통지서, 벌금 납부, 세무서 통지서. 그리고 제일 납작한 서랍에 달랑 들어 있는 사진 한 장. 그 사진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젊은 시절의 인혁과 부른 배를 안고 있는 젊은 여성.
하지만 수민의 책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오늘 수민이 사라진다면, 그래서 수민을 찾기 위해 아무리 책상을 뒤진들, 아무것도 찾지 못하리라. 고작 한 달 뿐이지만 함께 일하고 밥을 먹으러 다녔던 사무실 사람 중 누구도 수민이 어떤 사람이라고 명확히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겠지. 성실하고 참하고 김 소장을 잘 따랐던 청년이었어요, 라고.
찜찜했다.
박 씨는 혀를 차며 수민의 책상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주인 없는 책상에 손을 대다니. 무례한 짓이라는 걸 알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전에도 몇 번, 수민이 자리를 비울 때 책상에서 서류를 가져가곤 했다. 나중에 수민이 돌아오면 사후약방문 격으로 수민에게 허락을 구하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책상에 자신의 개인적인 소지품이 전혀 없어서일까? 수민은 항상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괜찮겠지.
박 씨는 주인 없는 책상을 뒤진다는 죄책감 대신 썰렁한 책상에 치를 떨며 중간 서랍을 열었다. 위 서랍과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다.
‘나중에 밖에 나갔다 올 때 인형 뽑기나 피규어? 그런 거라도 하나씩 사다 줘야지, 원.’
서랍을 닫는데, 뭔가 눈에 들어왔다. 제일 아래 서랍에서 반짝반짝한 재질의 종이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게 뭐지?”
박 씨가 찾으러 온 건 평범한 서류였다. 80g에 흑백으로 양면 인쇄된 A4 용지 다섯 장. 왼쪽 상단에 철이 되어 있는. 그러니 이렇게 두껍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재질의 종이는 박 씨가 찾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박 씨는 자연스럽게 그 종이에 손을 댔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로 문질러 보았다. 감촉이 아주 죽여줬다.
‘다른 사람 책상도 아니고 수민 학생의 책상에 이런 게?’
군침이 돌았다.
평생 정보를 모으고 팔아먹으며 살아왔다. 이제 그쪽 일은 청산하고 인혁 밑에서 안전한 월급쟁이로 생활하며 제법 건실하게 살고 있다지만. 여전히 제 버릇을 개 못 줬다.
“이게 뭘까나아?”
뭔지만 보고 다시 넣어 두면 된다. 훔쳐 갈 것도 아니고, 빼돌리지도 않을 거니까. 범죄는 아니다. 뭐가 문제란 말인가? 박 씨는 흐흐, 웃으며 서랍을 열었다.
“내 서류가 여기 있으려나아? 아니면 다른 게 있으려나아, 알 수가 없네에.”
이 바닥에서 정보로 밥 벌어먹고 살고 싶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마음가짐 하나. 편견을 가지지 않는 것.
때문에 박 씨는 그게 백화점 쇼핑백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섣불리 확신하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은 정보가 될 수 없다. 추측은 선입견을 낳고 착각을 만들어 낸다. 착각은 기억을 왜곡시키고, 입에 밥이 아니라 칼을 집어넣는다.
박 씨는 서랍에서 반짝반짝한 종이 가방을 꺼내, 직접 눈으로 살피고야 그게 브랜드명이 적힌 쇼핑백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그러고 나니 더더욱 쇼핑백 안에 든 게 궁금해졌다.
그새 여친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며칠 전에 첫 월급을 받더니, 평소 가지고 싶었던 명품을 샀다거나? 어느 쪽이든 흐뭇한 일이었다. 박 씨는 이 정도는 추측도 선입견도 아니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사춘기 아들의 일기장을 몰래 들여다보는 나쁜 아빠의 마음으로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아, 이런.”
쇼핑백 안에는 누가 봐도 ‘나 선물이에요!’ 티가 팍팍 나게 포장된 작고 길쭉한 박스가 세 개 들어 있었다. 하나는 분홍색 포장지로, 두 개는 검은색에 은박을 입힌 포장지로 싸여 있었다. 그러니까 여자 꺼 하나에 남자 꺼 둘이었다.
설마 마약이나 폭탄을 이렇게 포장해 들고 오진 않았겠지. 크기로 보건대 여자 건 양산이나 스카프 같았다. 남자 것은, 조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장지갑이라기엔 폭이 너무 좁은데. 허리띠는 요즘 이렇게 포장 안 하고. 그럼 넥타이?’
누구에게 준다고 이름이 쓰여 있진 않았지만 딱 봐도 답이 나왔다. 선입견이고 착각이고 끼어들 여지가 없이 딱 떨어져서, 박 씨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망할. 내가 보면 안 되는 거잖아.”
박 씨는 허둥지둥 쇼핑백을 서랍에 욱여넣었다가, 쇼핑백이 구겨진 걸 보곤 화들짝 놀라 다시 빼 들었다.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남의 책상 하루 이틀 뒤져 본 것도 아닌데. 한 번 꺼내 본 거 티 안 나게 돌려놓는 기본적인 손재주가 녹슨 것도 아니고. 그런데 막 이 업계에 뛰어들었던 새끼 시절에나 했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다니.
박 씨는 손으로 구겨진 쇼핑백을 폈다. 그러다 그 반짝반짝한 종이 표면 위에 찍힌 제 손자국을 보았다. 이건 진짜 새끼 시절에도 안 했던 실수였다.
