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2. 한진영, 22세, 베타
진영은 스물두 살의 청년으로, 공부에 큰 뜻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곤 검정고시에 합격했으나 수능 공부는 하다 말았다. 요즘엔 교회 인근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입대는 학업을 이유로 미뤘었는데 그냥 미루지 말고 다녀올 걸 그랬다고 은근히 후회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입대할 것 같은데 그 전에 뭘 하면 좋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요즘 주요 일과였다. 더없이 잉여로운 삶이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이 잉여로운 삶에 보람찬 일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진영은 교회 일에 열심이었다. 주일마다 종일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건 기본이요, 교회 청년부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은 눈썹 부근에서 단정하게 찰랑였다. 얇은 테 안경을 쓴 모습은 불량스러워 보이지도 답답해 보이지도 않았다. 부드럽고 상냥해 보일 뿐이었다. 싱긋 웃을 때마다 눈꼬리가 휘는데 안경테 때문에 가려지는 게 보는 사람을 괜히 아쉽게 만들었다.
키도 훤칠하게 크고 잘생긴 이 청년은 입대를 앞둔 20대 초반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등학생으로 보였다. 눈썰미가 제법 좋다 자부하는 사람들은 진영을 당연히 고등학생으로 봤다가, 스물둘이라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솜털이 가시지 않은 뽀얀 피부에 쑥스러운 듯 웃는 얼굴까지. 보고 있으면 아직도 우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교회에서는 듬직한 교회 오빠보다는 데려가 키우고 싶은 귀여운 연하남으로 통했다.
그는 외모만 순한 게 아니었다. 서글서글하니 성격도 좋았다.
수염 자국 없는 보드라운 얼굴을 보며 혹시 오메가가 아니냐며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면 진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청년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쑥스러운 듯 웃어 보이곤 했다.
주민등록증에 알파, 오메가, 베타 형질을 기록할 때부터 차별 논란은 꾸준히 있어 왔다. 인권 단체들은 이 무슨 구시대의 악습이냐면서 형질 표시 삭제를 주장했다.
형질로 인해 사회에서, 직장에서 차별받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전 세계적으로 알파와 오메가 성분에 속하는 인구수가 늘어나며, 형질 평등 운동은 큰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발맞추어 요즘 사기업 이력서에서도 형질을 적는 칸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의 형질을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례한 질문과 희롱을 받아도, 진영은 불쾌해하지 않고 순순히 제 지갑을 열어 보이곤 했다.
한진영. 스물둘, 베타.
진영은 인류의 약 65%를 차지한다는 베타였다.
진영의 가족은 모두 부산에서 살고 있었고, 진영만 서울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모두 건강하시고, 터울이 큰 누나는 결혼해 본가 근처에 살고 있다고 했다.
“저희 집에서 전 약간, 내놓은 자식이에요. 부모님도 누나도 다들 공부 엄청 잘하거든요. 누나는 결혼하고선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박사 과정을 밟고 있어요. 제가 고등학교 자퇴하겠다고 하니, 부모님 내건 유일한 조건이 검정고시 봐서 고졸 졸업장은 딸 것. 그거였거든요. 대학 입학하기 전까진 집에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하셨어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모습이 어찌나 짠해 보이던지. 진영은 교회에 다니는 중년층 신도들에게 사랑받는 귀염둥이가 되었다. 진영에게 무례한 질문을 한 사람들은 교회에 발도 못 붙이게 되었다.
집사님들은 일부러 점심시간에 먼 길을 걸어와 진영이 아르바이트하는 카페 매상을 올려 주었다. 권사님들은 주일에 교회에서 점심 국수를 말 때마다 진영에게만 한 주먹씩 국수를 더 올려 주었다. 집에서 담근 열무김치나 배추김치, 동치미는 철마다 바리바리 싸주었다.
그러면 진영은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카페 사장 몰래 쿠폰 도장을 하나씩 더 찍어 주었다. 아저씨 신도 중엔 그 맛에 더욱 그 카페를 찾아오는 사람도 꽤 됐다. 그걸 알기에 카페 사장님은 진영의 쿠폰 도장 인플레이션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진영은 카페 단골 신도에게 제 사비로 결제한 쿠키를 서비스로 주는가 하면, 교회 식당 청소나 식자재 나르기 같은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니 교회 중년 신도들에게 점점 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가 될 수밖에.
진영은 교회 봉사에 매사 열심이었으나 특히 길거리 전도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그건 일주일에 두 번, 평일 저녁에 2인 1조로 교회 홍보물을 들고 거리를 돌며 새신도 찾기에 나서는 일이었는데. 아무리 교회 일에 열심인 청년들도 길거리 전도만은 부끄러워하며 쉬이 참여하지 못했다. 나이 지긋하고 믿음 깊은 집사님 권사님들이나 할 법한 일을, 진영은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같은 조인 청년이 안 나와도, 진영은 혼자서 묵묵히 길거리 전도에 나섰다. 너무 집중해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간 적도 많았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저녁에 지하철역 앞에서 기타를 치며 찬송을 부르는 찬양 전도도 매번 참여했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잘생기고 성격 좋은 청년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교회 신도 수는 쉬이 늘지 않았다.
진영이 다니는 교회는 동네 시장 어귀의 낡은 5층 건물의 3층에 세 들어 있는 교회였다. 신도는 바자회 때나 고개를 들이미는 나이롱 신도까지 다 합해도 백 명이 될까 말까 했다.
전도 받아 교회에 오는 새신도가 한 달에 서너 명 있으나 오래되고 작은 교회 특유의 화목한 폐쇄성을 견뎌 내고 석 달 이상 출근 도장을 꼬박꼬박 찍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진영을 노리고 들어온 젊은 신도들의 낙오는 그보다 더 빨랐다.
다음 주에 또 보자며 웃고 헤어졌던 새신도가 다음 주에 안 보일 때마다 중년 신도들은 진영 청년이 실망할까 봐 늘 걱정이었다.
“전 괜찮아요.”
진영은 속마음이 어쨌든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밝게 웃어 보였다. 과연 중년 신도들의, 아니, 이 작은 교회의 아이돌이라 할 만했다.
교회 신도 수가 늘지 않는 것. 교회 신도가 베타뿐이고 오메가나 알파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은 그들의 즐거운 신앙 생활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들은 지난주처럼 이번 주에, 이번 주처럼 다음 주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웃고 울었다. 우린 구원 받는다는 강한 믿음과 유대 의식이 그들을 단단하게 묶어 주었다. 그들 안에 진영이 있었다.
밤늦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온 진영은 자취방으로 가기 전 교회에 들렀다. 매일, 진영은 불 켜진 텅 빈 교회에 가서 외부 네온사인 전원을 올렸다.
부웅- 툭.
손짓 한 번이면 건물 옥상에 설치된 붉은 네온사인이 켜졌다. 진영은 창문 앞에 서서 야경을 바라보았다.
외국인들이 한국 도시의 야경을 보고는 붉은 십자가 불빛이 가득하여 공동묘지 같다고 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데. 진영은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은 거대한 무덤이다. 밤이면 일제히 켜지는 붉은 십자 표식은 죽음의 상징. 하지만 죽음 속에 삶이 있나니. 무덤가를 돌며 유심히 살펴보노라면 생명의 표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구원의 길은 반으로 쪼개진 십자가 아래 숨어 있다.
최후의 날, 하늘이 열리고 땅이 쪼개지며 말세인 이 세상을 견딘 순결한 자들을 위해 나머지 십자가 반쪽이 떠오르리라. 그날이 오면, 비로소 거짓된 십자가들은 무너지고 무덤은 열리고, 땅에 묻혀 숨진 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이 도래하리니.
그날이 오면.
…….
반짝, 반짝.
낡은 네온사인. 반쪽뿐인 십자가가 꺼질 듯 말 듯 깜빡였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네, 목사님.”
-오, 진영아. 지금 어디니. 교회니?
“예. 방금 밖에 십자가 불 켰어요. 이제 교회 문 닫고 집에 가려구요.”
진영은 교단 옆, 낡은 캐비닛을 밀어 내고 벽을 더듬으며 답했다.
-그래? 늘 고생이 많구나. 고맙다.
“고생은요, 아니에요.”
전기 배관 문을 여니, 배관과 전선이 어지럽게 널브러진 공간에 기타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진영은 그것을 꺼내 먼지를 털고 어깨에 걸쳤다.
-저녁밥은 먹었고?
핸드폰 너머로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요. 이제 집에 가서 먹으려구요.”
-그래? 그럼 우리 집에 오겠니? 우리도 저녁이 아직인데 같이 먹자꾸나.
“아니에요, 저번에도 그랬는데 매번 죄송해서 어떡해요.”
진영이 예배당 문을 잠그고 나오며 말했다.
-죄송하긴.
“…….”
-올 거지?
“네에, 그럴게요.”
-오늘 저녁 메뉴는 갈비찜이다. 가득 해놨으니까 얼른 오렴. 여보, 진영이가 온다네요!
-언제 온대요?
이어 목사 남편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더 꺼내서 데워야겠네.
-진영아 한 20분이면 오지?
“네, 지금부터 걸어가면 그 정도 될 거 같아요.”
-그래, 조심히 오렴. 이따 보자.
진영이 웃으며 얼른 가겠다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샛길로 빠지지 않고, 다른 곳에 들르지도 않고, 20분을 꼬박 걸어 김 목사의 집에 도착했다.
김 목사의 환대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니, 목사 남편이 막 갈비찜이 가득 든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건 뭐야? 기타?”
진영이 현관 근처에 기타 케이스를 내려놓자 목사 남편이 물었다.
“네. 저번에 교회에 깜박 두고 갔는데, 오늘 가보니까 눈에 띄어서 챙겨 왔어요.”
“우리 진영이. 기타도 잘 치고, 착하고 잘 생기고. 못하는 게 없네.”
“공부를 못하죠.”
“안 하는 거겠지. 못하는 게 아니라!”
진영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목사 남편이 물러서지 않고 대학 갈 생각은 없냐고 다시 물었다. 입시 학원 학원비라도 대신 내줄 기세였다.
“여보, 그만해요.”
김 목사가 적절히 끊어 내며 진영을 도와주었다.
“나는 아쉬워서 그러지요. 우리 진영이가 카페 알바나 할 인재가 아닌데. 아니, 그렇다고 카페 알바 하는 게 시간 낭비라는 말은 절대 아니고. 그런 뜻 아닌 거 알지?”
목사 남편이 진영과 눈을 마주치고 슬쩍 웃었다.
그는 목사를 배우자로 둔 사람답게 성격이 푸근하고 인심이 좋았다. 생각이 짧아 앞뒤 가리지 않고 툭툭 말을 내뱉는 게 흠이긴 했으나 나쁜 마음을 먹고 한 말이 아니니만큼, 또 순박하게 곧바로 미안하다는 듯 웃어 보이며 사과하니 도무지 싫어하려야 싫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김 목사도 그에게 넘어가 결혼한 거겠지.
진영은 교회가 있는 시장에 길이길이 전해지는 두 사람의 결혼사를 떠올렸다.
목사 남편은 시장에서 오랫동안 채소를 팔아 온 늙다리 노총각이었다. 김 목사와는 김 목사가 교회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중에 알게 되었다.
