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

2월 말, 강원도에 있는 숙소는 몹시 추웠다. 두툼한 점퍼를 입었는데도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입 밖으로 허연 김이 나오는 걸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차피 밖에서 하는 활동은 없었지만, 추위가 몹시 고단하게 느껴졌다.

선배 몇 명이 체격이 유달리 큰 진우에게 다가와 박스를 나르러 가자고 말했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남자 선배가 진우의 어깨에 힘겹게 걸친 팔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여자 선배가 네일 컬러가 곱게 발린 예쁜 손으로 진우의 팔뚝을 살짝 쥔 것도 싫었다. 그들의 의도는 둘째 치고, 내 진우가 남의 손을 타는 게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고등학교에서는 이럴 일이 없었다. 우리 학교는 남고였다. 사내애들의 시선은 무서웠고, 감히 그걸 뚫고 진우에게 은근한 스킨십을 하는 배짱 좋은 놈은 없었다. 막상 닿아보면 시선 따위 느껴지지도 않는데. 그때는 타인을 이런 의미로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교문에서 기다리거나 거리에서 말을 거는 사람들이야 진우가 알아서 단호하게 잘 쳐냈으니까. 팔 한 번 잡아보기도 전에.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들은 선배 혹은 동기고, 진우는 그들과 어느 정도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 그 상황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멀어지는 진우의 등과 아직도 그의 팔뚝에서 떨어지지 않은 선배의 손을 뚫어지라 노려봤다. 옆에서 툭, 가볍게 치는 몸짓이 느껴졌다. 최민혜였다.

“오빠, 실내로 이동하래요.”

과고 조기졸업인 민혜는 동기들보다 나이가 한 살 이상 어렸다. 오티 때 빌려온 언니의 민증을 조마조마하게 내놓으면서 털어놓았었다. 붙임성이 좋아 그 이후로 살갑게 오빠, 언니 하며 잘 지내고 있다.

“응. 들어가자, 춥네.”

그리고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민혜는 귀여웠다. 체구도 작고 얼굴을 오밀조밀하게 채운 이목구비가 아주 앙증맞았다. 이미 많은 복학생과 선배들이 민혜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입맛대로 평가했을 허접스러운 리스트에 민혜는 아마 ‘쟤 정도면 내가 들이대도 괜찮을 애’ 따위의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올라가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지질한 건 아니겠지만, 나는 이런 쪽으로 촉이 좋았다. 가까워지는 몇몇 선배들을 보며 민혜의 등을 떠밀었다. 재잘대는 그 애의 말소리에 맞추어 열심히 대꾸도 했다. 별로 바람직한 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나는 나를 수줍은 얼굴로 보는 그 애에게 약간의 책임의식과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알량한 그 마음은 진우가 무거운 술 박스를 다 나르고 돌아오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진우의 곁에 누구도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아 나는 민혜를 여자 동기들 틈에 밀어 넣고 쏙 빠졌다.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진우의 옆자리를 꿰차고 은근슬쩍 주변과 거리를 벌렸다. 처음엔 애가 이렇게 장벽이 낮은 이미지는 아니었는데, 나를 만나면서 어쩐지 좀 유해졌다. 섹시한데 매너 좋고 상냥하기까지 한 남자애. 아 정말, 위험했다.

동아리 소개랑 무슨 게임을 한답시고 강당에 모두 모여 앉았다. 중학교 수련회도 아니고, 열 맞춰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줄 맨 뒷줄에 진우와 나란히 앉았다. 강당 불이 꺼지자 진우가 슬금슬금 내 뒤로 와 나를 끌어당겼다. 단단한 가슴팍에 툭, 머리가 닿았다. 아주 잠깐 주변의 시선을 생각했지만, 에라 모르겠다, 편하게 기댔다. 어두운 강당 안 저 앞쪽에서 화려한 조명이 번쩍였지만, 나는 진우의 체온, 체취, 숨소리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긴장했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사회를 맡은 어느 선배가 학과별로 가장 잘생긴 신입생을 소환했다. 앞에서부터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이쪽을 향했다. 슬그머니 허리를 곧추세웠다. 회장 선배가 뛰어와 진우를 일으켰다. 그가 감싼 진우의 손목이 아까워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진우의 등장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내 박진우는 조명도 참 잘 받았다. 사회자가 다른 과 학생들을 빨리빨리 패스하고 진우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음, 하면서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강당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조차 죽음이라며 양옆에서 다른 과 학우들이 술렁였다. 한숨을 푹 쉬었다.

“안녕하세요. 공학 3반 박진우입니다.”

근사한 목소리가 조용한 강당 안을 울렸다. 잠시 뒤, 일개 학생에게 보내는 것 치곤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몇 없는 여학우와 강당을 꽉 메운 남학우들이 목청이 터지라 소리를 질러댔다. 흔히 볼 수 없는 얼굴이긴 했다. 함께 번화가를 돌아다니다 연예 기획사의 명함을 받은 적도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반듯하면서도 관능적인 얼굴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래요, 진우학생. 진짜 잘생겼네. 원래 빨리 게임을 해야 하지만, 뜨거운 시선에 제가 이 질문은 꼭 해야 할 것 같네요. 여자 친구 있습니까?”

환호성이 울렸다. 사회자는 뿌듯하게 배를 내밀었다. 주위의 아이들이 진우의 입술에 무척 집중하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 팔을 뒤로 짚고 축 늘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었는데. 빈자리를 괜히 손바닥으로 쓸었다. 소란이 가라앉자 진우는 간단하게 답했다.

“애인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자, 그럼 다음 친구로 넘어가 봅시다.”

야유가 쏟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회자는 황급히 다음 사람에게 마이크를 옮겼다. 진우는 곧은 자세로 서서 정면을 응시했다.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에서 어두운 강당 끝이 보일 것 같진 않았지만,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몸을 일으켜 세워 다시 단정하게 앉았다. 불안해하지 말자. 다시 한번 되새겼다.

게임은 별거 아니었다. 진우는 무대 위에서 형편없는 그림 실력을 낱낱이 공개하고 돌아왔다.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아 자연스럽게 손을 찾는 몸짓에 마음이 또 사르르 녹았다. 밖에선 조심해야 한다고 항상 생각은 하는데, 불안할 때면 걱정보다 욕심이 앞서서 참을 수가 없다. 주변에 관심이 없는 진우는 내 판단에 맡긴다. 굉장히 주관적이고 즉흥적이라는 걸 알고는 있으려나 모르겠다. 슬쩍 손을 들어 진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결 좋은 머리카락에 한결 숨 쉬는 게 편안해졌다.

“칭찬해주는 거야?”

“……응. 잘했어.”

어둠 속에서 진우는 참 근사하게 웃었다.

국에서 수세미가 나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어영부영 저녁을 때우고 바로 술판이 시작되었다. 방마다 스무 명씩 동그랗게 둘러앉아선 선배들이 나눠주는 강냉이와 한 접시의 제육볶음, 한 그릇의 어묵을 받았다. 넉넉한 건 강냉이뿐이었다.

술잔은 살벌하게 돌아갔다. 이름도 기억 못 할 선배들이 번갈아가면서 방에 들어와 술 게임을 주도했다. 초반에 잔뜩 먹이기 위해서인지 의리 게임이 성행했다. 사랑하는 만큼이라 외치며 술잔을 가득 채워주는 선배의 얼굴이 몹시 악귀처럼 보였다. 몇 번 큰 문제가 생기고 많이 유해졌다고는 하지만, 끊어 마시거나 밑 잔을 깔면 바로 야유와 지적이 돌아왔다. 동기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소주병을 딴 지 30분 만에 첫 꽐라가 나왔다. 어묵탕 그릇으로 벌주를 마신 동기였다. 동기를 옮겨놓는다는 핑계로 자리를 뜰 기회도 주지 않았다. 자기 힘으로 걷지도 못하는 지훈은 선배들에게 끌려 시체 방으로 사라졌다.

술이 약한 편도 아니고, 알게 모르게 선배들이 막아주어 진우와 나는 맑은 정신으로 꽤 오래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오티 때 얼굴 평가를 주도하던 어떤 남선배의 말에 휩쓸리지 않았을 뿐인데도 선배들은 그 이후로 우리를 잘 챙겨주었다. 내 마음이 옹졸해 진우와 가까이 있을 때마다 가슴이 조여들긴 하지만, 고마운 분들이었다.

반 이상의 동기들이 시체 방으로 사라졌다. 선배들의 설명에 의하면 볼케이노를 생성하고 있어 방 안의 꼴이 딱 아비규환이라고 했다. 밤을 새우는 한이 있어도 시체 방은 가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인원이 적은 방을 합친다고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이동하는 틈을 타 진우와 슬쩍 빠져나왔다. 바깥 공기라도 좀 쐬고 싶었다. 흡연자도 아닌 우리 둘은 술자리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올 핑계가 없었다.

“와, 진짜 계속 술만 마시네.”

기지개를 쭉 켜며 진우가 말했다. 알코올 섞인 흰 입김이 몽글몽글 차가운 밤공기에 퍼져나갔다. 같이 몸을 쭉쭉 늘리며 건물 주변을 돌았다. 운동장은 방에서 너무 훤히 보였다. 흡연 구역이 비어 있어 냉큼 그 뒤쪽으로 돌아갔다. 예상대로 건물 뒤엔 아무도 없었다. 시멘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건물을 받치는 네모난 시멘트 아래로 푸슬푸슬한 흙이 경사지게 쌓여 있었다. 진우가 그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조심해. 발 미끄러질라.”

“괜찮아. 여기 평평해.”

어두워서 진우의 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얼굴만 희미한 빛을 받아 곱게 빛났다. 손을 들어 가지런한 눈썹을 죽 쓸었다. 따로 다듬지 않아도 모양대로 예쁘게 난 눈썹이 손가락에 묘한 촉감을 남겼다. 그사이 차게 식은 진우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귀 옆을 감쌌다. 천천히 가까워지는 입술을 보며 눈을 감았다.

술에 젖은 입술이 부드럽게 마찰했다. 촉촉하고 매끈한 감각이 기분 좋았다. 더 앞쪽으로 당겨 앉았다. 무릎 아래 두 다리가 경계를 벗어나 시멘트 아래로 툭 떨어졌다. 뒤꿈치로 벽을 툭툭 차며 진우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유달리 매끄럽게 느껴지는 혀를 감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도망치며 약 올리던 혀끝이 능숙하게 입안을 헤집었다. 따끈따끈하게 열 오른 살덩이가 순조롭게 몸에 불을 지폈다.