“아…….”
박 씨는 망연자실했다. 타이밍 좋게도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들렸다.
새삼 이 사무실에 낯선 손님이 올 리 없으니 그 두 사람의 정체야 안 봐도 뻔했다. 박 씨는 쇼핑백을 든 채로 고개를 돌렸다. 입술이 팅팅 부어서는 초코 쭈쭈바를 입에 물고 들어오는 수민과 검은 봉다리를 든 서 여사가 보였다.
“어…….”
털썩.
수민이 물고 있던 쭈쭈바가 바닥에 떨어졌다.
도통 웃지도 않고, 표정 변화가 없어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했는데. 이런 식으로 그 얼굴에 극적인 감정이 드러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망했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수민 학생, 왜 아이스크림을 먹다 떨…… 박 씨? 지금, 수민 학생 책상에서 뭐, 하는 거야?”
“하하, 그게, 그러니까, 저는, 서류를, 그러니까, 서류를 찾으려는 것뿐이었는데…….”
“지금, 수민 학생 책상 뒤지고 있었던 거야? 박 씨 미쳤어어어어?”
서 여사의 고함이 사무실을 뒤흔들었다.
아침에 얻어맞은 데가 아직도 욱신거리건만. 다시 매타작의 시간이 도래했다.
***
박 씨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박 씨 몫으로 사 온 쭈쭈바는 수민의 입에 들어갔다. 서 여사의 분노가 담긴 매서운 스매싱은 박 씨의 등짝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박 씨는 소파에 쓰러져 소금물 맞은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나, 날 죽인 범인은 서, 서 여…….”
“아직 덜 맞았지!”
박 씨는 다잉 메시지를 남기려다 정말 황천길에 갈 뻔했다.
“저, 이거요.”
수민은 이왕 들킨 김에 선물을 나눠 주었다. 서 여사에게, 박 씨에게, 또 인혁에게. 직접 건네주지는 못하고 책상 위에 슬쩍 올렸다.
“설마, 첫 월급 받았다고 내복 사 온 거야? 우리한테 선물로?”
서 여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역시 내복을 샀어야 했나. 수민은 잠깐이지만 후회했다.
“어머, 이게 뭐야? 너무 예쁘다!”
하지만 서 여사가 포장을 뜯고 환호성을 지르자, 그 생각이 싹 사라졌다.
“마음에 드세요?”
수민은 굳이 물어보았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서 여사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걸.
그래도 굳이 말로 듣고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엄. 수민 학생이 첫 월급 받아서 사준 거잖아. 떡볶이 떡 한 봉지만 사다 줬어도 정말 기뻤을 거 같은데. 이렇게 예쁜 양산을 사다 주면 어떡해. 이거 어디서 샀어. 포장지 보니까, 백화점에서 사다 준 거 맞지? 비싼 거 아냐?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사 와, 사 오긴.”
그 돈 있으면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사고 싶은 거 사지. 서 여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양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양산을 쫙 펴선 어깨에 걸치고 핑그르르 돌려 보기까지 했다.
“어때? 잘 어울려?”
“네.”
수민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박 씨도 선물을 열어 보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인혁도 박 씨도 넥타이를 안 매고 다니길래 넥타이가 없는 것 같아 사 온 건데 다행히 마음에 든 듯했다.
“이야, 부티 나는 게 때깔 죽이네. 나 넥타이 매고 다니라고?”
박 씨는 언제 꿈틀댔었냐는 듯 벌떡 일으켜서는 넥타이를 목에 맸다.
“김 소장, 김 소장 건 뭐야. 나랑 같은 색인가? 얼른 열어 봐.”
넥타이를 자랑하듯 인혁에게 들어 보였다.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다물어질 줄 몰랐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내가 말년에 무슨 복이 터져서 이런 선물을 다 받아 보나. 응? 김 소장. 김 소장 꺼도 얼른 확인해 보라니까?”
박 씨가 인혁을 재촉했다.
인혁은 서 여사가 양산을 들고 빙글빙글 돌건 박 씨가 넥타이를 닳아 없애 버릴 기세로 만져 대건 아랑곳하지 않고, 포장된 선물을 그냥 들고만 있었다. 포장을 푸르고 안을 열어 보지 않았다. 기뻐 보이지도 않았다. 인혁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삐딱하게 들고 수민을 바라보았다.
“너 돈이 어딨다고 이런 걸 사 와. 저번에 내가 말한 거 잊었어? 월급 받은 거, 그거 얼마나 된다고 이런 걸 사.”
“적금은 다 넣었어요.”
“그럼 이건 뭔 돈으로 사 왔어?”
“용돈으로요.”
“용돈으로? 너 용돈 뜻 몰라?”
“첫 월급 받으면 그래야 한다고 그래서…….”
“누가?”
“…….”
“설마 또 그 드라마?”
“네.”
“그놈의 드라마, 시청자 게시판에 항의글이라도 올려야 하나.”
“왜요?”
항의라니. 너무 재미있어서 시청률 30%를 돌파한 드라마에 뭔 잘못이 있다고?
“몰라서 물어?”
“…….”