그는 김 목사의 웃는 얼굴에 푹 빠져, 앞으로의 인생을 총각네 채소 가게 사장이 아니라 목사 남편으로 살고자 결심했고 목표를 이뤘다. 김 목사와 결혼한 뒤에도 채소 가게를 계속 운영하고는 있지만.
김 목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 보며 인사를 나누던 순박한 채소 가게 사장님의 청혼에 당황했다. 하지만 곧 그의 진심을 깨닫곤 제 처지를 솔직하게 말하며 청혼을 거절했다.
김 목사는 젊은 시절,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오랫동안 재혼하지 않았다. 큰 교회 부목사로 일하다 이 시장통에 교회를 개척할 생각을 했던 것도 홀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교회에 뼈를 묻으리라. 그리 굳게 마음먹고 사역에 자신을 바친 김 목사에게 결혼은 사치였다.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에도, 김 목사는 교회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없으리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 설령 목사 월급 정도는 나오는 교회가 된다 하더라도, 그 돈을 온전히 제 살림에 쓸 생각 또한 없었다.
그러니 김 목사와 결혼하는 사람은 집안 살림살이와 생활비를 책임질 뿐만 아니라, 교회 사역에 투신한 김 목사의 뒷바라지도 도맡아야 했다. 요즘 세상에, 어느 미친 자가 배우자에게 그런 희생을 강요한단 말인가.
김 목사가 자신의 사정과 계획을 솔직하게 말하며 거절해도 채소 가게 사장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집안 살림도, 생활비도, 목사님 뒷바라지도 내가 다 책임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주일이면 제일 앞줄에 앉아 버럭버럭 소리 지르듯 찬송을 부르던 그 목청이 김 목사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김 목사는 이후에도 여러 번 청혼을 거절하였지만, 채소 가게 사장님을 아주 밀어 내지는 못했다.
시장에 웬 교회가 생긴다니? 미운 눈까지는 아니어도, 곱지 않은 눈으로 김 목사를 대하던 시장 사람들도 둘의 쫓고 쫓기는 모습을 즐기며 김 목사에게 슬슬 마음을 열었다. 거기, 웬만하면 좀 받아 주지. 우리가 보증하는데 저기 채소 사장, 나쁜 놈은 아니여어.
시장 사람들의 응원을 한 몸에 받은 채소 가게 사장은 기어이 목사 남편이 되고야 말았다. 두 사람의 결혼 소식에 흥분한 시장 사람들이 나도 이제 그 교회에 다니겠다며 축의금 내듯 새신자 등록을 했다.
목사 남편은 여전히 채소 가게 사장님이지만 ‘사장님’ 소리보다 ‘아이고, 우리 목사님 남편분이시네.’ 소릴 듣는 걸 더 좋아했다. 그리고 결혼한 이래로 지금까지 두 사람은 여전히 금슬이 좋았다.
“알죠, 알죠, 저 걱정해서 하시는 말씀이란 거.”
진영이 쑥스러운 듯 웃자 목사 남편의 얼굴이 사르르 녹았다.
“어쩜 이렇게 착할까. 많이 먹어. 모자라면 말하고. 알긋지?”
냄비에 담긴 갈비찜은 족히 5인분은 되어 보였지만. 진영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네, 저 배 많이 고팠어요.”
진영이 호기롭게 외치곤 갈비를 입 안 가득 물었다. 목사도, 목사 남편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 녀석, 체한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지.”
목사가 자상하게 진영의 등을 두드렸다.
자식 없는 목사 부부와 자식처럼 곰살맞게 구는 청년의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갈비찜 대부분은 목사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목사 남편이 목사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치를 주고 아예 갈비찜 냄비를 진영의 밥그릇 앞으로 끌어다 놓아도 소용없었다.
목사는 평소보다 식탐을 부리며 갈비찜을 배 터져라 먹었다. 진영은 밥 반 공기를 겨우 비우고는 배부르다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걸 본 목사 남편은 안절부절 갈비찜을 입에 문 목사를 째려보았다. 목사는 슬쩍 눈을 돌리며 입에 든 갈비를 꿀꺽 삼켰다.
“으구, 내가 못 살아. 어깨 진영이가 오는 날만 되면 그래요?”
“내가 뭘.”
“에구, 더 말해 뭐해. 내 입만 아프지. 진영아 너 갈 때 싸주려고 따로 한 통 챙겨 놨거든? 가져가서 냄비에 덜어서 살짝 데워 먹기만 하면 돼. 이따 꼭 가져가. 내가 미리 챙겨서 현관 앞에 둘 테니까.”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또, 또 그런다. 그렇게 예의 차리는 게 오히려 더 나쁜 거라고 그랬지? 어른이 주면 ‘네,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되는 거야. 집에 김치는 남아 있어?”
“네, 네. 최 권사님께서 지난주에 열무김치 큰 통으로 주셨어요.”
“그래? 난 다음 주에 겉절이 좀 할 건데. 그거 줄 테니까 가져가서 먹어. 잘 익혀서 김치볶음밥 해 먹으면 맛있을 거야. 집에 혼자 있어도 끼니는 꼭 챙겨야 해. 알았지?”
“네. 감사해요.”
진영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나이대 남자아이 같지 않은 무해함과 청량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래서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지도 몰랐다.
뭐가 그리 부끄러운 걸까. 목사 남편은 덩달아 부끄러워지는 느낌이었다.
목사 남편은 일어서는 진영을 붙잡아 거실에 앉히고, 쟁반에 과일을 그득 담아 왔다. 갈비찜을 양껏 못 먹였으니 과일이라도 잔뜩 먹여 보낼 심산이었다.
젊은 남자애가 혼자 살며 제철 과일을 사다 먹을 리 없었다. 끼니라도 챙겨 먹으면 다행이지.
목사 남편은 자신이 깎겠다며 과도를 쥐려는 진영의 손을 찰싹, 아프지 않게 쳐내고는 과일을 산처럼 깎아 진영의 앞에 놓아 주었다.
목사는 슬쩍 남편 눈치를 보며 과일을 꿀떡꿀떡 삼켰다. 진영이 한 조각 먹을 때 서너 조각은 기본이었다. 씹지도 않고 삼키는 재주가 용해 보였다. 평소엔 깎아서 입에 넣어 주어도 싫어하던 사람이 진영만 오면 걸신들린 사람처럼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목사를 바라보는 목사 남편의 눈이 무시무시해졌다.
진영은 과일을 한 조각 입에 넣고 오래 씹으며, 금술 좋은 목사 부부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목사보다 목사 남편이 먼저 그 모습을 발견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그러게요. 깨워서 얼른 집에 가 쉬라고 할까.”
목사가 슬쩍 물었다. 목사 남편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목사씩이나 돼서 그런 말을 하다니요. 교회 사람들이 이 소릴 들었어야 하는데.”
“아니, 꼭 그러자는 건 아니고. 나는 당신의 의견을 물은 거지.”
“그럼 그냥 오늘은 여기서 재워요. 당신 기도방에서 자라고 하면 되잖아요. 저번에도 거기서 자고 갔잖아요. 그때 썼던 이부자리가 아직 남아 있을 텐데?”
“그럼 내가 얼른 깔아 놓고 오리다.”
목사는 남편이 그새 마음을 바꿔 진영을 돌려보내자고 할까 봐 겁났는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방으로 갔다.
‘깨워서 보내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저래?’
목사 남편은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제 배우자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무튼 귀엽다니까.’
아직도 눈에 콩깍지가 껴 있었다.
김 목사가 기도방에 이부자리를 깔고 나오자 목사 남편이 진영을 번쩍 들어 옮겼다. 그때까지도 진영은 눈 뜨지 않았다. 눕혀서 이불을 덮어 주니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가 본격적으로 자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목사 남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이런 아들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이렇게 순하고 예쁜 아들을, 공부 머리 없다는 이유로 내쫓듯 독립시키고 한 번 보러오지도 않는 진영의 부모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편으론 아쉽기도 했다. 차라리 부모 없는 아이였으면 입양해서 정말 아들로 만들어 버리는 건데.
“깰라. 조심해요.”
목사가 기타 케이스를 들고 와 진영의 머리맡에 놔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크. 목사 남편이 얼른 손을 뗐다. 아무리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른다지만, 종일 바쁘게 일하고 와 곯아떨어진 아이를 혹시라도 깨울까 봐 겁냈다.
“우린 나갑시다, 어서.”
목사 남편이 목사를 떠밀었다.
문이 닫히기 전,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그런데 집에 소화제가 남아 있던가요?”
“그럴 줄 알았어요. 평소보다 많이 드시더니.”
“아, 그러게 말이에요.”
“나이도 있는데, 이제 그렇게 과식하면 안 돼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나.”
“그럼 누가 시켜서 먹었어요? 누구? 하나님이? 예수님이?”
“하하, 내가 더없이 존경하는 선생님이.”
“무슨 선생님?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과식하라고 가르쳤을 리는 없고.”
문이 닫혔다.
밖에서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제 두 사람 중 누구도 실수로라도 진영이 잠든 기도방에 들어오지 않을 터였다. 진영이 잠에서 깨 나가지 않는 이상은.
진영은 눈을 떴다.
소리 나지 않게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자 벽에 걸린 십자가가 보였다. 진영은 커튼 친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십자가 앞에 섰다.
십자가 밑에 손을 넣어 스위치를 누르자 십자가 뒤에 은은한 흰 불빛이 커졌다. 스위치를 두 번 더 누르자 이번에는 십자가 반쪽에만 붉은빛이 감돌았다.
진영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은 하늘을 향했다.
“하늘 아버지시여. 두 번째 아드님이신 우리 선생님의 이름으로 죄지은 바를 고백합니다. 불쌍한 여린 양을, 이 지독한 말세에서 최후 심판의 날로 이끄소서.”
경건하게 속죄문을 읊은 뒤 기타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긴 원피스와 구두, 핸드백. 약물이 담긴 주사기와 새끼손톱만 한 캡슐이 든 약통, 사진 등이 들어 있었다.
‘결국 이걸로 가는 건가.’
약물이 든 작은 주사기. 진영은 그것이 달갑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살인은 살인. 그 방법이 화려하든 얌전하든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진영은 조용히 처리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자살인 듯 혹은 사고사인 듯 조용히. 그게 진영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의 방식은 진영과 달랐다. 그 아이는 과시하듯 자신의 임무 수행 결과를 드러냈다. 자살인가 타살인가. 사고인가 아닌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건은 대부분 그 아이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자살로 일을 꾸며도 일부러 발치에 밟고 오를 만한 것을 가져다 두지 않는다든가 두 손을 묶어 놓는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그로 인해 TV 뉴스가 떠들썩해질 때마다 김 장로는 못마땅해하며 혀를 찼다. 진영이 알기로, 김 장로는 이미 여러 번 그쪽에 주의하라는 의견을 전했다. 선생님 또한 특별히 단속한다며 그 아이를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자주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런 상황을 자신이 더 특별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 아이가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진영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요즘 들어, 아니 예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긴 했으나 최근 들어 더더욱, 교단의 지시마저 그 아이의 방식이 옳다는 듯 과격해진다는 것이었다.
정밀 부검을 하면 들킬지 모를 약물을 쓰게 하는 것만 해도 그랬다. 약물 주입 후 타깃이 쓰러지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설 구급차가 응급실로 호송해 쉽게 사망 선고를 받도록 할 예정이었다. 그렇다 해도 약물을 쓰는 건 불법 개조한 총으로 직접 사살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했다.