차에서 막 내렸을 땐 너무 춥다고 생각했는데,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조금 더운 것도 같았다. 진우의 목에 팔을 감았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끌어당겨 안은 진우가 나를 들어 올렸다. 시멘트에서 내려오며 진우의 몸에 다리를 감았다. 마른 편이긴 하지만, 평범한 성인 남성의 무게에 겨울옷까지 참 쉽게 버텨냈다. 등을 툭툭 쳐 바닥에 발을 내리고 섰다.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던 입술이 그제야 멀어졌다.

빛도 들지 않는 시멘트벽 아래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눈만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진우의 어깨너머로 그림처럼 펼쳐진 별이 가득한 하늘이 아름다웠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정중한 자세로 다시 진우의 얼굴이 다가왔다. 가볍게 포개고 입술을 문지르는 감촉에 푸스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등에 팔을 둘러 바짝 당겨 안았다. 그래 봐야 두툼한 외투 때문에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시작된 입맞춤은 곧 이가 부딪힐 정도로 격한 키스로 모양을 바꾸었다. 온종일 사람들 틈에서 제대로 눈도 못 맞추는 바람에 서로가 너무 부족했다. 갈급한 움직임으로 혀를 섞고 몸을 부대꼈다. 몸 사이에서 옷이 마구 일그러졌다. 달려드는 입술을 겨우 떼어내고 아까부터 입안에서 맴돌던 말을 내뱉었다.

“흐, 진우야, 할래?”

옷 너머로 등을 쓰다듬던 진우의 손이 뚝 멈췄다. 잔뜩 끌리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흩어졌다.

“너 감기 걸려.”

“하나도 안 추워. 하자. 나 3일이나 못 참겠어.”

“……뒤 돌아.”

뒤를 돌아 벽에 손을 짚었다. 진우의 손이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잡아 내렸다. 숨소리밖에 안 들리는 고요한 공간에서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참 선명하게도 들렸다. 바지와 속옷을 반쯤 끄집어 내리자 이미 서 있던 성기가 툭 쏟아져 나왔다. 단단한 진우의 손이 가볍게 기둥을 훑었다. 허벅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손이 차가워서,”

“그냥 넣어. 안쪽은 아직 기억하고 있을 거야.”

머뭇대던 진우가 재촉하는 내 말에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젤이 잔뜩 발린 콘돔이 포장지에서 빠져나오는 소리가 질척하게 귓가를 울렸다. 보이는 게 없는 대신 더 작은 것들이 들렸다.

“……들어갈게.”

“응. 읏,”

천천히, 진우의 것이 뒤를 열고 들어왔다. 내벽이 벌어지는 느낌이 선연했다. 안쪽이 열리고 잔뜩 젖은 것으로 문대지는 감촉이 황홀해서 숨이 마구 터져 나왔다. 느리게 길을 튼 물건이 내부를 꽉 채웠다.

“괜찮아?”

“응…… 움직여, 진우야.”

등 뒤에서 진우가 허리 짓을 시작했다.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맞추어 유일하게 옷 밖으로 나온 살덩이가 마구 흔들렸다. 느끼는 쪽을 꾹꾹 누르는 바람에 금세 앞이 젖었다. 뭉텅이로 쏟아지는 숨에 점차 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안쪽을 치대는 차진 소리가 탁 트인 공간을 울렸다. 바로 귓가에서 내 둔부와 진우의 골반이 철썩이며 부딪히고 있는 것 같았다. 기둥이 내벽과 마찰하는 찐득한 소리까지 들리는듯해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벗고 있는 것보다 더한 배덕감이 올라왔다. 그 기묘한 수치심이 더욱 머리에 열이 오르게 했다.

자잘한 박자로 안쪽이 치대져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데, 멀리서부터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움직임은 멈추지 않은 채로 진우의 손이 가볍게 내 입을 막았다. 귓바퀴에 쪽 하고 떨어지는 입맞춤에 허리를 떨었다. 무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겨우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흡연 구역에 자리를 잡았다. 안쪽을 꽉꽉 조이면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진우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진우의 손가락 틈으로 매캐한 담배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두툼한 귀두가 전립선을 뭉근하게 문댔다. 경련하듯 몸을 떨어대는 내 허리를 진우가 끌어안았다. 발뒤꿈치가 들렸다. 내 몸을 받치느라 입을 막을 손이 사라져 급히 옷을 끌어다 물었다. 팔로 다시 상체를 지지하기도 전에 진우의 것이 거세게 안을 파고들었다.

큰 동작으로 후벼 파듯 깊은 곳을 헤집고 인정사정없이 사방을 쳐올렸다. 내벽이 마구 밀리고 늘어나는 느낌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앞쪽에서 덜렁이는 성기는 이미 횟수를 세는 게 의미 없는 사정을 지속하고 있었다. 실금하듯 줄줄 싸댈 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입안의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요동치는 내벽이 멋대로 진우의 것을 물어댔다. 진우는 종종 내 안이 자신을 씹듯이 오물거린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던 낮은 목소리가 떠올라 단번에 끝에 다다랐다. 잔뜩 쳐 올려진 채로 흥분의 정점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나를 진우는 연이어 꿰뚫었다. 발아래 흙이 축축하게 젖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깊은 곳까지 밀어 넣은 진우가 몸을 떨었다. 천천히 빠져나가는 성기와 함께 둥둥 떠 있던 발뒤꿈치가 비로소 땅에 닿았다.

콘돔을 묶어서 잠시 내려놓은 진우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하체를 닦아줬다. 만류하는 걸 쳐내고 몸을 내려 진우의 것을 덥석 입에 물었다. 깨끗하게 쪽쪽 빨아내고 발기했기에 아예 목 너머로 넘겨 입안을 조였다. 진우의 손이 머리채를 휘감았다. 입가가 조금 붓겠지만, 어차피 신경 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정성껏 혀로 성기를 문질렀다. 입안을 꽉 채우고 혀끝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잠시 뒤, 목 안으로 쏟아지는 액체를 정신없이 삼켰다. ‘가진’ 느낌이 든다. 온종일 애매하게 나를 휘감고 괴롭히던 불안감이 그제야 완전히 발을 물렸다. 입 주변을 세심하게 핥아주는 진우의 손을 꼭 쥐었다.

“내 거지, 너.”

“다 네 거야.”

손을 마주 잡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퍽 포근했다.

* * *

대학은 좀, 이상했다.

내 기대가 너무 막연했던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그리는 대학생활이라고 해봐야, 준휘랑 손 붙잡고 벚꽃 축제 가는 거, 도서관 데이트, 학교 축제 날 솜사탕이나 사 먹는 정도긴 했지만, 어쨌든 좀 여러모로 상상한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동선, 점심시간, 공강을 고려해서 시간표를 짜고, 베팅하는 것 같은 이상한 시스템으로 수강신청을 하고, 실패한 건 빌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장터에서 구해 보고, 그래도 못 구하면 대충 다른 거로 끼워 넣고.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이공계 장학금 덕분에 실질적으로 등록금을 내진 않았지만) 원하는 수업 하나 못 듣는다는 것도 이상했고, 그렇게 어렵게 넣은 수업을 과방에서 선배의 강요로 의리 게임을 하다가 꽐라가 되어 못 들어간다는 것도 이상했다. 나나 준휘가 게임의 마지막 차례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열 가지 중에 여덟 가지는 마음에 차지 않는 이상한 대학생활이었지만, 준휘가 있어서 만점을 채운 나는 확실히 좋기는 했다. 준휘는 기숙사생이었지만, 점호가 없어 기숙사 문이 닫히기 전인 12시 전에 들어가거나, 열리는 시각인 새벽 여섯 시 이후에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기숙사로 돌아가겠다는 준휘를 내 자취방 침대에서 뒹굴도록 당기는 건 아주 행복한 일이었다. 그 예쁜 발목을 쥐고 쪽쪽 입을 맞추면 준휘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첫 강의를 들었던 날은 기억에 좀 오래 남을 것 같다. 평범한 전공기초 수업이었는데, 선배들이 이 수업만큼은 넣을 수 있다면 이 교수님 수업을 들으라며 추천해준 교수님이 계셨다. 긴 고민 끝에 우리는 꽤 많은 점수를 그 과목에 베팅했고, 수강신청에 성공했다. 우리 과에선 겨우 다섯 명뿐이었다. 70명 정원을 여러 학과가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강의 첫날에 수업하시는 교수님과 간단한 OT 진행 후 수업을 끝내주시는 교수님의 비율은 5:5 정도였다. 그 교수님은 한 시간 반 동안 OT를 빙자한 삶의 조언을 들려주셨는데,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 귀에도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는, 진솔하고 도움 되는 이야기였다. 수업 이십 분까지 더해 쉬는 시간 없이 한 시간 오십 분 동안 꽉 채운 강의를 해주셨지만, 강의실을 나서며 불평하는 학생은 없었다.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책상 밑에서 준휘와 손을 맞잡았다. 성인이라는 버거운 칭호를 갑작스럽게 달고 앞으로 제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할 우리의 인생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후회 없을 선택을 하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날씨가 풀리자 본격적으로 동아리 부스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천막 아래서 사람들이 기타를 치고, 춤을 추고, 회지를 나눠주었다. 준휘와 열심히 부스를 순회했다. 문예 창작 동아리도 좋아 보였고, 서예 동아리도, 다도회도 좋아 보였다. 준휘는 운동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함께 캘리그라피 부스에 앉아 붓펜을 들고 체험을 해보았다. 글씨를 쓰기 위해 집중한다는 게 잘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신중하게 획을 긋는 준휘가 보기 좋아 열심히 설명을 듣는 척했다. 나는 어디든 준휘가 선택하는 곳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지 마.”

준휘는 그런 나를 말렸다. 나 좋아하는 걸 하라고 했다. 왜 굳이? 너랑 같이하는 게 제일 좋은데. 그런 내 말을 막무가내 취급하고는 은근히 수영 동아리나 수상스키 동호회 같은 걸 권유했다.

“아니면 뮤지컬 동아리는 어때? 너 목소리 정말 좋은데.”

“나 노래 못 해.”

“음악 실기 A 받았잖아. 우리 반에서 A 받은 사람 너 하나였는데.”

“왜 그래, 준휘야?”

자꾸 나를 밀어내는 게 답답했다. 나는 이준휘에 비하면 너무도 섬세하지 못한 인간이라, 어디서 뭐가 어긋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양팔을 쥐고. 하지만 준휘가 원한다면 뿌리칠 수 있을 정도의 세기로만. 준휘는 잠깐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수업 끝나고 네 방으로 갈게. 그때 얘기해.”