그때 두부는 잘 먹어 놓고 이번엔 왜 이러는 걸까. 설마 포장을 풀어 보지도 않았는데 선물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제일 선물을 주고 싶은 사람이, 유일하게 선물을 마음에 안 들어 한다니. 수민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마음에 안 들면 교환할 수 있다고 그랬어요.”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인혁은 말을 하다 말았다. 어쩐지 피곤해 보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김 소장. 좋으면 그냥 솔직히 좋다고 해! 왜 좋은 선물 받고 애를 잡아, 잡긴!”
양산을 다시 상자 속에 고이 넣은 서 여사가 인혁을 째려봤다.
“여사님. 여사님도 마냥 좋아하기만 할 게 아니라…….”
“김 소장, 그냥 좋으면 좋다고 말하라니까? 왜 그렇게 삐뚤게 굴어.”
“서 여사님.”
“걱정해 주는 건 알겠는데, 이번엔 그냥 수민 학생 성의를 봐서, 솔직히 좋다고 해줘. 어? 주말에 일부러 백화점까지 나가서 큰돈 써서 우리 주겠다고 선물 사 온 거잖아. 그 마음 몰라주고 화부터 내면 어떡해?”
서 여사가 인혁을 타박하며 수민에게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기죽지 마요. 알죠? 김 소장 솔직하지 못한 거.”
“…….”
수민은 못마땅하게 절 바라보는 인혁을 뚱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행복이 별거>에 나오는 재벌 3세가 빨간 내복을 받았을 때 인혁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 것 같았다.
“괜히 좋으면서 저러는 거야. 수민 학생이 고생해서 번 돈, 자기한테 쓴다고 속상해서.”
“아닙니다만.”
“아니긴 뭐가 아냐. 아니어도 그런 걸로 해.”
서 여사가 수민을 달래며 인혁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인혁은 풀 죽은 수민을 보고는 뭐라 말을 하려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아직 포장을 뜯지도 않은 선물로 제 이마를 툭 쳤다.
그날, 인혁은 끝까지 선물을 열어 보지 않았다. 수민은 인혁의 책상 위에 놓인 선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퇴근했다.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조심해서 가. 내일 보자.”
인혁이 말했다.
수민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
다음 날.
수민은 평소보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평소보다 10분 늦게 사무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켜자마자, 저도 모르게 인혁의 책상을 쳐다보았다.
선물 상자가 안 보였다.
혹시나 싶어 쓰레기통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도 선물 상자는 들어 있지 않았다.
“…….”
기분이 좀 나아졌다.
수민은 평소처럼 사무실을 청소하고 화분에 물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책상에 앉아 오랜만에 검정고시 교재를 폈다.
오늘은 웬일인지 서 여사보다 박 씨가 먼저 출근했다.
“안녕하세요.”
수민이 인사하자 박 씨는 크흠, 괜히 헛기침하며 손에 든 쇼핑백을 건넸다. 바라만 보고 있자, 왜 바라만 보냐며 손에 쥐여 주었다.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음, 그냥. 첫 월급 받은 기념으로, 나도 선물 하나 주고 싶어서.”
흠흠. 박 씨가 또 헛기침하며 괜히 목을 손으로 문질렀다. 보니 수민이 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수민의 눈이 커지자 박 씨가 씩 웃었다.
“어때?”
“좋아요.”
“나도 좋아.”
“그런데 이건 뭔가요?”
수민은 박 씨가 준 쇼핑백을 들여다보았다. 어제 수민이 준 것처럼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열어 봐도 되나요?”
“어? 그럼, 그러엄. 뭐, 뭔지 궁금하면 내 앞에서 열어 봐도 되지. 암, 그럼. 나도 어제 그랬잖아?”
“네.”
수민은 포장된 상자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박 씨는 괜히 마른침을 삼키며 수민의 앞에서 얼쩡거렸다.
포장지를 까니 게임기가 그려진 박스가 나왔다. TV 광고로 봤던 게임기였다. 왜 이걸? 의아해하며 박 씨를 올려다보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고 들어서. 크흠, 왜, 별로야?”
흠흠, 흐흠. 박 씨는 목이 아픈지 자꾸 기침을 해댔다. 수민은 얼른 탕비실에서 물을 떠 와 내밀었다.
“어?”
박 씨는 ‘왜 나한테 물을 주지?’라는 표정으로 수민을 봤다. 일단 주니까 받는다는 느낌으로 받아 마셨지만, 눈은 계속 수민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음…… 마음에 들어?”
박 씨가 주저하다 물었다.
“네.”
수민은 게임기 박스를 손으로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게임을 해본 적 없었다. TV에서 게임기 광고를 봐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막상 선물로 받으니, 기뻤다.
“그런데 저…… 이거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서요.”
수민이 상자를 두 손으로 꼭 움켜쥔 채 박 씨를 쳐다봤다.
“뭐? 아니, 여태 게임 한 번 안 해봤어?”
박 씨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수민의 이력서를 보고 인혁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차, 싶었다.
“수민 학생, 완전히 모범생이었나 보네. 아, 안 되겠구만. 내가 또 여기서 실력을 발휘해야 하나? 내가 또 한 솜씨 하잖아? 어릴 때 오락실에서 백 원으로 반나절을 버틴 몸이라고.”
박 씨는 얼른 목소리를 키우고, 재킷을 벗어 재꼈다. 그리곤 수민에게 손짓했다.
“나랑 같이 켜보자. 까봐, 얼른.”
“네.”
수민은 얼른 박 씨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게임기를 꺼내 전원을 켜고, 이것저것 만져 보기 시작했다.
“뭐야, 둘이서 나 몰래 무슨 작당 모의를 하고 있는 거야?”