하지만 진영은 자신의 생각을 누구에게도, 김 장로에게마저도 말하지 못했다.
진영은 단지 도구였다.
도구는 쓰일 뿐. 절 쓰는 주인에게 충고하지 않는다.
진영은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눌러썼다. 주사기는 핸드백에 넣었고, 캡슐은 입 안, 사랑니를 뽑은 자리에 고정시켰다. 이어 검은 바람막이로 몸을 덮고 사진을 확인했다. 뒷면에 써진 글씨까지 외우고 난 뒤 사진을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창문을 열고, 장갑 낀 손으로 가스 배관을 타고 내려가 바람막이를 벗어 가스 배관에 묶어 놓았다.
이 동네는 시장과 낡은 빌라촌, 그 옆은 재개발 예정인 5층짜리 대규모 주공 아파트 단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낡은 빌라촌 골목엔 CCTV가 거의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어 으슥한 골목에 CCTV가 달리긴 했지만 몇몇 곳에 불과했고, 그마저 자주 고장 났다. 담벼락과 바닥에 꽃과 리본을 그려 넣고, 안전한 우리길 만들기 홀로그램을 띄워 놓았으나 거리의 음습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특히나 김 목사의 사택은 재개발을 바라고 단합 중인 다세대 주택 골목이라서 밤이 되면 더더욱 으슥해졌다. 세 들어 살던 대학생, 직장인들이 옆 동네의 새 빌라촌으로 빠져나가니, 외국인 노동자들이 빈방을 채웠다.
밤 골목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졌다. 목사 남편이 얼른 집을 팔고 이사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진영은 ‘안전한 우리 집 골목길’이라고 쓰인 홀로그램을 밟고 골목 끝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 백미러 위에 반쪽짜리 십자가가 흔들렸다.
진영은 동네를 벗어나 택시를 갈아타고 번화가로 갔다. 밤에도 거리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진영은 그들 틈에 끼여 걷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타깃을 발견하곤 핸드백에 손을 집어넣었다.
렌즈 낀 눈으로 상대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구겨진 양복을 입고 백팩을 멘, 머리숱이 적고 비쩍 마른 얼굴. 40대 중반쯤 되었을까? 피곤하고 지쳐 보이나 그럼에도 선해 보이는 인상. 두꺼운 안경도 또렷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 속 얼굴이었다. 말세인 이 세상을 굳이 꾸역꾸역 지속시키는 자. 최후 심판의 날을 미뤄지게 만들고 있는 원흉.
상대방이 세 발자국 앞까지 가까워졌을 때. 진영은 일부러 발을 헛디뎠다.
“어? 괜찮으세요?”
상대방이 얼른 손을 내밀어 어깨를 부축했다. 그리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리여리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어깨가 단단해서 놀란 듯했다. 아무리 마르고 비리비리해 보여도 여자와 남자의 근골은 다른 법이니까.
진영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말하지 않았다. 감사하다는 의미로 고개만 꾸벅였다. 그리고 절 잡은 손등에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아주 잠깐 사이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
모자챙에 진영의 얼굴은 물론, 그를 붙잡은 상대방의 손마저 가려졌다. 그래서인지 상대방의 반응이 한 박자 느렸다.
시각은 촉각을 알아채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타깃이 뒤늦게 따끔한 감각에 놀랐을 때, 진영은 핸드백에 주사기를 넣고 그를 지나쳤다. 옆을 스치는데, 타깃이 고개를 갸웃하며 제 손등을 문지르는 게 보였다.
진영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열다섯 발자국을 걸었을 때였다.
“꺄아악!”
“사, 사람이! 사람이 쓰러졌어요!”
“119, 구급대 불러, 어서!”
뒤에서 소란이 들렸다. 진영은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돌아오는 길. 마지막 택시가 으슥한 골목 앞에 진영을 내려 주었다. 진영은 바로 골목 안으로 들어가 바람막이를 뒤집어쓰고 벽을 탔다. 열린 창문 안으로 가볍게 몸을 날려 들어가고는 창문을 닫았다.
방 안은 떠날 때 그대로였다. 진영은 반쪽짜리 십자가 앞에서 거친 숨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해진 절차대로 속죄문을 읊었다.
3분 남짓 지난 뒤, 진영은 십자가 등을 끄고 어둠 속에서 옷을 벗었다. 커튼 사이로 한 가닥 달빛이 스며들어 진영의 몸을 비추었다.
하얗고 마른 몸. 피부는 깨끗했으나 군데군데 잘 아문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가장 큰 흠은 배꼽에서 왼쪽 골반으로 가로지르는 긴 흉터였다. 깨진 백자 조각을 값싼 접착제로 붙여 놓은 듯한 자국.
달빛이 그 상처를 훑었다.
진영은 달빛에 비친 제 상처를 손으로 훑고, 그 손을 들어 한 줄기 달빛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비칠 뻔한 순간.
구름이 달을 가렸다. 움켜쥔 줄 알았던 빛이 사라졌다. 손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
진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내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가지, 주사기, 핸드백 따위를 기타 케이스에 넣고 마지막으로 입 안에 물고 있던 캡슐을 꺼내 약병에 담았다. 그리곤 모자에 눌린 머리를 부스스하게 헤치고 다시 이불 위에 누웠다. 눌린 머리에 맞춰 베개를 베고.
후우.
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비로소 어둠은 휴식이 되었다.
***
진영이 다니는 교회는 작은 개척 교회였다. 김 목사는 타 지역 어느 교회의 부목사 출신이었는데, 그 교회를 ‘본회’라고 불렀다. 본이 되는 교회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본회는 타 지역에서 꽤 알아주는 대형 교회라고 했다.
김 목사가 본회를 떠날 때, 본회의 교인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개척금을 마련해 주었다. 그 뒤로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김 목사는 본회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개척 교회를 열고도 본회에 대한 소속감을 잊지 않는 건 김 목사만은 아니었다. 김 목사처럼 지원을 받아 개척 교회를 연 다른 지역의 목사들은 모임을 만들어 본회를 자주 찾아갔다. 개척 교회의 목사들은 본회의 명예 장로이기도 했다.
본회 역시 자기 교회 출신 개척 목사들을 살뜰히 챙겼다.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 구입하기 부담스러운 음향 기기라든가 여러 물품을 지원해 주었다. 부흥회나 수련회를 열면 목사의 추천을 받은 신실한 신도들을 본회에 초청했다. 목사들의 영성과 신앙 수양을 위해 지방에 있는 작은 기도원의 문을 열어 주기도 했다. 그곳에선 때때로 본회와 개척 목사들만의 세미나가 열렸다.
김 목사는 본회의 부름에 절대적이다 싶을 정도로 응했으며, 동행자는 언제나 진영뿐이었다.
매번 진영만 동행자로 뽑히니, 다른 신도들이 질투할 법도 하건만. 교회의 신도 중 누구도 감히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았다.
진영은 교회 일에 제일 열심인 열성 신도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고 목사 아들이거나 전도사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선택받을 만했다.
본회의 행사 기간도 문제였다. 참가하는 건 무척 영예로운 일이나 본회 행사는 짧게는 사흘, 길게는 일주일, 열흘씩도 걸렸다. 신도 대부분은 시장통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평범한 소상공인이었다. 일상을 내던지고 교회 행사를 쫓아다니는 건 아무래도 힘든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부터 교회 행사가 있으면 일을 하러 나올 수 없으니 양해해 달라고 밝혔다던, 교회 행사가 있으면 단 한 번도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는 진영은 존경의 대상이지, 시기의 대상일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 김 목사가 또 진영만 데리고 본회 기도원 세미나에 다녀올 예정이라고 했을 때에도 교인들은 ‘이러다 진영이가 우리 목사님 양자 되는 거 아냐?’, ‘아니지, 목사가 돼야지. 너 얼른 공부해서 신학대 가라, 응? 우리 교회 2대 목사가 되면 되지. 그럼 내가 헌금 더 많이 할게.’라고 말하며 진영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니에요. 저 공부 완전 못해서 안 돼요. 공부하기도 싫고요. 성경책도 겨우 읽는걸요.”
진영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웃는 모습이 순하디순해서, 신도들은 진영의 자취방 냉장고 상태가 궁금해졌다.
“저번에 준 김치는 다 먹었어?”
“그렇게 많이 주셨는데, 아직 많이 남았어요. 너무 맛있게 잘 먹고 있어요. 감사해요.”
“맨날 라면만 먹는 거 아니지?”
“아니요, 저 요즘 밥 잘해 먹어요.”
“그래? 그럼 밑반찬 좀 싸줄까?”
“어, 아니요…….”
“에이, 봐봐. 그렇게 말하면 진영이 얘가 넙죽 싸달라고 하겠어? 얜 그냥 싸다가 안겨 줘야 돼.”
“아니요, 아니에요.”
진영은 쑥스럽다는 듯 웃을 따름이었다.
***
-어제저녁, 광화문 거리에서 여당 이 모 초선 의원의 보좌관 박 모 씨가 쓰러져 인근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사망하였습니다. 사인은 급성 심근 경색으로 추정되나 정밀 부검을 요청…… 이 의원은 최근 연달아 발생한 명사들의 돌연사와 이번 일이 관련 있다고 주장하며 …… 고인은 이 의원이 발의한 …… 소위 아름이법이라 불리는 법의 초안을 담당했으며, 이전에도 국제 NGO에서 아동 인권 문제를…….
띡.
카페 사장이 TV 채널을 돌렸다.
“아우, 요즘엔 무슨 저런, 누가 죽었다는 뉴스만 자꾸 나와. 지난주인가? 또 언제는 사람 백 명을 살렸다고 강연 나오고 그러던 소방대원이 어디 건물서 떨어져 죽었다고 하고. 그러니까 무슨 음모라느니, 어디 사이비 종교에서 착한 사람들을 다 암살하고 있다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해대는 거 아냐. 사람들이.”
카페 주인이 투덜대며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송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틀었다. 엄숙할 정도로 단정했던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깔깔대며 웃는 효과음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만히 서서 TV를 보던 진영은 다시 하던 일에 몰두했다. 의자를 테이블 위에 엎어 올리고, 대걸레로 바닥을 문질렀다.
“진영아, 쉬엄쉬엄해. 시원한 거 먹고 싶으면 뭐든 먹고. 응?”
카페 사장은 시끌벅적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로만 먹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아예 한 잔 만들어 줄 모양이었다.
진영이 괜찮다고 손사래 쳐도 소용없었다. 흥이 돋은 카페 사장은 크림이 잔뜩 올라간 카페모카를 큰 잔에 가득 담고, 꾸덕한 치즈케이크까지 두 조각 꺼내 왔다. 그걸 TV 근처 테이블에 올리고는 진영에게 손짓했다. 치즈케이크와 카페모카는 진영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였다.
“진영아, 어서. 어서어!”
카페 사장이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진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벽에 대걸레를 세워 놓고 테이블에 앉았다. 얼굴에 기쁜 기색이 드러났다. 이렇게 좋아하니 케이크 한 조각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사장님도 드세요.”
진영이 포크를 하나 더 가져와 사장 앞에 놓았다.
“어머…….”
아들놈들에게도 받아 본 적 없는 따뜻한 배려라니. 카페 사장의 마음이 몽글해졌다.