하필이면 딱 하나 겹치지 않는 수업을 앞둔 날이었다.

자취방에서 초조하게 손끝을 씹으며 기다렸다. 더럽지도 않은 창틀을 물티슈로 닦고, 청소기도 두 번이나 돌렸다. 청소기 소리가 요란하게 귓가를 때려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빨래까지 돌리려고 하는 참에 준휘가 도착했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신발을 벗는 애를 급하게 방 안으로 들였다. 미리 빼놓은 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 앉았다. 무릎으로 몸을 지탱하고 열심히 얼굴을 훑었다. 내 둔한 머리로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단서가 있기를 바라면서. 준휘는 슬쩍 눈을 피했다.

“아까는 왜 그랬어?”

“……심술부려서 미안해.”

“괜찮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답했다. 정말 괜찮은 건 아니었지만, 괜찮았다. 어쩐지 울컥한 기색으로 입술을 잘근거리던 준휘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나직하게 귓가로 쏟아지는 소리가 살짝 젖은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진우야, 나 요즘 자꾸 나쁜 생각해.”

“……무슨 생각?”

“박진우. 너 진짜 잘생겼어. 그거 알아?”

뜬금없는 말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잘생겼어? 내가? 그러면 안 되지만 조금은 기분이 좋았다. 이준휘 눈에 내가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얘기니까. 준휘가 나를 좋게 보고 있다는 걸 몰랐다면 나는 정말 멍청이인 거겠지만, 짐작하고 있는 거랑 직접 듣는 건 또 달랐다. 철딱서니 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렸다.

“그냥, 자꾸 불안해. 너 뺏길까 봐. 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봐. 내가 가졌던 게 거짓말이나 꿈이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다 끝나버릴까 봐.”

그건 좀,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이었다.

“준휘야, 나 너 정말 많이 좋아해.”

“알아. 네가 나한테 못해서가 아니야. 그냥 불안해. 너는 너무 매력적이고, 나랑 이렇게 묶여 있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 같고, 나는 너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고. 왜 이러지 진짜, 미친 것 같아 요즘.”

준휘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손을 들어 부드럽게 목 뒤를 감쌌다. 차게 식은 피부가 내 손 안에서 서서히 데워졌다. 긴장한 목 근육을 쓸며 입을 열었다.

“이준휘. 내가 몇 년 후의 미래까지 그리는 줄 알아?”

“어?”

“그래, 그린다고 다 이뤄지는 건 아니지. 미래는 알 수 없어. 철없는 스무 살짜리가 낙관적인 꿈을 짜놨다고 해놔도 할 말은 없어. 그래도 나, 너랑 보내는 하루에 열흘을 더 쌓으면서 살아. 우리 지금 2년 만났지. 나 너랑 보내는 미래 20년까지 생각해봤어. 하루하루씩,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아놨어. 그거 하나씩 진짜 하루로 채울 기대로 살아. 2년 동안 세상에서 그게 제일 재밌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너는 어때?”

“나는,”

“아직 생각 안 해봤으면, 지금부터 해줘. 우리 환갑 기념으로 어디 놀러 갈지, 그것부터 생각해 보든가. 먼 미래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는 거, 좋은 습관 아니라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몰라. 근데 나는 그게 좋다, 준휘야. 너랑 보내는 지금도 좋고, 함께한 어제도 좋고, 우리 같이 있을 거라고 믿는 미래도 좋아. 그냥 내 인생을 너로 꽉꽉 채워서 생각해보는 게 나는 너무 좋아.”

“진우야.”

“네가 뭐 때문에 불안해하는지, 미안해. 나는 모르겠어. 근데 안 그러면 좋겠어. 너도 그냥 나처럼 조금만 멍청해지면 안 될까? 내 고희연은 마카오에서 열어줘. 그런 실없는 생각 해주면 안 돼?”

준휘의 손끝이 내 뺨을 스쳐서 알았다.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준휘가 크게 내게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절박하게 구는 내가 볼썽사납다는 생각은 했지만, 쪽팔리진 않았다. 이준휘가 내게서 멀어지는 게 더 싫었다. 그게 나 때문이라면, 나를 용서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았고. 글썽이던 눈물을 뚝 떨구며 준휘는 말했다.

“왜 하필 마카오야…….”

웃는 듯 우는 듯한 얼굴을 보며 나도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몰라. 그냥 갑자기 생각났어…….”

“고희연은 또 뭔데…….”

“그때까지 나랑 살자. 지금은 그러겠다고 해주면 안 돼?”

“응, 그럴게. 그럴게, 진우야.”

찝찔한 입술을 부비면서 한참을 질질 짰던 것 같다.

다 울고는 둘 다 민망해서 우선 세수를 한 번 하고, 맥주 한 캔을 홀짝이며 영화를 봤다. 가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준휘의 손이 무척 상냥했다.

결국, 우리는 아무 동아리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신입생일 때 좀 더 환영받긴 하겠지만, 영영 들 수 없는 것도 아니니 좀 더 둘만의 시간을 보낸 후에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딱히 한가하지도 않았다. 미친 공대는 3학점짜리 강의가 주 4시간씩 강의를 해댔고, 실험 시간은 또 따로 있었다. 매주 리포트에 과제에 정신없는 와중에 시험도 중간, 기말이 아닌 3차, 4차로 나뉘어 한 주에 한 번씩 시험을 보는 꼴이 됐다. 말로만 듣던 공대 생활이 소화하기 벅찬 현실이 되어 몰아쳤다.

수업이 끝나면 그런대로 먹을 만한 학식을 적당히 먹고 커피 한 잔을 든 채 바로 도서관에 들어왔다. 가끔 밥을 너무 많이 먹은 날이면 산책을 좀 하기도 했다. 도서관에 마주 보고 앉아 800페이지짜리 하드커버 전공 서적을 열심히 뒤적이며 과제를 했다. 어려운 문제는 준휘와 내가 함께 머리를 싸매도 한 시간 넘게 걸리기도 했다. 한 번은 둘 다 처음에 길을 잘못 들어 문제 하나를 붙들고 세 시간을 씨름했는데, 뇌가 아주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과열된 머리에서 스팀이 올라올 지경이라 같이 벌떡 일어나 바깥바람을 쐬고 들어왔었다. 대학 생활은 참, 만만치 않았다.

1차 고사와 함께 여의도 벚꽃 축제가 돌아왔다. 시험 범위부터 예상 난이도까지 헬이었지만, 고등학생 때 참 소중하게도 품고 있던 로망을 놓칠 순 없었다. 준휘와 나는 무리하게 하루를 빼냈다. 자체휴강은 덤이었다.

평일 낮인데도 거리는 붐볐다. 며칠 전에 받은 따끈따끈한 야구잠바는 디자인이 영 예쁘지 않아 포기했다. 색도 다르고, 하나는 후드에 하나는 맨투맨이지만 나름대로 커플템이라고 장만한 윗옷을 입었다. 연청바지에 레몬색 후드를 입은 준휘는 아주 귀여웠다. 손잡고 싶은데, 준휘가 고개를 저어 순순히 포기했다. 대신 같은 방향을 보며 걸었다. 사람이 많아 독사진은 어려웠지만, 유달리 풍성한 나무를 보면 사진도 꼭 찍었다. 날씨도 맑고 벚꽃도 흐드러지게 피었고, 행복했다.

“저거 먹을까, 우리.”

준휘의 손끝에 보송보송한 솜사탕이 있었다. 헤프게 웃으며 솜사탕을 사 들었다. 분홍색 솜사탕이 아주 예뻤다. 놀러 나왔다는 게 실감 났다.

솜사탕 막대를 쥔 내 손가락에 준휘의 손이 슬그머니 감겨왔다. 흘긋 바라보니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렸다. 솜사탕을 핑계로 손을 잡고 한참을 걸었다. 벚꽃이 흩날리지 않은 빈 하늘조차 분홍빛으로 보였다. 얽힌 손을 가려주는 솜사탕은 벚꽃길이 끝나고 다시 돌아오는 걸음이 끝날 때까지 줄지 않았다.

버스정거장에서 아쉬운 손길로 솜사탕을 해체했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서로가 찍어준 사진으로 프로필 사진을 바꾸었다.

“커플 프로필 사진.”

실없는 내 소리에도 준휘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참 밝게도 웃는 얼굴 뒤로 흩날리는 벚꽃잎이 퍽 예뻤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더 많은 나날이지만, 좋구나, 하고 생각했다.

축제가 다가왔다. 고등학생 때는 축제라고 해봐야 강당에서 공연이나 좀 보고, 몇몇 동아리에서 부스를 준비하는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대학 축제는 스케일이 확연히 달랐다. 며칠 내내 학교에서 음악 소리가 끊이질 않고, 거대한 미끄럼틀과 어린 시절에나 그 위에서 뛰어 봤던 트램펄린이 등장했다. 별 기업체들이 다 몰려와 돌림판을 설치하고 복불복 게임을 주최했다. 축젯날에 비하면 이전의 대학은 사람만 많았다뿐이지 아주 정적이었던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규모와 화려함이 고등학교 동아리 부스는 비할 바도 못 되었다.

공대답게 우리 과에선 주점을 준비했다. 낮에는 준비한답시고 테이블과 간이 의자를 세팅하는 정도밖에 할 일이 없었다. 미리 계획했던 여행과 일정이 겹쳐 일일 주점에 참여하지 않았던 준휘와 나는 꼼짝없이 과 주점에 붙잡혔다. 주점 컨셉을 듣는 순간, 여행을 취소해서라도 일일 주점에 참여해야 했다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우리 과 주점 컨셉은 여장이었다.

어차피 낮부터 봉지 칵테일을 홀짝이던 사람들이 모여 해가 진 밤에는 이미 준 꽐라들이 들어오는 게 과 주점인데, 대체 뭐라고 컨셉을 정하고 그걸 또 그리 열심히 준비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몇 번의 축제를 겪은 뒤에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지만, 당시 신입생이었던 우리는 얌전히 선배의 말을 따랐다. 집에서 흰 셔츠를 가져오고, 속이 비치는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몸에 착 붙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적지 않은 대여료를 대체 왜 감수했는지 모를 가발도 쓰고 검은색 바니 귀도 달았다. 화장하는 동기들은 기꺼이 자신의 파우치를 들고 준휘와 내 얼굴에 달라붙었다. 방치된 다른 서버들은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비비를 발랐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거려 슬쩍 준휘 옆에 붙었다. 내 등치로 조금이라도 가려지길 바라면서.