문이 열리고 서 여사가 씩씩하게 걸어 들어왔다. 서 여사는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아, 좀 늦게 오시지. 서 여사님, 왜 이렇게 일찍…… 어, 설마?”
박 씨가 그 쇼핑백을 보고는 의뭉스럽게 웃었다.
“그러면 박 씨도?”
서 여사는 박 씨와 수민, 두 사람이 쥐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는 알 만하다는 듯 웃음 지었다.
“아니, 나이들이 몇인데 아직도 게임기를 가지고 놀아?”
“아따, 서 여사님. 요즘 시대에 나이가 뭔 상관이래요. 이거, TV에 광고도 나오는 게임기라고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거 없어서 못 산다는데.”
“비켜 봐봐, 게임기는 나중에 가지고 놀고. 수민 학생, 잠깐 이거 좀 한 번 걸쳐 봐봐, 맞나 보게.”
서 여사가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수민의 책상 위에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그 쇼핑백에서는 두툼한 스웨터와 남방이 나왔다.
“바지도 사 오고 싶었는데, 사이즈를 몰라서.”
서 여사는 안타깝다는 듯 말하며 수민의 허리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수민은 어제 퇴근 전에 서 여사가 제 셔츠 목 부분을 뒤집어 봤던 것을 떠올렸다.
수민은 서 여사가 입혀 주는 대로 스웨터와 남방을 입어 보았다. 스웨터도 남방도 조금 큰 듯했지만, 수민에게 잘 어울렸다.
“이런 밝은색이 어울릴 줄 알았다니까. 맨날 어두운색만 입고 다니는 걸 보고, 이 예쁜 얼굴이 아깝다 싶었거든.”
서 여사는 흐뭇하게 웃으며 수민을 이리 휙 저리 휙 돌려 보았다.
“그러게요, 잘생긴 얼굴이 확 사네.”
박 씨가 게임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짝짝 손뼉 쳤다.
“김 소장이 옷은 안 챙겨 줬죠? 그 사람이 이런 덴 무뎌서 그래. 김 소장은 그렇다 치고, 수민 학생까지 괜히 김 소장 그런 면 닮지 말고 멋지게 입고 다녀요. 얼굴이 너무 아깝잖아! 왜 자꾸 김 소장 나쁜 점만 닮고 그래.”
서 여사가 스웨터와 남방의 태그를 떼며 말했다.
“고럼, 고럼. 그런 건 닮으면 안 되지.”
박 씨가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썰렁하던 책상이 금세 어지러워졌다. 게임기 박스와 설명서, 스웨터와 남방, 포장지, 비닐, 태그, 쇼핑백. 모두 수민을 향한 사무실 사람들의 호의였다.
나이 많은 사람이 건네는 호의는 익숙하다. 옛날에도 밥은 먹고 다니냐는 걱정을 들으며 철마다 온갖 김치통과 반찬통을 선물로 받곤 했으니까.
그땐 호의로 받은 김치와 반찬을 집에 가져가 옮겨 담고 통을 깨끗이 씻어 바로 돌려주었다. 비닐에 옮겨 담은 김치와 반찬은 썩기도 전에 버려졌다. 정기적으로 자취방을 검사하러 온 김 목사가 그것들을 수거하여 내다 버렸다. 그리곤 기도원에서 택배로 온 음식들로 냉장고를 채워 주었다.
‘외부의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아라. 오직 정화된 순결한 음식만 먹고, 네 몸을 늘 깨끗이 해야 한다. 선생님께 닿는 것이니 말이다.’
외부에서 의심을 피하기 위해 먹어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마저도 죄는 죄였다. 집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엎드려 속죄문을 읊어야 했다.
시장통 교회 교인들이 주는 호의는 늘 김 목사라는 벽에 막혀 수민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수민은 그것을 애석해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묵직한 반찬통과 김치통을 들고 집으로 가는 언덕을 오를 때마다 번거롭고 귀찮다고만 생각했다. 어차피 버려질 텐데. 왜 자꾸 주는 걸까.
그때 한 번이라도 김 목사 몰래 반찬과 김치를 먹어 봤다면 어땠을까? 지금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
잘 모르겠다고, 수민은 왼쪽 어깨 아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왜, 그쪽이 불편해? 팔 움직이기가 힘들어?”
“아니요.”
“아니면?”
“그냥요.”
수민은 손을 내렸다. 그래도 왼쪽 어깨 아래의 뻐근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나만 좋아했네. 수민 학생, 마음에 들어? 안 들면, 다른 색으로 바꿔 주고.”
흥분이 한 꺼풀 가라앉았는지, 서 여사가 뒤늦게 수민의 눈치를 보았다. 좋다 싫다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수민의 태도가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정말?”
“네. 감사해요.”
“감사하긴, 뭘. 안 그래도 내가 기회가 되면 수민 학생 옷 한번 사주고 싶었거든? 어제 너무 예쁜 양산 받아서, 그 김에 내 욕심 채우는 거지, 뭐.”
서 여사가 봄꽃처럼 활짝 웃었다.
“어제 준 선물은 정말 고마워요. 내가 소중히 아껴 쓸게. 집에 고이고이 모셔 두었다가 봄에 햇볕 따가우면 매일 들고 다닐 거야.”
서 여사가 수민의 등을 문지르며 말했다.
“왜들 몰려 있어요. 이젠 나 안 오면 일할 생각들을 안 하나 보네?”