“난 먹고 싶으면 내가 꺼내 먹을 테니까. 진영아, 그냥 너 다 먹어. 너 주려고 꺼내 온 거야.”
“하지만 너무 많은걸요.”
“많긴 뭐가 많아. 우리 집 하마들은 한입에 다 먹던데. 에그, 기특한 거. 뉘 집 아들인데 이렇게 예쁘고 착하고 그러나?”
“사장님 카페 알바생이죠, 뭐.”
“말도 예쁘게 하네. 진짜 니네 엄마는 복 받았나 보다. 어디서 이런 아들을…….”
카페 사장이 말을 하다 말았다.
그녀도 저 위쪽, 채소 가게 건물 3층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었다. 바자회 할 때나 얼굴을 비치는 날라리 교인도 교인으로 쳐준다면. 그러니 진영이 혼자 이 동네에서 자취하고 사는 사정을 대강 알았다.
“어서 먹어, 먹어. 부족하면 더 가져다 먹고.”
카페 사장이 부산스럽게 말을 돌렸다. 진영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포크로 치즈케이크를 쪼갰다.
카페 사장은 턱을 괴고 진영이 먹는 걸 구경했다. 시끌시끌한 예능 프로야 배경으로 깔아 놓은 거고.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는 것보다 케이크 먹는 진영을 보는 게 백배 천배 더 재미있었다.
잘생긴 애가 맛있게 케이크를 먹는데. 눈이 마주치면 쑥스러운 듯 웃고 눈을 내리까는데, 세상천지에 이보다 더 재미있는 구경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다만 아쉬운 건, 진영이 너무 말랐다는 것이었다.
“다들 나보고 널 얼마나 부려 먹으면 이렇게 비쩍 곯냐고 얼마나 뭐라고들 하는 줄 아니?”
카페 사장은 진영의 마른 팔을 보며 혀를 찼다.
“참 이상하단 말야. 이렇게 잘 먹이는데. 그렇다고 우리 가게가 엄청 크고 일이 빡센 것도 아니잖아? 근데 왜 이렇게 살이 안 찔까? 응? 진영아. 너 나 몰래 밤에 다른 알바 또 뛰니? 공사장 막노동이나 뭐 그런 거 말야. 아니면 새벽에 우유 배달이라도 한다든지. 내가 시급 좀 올려 줄까?”
“아니요. 저 그런 거 안 해요.”
진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살이 안 찌지? 먹어도 살 안 찌는 체질인가? 그럼 너 너튜브에 먹방인지 뭔지 그런 거 한번 찍어 봐라. 요즘엔 그런 걸로 돈을 많이 번대.”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해요.”
진영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딱 봐도 숫기 없어 보였다.
진영은 제가 숫기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도망치듯 일어났다. 제가 먹은 그릇과 컵, 포크를 치우고 테이블도 깨끗이 닦은 뒤 다시 대걸레 자루를 잡았다.
“아유, 쟤가 내 아들이었으면 맨날 업고 다녔을 텐데.”
카페 주인이 한숨을 푹 내쉬며 TV 채널을 휙휙 돌렸다.
그날 밤.
진영은 김 목사 사택에 가서 저녁을 얻어먹고 까무룩 잠들었다. 김 목사는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진영을 기도방에 눕혀 재웠다. 그리고 차로 한 시간 거리 야산에서 수십 년간 인권 변호사로 일했던 사람이 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
유서는 없었다. 가족과 지인들은 이전에 어떤 자살 징후도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경찰은 타살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고인이 오메가 범죄 사건 피해자들의 재심을 연달아 담당해 패소하며 심적 고통을 느꼈다는 내용을 일기에서 발견했다.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은 내역도 증거가 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을 내리고 수사를 종결했다.
며칠 뒤, 카페 사장은 똑같은 자리에 앉아 TV 채널을 틱틱 돌렸다. 낮 뉴스에서 어느 인권 변호사의 부고 소식을 알리고 있었지만 주의 깊게 듣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요즘 정말 볼 거 없다니까.”
***
다시 이틀 뒤.
진영은 대타로 나온 카페 사장의 아들에게 인수인계를 해주고 카페 앞까지 마중 온 김 목사의 차에 올라탔다.
“갈까?”
“네.”
진영을 태운 승용차는 한참 달려 경기도 외곽으로 접어들었다. 김 목사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능숙하게 운전했다. 보조석에 앉은 진영 또한 창밖으로 보이는, 바퀴가 조금만 삐끗해도 차 채로 굴러떨어져 내릴 것 같은 산비탈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았다.
산중에 위치한 기도원은 작고 낡았다. 주차장에는 부서진 자갈이 가득 딸려 있었다. 노끈으로 바닥에 주차선을 잡아 놓은 건, 그렇게 해놓지 않으면 차를 채 열 대도 못 댈 만큼 협소해서였다.
구석 자리에 겨우 차를 댄 후, 두 사람은 비탈진 길을 올라 안으로 들어갔다. 예배당에 갈 때까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배당에 모여 있었다. 예배당에 모인 사람의 절반은 김 목사와 같은 처지였다. 그들은 ‘장로’였다.
여자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다. 뚱뚱한 사람도 있었고 빼빼 마른 사람도 있었다. 사지가 멀쩡한 자도 있었고, 몸 일부가 불편하거나 없거나 앞을 못 보는 사람도 있었다. 30대쯤 되어 보이는 젊은 사람도 있었고, 김 목사 같은 중년도,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도 있었다.
하지만 오메가나 알파는 없었다. 전부 정상인이었다. 밖에선 베타라 부르는 부류뿐이었다.
장로들은 김 목사에게 “김 장로, 어서 오게!”라고 말하며 환대했다. 김 목사, 아니 김 장로는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시간이 꽤 길었다.
시장통 교회 교인들이 생각하는 엄숙하고 학구적인 분위기의 세미나는 도통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장통보다 더 시끄럽고 도떼기시장 같기까지 한 자기 자랑의 좌담회가 무제한 진행될 따름이었다.
그들은 복사로 데려온 한 명, 혹은 두 명의 아이를 옆에 끼고 있었다. 셋 혹은 네 명을 데리고 다니는 장로도 있었다. 원래는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나 ‘숙청의 밤’ 이후, 숙청된 장로들의 아이를 떠맡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예배당에 모인 사람 중 나머지 반은 ‘아이’였다. 그들은 ‘아이’라고 불렸으나 정말 아이인 건 아니었다. 20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역시나 모두, 아니 대부분 베타였다. 그중 한 명 정도는 베타가 아니나 베타로 다시 태어나는 은혜를 입고 왼쪽 골반에 영광스러운 상흔을 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장로들이 서로의 업적을 정답게 캐묻는 동안 아이들은 제 장로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아이들은 그림자였다. 허락받지 않는 한 말하지 못했고 지금까지의 경험상 말을 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 적은 없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장로들이 자신을 무시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로들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아이 중 일부만이 선택받은 ‘진짜’라는걸. 나머지는 진짜를 숨기기 위한 숲이었다.
누가 진짜 선택받은 아이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선택받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만이 남들 몰래 비밀 임무를 수행하며, 그 죄를 씻고 새로운 죄를 짓기 위해 이곳에 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특별하다.
어쩌면 이곳에 나 말고 한두 명쯤, 나처럼 특별한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무튼 이곳에 있는 아이들 대부분이 ‘나’를 지키기 위한 들러리일 뿐인데. 저들을 이용해 지켜지는 특별한 아이가 ‘나’라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은 대개 이러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아이들이 특별하게 오만하고 자존심이 높아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장로들이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상냥하게 부추겨 온 결과물이었다.
어쩌면 장로들도 자신이 ‘진짜’를 데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늘 같은 날,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듯 제 옆에선 아이의 공적을 늘어놓는 것이리라.
데리고 있는 아이가 뛰어나다는 것은 아이를 데리고 있는 장로의 양육이 올바르다는 의미. 그러니 데리고 있는 아이를 자랑하는 건 제 얼굴에 금칠하는 일이었다. 그걸 모르는 아이들은 제가 인정받는 것을 기뻐하고 당연하게 여기며, 얼굴에 은은히 드러내었다.
모든 장로가 그렇게 제 얼굴에 금칠하기 바빴다면 어느 순간, 내가 더 잘났네, 네가 못났네 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얼굴을 붉히는 순간이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굴에 금칠하지 않으려는 자들과 얼굴에 금칠할 수 없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 장로와 박 장로는 유독 말을 아꼈다. 둘은 각기 한 명의 아이만을 데리고 있었다. 둘은 ‘숙청의 밤’ 이후 한두 명씩 아이를 더 맡으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한 명도 벅차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한 명을 겨우 키워 낸 이 두 장로는 아이를 자랑하는 법이 없었다. 당신의 아이는 그동안 선생님을 위해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느냐고, 따지듯 묻는 말에도 곤란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김 장로는 진영이 한 적 없는 자잘한 일들을 더듬더듬 늘어놓고는 부끄러워하며 낯빛을 붉혔다. 옆에 서 있는 진영은 쑥스러운 듯 따라 웃었다.
김 장로는 오늘 같은 모임에서나 사적으로 둘만 있을 때나, 진영에게 잘했다고 칭찬한 적이 없었다. 너의 음욕적인 원죄를 잊지 말고 늘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거듭 타이를 뿐이었다.
때문에 진영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야말로 선택받은 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진영의 마음 텃밭엔 오만의 씨앗이 뿌려져 있지 않았다.
박 장로와 그가 데리고 있는 아이는 김 장로와 진영의 경우와 비슷했으나 살짝 다르기도 했다. 박 장로의 아이는 진영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얼굴을 기억하는 아이였다. 진영은 박 장로의 아이와 마주칠 때마다 속으로 그 아이를 불러보았다. 038.
038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박 장로는 김 장로와 달리 호탕하게 웃고, 주저 없이 다른 장로의 아이를 칭찬했다. 그러면 038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제 얼굴에 금칠하고 싶은 장로들은 박 장로 주변에 몰려들었다.
박 장로 주변에 사람이 몰릴수록 박 장로의 아이, 038은 더욱 침울해졌다. 나중 가서는 아예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그 모습이 다른 장로와 아이들을 우쭐하게 만들었다.
진영은 잠깐이지만 038과 눈을 마주쳤다. 038이 남몰래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곤 다시 고개를 푹 숙이던 그 순간. 그때였다.
038이 진영을 알아보고 미소 지었다. 아주 잠깐. 정말 잠깐이었지만, 진영은 038의 표정을 읽었다.
038은 다른 어떤 아이들보다 월등히 오만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너와 나. 우리가 진짜야.’
눈을 깜빡이니, 038의 그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위축된, 공적이라곤 하나도 없는, 박 장로의 볼품없는 아이. 그 불쌍한 아이의 정수리만 보일 뿐이었다.
방금 본 건 착각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도 내가 여기서 가장, 혹은 유일하게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진영은 반성했다. 대놓고 으스대는 아이들을 신기하게 여기거나, 옅게나마 경멸하였던 것은 동족 혐오의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작부터 다른 선상에 놓여 있던 내가, 어쩌면 가장 특별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생각하고 싶었던 걸까.
문득 왼쪽 골반 부근이 아려 왔다. 하지만 실수로라도 그 부위에 손을 얹지는 않았다.