이준휘는 존나 예뻤다. 아무것도 안 찍어 발라도 예쁜 애를 하얗게 분칠하고 발갛게 칠해놓으니 보송보송하고 촉촉하고, 사람을 쓰레기로 만들었다. 철 좀 들자고 자기 전에 백 번씩 외운 세월이 1년이 훨씬 넘었는데, 그 누적된 노력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딱히 여장해서가 아니라, 내가 못 봤던 이준휘라서. 박꽃처럼 하얗고 보송보송한 준휘의 뺨이 우아한 분내를 풍기며 갓 쪄낸 찐빵처럼 소담스레 빛나는 것이 영 구미를 당겼고, 조그만 입술이 빨간 옷을 입고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게 아래쪽을 뿌듯하게 당겼다. 그렇게 입으면 안 된다고 욕을 잔뜩 들으면서도 치마에서 셔츠를 빼냈다. 한 장에 오천 원도 안 되는 치마는 실루엣을 가려주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생각 같아선 준휘의 몸매마저 고스란히 드러내는 치마 자체를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본인이 나름대로 열심히 참여하는데 안 좋은 내색을 하는 것도 철없는 짓인 것 같아 꾹 참았다. 나는 어른스러워지고 싶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준휘에게 상처를 주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 쉽지는 않았다.

주점을 오픈하자마자 준휘와 나는 나란히 궁둥이를 차여 쫓겨났다. 커다란 피켓과 함께. 날이 아직 밝아서 조금 슬펐다. 홍보를 핑계로 준휘의 손을 꾹 잡았다. 그사이 발갛게 네일 컬러까지 발린 준휘가 곱게 내 손등을 감쌌다. 광고판 따위 길거리에 버려두고 인적 드문 곳으로 가 키스라도 하고 싶었지만, 축젯날 교내에 인적 드문 곳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얌전히 길을 걸었다. 온몸으로 광고하며.

“진우야.”

“응?”

“나 스타킹 올 나간 것 같은데…….”

진심으로 이성이 위험했다. 대답하기 전에 침을 몇 번 삼켰는지 모른다. 나오기 전, 얌전히 치마에 넣었던 셔츠를 다시 끄집어내고 빠른 걸음으로 주점에 복귀했다. 왜 벌써 오느냐고 인상을 구기던 동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투명 매니큐어를 건넸다. 준휘 대신 덥석 그걸 받아들고 화장실로 이끌었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스타킹에 매니큐어를 칠해놓고 화장 지워진다고, 안된다고 말리는 통에 입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고 맞대고 손으로 비벼 한 번 갔다. 분홍빛 볼 터치 위에 홍조가 더해진 애를 내보내고 혼자 한 번 더 뺐다. 주점 끝날 때까지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어색하게 머리 위에 눌러앉은 가발도, 걸을 때마다 팔랑이는 토끼 귀도 그냥, 이준휘라서 다 너무 예뻤다. 예쁘고 꼴렸다.

서빙하며 시간을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모른다. 그런다고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 어째선지 손님이 몰려들어 자꾸 찾아대는 통에 주머니에 손 한 번 넣기도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확인했다. 몇 시쯤이나 됐는지,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 내일도 주점이 있어 오늘은 뒤풀이도 따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로선 그나마 다행이었다.

인원수로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공대라서 인력이 넘쳐남에도 선배들은 준휘와 나를 쉬이 보내주지 않았다. 보다 못한 고학번 선배가 나서주어 밤 11시를 넘긴 시각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에게 깊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주점을 나섰다. 불 앞에 있던 게 아니라 음식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몸이 꿉꿉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5분 컷인 내 자취방으로 향했다.

손을 잡혀 끌려오면서도 준휘는 묵묵히 보조를 맞췄다.

문이 닫히자마자 입술부터 맞댔다. 센서가 신통치 않은 현관 등이 잠깐 켜졌다가 꺼지는 바람에 시야가 온통 캄캄했다. 그래도 준휘의 입술을 찾아가는 데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뭘 먹지도 못했는데 수정 화장만 여러 차례 받아 새빨개졌던 입술을 기억하며 입술을 포갰다. 평소완 달리 끈적하게 맞붙었다. 유리알 같은 광택을 자랑하는 제품은 실제로는 몹시 끈적거렸다. 인공적인 단맛을 감내하고 혀를 내었다. 질척하게 혀가 섞였다. 뒷덜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걸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정신없이 손을 펼쳐 땀이 살짝 밴 셔츠를 더듬었다. 준휘가 움찔 허리를 뒤틀었다. 그래도 두 팔은 얌전히 내 목을 감았다. 입안의 혀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기꺼이 혀를 얽고 입안을 더듬었다.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섞여들었다. 약간 습기가 있는 셔츠가 손 안에 달라붙는 느낌마저 사랑스러웠다.

겨우 입술을 떼고 한참을 숨을 골랐다. 머리가 어찔할 정도로 흥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숨이 찼다. 치마 안의 성기는 이미 잔뜩 발기하여 누군가 볼 수 있다면 퍽 우스운 꼴이라 비웃었으리라. 그런 거야 아무 상관없었다. 내 허벅지 위 준휘의 성기도 빳빳하게 서 있었으니까. 이준휘도 나처럼 흥분해서 한참이나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있으니까. 시발, 그게 또 죽을 만큼 좋았다. 준휘랑은 달리 덩치도 산만하고 외양도 좀 더 테스토스테론이 확 느껴지는 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한데, 그런 나를 두고도 준휘가 흥분하고 있다는 게, 못내 좋았다. 보송한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끈적끈적한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쪽, 쪽, 가볍게.

“씻어야, 하는데…….”

목에서 어깨를 타고 내려와 얌전히 내 허리에 감은 팔을 내릴 생각도 하지 않으며 말을 줄이는 준휘가 너무 좋았다. 대뜸 눈썹에, 뺨에, 반짝이는 것이 발린 눈두덩이에 입술을 찍었다. 화장품이 어떤 꼴로 섞이고 있을지, 어두워서 알 수 없었다. 화장이 좀 무너지긴 했지만, 곱게 칠해놓은 얼굴이 망가지든 말든 뺨을 부비고 입술을 부딪쳤다. 준휘가 나서서 내 입술을 쪽 빨았다. 허락으로 알고 급히 치마를 걷어 올렸다. 준휘의 손이 내가 입은 치마의 지퍼를 찾았다.

준휘의 치마가 허리께로 말려 올라감과 동시에 내 치마의 지퍼가 죽 내려갔다. 준휘의 손끝이 내 치마를 쥐고 내렸다. 서빙을 하다 스타킹을 수습할 수도 없게끔 완전히 찢어먹어 맨살에 준휘의 손이 바로 닿았다. 눈을 감고도 선명하게 그 모양을 그릴 수 있는 고운 손이 능숙하게 속옷을 내리고 성기를 쥐었다.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금 물러서는 내 몸짓에 현관 등이 다시 들어왔다.

“아,”

잔뜩 흐트러진 얼굴로 준휘가 나를 올려다봤다. 허리까지 죽 밀려 올라간 치마, 허벅지까지 가늘게 올이 나간 스타킹, 그 안으로 비치는 맨 살갗. 구깃구깃한 셔츠와 흐트러진 화장까지. 자극이 과해서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가슴을 크게 들썩였다. 그래도 숨이 답답했다. 머리를 쓸어 올리다 어중간하게 걸치고 있던 가발이 걸려 떨어졌다. 아직 쓰고 있는 줄도 몰랐던 머리띠와 함께. 준휘도 그 모습을 보고 떠올린 듯 머리로 손을 올렸다. 그 손을 잡아 막았다.

“왜…….”

“예뻐. 그냥 하고 있으면 안 돼?”

“……안 될 건 없지만, 부끄러운데…….”

“그냥 하고 있어, 준휘야. 예쁘다.”

“……화장 다 망가졌지.”

“그래도 예뻐.”

“……너는 그런 차림으로 그런 말을 해도 왜 야하지.”

“콩깍지 아닐까.”

평생 벗기지 말아줘. 다음 말은 한숨처럼 준휘의 입술로 내려앉았다. 얌전히 입술을 벌리고 다시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현관에서 신발도 못 벗은 채 나는 속옷까지 반쯤 내리고, 준휘는 치마를 허리에 걸친 채로 하는 키스는 그럼에도 퍽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혀끝에 닿는 감촉이 그랬다.

성기를 쥐고 흔들던 준휘의 손을 치우고 내 손을 내려 준휘의 스타킹을 쥐었다. 매니큐어로 막아놓은 구멍에 손가락을 걸고 죽 찢어버렸다. 탄성 있는 섬유가 주르륵 풀리고 끊기는 소리가 자극적으로 귀에 와 박혔다. 절로 숨이 거칠어져 다시 또 몇 번째인지 모를 심호흡을 해야 했다. 속옷과 함께 죽 내려버리면 되는 걸, 굳이 찢어서 없애느라 준휘의 살이 안쪽에서 마구 당겼다. 손에 슬쩍슬쩍 닿는 성기가 심상치 않았다.

“준휘야, 느껴?”

“읏,”

“스타킹 찢는 게 좋은 거야?”

준휘가 말 대신 작은 숨을 내쉬며 내 어깨에 이마를 부볐다. 머리 위에 얌전히 얹힌 토끼 귀가 살랑살랑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허벅지 윗부분이 다 찢겨 드러난 속옷을 끄집어 내렸다. 속옷이 자유롭게 반쯤 스타킹에 감싸인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스타킹 조각만 걸친 하체를 부러 센서 등을 켜 확인했다. 젖어 반짝이는 성기와 자극에 발갛게 자국이 남은 하얀 허벅지를. 몸을 숙여 허벅지를 어깨에 얹게 하고 죽 밀어 올리며 일어섰다. 벽에 기댄 준휘가 딸려 올려오며 급히 내 어깨를 짚었다.

“잠깐,”

“힘들어?”

“이건, 힘들어. 불안해.”

“싫어, 준휘야?”

“아…….”

“싫어?”

“읏, 아니…….”

실없이 웃자 준휘가 의아한 눈을 했다.

“우리 언젠가부터 입장이 조금 바뀐 것 같다. 그렇지 않아?”

“어?”

“……해줄까?”

“……박진우.”

“응.”

뭐라고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는 걸 다시 입술을 맞붙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힘으로 벽에 납작 붙여놓은 채로 등 뒤의 선반을 더듬어 콘돔을 찾아내고 어렵게 씌웠다. 현관에서 불이 붙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아예 신발장 옆에 가져다 놨다. 이 좁은 방 안에 들어가 침대에 오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신발도 못 벗고 현관 앞에서 그렇게 해댔다. 술의 도움도 약간 있었다. 오늘은 완전히 말짱한 정신이었지만.