타이밍 좋게 인혁이 들어왔다. 서 여사가 재빨리 수민의 어깨를 잡고 몸을 빙글 돌렸다.
“어때 김 소장, 수민 학생 예쁘지?”
서 여사가 물었다.
“병아리 같네요.”
노란 스웨터를 입고 어색하게 서 있는 모습이. 인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어? 김 소장. 설마 그거-.”
박 씨가 인혁의 목 부분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서 여사와 수민도 덩달아 인혁의 목 부분을 보았다.
인혁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인혁이나 박 씨나 늘 양복을 입고 그 위에 코트나 파카를 걸치긴 했지만, 넥타이를 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여름이라면 모를까 겨울엔 추워 보이다 못해 시려 보였다.
서 여사의 잔소리 때문인지 가끔 머플러를 두르고 다니긴 했으나 갑갑하다며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가끔 인터뷰가 있거나 방송 출연이 있을 때나 넥타이를 했는데, 그마저도 일정이 끝나면 바로 잡아 빼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곤 했다.
그랬던 인혁이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코트나 셔츠, 바지 모두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는 인혁의 성격을 드러내듯 적당히 구겨져 있었고, 또 낡아 있었다. 개중에서 넥타이만 새것처럼 윤이 났다. 그러니 자연히 넥타이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인혁은 모두의 시선이 제게 모이자 불편한지 목을 죄는 넥타이를 손으로 잡아 빼려다가 멈칫, 손을 내렸다. 흐흥. 서 여사가 짓궂게 웃으며 눈짓했다. 거봐, 좋으면서.
“웬 겁니까?”
인혁이 세 사람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며, 화제를 돌릴 겸 수민의 책상을 턱짓했다. 그래도 수민의 눈은 인혁이 맨 넥타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아, 이거? 게임기는 박 씨가 사 왔고. 이거는 내가 사 온 거.”
서 여사가 자랑하듯 말했다.
인혁은 게임기를 대충 훑어보고는, 수민이 입고 있는 스웨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
그리고 제가 뭘 놓쳤는지 깨달았다. 서 여사는 턱을 당당히 치켜들고 웃어 보였다.
수민은 인혁이 어제 제게 그랬듯 박 씨와 서 여사에게도 한 소리 할 거라 생각했다.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이런 걸 사 오냐. 그럴 돈 있으면 적금을 하나 더 들어라, 라고. 하지만 인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잘 어울리네.”
수민의 머리를 쓱쓱 문지르고는 제 자리로 걸어갈 뿐이었다.
잘 어울린다는 칭찬은 듣기 좋았다. 하지만 똑같이 월급을 선물 사는 데 썼는데 자신만 혼난 것은 아무래도 불만이었다.
수민은 불만 어린 눈으로 인혁을 바라보았다. 인혁은 그런 수민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책상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게 된 건, 그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
“저, 얘랑 나갔다 옵니다.”
인혁이 수민을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어디 가는 건가요?”
수민은 싫다는 말 한마디 없이 따라나섰으나 무슨 일인지는 궁금해 슬그머니 물었다. 서 여사가 사준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채였다.
“가보면 알아. 멸치잡이 배에 안 팔아먹을 테니까 따라오기나 해.”
“그래, 잘 갔다 와.”
“급한 일 있으면 연락할 테니까 천천히 다녀오슈.”
서 여사와 박 씨는 인혁이 어딜 가려는지 아는 듯했다. 수민은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시내의 백화점이었다. 주말에 선물을 사러 온 곳이었고, 지난달에 인혁과 책상과 침대 등을 사러 온 곳이기도 했다.
인혁은 백화점의 층별 매장 지도를 확인하고는 영캐주얼 층으로 수민을 데리고 갔다. 남성복, 정장류 매장과 달리 캐쥬얼 패션 매장은 벌써 봄옷 신상을 팔고 있었다.
“이런.”
인혁은 낭패라는 듯 혀를 찼으나 발걸음을 돌리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 층을 천천히 돌며 매장을 훑어보았다.
제 뒤를 졸졸 쫓아오는 수민도 한 번씩 돌아보았다. 잘 따라오나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고, 매장 앞에 서 있는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과 수민을 맞춰 보는 것이기도 했다.
한 바퀴 돈 후. 인혁은 선택받은 매장에 들어가 봄 신상을 전부 샀다. 평일 낮이라 알바생만 매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인혁이 매장을 휙 둘러보고 색깔 별로 사겠다고 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잠시만요!”
알바생은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혹시 백화점 멤버십 카드가 있느냐고 물었다. 인혁이 없다고 하자 인혁의 이름을 물어보고는 다시 전화에 대고 뭐라 말했다.
그 사이 인혁은 수민에게 옷 사이즈를 물었다. 수민 역시 알바생과 비슷한 이유로 기가 질려 있었다. 혹시 제가 사이즈를 말해 주지 않으면 저 말도 안 되는 주문이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여 입을 꾹 다물었으나, 인혁이 어제 서 여사가 그랬듯 수민의 셔츠 목덜미 부분을 까 사이즈를 확인했다.
“바지도 내가 직접 확인해?”
인혁이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려 웃으며 물었다.
“……28이요.”
“남자 허리가 그게 뭐냐.”
인혁이 혀를 차며 알바생에게 수민의 사이즈를 알려 주었다.