진영은 어떤 강렬한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보았다. 그곳에 자신들과 다른 의미로 이방인인 두 사람이 있었다. 둘 중 누구도 진영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을 느낀 건 착각이었을까?
임 권사와 허 집사.
둘은 몇 년 전, 장로 직분을 받았으나 여전히 임 권사와 허 집사로 불렸다.
숙청의 밤 이후 교단은 꿀 털린 벌집처럼 너덜너덜해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건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2세대 신도들이었다.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2세대.
이건 김 장로가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부르는 멸칭이었다.
임 권사와 허 집사는 다른 장로들처럼 교단 초기부터 선생님을 따랐던 사도가 아니었다. 교단이 어느 정도 기틀을 갖추고 난 뒤 전국에 퍼진 크고 작은 포교회들, 이를테면 진영이 다니고 있는 개척 교회 같은, 그런 곳에서 전도되어 신앙을 인정받은 새신도 출신이었다.
선생님의 존재를 알게 되고, 열심히 공부하고 신앙 생활을 하며 전 재산을 교단에 바친. 집과 직장, 밖의 세상 모든 걸 내던지고 자기 자신마저 교단에 바친 2세대 열성 교인.
그러니까 임 권사와 허 집사는 오 박사 덕분에 장로가 된 거라 할 수 있었다. 오 박사의 배신에 충격받은 선생님의 명을 받아 박 장로의 주도로 일어난 것이 숙청의 밤이었으니까.
임 권사와 허 집사는 숙청의 밤 이후 출세한 2세대 신도 중에서도 특히나 열성적이고 맹목적이었으며, 쓸모 있는 세속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눈여겨본 오 장로가 선생님께 추천하여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른 것이었다.
임 권사는 밖의 세상에서 세무사로 일했다. 굵직한 업체들을 끼고 큰 세무 법인을 운영해 1년 치 수임료만 수십억에 이르렀다. 그녀가 모든 걸 버리고 교단에 투신한 게 그쪽 업계에선 꽤 오랫동안이나 화제가 되었다고 했다.
허 집사는 뒷골목 깡패 출신이었다. 전국구 조직에 속해 있던 것은 아니고, 동네 건달로 어슬렁대며 재건축 공사판을 찾아다니면서 콩고물이나 주워 먹는 하류 인생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선생님을 알게 되고선 모든 걸 청산하고 교단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안 된다고 뜯어말리는 아내와 이혼하고, 위자료 한 푼 주지 않고 전 재산을 교단에 바쳤다. 전 재산이라 봤자 전세방 보증금 몇천만 원이 고작이었지만.
허 집사는 중졸에 사람 패는 것 말고는 딱히 별 재주도 없어 보이는 자였다. 오메가나 알파가 아니고 정상인이라는 게 그의 유일한 장점인 듯 보였기에, 그가 장로가 됐을 때 교단 내에선 불만이 컸다.
하지만 불만은 곧 눈 녹듯 사라졌다. 허 집사가 장로가 되자마자 제 능력을 마음껏 드러냈으니까.
허 집사는 구린내를 기가 막히게 잘 맡았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군 잡아가던 순사 놈들 개코가 저만했겠지.”
허 집사 이전에 비슷한 일을 맡았던 박 장로마저 혀를 내두를 만큼, 허 집사는 악랄한 개새끼였다.
교단에 불만을 품고도 아닌 척 낯빛을 꾸미는 놈. 밖의 사특한 세력과 야합해 교단을 무너뜨릴 음모를 꾸미는 불순분자. 교단의 비밀을 외부에 유출하는 배신자. 허 집사는 그런 자들을 기가 막히게 잡아 냈다.
비록 출혈은 컸지만, 숙청의 밤 때 그런 것들을 잘 솎아 냈다 자화자찬했던 장로들은 허 집사의 개코에 걸려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 나오는 새로운 배신자들을 보고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임 권사는 회계를.
허 집사는 감찰을.
그렇게 두 사람은 교단에 없어선 안 될 인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교단의 핵심 세력이 된 것과는 별개로, 아이들을 배급받지 못했다. 숙청의 밤 직후 아이들을 재배치해 남은 아이들이 없다는 것이 명목상의 이유였지만, 사실은 기존 장로들의 텃세에 불과했다.
아이를 여럿 데리고 있는 장로가 한두 명 넘겨주면 될 일이나 어떤 장로도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둘을 추천해 올린 오 장로마저 그랬다. 오 장로는 네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것은 특권이었다. 여기 모인 장로들도 누가 정말 특별한 아이를 데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아는 사람이 두 명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나 모두가 각자 자신이 데리고 있는 아이가 특별하며, 자신이야말로 선생님의 최측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 명의 아이도 남에게 넘겨줄 수 없는 것이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가 얼마나 뛰어난지 침 튀기며 자랑해 대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아이를 가지지 못한 두 장로는 겉돌 수밖에 없었다.
임 권사와 허 집사는 구석에 서서 자기들끼리 속닥댔다. 눈빛이 날카롭고 분위기가 음울했으나 그들을 눈여겨보는 장로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그들이 자신을 불순분자로 의심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게 전부였다. 호승심 돋은 장로는 어깨를 쫙 펴고 눈싸움을 하기도 했으나, 그뿐이었다.
진영 역시 잠시간 지켜보다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진영이 고개를 돌린 직후 임 권사가 진영을 보았다. 그 눈빛은 아주 차분하고 지독했다.
“선생님께서 오십니다.”
잠시 사라졌다 헐레벌떡 뛰어온 허 집사가 외치자 시끄럽던 내부가 바로 조용해졌다.
장로들은 아이들을 내보냈다. 아이들은 서로 다른 문을 열고 나갔다. 아이들은 누구도 마주치지 않고, 정해진 숙소로 갔다.
숙소는 진영의 자취방 원룸보다 컸다. 구조와 인테리어는 김 장로 사택의 기도방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벽에 걸린 반쪽짜리 십자가가 이미 환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진영은 그 아래 놓인 방석을 치우고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두 손은 십자가가 떨어지면 언제든 받쳐 들 수 있도록 들어 올렸다. 손바닥은 천장을 향했다. 진영은 그 상태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심판은 내일 반드시 도래하리라는 믿음.
속죄는 오직 순명으로 이뤄 낼 수 있는 구원.
곧,
죽음은 기회.
심판은 믿음.
속죄는 순명.
진영은 교리를 되새기며 그동안 자신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몇 번이나 성공시켰는가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심판의 때, 최후의 날이 좀 더 일찍 도래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저절로 선생님을 향한 믿음이 샘솟았다. 앞으로도 김 장로에게 복종하리라. 선생님이 이 말세의 세상을 끝내고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시기만을 바라리라. 그렇게만 되면 모든 게 끝나겠지.
더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무것도.
진영은 제가 죽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바라건대, 땅속에 묻혀 있는 그들이 최후의 날 몸을 일으켜 심판을 받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이르게 하소서.
방 안에 진영의 숨소리가 조용히 차올랐다 흩어졌다.
***
세상은 오랫동안 그저 남자와 여자로만 구분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 말고 다른 형질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여자와 남자.
거기에 알파와 오메가, 베타.
이중 분류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어떻게 분류되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인권 선언이 지켜졌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만. 그게 새삼 지켜질 리 없었다. 사람들은 상대를 약자로 만들어 짓밟으며 안도감과 우월감을 느끼는 인간의 본능을 여지없이 뽐냈다.
베타는 불감증, 불능.
알파는 인간 비아그라.
오메가는 365일 발정 난 걸레.
일차원적인 편견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비웃고 폄하하고 공격했다. 알파와 오메가 혐오 범죄율은 수직 상승했다. 오메가 납치, 강간 범죄가 특히나 심각했다.
각 나라의 정부는 사회 질서 안정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오메가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법안이 마련되었으나 사고가 일어났을 때나 반짝 논의될 따름이었다. 관심이 식으면 국회 법사위에서 계류되기 일쑤인 상황에서 사회의 혼란은 지속되었다.
이 이상한 세상에서 진실에 눈을 뜬 진리자가 나타났다.
그는 열성 알파의 육신을 입고 태어났으나 알파, 오메가의 본능에 박힌 음욕을 이겨 내고 이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진리자를 알아본 자들이 그를 선생님으로 받들고 따르니. 진리자는 그들의 진정한 선생님이 되어 하늘의 진리를 설파했다.
신은 인간을 아담과 하와.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건만, 그 분류를 벗어나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것들이 생겨난 건 세상이 말세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타락하고 사치하고, 음욕에 빠진 인간은 선악과 원죄를 뛰어넘은 음욕의 원죄로 영혼마저 썩어 버렸다.
당장이라도 심판의 때가 이르러야 마땅하건만, 말세의 세상을 포기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로 인하여 최후 심판의 날이 늦춰지고 있다. 오호, 통재라.
최후 심판을 늦추는 어리석은 자들은 놀랍게도 이 말세의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인격자요, 복지가,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영혼은 순결하나 진정 무지한 자들이라.
생각해 보라.
여기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이 있다. 상아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코끼리여도 좋고, 애완용으로 밀렵당하는 치타나 그 밖의 어떤 동물이어도 좋다.
탐욕스러운 자들 때문에 그 동물은 끊임없이 쫓기고 죽임당한다. 암컷은 뜬장 우리에 갇혀 임신과 출산을 강요당하다 비참하게 죽고, 야생의 새끼들은 다루기 힘들단 이유로 눈앞에서 제 부모가 산탄총에 맞아 머리가 터져 죽는 걸 본다. 그리곤 우리에 갇혀 배를 타고 어디론가 팔려 나간다.
더는 이 세상에 생육하고 번성치 못하게 되니. 개체 수가 급감하여 멸종 직전에 이른다.
그러면 뒤늦게 일부의 인간들이 이 소중한 동물을 지키겠다고 나선다. 그들은 밀렵꾼들과 싸워 죽거나 팔려 갈 뻔한 새끼들을 구출해 자신들의 아지트에 숨기고 금이야 옥이야 돌본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열에 여덟은 밀렵꾼들에게 아지트가 털려 새끼들을 다시 빼앗긴다. 남은 둘의 경우 운 좋게 살아남으나 그럼에도 철창 우리에 갇혀 살게 될 것이다. 인간들이 동물의 본능을 지켜 주겠다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암컷이나 수컷과 합사해 주면 새끼를 낳을 것이고, 그 새끼는 아지트를 덮친 밀렵꾼들에게 잡혀갈 것이다.
그 생존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왜 멸종하도록 놔두지 않는가. 어찌하여 고통뿐인 종족 보존을 강제하는가. 생태계가 교란되고 파괴될 거란 우려 때문에? 그건 파괴된 생태계로 고통받기 싫다는 인간의 이기심 아닌가. 정말 그 동물을 위한다면 더는 고통 받지 않게 차라리 멸종당하게 두는 게 낫지 않은가.
이런 상냥한 이기심, 무지한 선량함이 이 세상 곳곳을 지탱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환락과 타락이 만연한지 너무도 오래되었으니 사람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죽이고, 혐오하고, 강간하고, 짓밟으며, 절망에 빠트리고, 비웃고, 모독하며, 차별한다. 그럼에도 선량한 무식자들은 아득바득 이 말세를 부여잡는다.
그들이 사회 곳곳에 뿌리 박혀 있기에 이 세상은 아직 희망이 있다 생각하고야 만다. 타인의 처지와 슬픔에 공감하여 함께 눈물 흘리고 연대한다.