콘돔을 하나 더 까서 손가락을 끼웠다. 씻지도 않은 손으로 안쪽을 헤집기엔 오늘 우리는 둘 다 좀 지저분했으니까. 콘돔에 묻은 젤을 열심히 준휘의 안쪽에 펴 발랐다. 불안정하게 허공에 매달린 준휘가 아래를 꽉 조이며 몸을 떨었다. 불편할 걸 알면서도 멈추진 않았다. 둘 중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라는 걸 알아서. 운동한 보람이 있게도, 벽에 지탱해 준휘를 들어 올리고 있는 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안쪽을 넓히고 적신 채 쓸모를 잃은 콘돔을 대충 집어 던지고 준휘의 몸을 단단히 받쳤다. 성기 끝을 구멍에 맞추고 조금씩 팔에 힘을 풀어 준휘의 몸을 내렸다. 빠듯하게 힘이 들어간 내벽이 천천히 성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준휘가 의식적으로 심호흡하며 몸에 힘을 빼는 게 느껴졌다. 그 숨소리마저 사랑스러워 땀에 젖은 머리카락 위로 입술을 붙였다.

“으응…….”

간신히 몸 안에 다 받아들인 준휘가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다리를 미끄러지지 않게 어깨로 잘 받치고 엉덩이를 힘주어 움켜쥔 채 몸을 움직였다. 벽에 밀려 내게 눌리면서도 준휘는 착실하게 앞을 적시며 느꼈다. 셔츠 너머로 복부에 문질러지는 준휘의 성기가 젖어 있어서 좋았다. 이미 더러워진 흰 셔츠가 조금씩 젖어 들었다.

꽉 조이는 안쪽을 비집어 열고 자신을 문지르는 건 기묘한 느낌이다. 이미 욕정에 눈이 먼 감각마저 현실로 불러오는 선연함. 쾌락으로 이성이 일그러지면서도 현실을 놓을 수 없는 뚜렷함이 거기에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이 풀리면 허공에 들린 준휘가 위험하기에 땀을 뻘뻘 흘리며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답답한 느낌이 좋은지 준휘가 연신 내 목을 쓸고 뺨을 감쌌다. 깜박이는 센서 등 아래서 한참을 느리고 힘들게 움직였다. 고요한 어둠 속에 흩어지는 유일한 소리. 우리가 내쉬는 숨소리와 낮은 신음이 마음을 충만하게 했다.

안쪽을 꽉 조이며 사정한 준휘가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자고 해서, 얌전히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대충 뒤축을 눌러 밟아 신발을 벗은 나와는 달리 내게 들려서 방에 들어온 준휘의 발엔 아직도 스타킹 반절과 함께 신발이 신겨 있었다. 그걸 벗겨 현관으로 던졌다. 넓지 않은 방이라 목표 지점을 비켜 갈 확률은 높지 않았다.

땀에 젖고 먼지가 붙은 몸으로 한 번 더 뒹굴었다. 나름대로 침대의 청결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힘을 쓴 탓에 노곤한 몸을 일으켜 준휘를 좁은 욕실로 보내고 손만 겨우 씻은 채 시트를 갈았다. 자취방 욕실은 도저히 둘이 함께 들어갈 수 없었다. 그게 좀 아쉬웠다. 침대에서 뒹구는 사이 이리저리 날아간 가발과 머리띠를 주워 한쪽에 챙겨 두었다. 다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반납은 해야 했으니. 그나마 내일은 주점에서 해방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몇 시간 동안 개새끼처럼 끙끙 앓는 건 좀, 견디기 쉽지 않았다.

전공 2차 고사와 교양 중간이 제멋대로 섞인 중간고사 기간이 끝났다. 학교는 같은 등록금을 받고 어떻게든 수업을 적게 하려고 시험 후 한 주를 강제로 휴강했다. 준휘와 나는 캠퍼스 저 안쪽에 있는 경영대에서의 교양기초 시험을 마치고 좀비처럼 걸어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도서관에서 밤을 새워 꼬질꼬질한 몸을 씻을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뻗어 10시간을 내리 잤다.

배가 고파 일어났을 땐 이미 한밤중이었다. 야식을 주문하고 교대로 씻고 나오니 피자가 도착했다. 추가 토핑을 잔뜩 올린 피자를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비타민제를 삼시 세끼 챙겨 먹고 식사를 거르지 않으려 노력했어도, 중간고사 동안 몸이 상한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내일은 좀 제대로 된 밥 먹자.”

“응.”

따라놓은 콜라를 마저 마시며 준휘가 대답했다. 푹 잤음에도 눈이 푹 꺼져 있었다. 눈에 띄게 볼살이 내린 얼굴이 안쓰러웠다. 수능이란 대장정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영양사 선생님과 부모님의 서포트가 있어서 괜찮았던 건가. 우리 둘 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밥도 잘 챙겨 먹고, 당이나 커피에 의존하지 않으려 노력했음에도.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일으켜 다시 욕실에 들어가 사이좋게 양치했다. 별로 크지도 않은 거울 안에 둘 다 들어가도록 딱 붙어 서서. 자연스럽게 욕실에 자리한 준휘의 칫솔, 옷장 한 칸 가득 들어있는 준휘의 옷과 속옷, 준휘가 기숙사에서 쓰는 것과 같은 섬유 유연제. 그런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침대에 찰싹 붙어 누워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다가 문득 준휘가 말했다. 내 배 위에 납작 엎드려 누워서,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이 축 늘어져서는.

“……할까?”

이벤트 가로 1,500원에 결제한 영화는 노트북 팬을 윙 소리가 나게 돌리며 열심히 내용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 말에 내 눈은 또 비현실적으로 준휘만을 잡아냈다. 주변은 블러질이라도 한 것처럼 희미하게 사라지고, 포커스가 맞는 곳은 이준휘밖에 없다는 듯이. 위에 얹힌 따끈따끈한 몸의 상태를 걱정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몸에 열이 올랐다.

“괜찮겠어?”

“시험도 끝났고, 잔뜩 하고 내일은 종일 잠이나 잤으면 좋겠는데…… 힘들어?”

“힘들 리가.”

몸을 빙글 돌리며 준휘의 입술을 찾았다. 그 애의 등이 침대에 온전히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조차 기다리기 아까워서. 달싹이는 입술을 열고 혀를 넣어 내가 쓰는 치약 향이 가득한 입안을 훑었다. 입병이 나 헐어버린 아랫입술 안쪽에 혀가 닿자 준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움츠렸다. 혀끝에 힘을 빼고 살살 쓸어주었다. 침이 약일 리는 없었지만, 사랑하는 이의 상처를 핥아주고 싶은 건 짐승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어제 싫다는 걸 억지로 바르고 자게 했던 연고를 떠올리다가 문득 생각났다. 시험 일정이 나오기 전, 자취방으로 도착했던 택배가.

“준휘야.”

“으응?”

촉촉하게 젖은 입술로 그새 가빠진 숨을 내쉬며 준휘가 답했다. 길게 끄는 음성이 사랑스러웠다. 피곤함에 젖어 잘 뜨이지 않는 눈도. 잠을 몰아 자고 일어나 푸슬푸슬한 뺨을 쓸며 물었다.

“전에 주문한 거, 써볼래?”

잠깐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준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눌린 입술을 손끝으로 톡 쳐서 빼내며 다시 몸을 숙였다. 맵기만 한 치약 향이 달큰하게 혀에 감겼다. 다디단 혀끝을 한참을 쪽쪽 거린 후에야 몸을 일으켜 물건을 찾으러 갈 수 있었다. 시뻘게진 얼굴로 준휘가 직접 고른 그것을.

서랍에서 잘그락거리는 것을 꺼내 알코올로 소독한 뒤, 조심스럽게 끝을 쥐고 다시 침대로 향했다. 한쪽에 잘 올려두고 준휘의 몸을 쓸었다. 충분히 흥분해야 이게 주는 아픔까지 쾌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뜨겁게 열 오른 손으로 허리를 쓸다가 헐렁한 티를 걷어냈다. 형광등 불빛 아래 훤히 드러난 유두를 엄지로 꾹 누르자 준휘가 다시 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뒤틀었다. 골반에 느슨하게 걸친 운동복을 속옷과 함께 쥐고 죽 끄집어 내렸다. 준휘가 다리를 움직여 옷을 벗기는 것을 도왔다.

딱 이준휘 얼굴만큼 예쁘장하고 단정하게 생긴 성기는 이미 끝이 젖어 끄덕이고 있었다. 손 안에 기분 좋게 들어차는 물건을 쥐고 슥슥 쓸었다. 허리를 숙여 혓바닥으로 끝을 사악 핥고 입안에 삼키자 하얀 허벅지에 근육의 선이 드러났다. 한 손으로는 밑동을 쥐고, 남는 손으로는 긴장한 허벅지를 쓸며 성기를 쭉 빨아들였다. 느긋하게 단계를 밟아가기엔 준휘의 눈이 이미 반쯤 감겨 있었다. 빨리 불태우고 쉬게 하려는 걸 알았는지, 준휘가 스스로 가슴팍을 쓸고 손끝으로 유두를 쥐었다. 가슴으로 자위하는 이준휘는 좀, 설명할 수 없는 욕정을 불러일으킨다. 이성의 정 반대에 있을 것이 분명한 어떤 것을. 다급하게 입안을 조였다. 이젠 익숙한 모양의 성기를 열심히 혀로 덧그리면서. 입술을 조이며 혀끝을 세워 귀두 아래쪽을 꼼꼼히 쓸었다. 한동안 자극받지 못한 성기는 금세 진한 정액을 토해냈다. 혀에 얽히는 것을 억지로 삼켜내고 서랍에서 꺼내온 젤 뚜껑을 열었다.

“흐, 젤 쓰게?”

“응. 나중에 내가 닦을게.”

“읏, 으응…….”

준휘의 골반을 들어 올리고 훤히 드러난 곳에 젤을 꾹 짜냈다. 찌그러진 튜브를 침대 밑으로 던져버리고 손가락을 힘주어 밀어 넣었다. 오랜만의 침입에 다소 놀란 듯 경직했던 구멍이 곧 익숙하게 풀어지며 손가락을 끌어당겼다. 안쪽을 꾹꾹 눌러 넓히며 하나씩 개수를 늘렸다. 하나도 빠듯했던 곳이 오물거리며 세 개의 손가락을 한 번에 씹어댔다. 골반과 함께 두 다리가 허공에 들린 채로 준휘는 색색 숨을 내쉬었다. 크게 숨을 쉬어 아래쪽에 힘을 뺄 때마다 구멍이 빠끔 열리며 더 굵은 것을 원한다는 듯 움찔거렸다. 성기에 비하면 깊이 들어가지도 않는 손가락을 빼내고 새 콘돔 비닐을 찢었다.