잠시 후 매장 매니저가 달려왔다. 곧이어 플로어 매니저도 달려왔는데 인혁에게 깍듯이 인사하고는 다른 곳으로 모셔 편히 쇼핑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인혁은 그게 더 번거롭다며 플로어 매니저를 돌려보냈다.
플로어 매니저에게 밀려 찌그러져 있던 매장 매니저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얼른, 다 가져와!”
매장 매니저가 알바생에게 손짓했다.
알바생이 창고를 다녀오는 동안, 매니저는 아주 밝은 웃음을 띠며 인혁과 수민을 응대했다.
수민은 매니저에게 붙잡혀 봄 신상이라는 셔츠와 카디건, 바지 등을 몸 위에 대보아야 했다. 입고 있는 노란 스웨터만큼이나 밝은색이었다.
“잘 어울리네.”
인혁이 특히 노란색 계열 옷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렇다고 다른 색을 내버리진 않았다.
“전부 다 한 벌씩 주세요.”
“아아.”
수민은 매니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들었다.
“형님, 아니면 아버님이신가요?”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마 인혁에겐 못 묻고 수민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소릴 들은 인혁이 대답했다.
“형뻘은 아니지, 내가.”
“아, 역시 아버님이시군요. 아버님을 닮아서 그런지 아드님께서 정말 옷발이 잘 받으십니다.”
매니저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말했다. 인혁은 대답하는 대신 카드를 내밀었다. 매니저는 여름 신상이 나오면 연락을 드리겠다며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았고, 인혁은 순순히 제 번호를 알려주었다.
알바생이 카트에 담아 가져온 상품들은 알아서 배송해 주겠다고 했다. 수민은 매니저가 내미는 카드에 이름과 핸드폰 번호, 주소를 적었다.
그렇게 세 매장을 더 돌았다.
두 번째로 들른 매장에선 아직 겨울옷을 팔고 있었지만, 어두운 색깔이었다. 밝은색은 다 나가고 그 색만 남았다고 했다.
인혁은 고민하다가 겨울옷은 놔두고 봄 신상만 전부 사들였다. 역시나 이곳에서도 밝은 노란색 옷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세 번째 매장으로 들어가려 할 때, 수민은 인혁의 소매를 잡았다.
“왜?”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산 것만으로도 앞으로 10년은 족히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민은 부담스러웠다.
“왜? 서 여사님이랑 박 계장님 선물은 받고, 내 선물은 거절하려고?”
“네?”
“이거 답례야, 수민아. 네가 선물 준 것에 대한 답례.”
인혁이 제가 매고 있는 넥타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답례 또 받고 싶으면 선물 사 와. 알았지?”
“혹시 화, 나셨어요?”
“화났냐고? 내가?”
“네.”
“화낼 이유가 없는데 화를 왜 내. 말했잖아. 선물 받은 게 고마워서 답례하는 거라고. 서 여사님이랑 박 계장님처럼.”
“하지만 두 분은 하나씩만 사주셨는데요.”
서 여사는 스웨터와 남방, 두 개를 사긴 했지만.
수민은 백화점을 터는 인혁의 행동이, 평범한 답례로 보이지 않았다.
“난 그 두 사람보다 돈이 많거든.”
“…….”
“몰랐으면 알아 두고. 들어가자. 직원분들 기다리신다.”
아닌 게 아니라 세 번째 매장의 직원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매장뿐만이 아니었다. 평일 낮, 한적했던 남성복 층 매장들이 전부 술렁이고 있었다. 인혁이 오길 바라며, 직원들이 죄다 매장 입구 쪽에 나와 두 사람만 바라보고 있었다.
인혁이 수민을 질질 끌고 들어가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방긋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봄 신상 전부 다 보여 줘 봐요, 밝은색으로. 사이즈는 여기 얘한테 맞는 걸로.”
인혁은 직원이 권하는 의자에 앉아 <사랑이 별거>에 나오는 재벌 3세처럼 말했다.
수민은 <사랑이 별거>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매장 직원들에게 붙잡혀 인혁만을 위한 패션쇼의 살아 있는 마네킹이 되어야 했다. 인혁은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며, 매니저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네 번째 매장까지 들르고서야 수민은 인혁의 코트를 붙잡고 다급히 말했다.
“죄송해요.”
“뭐가?”
“선물, 사 온 거요.”
“그건 잘못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뭐가 문제냐고 묻고 싶었다. 표정이 극적으로 바뀌진 않았으나 나름 울상이 되었다. 인혁은 수민의 표정을 보곤 웃으며 몸을 돌렸다.
“다시 생각해 봐.”
인혁이 다섯 번째 매장으로 들어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발을 내딛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민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용돈.”
엉겁결에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인혁이 걸음을 멈췄다. 수민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정답임을 깨달았다.
“용돈이요.”
“용돈이 뭐.”
“다 쓴 거요. 다 써서 죄송해요.”
“그냥 다 쓴 게?”
인혁이 되물었다. 수민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선물 사는 데 다 쓴 거요. 잘못했어요.”
그제야 인혁이 수민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는 수민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고는 고개를 저었다.
“소 뒷걸음질에 쥐 잡은 격이지?”
“아니에요, 진심을 다해서 반성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네.”
“거짓말.”
“…….”
“이 상황 모면하려고 하는 말이라는 거 알아.”
“…….”
“누굴 속이려 들어.”
인혁이 수민의 어깨를 툭 쳤다. 수민은 낭패다 싶었다.
“괘씸하긴 한데, 그래도.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건 기특하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봐주지.”