이것이 선량한 무식자들이 저도 모르게 저지르고 있는 기만이다.
그들은 싹이 움텄으되 자라 결실을 보지 못하는 겨자씨다. 차라리 싹조차 트지 않았다면 희망조차 품지 않았을 것을. 퍼런 떡잎을 드러내니 결실이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야 말게 되는 것이다.
그 웃자란 싹들이 이 세상을 붙잡고 늘어지는 한 최후의 날은 오지 못한다. 그러니 선량한 연대를 끊고, 타인의 처지에 공감해 흘리는 눈물을 메마르게 해야 한다.
세상은 이미 말세.
도처에 절망과 타락만이 가득하다.
가진 자는 만족하지 못하여 더 가지려 들고, 못 가진 자는 기회를 잃고 더더욱 못 가진 자 되니. 약한 자는 억압 받고 짓밟힌다. 이 세상은 더는 약한 자를 가엾이 여기지 않는다.
먼저 창조된 돼지와 소, 닭들은 태어나자마자 산 채로 갈리거나 우리에 갇혀 사육당하다 살육당한다.
인간이 더럽힌 물이 하늘 아버지가 창조하신 세상을 죽음의 땅으로, 죽음의 바다로 만들고 있나니.
그럼에도 선량한 무식자들은 희망을 설파한다. 오직 그들로 인하여 말세가 이어지고 있다.
세상은 이미 말세.
말세는 곧 고통.
심판의 날이 멀어져 간다.
선량한 무식자여. 너는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되. 나의 아이가 너를 찾아 육신의 숨결을 끊고 땅에 묻으리라. 그제야 너는 자신이 헛된 삶을 살았는지 알리라.
오직 내가 너를 위하여 이 땅 위에 기드온의 전사를 내사 네 목을 조이고 너의 숨을 끊어 더 큰 죄를 짓기 전에 눕혔으니. 널 위하여 큰 계명을 어기고 살인을 저지르는 그들의 희생에 감사하라.
말세를 끝내기 위해 선택받은 기드온의 아이야. 죄짓기를 두려워 말라. 하늘 아버지와 그의 두 번째 아들인 나의 가호와 축복이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끝내 구원을 얻으리라.
다만 순종하여 따르라. 너의 기업은 땅이 아니요. 죄를 등에 진 자의 사명이라.
말세를 끝내기 위해 너를 온전히 바쳐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로다. 천국 내 왼편의 자리가 온전히 너의 것이리라.
***
진영이 선생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사흘 뒤였다.
김 장로가 진영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명령했다.
“선생님이 무엇을 하든 받아들이거라. 그분이 내리는 축복의 은혜에 감사하거라.”
선생님은 말세를 끝내고 최후 심판을 일으키고자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늘 아버지의 두 번째 아들. 하늘과 교통하여 만민을 사랑하나 세상일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으신다. 세상 어떤 신이 보잘것없는 세상일에 일일이 간섭하고 명령한단 말인가.
그래서 장로가 존재한다.
장로들은 선생님의 깊은 뜻을 받들어, 선생님의 손발이 되어 교단의 대소사를 처리한다. 선생님께서 그저 기도와 예배에만 전념하실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오직 구원과 심판에만 마음을 쏟으실 수 있도록.
아이들은 장로들이 사용하는 도구다. 도구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도구가 주인을 건너뛰고, 그 위의 위대한 존재의 명을 받들 수 있겠는가?
하여 도구인 아이들은, 주인인 장로의 명령을 받는다.
선생님은 장로에게 명령하고, 장로는 아이에게 명령한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직접 명령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선생님을 우러르나 선생님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
모순이라면 모순이라 할 수 있겠으나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장로들은 선생님을 위해 일하고, 아이들은 장로들을 위해 일하니까. 삼위일체처럼 뜻을 함께하는데 문제 될 게 무엇 있겠는가.
그래서 김 장로는 진영이 선생님의 부름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명령하는 것이었다.
진영은 오늘 밤, 선생님께 순종하겠다고 맹세한 뒤 김 장로를 따라 긴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복도 끝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마주쳤다. 임 권사였다.
김 장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도 마주쳐선 안 되고, 아무에게서 방해받아서도 안 될 길을 침범당해서일까. 아니면 임 권사가 감히, 자신보다 먼저 그 문 안에 들어갔다 나온 것에 대한 불쾌감일까. 진영은 둘 모두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이 복도에서 다른 누군가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 마주친 건 실수일까, 우연일까. 혹은 소문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어리석음일까.
진영은 김 장로를 지나쳐 제 앞에 멈춰 선 임 권사의 시선을 눈치챘다. 눈이 마주치자 임 권사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진영을 사납게 노려보더니, 보란 듯 진영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진영은 비틀거리며 부딪친 어깨를 움켜잡았다.
“괜찮으냐?”
김 장로가 진영을 부축했다.
“…….”
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과 부딪치면 비틀거리고 부딪친 부위를 붙잡아야 한다. 학습에 의한 반사적인 행위였을 뿐, 아프진 않았다.
오히려 제게 부딪친 임 권사가 더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임 권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지나쳤다. 김 장로가 혀를 끌끌 차며 임 권사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기가 살았군. 최근 돈 문제로 선생님을 자주 독대하더니 제가 뭐라도 된 줄 알고.”
김 장로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못마땅해하면서도 혹여나 임 권사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한껏 낮춘 것이었다.
진영이 빤히 쳐다보자 김 장로는 헛기침하며 길을 재촉했다. 둘은 임 권사가 나온 방 앞에 섰다.
김 장로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진영은 밖에 서서 대기했다. 한참 후 김 장로가 환한 얼굴을 하고 나왔다.
“들어가 보렴,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김 장로가 진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순간, 진영은 들어가기 싫다고 생각해 버렸다.
선생님을 향한 믿음. 구원에 대한 신념. 모든 것들이 여전했다. 그런데도 이 문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진영은 용기를 내어 김 장로를 바라보았다.
“어서. 대답해야지?”
김 장로가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네.”
진영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김 장로가 진영의 등을 떠밀었다.
방은 진영이 배정받은 숙소보다 열 배, 아니, 스무 배 이상 컸다. 한쪽 벽에 반쪽짜리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나머지 벽을 채웠다. 그리고 아주 큰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에는 화려한 휘장이 쳐져 있었다. 침대 앞에는 고풍스러운 원목 책상이 놓여 있고, 성서와 여러 서류가 쌓여 있었다. 마주 보게 놓여 있는 의자로 보건대, 침대 쪽 의자에 방의 주인이 앉아 있었을 것이고 문 쪽 의자에는 임 권사가, 또 김 장로가 앉았을 터였다.
진영이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방의 주인은 더 이상 책상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침대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얼굴이 더없이 엄숙했다.
그는 목욕 가운처럼 보이는 흰 튜닉을 걸치고 있었는데, 느슨한 옷깃 사이로 마른 몸이 드러났다.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진영은 숨이 막혔다.
“…….”
진영은 발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걸어 침대 옆에 난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선생님은 눈을 뜨지 않았다.
샤워실은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다. 진영은 옷을 벗어 빈 바구니에 넣고, 사자 조각이 붙어 있는 도금된 샤워기로 몸을 깨끗이 씻었다. 크고 보드라운 타월로 몸의 물기를 닦고 맨몸에 목욕 가운을 입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선생님은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진영은 선생님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두 손은 들어 올려 손바닥이 천장을 향하도록 했다.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하자 선생님이 비로소 움직였다.
그가 진영의 머리에 양손을 얹고 힘 있게 눌렀다. 진영의 목이 푹 떨구어졌다.
“아버지시여. 이 불쌍한 어린양을 돌보소서. 이 몸으로 하여금 이 어린양을 정결케 하소서.”
선생님이 엄숙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하지만 기도만으론 부족했다. 진영의 죄는 너무도 무거워서 좀 더 특별한 속죄가 필요했다.
“올라오거라.”
“…….”
선생님이 진영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진영은 목욕 가운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반듯이 눕고 눈을 감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선생님이 맨몸으로 진영의 몸 위에 올라탔다.
“가만히, 가만히 있거라. 나를 믿고 그래, 그렇게. 착하구나.”
선생님이 속삭였다.
침대 기둥에는 은은한 빛을 내뿜는 반쪽짜리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그 빛이 진영의 몸을 환히 비췄다. 뱀 같은 눈길이 진영의 마른 몸을 훑었다.
하얗지만 여기저기 흉터가 있는 몸. 마른 근육과 뼈가 드러난 남자아이의 몸. 순종적으로 누워 눈마저 감고 있는, 야들하고 싱싱한 젊은 육신.
마른 허리, 긴 다리를 훑던 눈이 진영의 왼쪽 골반 근처에서 멈췄다. 선생님의 손이 우둘투둘한 상처에 닿았다. 진영은 숨을 멈췄다.
이제 이 상처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셋뿐이었다. 김 장로와 박 장로, 그리고 진영. 아니, 셋이 아니라 넷이라 말해야 옳을지도.
관심법을 익힌 선생님은 남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시니. 김 장로와 박 장로, 진영의 비밀을 이미 꿰뚫어 봤으리라. 그리고 용서하셨으리라. 그럼에도 모른 척하시는 선생님의 넓은 마음을 헤아려 장단 맞춰 드려야 한다고, 김 장로가 신신당부하였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지금, 그 상처를 숙청의 밤 때 불의한 사고로 얻은 훈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봐야 한다.
숙청의 밤.
그날은 교단의 숙원이었던 에덴 프로젝트가 완성된 날이었으며, 오 박사처럼 딴마음을 품고 교단에 해를 끼치려 한 불순분자들을 한꺼번에 처단한 밤이었다.
그날 밤. 에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교인 전부가 순교했다. 교단은 배신자들을 솎아 내는 큰 홍역을 치렀다.
숙청 규모는 컸다. 열두 지파의 열두 장로 중 절반, 여섯이 죽었다. 죽은 장로들이 데리고 있던 아이들은 다른 장로들에게 인계되었다.
그 여파로 현재까지도 장로는 여덟 명에 불과했다. 열둘을 다시 채우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교단은 아직도 그때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진영의 골반 쪽 상처는 교단 내부의 어지러운 상황과 맞물렸다. 마침 잘 됐다며 흐뭇하게 웃던 박 장로의 얼굴을, 진영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진영은 도망치던 불순분자를 막아서다가 아랫배에 칼을 맞고 응급 수술을 하여 살아남았다. 당시 연구병동과 의료부에 종사하던 교인 절반가량이 숙청당했기에, 인력이 부족하여 수술이 잘 마무리되지 못하고 흉터가 남아 버렸다.
그런데 이 흉터가 문제였다. 선생님은 진영의 몸에 난 흉터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또는 지극하게 감명받아 숭배하듯 찬양했다.
어느 땐 흠집 난 것을 내게 가져다 대냐고 불같이 화를 내며 진영을 밀쳤다. 걷어찼다. 그러면 진영은 맨몸으로 침대 아래로 나동그라졌다. 그대로, 맨몸으로, 방에서 쫓겨났다. 그러면 어떻게 알고 온 건지, 김 장로가 허겁지겁 달려와 큰 천으로 진영을 감싸고 숙소로 데리고 갔다.