“그거…… 뭐야?”

오돌토돌한 돌기가 잔뜩 돋아난 콘돔을 입은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씌우면서 만져보니 돌기가 제법 단단하고 존재감이 있었다.

“사은품. 안 내키면 원래 쓰던 거로 바꿀게. 어떻게 할까?”

“……그냥 해.”

준휘가 스스로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다시 좁게 다물린 구멍에 끝을 맞추고 천천히 밀어 넣었다. 콘돔에 돋아난 돌기가 내벽의 민감한 부분을 긁을 때마다 준휘가 흠칫 몸을 떨었다. 꽃이 피듯 저절로 벌어지는 입술을 가만히 보다가 끝까지 삽입하고 혀를 넣었다. 몸 사이에 끼인 다리를 넓게 벌려 내리누르며 벌써 힘이 다 풀린 입안을 핥았다. 내벽이 움찔움찔 성기를 조였다.

“아, 하으,”

“좋아, 준휘야?”

“이상해…….”

준휘의 눈가로 작은 눈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몸을 지탱한 팔을 하나 들어 손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준휘가 가볍게 훌쩍였다. 들썩이는 몸에 내벽이 힘을 풀었다가 다시 꽉 조여들었다.

“어디가 이상해?”

“모르겠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뇌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거의 속삭이듯 전해진 마지막 말을 들으며 허리를 뒤로 죽 잡아 뺐다. 우둘투둘한 돌기가 여린 내벽과 구멍을 긁으며 나와 준휘가 마구 신음을 내질렀다.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진 몰랐는데, 가뜩이나 민감해진 몸에 익숙지 않은 자극이 더해지니 참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옆방이 오늘 비었길 바라며 다시 단번에 안쪽을 파고들었다.

“아흐, 흣, 아, 좋아,”

얕은 지점은 무시하고 가장 느끼는 안쪽 저 깊은 곳만 집중적으로 자극하니 허리를 들썩이며 금세 끝에 다다랐다. 목 너머로 삼킨 것보다 묽은 정액을 토해내고 성기는 곧 다시 힘을 받아 일어섰다. 허공에 흔들리는 것을 집요하게 보며 가늠하다가 깊숙이 성기를 밀어 넣은 채로 멈추어 미리 소독해놓은 금속 막대를 집어 들었다.

“하, 으읏,”

“넣을게, 준휘야?”

“읏, 으응…….”

“움직이면 위험하니까, 얌전히 있어.”

미끈하게 쭉 빠져 끝부분이 둥글게 마감된 막대를 요도 끝에 맞추고 힘주어 밀어 넣었다. 해면체가 잔뜩 부풀어 좁아진 틈을 비집고 막대가 조금씩 요도를 파고들었다. 준휘의 엉덩이와 복근에 딱딱하게 힘이 들어가고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으나, 성기에 깊이 꿰인 몸은 다행히 원래 위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 아으, 아파, 아프, 으응…….”

고통에 내벽이 마구 조여들어 눈앞이 아찔했다.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삐끗할까 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도록 집중했다. 마침내 막대가 끝까지 들어가고, 둥근 고리 모양에 금속 참이 달린 손잡이만 준휘의 성기 끝에 장식처럼 남았다. 매끈하게 마감이 된 참이 말랑한 귀두를 제멋대로 때렸다. 준휘가 우는 소리를 내며 몸을 틀었다.

“어때?”

“아파, 이상해, 읏,”

“움직일게.”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준휘의 성기를 가볍게 움켜쥔 채로 몸을 움직였다. 성기를 살짝 빼냈다가 안쪽을 자잘하게 쳐올렸다.

“아, 아으,”

준휘가 내 팔에 손을 얹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아 두 팔은 곧 시트 위로 떨어졌다. 준휘에게로 몸을 숙이며 두 팔을 한 손으로 끌어모아 머리 위로 끄집어 올려 침대에 내리눌렀다. 허벅지와 엉덩이, 하복부가 마구 마찰하도록 몸을 흔들면서 고리에 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아, 싫어!”

“정말 싫어?”

“아니, 으응, 그치만,”

“조심할게. 너 이거 해보고 싶었잖아.”

고리를 슬쩍 잡아당겼다. 막대 끝 조금 더 도톰하고 둥근 부분이 관을 넓히며 빠져나오고 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흐아-”

잔뜩 힘이 들어간 몸을 바들바들 떨며 준휘가 울었다. 조금 끄집어냈던 막대를 다시 꾹 눌러 넣자 저도 모르게 움찔 허리를 흔들었다. 성기에 금속 막대가 꽂힌 채로 쾌감을 쫓아 엉덩이를 돌리는 몸짓이 내 몸에 피를 팽팽 돌게 했다. 어지러울 정도로 흥분감이 밀려왔다. 안쪽을 퍽퍽 세게 때리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준휘의 것에 꽂힌 고리를 움직였다. 격한 움직임 탓에 다소 거칠게 요도가 긁히면서도 준휘는 한껏 만족스러운 신음을 뽑아냈다. 적극적으로 허리를 흔들며 내 걸 제 안에 품고 즐겼다. 자유로워진 두 팔로 내 등 뒤를 힘주어 잡고 몸을 끌어당겼다. 순순히 몸을 겹친 채로 안쪽을 들쑤셨다. 요도가 막혀 가지 못하고 몇 번이고 다다르며 내벽을 꽉 조였다. 쥐어짜는 움직임에 사정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둘 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한 번 만에 최대한 짜내고 깔끔하게 방전되어야 했다.

몇 번 더 간신히 사정을 참아낸 끝에 준휘가 스스로 고리를 잡으며 애원했다. 이제 그만 빼달라고, 더는 못 견디겠다고. 그 손에 고리를 걸어주고 내벽을 거칠게 마찰하자 머뭇거리던 손끝이 단번에 막대를 뽑아냈다. 흩뿌려지는 묽은 액을 보며 참았던 감각을 내려놓았다. 둘이서 몸을 겹친 채로 한참을 숨을 골라야 했다.

“나, 죽었나…….”

알 수 없는 말을 몇 번 중얼거리던 준휘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한 번에 끝낸 적이 별로 없어 습관처럼 다시 발기하려는 성기를 애써 가라앉히며 쇳덩이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일으켰다.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와 준휘의 몸을 닦고, 대충 내 몸도 문질러 닦은 다음 바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삼십 분쯤 기절한 것처럼 잔 후에야 일어나 방 불을 끌 수 있었다.

준휘의 룸메이트가 기숙사를 나갔다.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나간 건 아니고, 여자친구와 동거를 하겠다며 짐을 싸 들고 나갔단다. 눈에 띄지 않게 배낭에 조금씩. 준휘와 나는 그 애가 나간다는 선언을 처음 했을 때부터 모든 짐이 빠지는 날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백팩을 고쳐 메고 문고리를 쥐었다. 지나가는 기숙사생들이 나를 유심히 보는 것만 같아 속으로 그럴 리 없다고 중얼거리며 애써 긴장을 풀었다. 이런 건 처음이다. 내가 존나 못해서 준휘가 실망하면 어쩌지. 방음이 너무 심각하게 안 돼서 걸리면? 준휘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나진 않을까. 걱정거리가 가득했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었다. 마디가 하얘지도록 손에 힘을 주어 문고리를 돌렸다.

가벼운 나무문은 적은 힘에도 활짝 열렸다. 캐리어에서 어색하게 짐을 꺼내고 있던 준휘가 이쪽을 돌아봤다. 보송보송한 흰색 상의에 편한 반바지를 입은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급히 방문을 닫았다. 나만을 위해 준비한 모습인데, 누가 볼 새라.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이어진 인사에 괜히 볼캡의 챙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준휘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어느 학과 몇 학번 누구고, 현역이라 나이는 스무 살이라고.

“어, 저도 같은 과인데, 박진우입니다. 저도 스무 살이에요.”

“아, 그래요? 말 놓을까……요?”

“어…… 그래, 말 놓자.”

백팩을 침대에 내려놓자 준휘가 다시 주섬주섬 캐리어에서 옷가지를 꺼냈다. 침대에 대충 걸터앉은 채로 짐 푸는 걸 보며 말을 걸었다. 과에 아는 사람 있는지, 수시인지 정시인지, 오티 누구랑 가는지. 괜찮다면, 같이 가자고. 귀 끝이 분홍빛으로 살짝 물든 준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바쁘게 하고 있을 생각이 짐작되어 소리 나지 않게 조금 웃었다.

준휘가 떨리는 손끝으로 옷 뭉치를 집어 들었다. 들고 일어서는 순간, 툭. 투명하지만 굴곡이 예사롭지 않은 딜도가 옷 사이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굴렀다. 그대로 숨조차 멈추고 정지한 준휘와 티를 안 내려고 이를 악물고 있지만 죽도록 긴장한 나. 침묵이 흘렀다.

스윽,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엄청 크게 느껴졌다. 방음이 형편없어 복도에서 나는 소리까지 요란하게 울리는 와중에 내 귀엔 내가 내는 아주 작은 소음과 이미 살짝 거칠어진 준휘의 호흡만 들렸다. 가까이 다가서자 준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스치듯 허리를 숙여 딜도를 주웠다.

“……뭐야?”

“아, 그, 여자친구가, 장난을…….”

“여자친구?”

거짓말이란 걸 알면서도 준휘의 입에서 여자친구란 말이 나오자 머리에 열이 확 올랐다. 이준휘가, 여자친구. 여자친구라고.

“그, 이리 줘.”

손을 뻗는 걸 피해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당황한 낯으로 까치발을 들고 내게 바싹 붙어오는 몸에서 익숙한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아주 약간, 뒤틀렸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 옷에서 나는 것과 같은 냄새. 까치발을 든 발을 감싼 양말은 내 것. 이건 상황극이고, 준휘의 말은 대사일 뿐이다. 딜도를 도로 가져가겠다고 휘청거리다 넘어질라, 한쪽 팔을 등 뒤에 살짝 받치고 상황에 맞는 말을 다시 찾았다.

“정말 여자친구 거 맞아?”

“마, 맞아. 아니면 내가 그걸 어디에 쓰는데.”

등줄기에 살짝 닿은 손가락을 걷는 듯 내려 엉덩이골을 스윽 훑었다.