그런데 인혁이 자비를 베풀었다.
“감사합니다.”
수민이 진심으로 말했다.
“이거 보게.”
인혁이 진심인 걸 알아챘는지 옅게 웃었다. 수민은 혹시나 인혁이 다섯 번째 매장으로 들어갈까 싶어 바짝 긴장했다.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긴장 풀어.”
인혁은 손을 들어 수민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수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제가 용돈으로 선물을 산 게 잘못한 일인가요?”
“말했잖아. 남에게 주려고 선물 산 건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면…….”
뭐가 문제인 거지. 수민의 얼굴이 살짝 뚱해졌다.
“널 첫 번째로 생각 안 한 거. 수민아. 그게 잘못이야.”
인혁이 손으로 수민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쳤다. 인혁의 눈은 여전히 메말라 있었다. 그 눈동자에 제 모습만 비치는 광경을, 수민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수민아.”
나직한 부름은 마법이었다. 몸뿐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로잡힌다는 건 겁에 질리는 것과 비슷했다. 수민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깜빡였다. 인혁은 그런 수민을 달래듯 손가락으로 수민의 어깨를 다독였다.
“네가 가진 건 온전히 널 위해 써. 앞으론 누구보다 너를 먼저 생각해. 다른 사람들은 두 번째야. 지금까진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라도 너한텐 네가 첫 번째여야 돼. 무조건.”
인혁이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고작 선물 하나. 그래, 고작 하나일 뿐이지. 유난스럽게 군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넌 그걸 사느라고 이번 한 달 동안 써야 하는 용돈을 다 썼잖아? 널 위해 써야 하는 돈을 남을 위해 전부 쓰다니. 어떡하자는 거야.”
타박하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걱정해 주는 말이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가지고 싶은 게 생기면 어떻게 할 거니? 친구가 생겨서 같이 영화를 보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게 되면?”
“…….”
친구 같은 거 없다고, 앞으로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일이 아니라 다음 주, 다음 달이 되어도 가지고 싶은 건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인혁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인혁이 하는 말이 친구를 사귀고, 사고 싶은 걸 사라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수민은 혼란스러웠다.
“절 위해서요?”
“그래. 널 위해서.”
“그건 착한 게 아니잖아요.”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남을 돕고, 남을 먼저 위해야 한다. 그동안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그랬듯.
“왜 착해야 하는데?”
그래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으니까.
“착해지지 마. 착해질 필요 없어.”
인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착해지지 않으면요?”
착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지?
“그냥, 행복해질 생각만 해.”
그러니까. 도대체 그 행복을, 착해지지 않고 어떻게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려면 착해져야 되잖아요.”
수민이 말했다. 오직 이 길이 정답이라고 믿고 걸어왔건만, 그 길이 답이 아니라고 들었을 때의 절박함이 그 목소리 안에 담겨 있었다.
“…….”
인혁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다만 새삼스럽게 수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짐작이 가긴 하는데.”
옅게 주름진 눈가에 어떤 감정이 스쳤다. 수민은 아직 그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수민아, 그런 거 아냐. 착하지 않아도 돼. 안 착해도 행복해질 수 있어. 그러니까 착해지지 마. 착해지려고 애쓰지 마.”
인혁은 수민이 공익 생활 중 만난 공무원과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걸 찾아. 널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걸 찾아서 붙잡아. 그건 착한 거랑은 상관없어. 그냥, 네가 널 가장 소중히 여기고, 네가 가장 가지고 싶은 것에 충실하면 되는 거야.”
인혁이 손을 내려 수민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널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이렇게 붙잡으라는 듯이.
“알아듣겠어?”
“……네.”
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기억해 둬.”
인혁은 수민의 손을 놓고 앞장서 걸었다.
그는 약속대로 다섯 번째 매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기하고 있던 매장 직원들이 아쉬워하며 한숨지었다.
수민은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인혁을 찾았다. 그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수민은 그를 뒤쫓아가며 슬그머니, 그의 코트를 움켜잡았다.
***
한층 아래로 내려가니 남성복 매장이었다. 엘리베이터는 그 층에서 끊겼다. 더 아래로 내려가려면 중앙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주말에 이곳을 헤맨 적 있는 수민이 앞장서 걸었다. 층을 크게 반 바퀴 도는데, 주말에 봤던 그 코트가 눈에 띄었다. 발걸음이 느려지고 눈이 그 코트에 붙박인 듯 떨어지지 않았다. 수민을 뒤따라 걷던 인혁이 그걸 못 알아챌 리 없었다.
코트는 수민이 입을 만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인혁이 이전에 입고 다니던 코트와 비슷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아까 위층에서 너무 혼내듯이 말한 건 아닌가, 찝찝한 마음이 들던 차였다.
‘좋으면 좋다고 해, 괜히 애한테 성질내지 말고.’
서 여사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았다.
‘좋으면 좋다고 고맙다면 고맙다고, 인가.’
“잠깐.”
인혁이 걸음을 멈췄다.
“네?”
“이거, 마음에 들어?”
“…….”
수민은 인혁이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일단 대답을 유보했다.
“어울릴 거 같아?”
인혁이 굳이 다시 물었다.
“아니요.”
수민은 인혁이 이것을 사주겠다고 할까 봐 얼른 대답했다. 수민은 저걸 입고 있는 인혁이 보고 싶은 거지, 제가 저걸 입고 싶은 게 아니었다.