이후 벌어지는 일은 뻔했다. 진영 말고, 몸에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또 다른 아이가 선생님의 방에 불려 들어갔다. 그 아이는 흠집 난 것을 보고 분노하고 실망한 선생님의 기분을 가라앉히고, 진영의 몫이었던 은혜를 대신 받았다.
선생님의 침대 위에 누워, 선생님의 성체를 받아들이고, 선생님이 내주는 성수를 가랑이 사이로 받고, 구원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으리라. 선생님의 침상에서 쫓겨난 흠집 난 것이 숙소에 처박혀 반쪽짜리 십자가 아래서 고행하듯 무릎 꿇고 있는 밤새도록.
다음 모임 때 그 방의 수혜자는 진영과 눈이 마주치고자 애썼다. 마침내 눈이 마주치면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그러면 진영은 알게 되었다. 자신이 내쳐진 뒤 그다음 차례가 그 아이였다는 걸.
그렇다고 늘 내쳐지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오늘 같은 날도 더러 있었다.
선생님은 진영의 골반에 난 상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주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이.
“이것이 내게 충성한 증거구나. 성흔이다. 이 성흔이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감격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몸을 굽혀 상처에 입을 댔다. 실컷 혀로 핥고 빨고는 진영의 다리를 벌렸다. 축 처진 성기를 한 손에 쥐고 주물러 댔다. 그러면 진영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싫다.
벗어나고 싶다.
이대로 방 밖으로 나가고 싶다.
배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진영은 그 끈적한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두 손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어야 했다.
김 장로가 명령했다. 선생님이 무엇을 하든 받아들이라고. 오직 감사하라고. 진영은 그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진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선생님은 뱀처럼 진영의 몸 위를 기어 다니며 온갖 곳을 핥아 댔다. 그건 진영이 지은 살인죄를 씻어 주기 위한 행위였다.
말세를 끝내기 위해 살인했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고는 하나 대죄는 대죄였다. 홀로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속죄하기 위해선 선생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했다.
선생님이 진영의 몸을 제 몸으로 짓누르고 입과 입을 맞댔다. 입 안으로 물컹한 혀가 들어왔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진영은 입을 벌려 선생님의 혀가 입속을 마음껏 헤집도록 했다. 곧 닥쳐올 고통을 예상하고, 혹시라도 선생님의 혀를 씹지 않도록 준비했다.
예상대로, 선생님이 두 허벅다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다리가 크게 벌어졌다. 기분 나쁘게 뜨거운 것이 벌어진 엉덩이 사이에 닿았다. 꽉 다물린 구멍을, 흥분해 물을 질질 흘리는 성기가 아무 준비도 예고도 없이 파고들었다.
“……!”
진영은 입을 벌린 채 비명을 참았다.
아직 입 안에 선생님의 혀가 들어 있었다. 그 혀가 진영의 혀를 게걸스럽게 빨았다. 쩝쩝대는 소리가 났다. 진영의 입 주변이 침 범벅이 됐다.
아래쪽은 메말랐다. 성마르게 침입한 성기가 뻑뻑한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허윽.”
선생님이 입을 떼고 숨을 내뱉었다. 진영은 그제야 이를 악물 수 있었다. 침대 시트를 움켜쥔 손등 위로 하얀 뼈가 도드라졌다.
“너무 조이잖아.”
선생님이 허리를 돌리며 허억,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래, 그거야. 조, 좋아. 헉. 그래. 좋아. 이래야지. 역시 넌, 베타가, 정상인이 맞군. 그래, 음욕에 물들지 않고, 헉, 허억. 조이고 뻑뻑하고, 좋아. 아주 좋아. 이거야.”
선생님이 허리를 흔들었다. 배 속에 들어온 게 빠져나갔다 들어왔다. 다시 들어왔다 빠져나갔다 하며 왕복 활동을 반복했다. 뻑뻑한 구멍은 고통만을 느꼈다.
이건 세간에서 말하는 성교 행위와 유사했다. 아니, 같은 것 같기도 했다. 가임기의 알파와 오메가가, 베타와 베타가 아이를 만들기 위해 하는 행위.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출산의 고통, 자손의 번식을 위해 시작했던 행위.
하지만 이 행위는 그런 성교와 모양새는 같을지 모르나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아이를 낳기 위해선 알파와 오메가가, 또 확률은 낮지만 베타와 베타가 성교해야 한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는 서로를 유혹하기 위한 음탕한 냄새를 풍긴다.
그 같은 관계 속에서 알파와 베타는 엮일 수 없다. 아무리 성교해도 아이를 얻지 못할뿐더러, 알파가 내뿜는 음탕한 냄새는 베타를 흥분시키지 못하니까.
그러니 고통뿐인 이 행위는, 신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에게 시킨 행위가 아니었다. 그저 죄 씻음의 행위, 속죄의 과정일 뿐이다.
음욕으로 가득 찬 말세를 끝내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선생님은 음욕에 빠진 죄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일부러 알파의 몸을 입으셨다. 하늘 아버지의 첫째 아들인 예수님이 가장 낮고 하찮은 자들을 위해 낡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선생님은 그 신성한 정신을, 음욕에 차마 완전히 담글 수는 없어 열성 알파의 육신을 입으셨는데, 음욕에 휘둘려 오메가들과 놀아나고 타락하기는커녕 음욕을 이겨 내고 결백한 영혼을 지켰다. 그리곤 자신과 마찬가지로 결백한 영혼을 지킨 베타, 정상인들을 모아 교단을 일구고, 죄인들은 구원하기 위해 기도와 예배에 힘썼다.
그런 선생님께서 한낱 도구에 불과한 아이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육신의 행위를 치르시니. 이는 쾌락이나 임신을 위한 것이 아니요. 오로지 고통과 속죄를 위한 것이리라.
눈을 감은 진영의 얼굴 위에 허억, 헉, 습하고 거친 숨이 계속 쏟아졌다. 고통으로 굳어진 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더, 더, 조, 조금 더, 헉, 더 조여, 조여 봐. 그래, 그래!”
선생님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그럴수록 진영의 아래는 더 쓰리고 아렸다. 고통, 고통. 오직 고통뿐이었다.
그 고통이 진영을 안심시켰다.
만약 진영이 오메가라면, 선생님이 내뿜는 알파 페로몬에 취해 다리 사이 구멍이 말랑해졌을 것이다. 어쩌면 애액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속죄 행위에 불과한 이 행위를 성교로 여기고, 교성 어린 신음을 내지르며 엉덩이를 흔들어 댔을 것이다. 더, 더 해달라고 천박하고, 더럽고, 끔찍하게 조르며 영혼에 새겨진 음욕의 낙인을 고스란히 드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진영은 그러지 않았다. 못 했다.
윽. 흑. 윽. 간혹 절 거칠게 다루는 선생님의 손길에 밀려 신음이 흘러나왔으나 그건 고통 어린 비명일 뿐. 쾌락에 젖은 교성이 아니었다.
행위가 길어질수록 몸은 더 뻣뻣하게 굳었다. 다리 사이는 쓸려 아프기만 했다. 배 속은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했다.
그러니 진영은 오메가가 아니었다. 이 속죄의 행위는, 진영이 음욕의 원죄를 가진 더러운 오메가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러니까 아파도 된다. 더 아파야 했다.
“허억, 헉. 조, 조여 보라니까. 더! 뻐, 뻣뻣하기는. 넌, 뭐, 그게 또 맛이긴 하지만. 하, 윽.”
선생님이 진영의 허리를 잡고 허리를 급하게 털어 댔다. 진영은 끝이 가까워져 왔음을 깨달았다.
역시나 곧.
“으읏, 큭. 크윽.”
선생님이 거친 숨을 뱉으며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 진영은 선생님이 제 안에 사정한 걸 알았다. 안에 사정했는데도 딱히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선생님은 지쳤는지 진영의 몸 위에 엎드렸다. 진영의 목과 귀를 빨아 대며, 몸 여기저기를 주물러 댔다. 시들시들해진 그것을 빼지 않은 채로 몇 번 더 허리를 털기도 했다.
그런 뒤엔 힘을 쭉 빼며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은 너의 죄를 씻는 세례 의식이기도 하지만. 너를 숨기고 지키기 위한 기만술이기도 하단다. 음욕에 물들어 버린 밖의 죄인들은 지금 너와 나의 모습을 보곤, 내가 너를 억압적으로 탐하고 성적으로 유린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단다. 그 말은 전적으로 틀린 말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며 날 매도하고, 널 불쌍히 여길지도 모르지. 네가 이 세상을 위해 한 진짜 일들을 모른 채. 그저 널 불쌍히 여기고 안쓰럽게 생각할 텐데.”
선생님이 진영의 허리를 쓸어내리며 킬킬댔다.
“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이곳은 완벽하게 안전하고 안락한 나의 궁궐, 나의 예루살렘이니. 그러나 그럼에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와 장로들이 없어지고 우리 교단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일이 생긴다면 말이다. 너만은 온전히 그들 틈에 숨어들어, 말세를 끝내기 위한 우리의 대업을 이어 나가면 되는 것이란다. 너의 두 손으로. 내가 은혜를 내려 준 이 몸으로 말이다.”
말을 마친 선생님이 진영의 몸속에서 제 것을 빼냈다. 시든 그것이 덜렁덜렁 흔들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양반다리로 앉은 다음 엄숙한 표정을 짓고 진영에게 일어나라 손짓했다.
진영이 마주 앉자, 선생님은 그윽한 표정을 지으며 진영의 두 손을 끌어다 손바닥에 경건히 입 맞췄다.
“너의 이 두 손으로 말이다.”
선생님의 눈은 여전히 몽롱했다.
“…….”
진영은 순종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이대로 속죄가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날 유혹하려고 그런 표정을 지어? 요망한 것 같으니라고.”
선생님은 입맛을 다시며 진영을 밀어뜨리고 올라탔다. 몽롱하던 눈빛이 다시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
늘 있던 일인지라 진영은 놀라지 않았다.
속죄의 행위는 한 번의 삽입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선생님이 다시 올라탈 때도 있었고, 진영이 침대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때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에 선생님은 자비를 내리듯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 볼품없는 다리를 벌려 제 성기를 빨게 시켰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한 번 사정한 선생님의 것이 다시 발기하는 일은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은 진영의 몸 위에 올라타 진영의 다리 사이에 제 시든 성기를 문지르고 비벼 댔으나 다시 삽입하진 못했다. 그래도 선생님은 한참 동안 진영의 몸 위에서 헉헉댔다.
“…….”
진영은 가만히 누운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
속죄의 의식이 끝난 뒤. 진영은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샤워실로 갔다.
샤워기를 틀고 손가락으로 뒤를 벌려 안에 든 걸 긁어냈다. 다리를 타고 무언가가 흘렀다. 두 눈에서도 미지근한 것이 흘렀다. 샤워기 물은 뜨거웠으니, 샤워기 물은 아니었다.
눈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눈물이라고 한다. 그건 사람이 기쁘거나 슬플 때, 너무 무섭거나 감동받았을 때 흘리는 것이다. 그런데 진영은 자신이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무서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선생님의 말씀대로 이곳은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문밖엔 선생님이 계셨다. 혹시나 선생님의 분노를 사 쫓겨나면 바로 달려와 줄 김 장로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눈물은 감동의 의미인 걸까?