“글쎄, 여기에?”

“흣,”

정말 부끄러운 듯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 상황극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키스하고 싶은 걸 참느라 이를 꽉 물어야 했다. 들었던 발뒤꿈치를 내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준휘가 작게 중얼거렸다.

“장난치지 말고, 돌려줘.”

“……이준휘. 내가 이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곤란하지 않아?”

드러났던 가련한 뒷목이 빠르게 사라지고 시야에 다시 준휘의 얼굴이 들어찼다. 매끄럽고 단정한 얼굴. 내가 사랑하는. 간절하게 내 상의 앞자락을 쥔 채로 준휘가 물었다.

“말할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높이 들었던 팔을 서서히 내리면서 준휘의 등을 감쌌다. 안고 싶은 걸 참을 수 없어 실수인 척 힘주어 끌어안았다가 침대 쪽으로 툭 밀쳤다. 썩 좋지 않은 매트리스가 다소 거칠게 준휘의 몸을 받아냈다. 삐걱대는 소리가 야했다.

“뭐하게…….”

정말로 겁먹은 목소리. 기분이 이상했다. 혼자 생각했다면 몹시 자책했겠지만, 함께 만들어낸 그림이란 걸 떠올리니 준휘의 무서워하는 표정까지도 나를 부추겼다. 준휘가 원해서 만든 상황. 겁먹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바지 밑에서 확연히 부푼 성기.

매끈한 딜도 끝을 밀려 올라간 바지 아래 훤히 드러난 준휘의 허벅지에 꾹 누르며 준휘의 위에 올라탔다.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불량한 표정을 짓자 준휘가 노골적으로 나를 바라봤다. 핥는 듯한 시선으로.

“쓰는 거 보여줘.”

“……싫어.”

말끝이 살짝 떨렸다. 우리 둘 다 그게 두려움이나 수치심이 아니라 흥분 때문이라는 걸 알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상황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낮게 속삭였다. 내 목소리를 좋아하는 준휘가 충분히 흥분할 수 있도록.

“그럼 내가 해 줄게.”

“싫, 흣,”

상의를 어중간하게 머리 위로 올려 팔을 빼지 못하게 하고 입안에 딜도를 밀어 넣었다. 좁은 입이 단단한 것을 가득 머금었다. 기둥이 투명해 촉촉하고 붉은 입안이 고스란히 보였다. 말캉한 혀가 표면에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붉은색이 짙어졌다가 흐려졌다. 혀가 눌려 막힌 듯 나오는 신음이 묵직하게 귀를 울렸다.

“잘 빨아서 적셔야 안 다친다?”

목 안쪽을 자극당해 눈꼬리가 잔뜩 젖은 채로 준휘가 조심스럽게 기구를 머금었다. 입을 넓게 벌리고 혀로 둥근 표면을 문지르는 걸 꼼꼼히 지켜봤다. 밝은 조명 아래 훤히 드러난 작은 유두를 손끝으로 희롱하자 몸 아래 깔린 준휘의 허리가 뒤틀렸다. 작게 솟은 것을 손끝으로 쥐고 비비듯 문질렀다.

“자위할 때 젖꼭지도 만지나 봐?”

“읏, 으응…….”

반박하려 벌어진 입에 딜도를 더 깊숙이 넣었다. 미끈미끈한 딜도는 목 안쪽을 부드럽게 스치고 나와 혓바닥에 문질러졌다. 준휘의 입술이 힘주어 그것을 빨았다. 젖꼭지를 세게 문지르고 힘이 잔뜩 들어간 복부를 슬슬 쓸었다. 손이 스칠 때마다 준휘가 민감하게 몸을 굳혔다. 일부러 웃음기를 잔뜩 섞어 말했다. 비웃듯이.

“좋아? 야, 너 오늘 나랑 처음 만났어. 근데도 만져지면서,”

허리를 깔고 앉아 있던 엉덩이를 뒤로 죽 밀었다. 발기한 준휘의 것이 턱 걸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살짝 몸을 띄웠다가 성기 위로 체중을 실어 앉았다. 준휘의 다리가 매트리스를 마구 찼다.

“좆을 세우냐.”

“흣, 으응, 읏,”

딜도의 방향을 바꾸어 볼 안쪽을 마구 찌르다가 쑥 잡아 뺐다. 맑은 타액의 실이 딸려 나오다 곧 끊어졌다. 잔뜩 젖은 입술에 퍽 사실적으로 표현된 기구의 귀두 부분을 문지르다가 붉게 달아오른 뺨을 쿡쿡 찔렀다.

“무슨 생각으로 기숙사에 이런 걸 가져온 거야, 너?”

“내가, 가져온 게, 아니,”

“아, 아직도 그렇게 우길 거야? 그래, 뭐. 더 해봐.”

벨트를 풀어 옷이 휘감긴 손목을 죄어 침대 헤드에 고정했다. 사흘 동안 연습한 터라 단번에 성공할 수 있었다. 준휘가 마음 놓고 팔을 흔들었다. 이젠 정말 풀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손이 떨려서 쉽진 않았지만, 볼을 찰싹 때리고 입안에 손가락을 쑤셔 넣어 움직임을 멈췄다. 이미 벨트가 빠져나간 바지 단추를 한 손으로 끄르며 말했다.

“빨아. 잘하면 여기서 끝내줄게.”

손가락을 깨물 것처럼 입을 다무는 준휘의 턱을 단단히 움켜쥐고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겁박했다.

“구멍에 꽂고 동영상이라도 찍어서 올려줘?”

준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눈만 들어 나를 올려다보며 숨을 고르는 애 입술에 잔뜩 발기한 성기 끝을 문지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입 벌려. 천천히 입술이 벌어졌다. 그 안에 단번에 내 것을 쑤셔 넣었다. 일부러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목 안쪽의 점막과 여린입천장이 사정없이 긁힌다는 걸 알면서 허리를 세게 흔들고 성기를 문 입술에 손가락을 넣어 더 벌렸다. 벌어진 바지 천에 쓸린 준휘의 뺨이 붉어졌다. 머리채를 잡고 괴로워할 때까지 성기를 밀어 넣었다. 상체가 뒤틀릴 때 몸을 물려 숨을 넣어주고 곧바로 다시 목을 차지하고 들쑤셨다. 소란스러운 방 밖의 소리와는 괴리된 억눌린 신음이 방 안을 울렸다. 잔뜩 습하고 묵직하게.

“걸신들렸나 봐. 좆이 그렇게 빨고 싶었어?”

“읏, 윽,”

정성껏 입안을 조이고 성기를 빠는 움직임을 가지고 비아냥댔다. 보이진 않지만, 등 뒤에서 준휘의 얇은 면바지가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을 아프게 당기는 손짓에 입안의 성기를 빠는 힘이 더해졌다. 손목은 묶이고 눈은 잔뜩 풀린 채로 내 걸 물고 있는 준휘의 모습은 위험했지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나를 원한다는 걸 아니까.

숨이 막혀 힘이 들어가 좁아진 목 안쪽에 그대로 사정했다. 반사적으로 꿀렁이는 목을 타고 정액이 뽑혀 내려가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잔뜩 지친 입술에서 성기를 잡아 빼자 준휘가 혀를 넓게 펼쳐 귀두를 핥았다.

“왜, 더 빨고 싶어?”

그제야 상황이 기억난 듯 잔뜩 수치스러운 낯을 했다. 피식 웃으며 몸을 내렸다. 준휘의 몸에서 내려와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젖어서 얼룩진 바지춤을 힘주어 잡자 준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바지까지 젖었어, 너. 빨면서 사정이라도 한 거야? 장난 아니네.”

“놔, 놔줘. 하지 마.”

“뭘 하지 마. 내 손에서 좋아서 꿈틀대면서. 아픈 게 좋아?”

“아냐.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아니야? 낮게 내리깐 목소리에 드러난 피부가 또 붉게 화르르 타올랐다. 아 진짜, 귀엽게. 성기에서 손을 떼고 양 유두를 꽉 쥐었다.

“아읏,”

“시끄러워. 가슴 좀 만진다고 그러면 어떡하냐? 옆방에 다 들려.”

“하, 하지, 아윽, 아, 아아,”

그대로 힘주어 비틀면서 끌어올리자 준휘가 가슴을 위로 띄웠다. 그런다고 고통이 줄지는 않겠지만, 등에 힘을 주어 최선을 다해 손을 따라오는 몸짓이 애처로웠다. 더 세게 비틀며 위로 당겼다. 아무리 등을 휘어도 고통이 줄어들지 않도록. 준휘가 몸을 떨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한쪽 유두를 먼저 놓자 몸을 크게 흔들었다. 작살에 꿰이기라도 한 것처럼. 방심한 사이 나머지 한쪽도 놔 버렸다. 한껏 떠올랐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떨어졌다.

“아으, 아으으…….”

가슴이 아픈지 몸을 막 비틀었다. 모르는 척 자극에 부푼 유두를 손끝으로 튕겼다. 딱밤이라도 때리듯이 제대로 힘을 줘 유두를 때리자 눈물을 흘리며 몸을 꼬았다. 바지의 얼룩이 점점 더 진해졌다. 빨갛게 물든 유두를 세게 꼬집고 손톱을 세워 꾹꾹 누르다가 다시 손끝으로 마구 튕겼다. 히끅대는 신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거친 숨이 새어 나오는 입에 손가락을 물렸다가 젖은 손을 꺼내어 또 유두를 마구 마찰했다. 허벅지가 자꾸 좁혀지려 했으나, 사이에 내가 있어 내 몸을 조이다가 힘없이 풀렸다. 팔만 좀 길게 뻗으면 닿는 책상에서 금속으로 된 집게를 집어 들었다. 내 몸에 실험해 봤을 때, 이건 정말 아팠다. 준휘는 좋아했지만.

“존나 야해, 너.”

벌어진 입술을 슬쩍 핥으며 유두에 집게를 물렸다. 준휘의 비명이 내 안으로 먹혀들었다. 아까부터 탐하고 싶었던 입안에 혀를 묻어 소리를 막았다. 바르작대는 혀를 마구 빨고 문질렀다. 입술이 살짝 떨어질 때마다 준휘가 가슴을 들썩이며 헐떡였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이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집게를 하나 더 물렸다.