“정말? 나한테 안 어울릴 거 같아?”
“네, 저는…… 네?”
“나한테 맞을 거 같냐고.”
인혁이 물었다.
수민은 그제야 질문을 완벽히 이해했다.
“네.”
수민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
“정말로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인혁은 코트를 놓고 매장 안으로 쑥 들어갔다. 수민은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뭐해, 안 들어오고.”
인혁이 손짓했다. 수민이 머뭇거리다 들어가자, 그 사이 직원이 인혁에게 다가왔다. 주말에 수민을 보고도 못 본 척 돌아섰던 직원이었다. 수민은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데, 그는 수민을 기억하지 못했다.
인혁은 밖의 마네킹을 가리키며 직원에게 사이즈를 말했다. 직원이 얼른 안쪽에서 똑같은 코트를 들고나왔다. 마네킹이 입은 것보다 두 사이즈는 더 커 보였다. 인혁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고 그것을 몸에 걸쳤다.
잘 어울렸다.
수민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옷을 가져다준 직원마저도 감탄했다. 상품을 팔기 위해 꾸며 낸 반응 같아 보이진 않았다.
넓은 어깨와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등이 코트에 감싸였다. 긴 자락이 무릎 근처, 딱 적당한 길이에서 끊겼다. 인혁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확인했다. 수민의 옷을 살 때와는 다르게 성의 없어 보였다. 반대로 수민은 제 옷을 살 때보다 훨씬 생기 있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때?”
인혁이 수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좋아요.”
수민은 바로 대답했다. 옆에 서 있던 직원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십니다.”
“그래요? 우리 애가 이거 사라고 해서 들어온 건데.”
“아, 아드님, 이신가요?”
직원이 ‘아버님께서 젊으시네요.’라고 말하며 인혁과 수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인혁은 대답하는 대신 카드를 내밀었다. 일시불로 해달라고 하니 직원이 오, 감탄을 내뱉었다.
“얘가 사주는 거예요.”
“네?”
“예?”
직원과 수민이 동시에 깜짝 놀랐다.
“넌 왜 놀래, 임마.”
인혁이 수민의 머리를 꾹 눌렀다.
직원이 입고 들어 왔던 코트를 쇼핑백에 싸주었다. 인혁은 쇼핑백을 받아들고 매장을 나왔다. 수민은 직원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뒤따랐다.
“이거 네가 사준 거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인혁이 다시 한번 말했다.
“아닌데요.”
분명 결제를 인혁의 카드로 했다.
“네가 골라 준 거니까 네가 사준 거지. 이거랑도 잘 어울리지?”
인혁이 넥타이를 가리켰다.
그냥 가볍게 하고 지나가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김 소장, 그 코트 뭐야? 새로 샀어? 수민 학생 꺼 사러 간 거 아니었어?”
서 여사는 인혁의 코트가 바뀐 걸 대번 눈치채고 눈을 부라렸다.
인혁이 먼저 입던 옷이 든 쇼핑백을 하나 달랑 들고 오고 수민은 빈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단단히 오해한 듯싶었다.
“이거요? 아, 쟤가 사줬어요.”
인혁이 코트를 보란 듯이 걸어놓으며 말했다.
“이제 첫 월급 받은 사람한테 코트를 사달랬다고? 어제 양산하고 넥타이 사 왔다고 그렇게 사람을 들들 볶았으면서. 뭐?”
서 여사가 달려가 옷걸이에 걸린 코트의 브랜드를 확인하고는 기함했다.
“이거 명품이잖아? 이걸 어떻게 수민 학생 월급으로 사?”
“12개월 무이자 된다고, 할부로 사 주더라구요.”
인혁은 태연스럽게 말하고는 수민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고맙다. 잘 입을게.”
“아니요. 그런 거 아닌데…….”
수민은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드물게 수민의 얼굴에 절박한 표정이 어렸다. 그러자 서 여사의 얼굴에서 노기가 가셨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거기에 박 씨까지 슬쩍 합세했다.
“오호?”
“이야, 뭐야? 김 소장만 특별 취급이야?”
서 여사와 박 씨가 동시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수민을 돌아봤다.
“부럽다, 김 소장. 수민이한테 코트도 선물 받고.”
“코트만 받았어? 박 씨,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넥타이 받았는데 코트를 또 받은 거잖아. 딱 봐도 수민 학생이 박 씨보다 김 소장을 더 좋아하는 거 같지 않아?”
“이럴 수가.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어제 줄 서서 게임기를 사 왔는데. 어흑.”
예쁘고 순진한 청년을 놀려먹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수민은 답지 않게 쩔쩔매다가 원흉인 인혁을 쳐다보았다. 이 상황을 이제 그만 수습해 주길 바랐건만.
“잘 입을게. 고마워.”
인혁은 서류를 들여다보며 손만 휘휘 흔들었다.
“김 소장이 코트 낡은 거 입고 다니는 거 보고 마음이 아팠어?”
“내 파카는 안 낡아 보여? 수민 학생. 응?”
“…….”
아까 게임기와 스웨터를 줄 때만 해도 정말 고마웠는데. 아니, 그런 걸 주지 않아도 고마운 사람들이었는데.
수민은 이제 이 두 사람이 조금 미워지려고 했다. 그래서 그날 수민은 박 씨가 아무리 부탁해도 대신 문서를 타이핑해 주지 않았다. 서 여사와도 떡볶이를 먹으러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