진영은 습기로 뿌옇게 된 거울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아이가 샤워기에서 흐르는 물을 맞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책과 영상에서 본 것처럼 딱히 감동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감동스러운 거겠지. 선생님의 선택을 받아 오메가로서의 삶을 벗어났으니까. 선생님께 직접 죄 사함의 은혜를 입었으니까.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진영은 거울을 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
모임 마지막 날.
선생님이 김 장로에게 연락했다. 진영이 이번에 지은 죄가 너무 깊어 한 번의 속죄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진영은 당연한 부름이라 생각했다.
처음 부름 받았을 때, 무심코 방 안으로 들어가기 싫다고 생각했다. 선생님께선 그 마음을 들여다보시곤 순종하지 않은 죄마저 씻어 주시려는 게 분명했다.
진영은 김 장로와 함께 다시 긴 복도를 걸었다. 이번엔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방 안으로 들어가 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은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다리 사이로 불룩 솟은 성기가 보였다.
진영은 샤워실로 가 천천히 몸을 씻고 나왔다.
속죄 의식이 급한지, 선생님은 진영의 팔을 낚아채 침대에 내던지듯 눕히고는 바로 올라탔다.
진영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막 선생님이 진영의 다리를 벌리려 할 때였다.
문이 열렸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던 일이었다. 진영보다 선생님이 먼저 반응했다.
“감히 누가 신성한 의식을 방해…….”
선생님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진영은 피 냄새를 맡았다.
“죽어, 죽어어어어!”
귀청을 찢을 듯한 고함은 그다음이었다.
선생님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운을 주워 입지도 못하고, 볼품없이 덜렁거리는 제 성기를 가릴 새도 없이, 침대 위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그렇게 도망칠 때는 진영을 신경도 쓰지 않았으면서.
“죽여 버리겠어, 죽어, 죽어어어!”
피비린내 나는 비명이 절 쫓자 뒤늦게 진영을 떠올렸다.
“마, 막아! 얼른 일어나서 날 지켜. 어서!”
주어는 없었지만, 누구에게 하는 명령인지는 분명했다.
진영은 일단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가에 김 장로가 쓰러져 있었다. 몸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아직은 살아 있었다. 선생님은 도망치고 있었고 임 권사가 피를 뒤집어쓴 채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선생님에게 달려들었다.
둘은 엎치락뒤치락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선생님이 칼을 빼앗으려 했다. 남자, 그리고 열성이라고는 하나 알파였다. 여자, 그리고 베타인 임 권사가 당해내기 힘들 텐데. 임 권사는 칼을 뺏기지 않았다. 제 손을 잡아챈 선생님의 손을 악착같이 물어뜯었다.
“악!”
선생님이 비명을 지르며 임 권사를 뿌리쳤다.
“내, 내 손! 내 손!”
선생님이 피 나는 손을 붙잡고 절규했다. 손에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손가락은 임 권사의 입 안에 있었다. 임 권사는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어 퉤, 뱉었다.
임 권사는 늘 쓰고 있던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눈이 꽤 나쁘다고 들었는데. 안경 없이도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경으로 가리지 않은 두 눈은 증오로, 분노로, 어찌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일렁였다.
“나, 날 지키란 말이다. 어서, 어서!”
선생님은 충성스러웠던 임 권사가 왜 이렇게 돌아 버렸는지,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직 제 안위만을 염려할 따름이었다.
“이 새끼야. 빨리 이리 와서 날 지키라고!”
“멈춰, 오지 마. 명령이다.”
임 권사는 두 손으로 긴 회칼을 움켜잡고 있었다. 두 눈은 여전히 선생님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진영에게 두 가지, 상반된 명령이 떨어졌다.
“야 이 새끼야. 내 말 안 들려? 내 말대로 하라고!”
선생님이 꽥꽥 소리 질렀다.
“김 장로가 죽었어. 넌 이제 내 권한이야. 내 말대로 해.”
임 권사가 차분히 말했다.
임 권사의 말대로였다. 선생님은 그 어떤 순간에도, 이런 상황에서마저 진영의 명령권자가 아니었다.
아이는 장로에게 속한다.
장로는 아이에게 명령한다.
아이는 장로를 따른다.
이것이 율법이었다. 선생님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선생님께서 직접 하늘 아버지의 음성을 들어 전달해 주신 율법대로지 않은가.
진영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김 장로는 여전히 거기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김 장로가 죽었다. 그리고 진영의 앞에 다른 장로가 있었다.
“제가 임 장로님 지파에 소속되는 건가요?”
지금의 그는 장로에게 속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허락받지 않고 말해도 되었다.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잡소리야! 내가 허락 안 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힉, 얼른 이, 이 미친년을 죽여! 죽이라고!”
선생님은 죽음에 질려 율법을 잠시 잊은 듯했다.
“그래. 맞아.”
임 권사가 선생님께 칼을 휘두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장로로서 명령하시는 건가요?”
“아아악! 이 씨발, 연놈들이!”
“그러니까 거기 가만히 있어. 너는.”
이어 임 권사가 선생님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칼이 살가죽을 찢고 몸에 박혔다. 임 권사는 이를 악물고, 있는 힘껏 칼을 비틀었다.
“어, 어억, 끄어, 억…….”
선생님이 제 배때기에 박힌 칼과 임 권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한 걸까? 꾸르르, 끄르륵. 선생님은 피 끓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비틀댔다. 하지만 임 권사는 아직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쿵. 선생님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임 권사는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곤 다시, 다시, 또다시, 다시.
푹. 푹. 푹.
칼로 몸뚱이를 난자했다. 칼이 뽑힐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선생님의 목이 힘없이 늘어졌다. 얼굴이 진영 쪽을 향했다. 감지 못한 두 눈의 동공이 커지더니 그 안의 빛이 훅 꺼지는 걸, 진영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죽음의 순간은 모두에게 공평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에게도, 광화문역 근처에서 쓰러져 죽은 사람에게도, 제 신도에게 난도질당한 신의 두 번째 아들에게도. 신의 두 번째 아들을 죽인 사람에게도.
“으아아아악!”
선생의 심장에 칼을 꽂은 임 권사가 짐승 같은 울음을 내뱉었다. 속을 모두 게워 내는 것 같은 비명이었다.
진영은 임 권사가 심장을 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오열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칼을 움켜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사람을 죽이고 수십 번 난도질한 살인자의 손처럼 보이진 않았다. 너무 가냘프고 볼품없었다. 피로 범벅되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열은, 비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임 권사는 더 울지 못했다.
임 권사의 배엔 칼에 찔린 상처가 길게 나 있었다. 어깨뼈도 뭐에 찍힌 듯 가라앉아 있었다. 진영이 처음 맡은 피 냄새의 근원이었다.
임 권사는 곧 죽는다고, 진영은 생각했다. 이런 경우 진영의 판단은 언제나 언제나 옳았다.
선생님의 몸이 쓸데없는 경련마저 멈추자, 그가 완전히 죽었다는 확신이 들자, 오직 그를 죽이겠다는 일념만으로 버텼던 여인의 몸이 허물어졌다.
“이, 리로…….”
임 권사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진영은 흘러내린 가운을 추켜올리지도 않고 타박타박, 피 웅덩이진 대리석 바닥을 걸어 임 권사 앞에 웅크렸다.
“다, 다 끝, 났어.”
임 권사의 몸이 크게 퍼덕였다.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내, 딸…… 우리, 예쁜, 죽인, 새, 끼들, 다, 내가, 내가 죽, 여 버렸어. 내 새끼, 엄마가, 엄마가, 복수……. 이제 갈, 게, 혼자, 얼마나, 얼마나…….”
진영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헐떡이며 하는 말의 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건 분명했다.
“내가, 당신의 딸을 죽였나요?”
진영은 허락받지 않고 감히 입을 열었다.
“…….”
임 권사의 눈가가 시뻘게져 있었다. 그걸 본 진영이 물었다.
“왜 날 죽이지 않나요?”
어째서 복수가 다 끝났다는 듯 후련한 표정을 짓는 걸까.
한 명 더 죽일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건 변명이 되지 않았다. 임 권사는 그저 한마디만 하면 된다. ‘죽어.’
하지만 임 권사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눈물을 흘렸다. 피가 섞여 피눈물처럼 보였다. 어쩌면 피눈물일지도 몰랐다.
왜 우는 걸까.
사람은 기쁘거나 슬플 때, 너무 무섭거나 감동받았을 때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면 임 권사는, 이제 닥칠 죽음이 무서워 우는 걸까? 죽어 땅에 묻힌 다음 최후의 날 때 심판을 받으려고 다시 일어났을 때, 하늘 아버지의 두 번째 아들이신 선생님을 죽인 죗값을 받게 될까 봐?
그런 거라면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선생님은 관심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분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선생님을 죽이려 한 임 권사의 마음을 설마 몰랐으랴. 알고도 가까이하며 임 권사가 자신을 죽이러 올 때만을 기다렸던 게 분명하다. 가룟 유다의 어깨를 밀며 이제 나를 팔러 가라고 말했던 예수처럼.
죽임당하기 직전, 감사하게도 자신을 생각해 내 급히 마지막 속죄 의식을 치르려 하셨던 거고.
하늘 아버지의 첫째 아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번민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뒤에도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러니 선생님도 닥친 죽음을 피하고자 번민했고, 칼을 피하려 잠시 험한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모두 다 선생님께서 예비한 일일 테니 무서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한낱 아이에 불과한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장로’인 임 권사가 왜 모르는 걸까.
“이제 와, 그게 무슨 의미…… 있을까.”
임 권사가 숨을 헐떡이며 손을 들었다. 진영의 마른 뺨을 쓸어 주고 싶었던 건지 손가락을 구부렸으나, 당연히 진영에게 닿지 못했다.
“나는, 아직, 네게 명령…… 내릴 수, 있어.”
“네.”
선생님을 죽인 장로에게 권한이 사라진다는 규율은 듣지 못했으니까.
“불, 쌍한 것…….”
“…….”
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행, 복해지렴. 행, 복…… 평범하, 게…… 살아…….”
“행복?”
진영이 눈을 깜빡였다.
허억. 임 권사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끝이 가까워져 왔다. 임 권사도 진영도 그걸 느꼈다.
임 권사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진영이 입은 가운 끝을 겨우 잡았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고작이었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다, 다 지웠어……그, 러니까, 아, 무도…… 너희…….”
그러나 그것마저도 오래 붙들지 못하고 놓쳤다.
“우리, 딸…… 엄마, 가, 가, 갈……게.”
임 권사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피 칠갑 된 손이 진영의 발등을 툭 치곤 나동그라졌다.
“그건 명령인가요?”
진영이 뒤늦게 물었지만 임 권사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
진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로 물든 방. 죽어 버린 세 사람.
이제 이 방에서 살아 숨 쉬는 건 진영뿐이었다.
또 장로를 잃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을 시작하기도 전에 복도에서 쿵쿵쿵, 떼 지어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멈춰. 손에 든 거 다 내려놓고 손들고. 허튼짓하지 말고!”
금세 낯선 목소리가 등 뒤에 도착했다.
진영이 기억하는 그 어떤 장로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때문에 진영은 따르지 않았다. 크게 문제 되진 않았다. 소리친 사람도, 무장하고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도 문제 삼지 않았으니까.
진영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를 향한 총구를, 총구를 들이민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기를 잃은 교주의 눈이 그런 진영을 흐리멍덩하게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