“아으, 흐읏,”

눈물로 젖은 얼굴은 이미 이성을 잃고 잔뜩 풀려 있었다. 손끝으로 집게를 툭툭 쳤다. 준휘의 몸이 움찔움찔 튀었다. 한쪽 집게를 벌렸다가 다시 유두를 집었을 때, 준휘는 얼굴을 다 적시며 울었다. 내가 그만두지 못하도록 다리로 열심히 허리를 감아오는 몸짓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젖은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겨냈다. 축축하게 젖은 성기가 반들거렸다. 기둥을 꽉 쥐고 귀두를 아프게 퉁겼다. 넓게 벌어진 허벅지가 바르작댔다. 손바닥으로 매서운 소리가 나도록 쳐서 흰 피부 아래 금세 붉은 빛이 올라왔다. 준휘가 실컷 물고 빨았던 딜도를 들어 구멍에 가져다 댔다. 빠끔 열리도록 힘주어 밀어붙이자 준휘가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아, 안 돼.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싫어…….”

“왜? 이러려고 가져온 거 아냐?”

“아, 아니야. 내 거 아냐. 이제 그만해…….”

“……여자친구 거라고.”

“흣, 그게,”

“좆만 좀 물려줘도 질질 싸면서 무슨 소리야. 자꾸 거짓말하면 재미없어, 준휘야.”

힘주어 조금 더 밀어 넣자 준휘가 미리 풀어뒀을 구멍이 퍽 수월하게 성기 모양 딜도의 귀두를 삼켰다.

“아아, 맞아. 내가 쓰려고 샀어. 근데 아직, 아직. 싫어…….”

손끝을 세워 가짜 귀두를 머금은 구멍 주위를 덧그리며 물었다.

“아직 여기에 넣어본 적 없어?”

“읏, 응. 하지 마. 제발.”

거짓으로 가득 찬 상황에 이 말 만큼은 진짜였다. 준휘는 뒤에 이 딜도를 넣어본 적이 없다. 대신 내 성기라든가, 다른 건 많이 먹어본 구멍이지만.

“이미 들어갔는데? 너무 해대서 뒤가 늘어난 거 아냐?”

“읏, 아니야……. 제발, 빼줘. 괴로워.”

“싫어, 이준휘.”

그대로 손에 힘을 주어 딜도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준휘가 미리 촉촉하게 풀어놓긴 했지만, 젤도 아니고 타액으로 한 겹 싸인 정도로는 침입이 쉽지 않았다. 들러붙는 내벽을 무시하며 쭉 밀어 넣었다. 구멍이 다급하게 기구를 물어왔다.

“아, 아아,”

“다 들어갔어. 잘 먹네.”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이는 걸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진정될 때까지.

“적응됐어? 스위치 올린다?”

“아, 아니, 아흐, 으응…….”

역시 거부의 말은 무시하고 스위치를 쭉 올렸다. ‘진짜’ 거부의 말은 사전에 정해놨고, 준휘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웅웅 울리는 진동 소리와 함께 굵은 기둥이 준휘의 안에서 마구 돌아가기 시작했다. 투명한 기구의 움직임에 내벽이 이리저리 짓이겨졌다. 준휘가 연신 헐떡였다. 소리로조차 나오지 않는 신음이 방을 조용히 울렸다. 진동을 약하게 내려놓고 기구를 죽 잡아 뺐다.

“하으, 읏,”

구멍에 간신히 걸친 딜도가 빙글빙글 돌았다. 자잘하게 전해지는 진동이 자극적인지 준휘가 허리를 마구 뒤틀었다.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세게 안쪽을 쑤셨다. 빠르고 깊게.

“아힉, 힉, 흣, 아아, 하읏,”

높은 소리가 마구 튀어 나가기에 한 손을 들어 입을 막아버렸다. 코는 막지 않았음에도 숨이 가쁜지 준휘의 상체가 꽉 조여들었다. 무시하고 딜도를 세게 쳐올렸다. 성기가 줄줄 사정할 때까지. 여운에 젖어 바들바들 떨리는 애 뒤를 쉬지 않고 쑤셔 기어이 겨우 멈춘 눈물을 다시 흘리게 했다. 연달아 가버린 뒤에야 준휘의 입술은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전히 약하게 진동하는 기구를 뒤에 꽂은 채로 준휘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입에 손가락을 물리고 딜도를 깊이 밀어 넣었다. 빠져나오지 못하게 구멍 앞에 내 몸을 바짝 붙이고 진동 세기를 확 올렸다. 휴대전화 진동 소리보다도 큰 소음이 준휘의 내벽을 때리며 울려 펴졌다. 벌어진 준휘의 입에 그대로 입 맞췄다. 찐득한 신음이 내 목으로 넘어갔다. 준휘가 몸을 떨었다. 묶인 팔을 마구 비틀기에 입술을 살짝 떼자 다급하게 외쳤다.

“넣어, 넣어줘. 네 걸로 쑤셔줘. 이건, 그만,”

뭔가 그럴듯한 말을 해서 준휘를 희롱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마음이 급해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다시 준휘의 입안에 혀를 밀어 넣으며 바지를 내리고 기구를 쭉 뽑아냈다. 스스로 젖은 구멍에 내 걸 그냥 밀어 넣었다. 갑자기 사라진 딜도에 빠끔대던 구멍이 아직 넓혀져 있는 내벽으로 성기를 쭉쭉 빨아들였다. 내부를 차지한 다른 모양의 부피감에 내벽이 부지런히 이동했다. 약간 어긋난 느낌이 사라지자마자 광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퍽퍽 살벌한 소리가 방을 울리고, 서로의 입에 막혀 밖으로 나오지 못한 신음이 목 안에서 울렸다.

유두를 차지한 집게를 떼어 던져 버리고 새빨갛게 물든 애처로운 돌기를 입안에 쏙 넣고 살살 핥았다. 준휘가 묶인 제 팔을 당겨 입에 물었다. 벨트를 풀고 애매하게 걸린 상의도 벗겨내자 다급하게 팔을 뻗어 내 등을 감쌌다. 준휘의 골반을 높이 들어 올리고 내리찍듯 박아 넣었다. 침대를 더듬던 준휘의 손이 옷자락을 쥐고 입에 밀어 넣었다. 스스로 옷을 물어 신음을 죽인 채 다시 내 목에 팔을 둘렀다. 내가 찍어 누르는 박자에 맞추어 안쪽을 꽉 조였다.

“내가, 매일, 박아줄게.”

준휘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바쁘게 내벽을 조이고 엉덩이를 흔드는 몸짓이 몹시 색정적이었다. 준휘의 입에서 옷자락을 빼내며 물었다.

“나를, 기다렸지?”

“읏, 응, 기다, 기다렸어. 아, 좋아,”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기대했지?”

“읏, 응,”

“뭘 기대했어?”

“네가, 흣, 넣어줬으면, 좋겠다고, 으응, 앗, 아아, 아프게, 하으, 아프, 아, 좋아, 죽을 것,”

내 걸 품고 있는 복부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내 거야. 그렇지?”

“읏, 응, 마음, 마음대로, 하으, 더, 세게,”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준휘가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로, 평소에는 하지 않던 말을. 죽을 만큼 부끄러웠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안에 싸 줄게. 잔뜩.”

“좋아, 너무, 좋아, 물들여줘.”

준휘가 등을 꽉 끌어안았다. 제일 깊은 곳까지 삽입하고 참았던 것을 토해냈다. 다소 빠듯하던 내벽이 조금씩 젖어 들었다. 빼리라 생각했는지, 준휘가 다리에 힘을 주어 내 몸을 당겼다. 얌전히 준휘의 안에 몸을 묻고 기다렸다. 다시 힘을 받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샤워실이 공용이라 미리 준비한 물수건만으로 처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르기 전에는 끝내보자고 생각하며 준휘를 다시 끌어안았다. 갑자기 상체가 들려 휘청거리다 내 몸 위에 안착하는 걸 확인하고 골반을 쥐었다. 얼굴부터 허리 아래까지 푹 젖은 준휘가 능숙하게 허리를 돌렸다. 내 손을 안 탄 이준휘가 할 수 있는 행위는 아니었지만, 준휘가 하는 일에 오답이 있을 리가. 둥근 엉덩이와 고관절을 쓸며 다시 준휘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복층 원룸에 긴장이 감돌았다. 둘이 살기에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을 가득 메운 답답한 기운이 도무지 속 시원하게 숨을 쉬지 못하게 해서 준휘와 나는 숨까지 참은 채 모니터를 노려봤다. 마우스에 올린 준휘의 단정한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내 손으로 덮고 다독이고 싶었지만, 함부로 손댈 상황이 아니라 닿을 듯 말 듯 떨어진 채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과제 많고 시험도 많고, 일정 빡세기로 유명한 공대에서 아득바득 보낸 4년의 결과물이 이 화면 너머에 있었다. 취업이 대학의 목적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취업률을 바탕으로 집요하게 대학을 평가하는 마당에 공대 졸업예정자가 최종면접 결과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랩과 이야기까지 마친 나와는 달리 준휘는 졸업하면 정말로 학교를 떠나 사회로 나간다. 첫발을 디딜 곳이 어디가 되느냐가 클릭 한 번을 남겨두고 공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대에서 학점 4.0 이상에 오픽 AL, 자격증도 여럿인 데다 논리적으로 말도 곧잘 하는 준휘는 이미 세 개의 기업에 최종 합격했다. 마지막으로 합격 발표를 하는 곳이 준휘가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이었을 뿐이다. 매끈한 손끝이 조심스럽게 마우스의 왼쪽 버튼을 클릭했다. 접속자가 몰려 흰 화면에 서서히 내용이 뜨는 걸 둘이서 숨죽이고 지켜봤다.

“아,”

짧은 감탄과 함께 입을 벌린 준휘가 잠시 뒤 허리를 틀어 나를 끌어안았다. 화면 가득 합격 축하 멘트와 함께 신입사원 교육에 대한 안내 문구가 떠 있었다. 가슴팍에 준휘의 숨이 흩어졌다.

“됐다…….”

“응. 고생했어.”

둥근 뒤통수를 천천히 쓸었다.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취업 준비는 피 말리는 과정이었다. 실업률이 매해 기록을 경신해 자교 대학원마저 사람을 깐깐하게 거르는 요즘은 더욱이. 가만가만 한참을 품 안의 준휘를 다독이며 서 있었다.

축하 파티를 위해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고 치킨을 주문했다. 그럴듯하게 음식이라도 차려 먹으면 좋겠지만, 기다리던 소식을 듣고 맥이 풀린 준휘와 실험실에 메여 있는 내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부모님들이 가끔 채워주시는 냉장고 안 반찬 통에서 반찬을 꺼내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벅찰 게 분명했다. 그냥 익숙한 번호를 눌러 늘 먹던 치킨을 주문했다. 맥주 약간과 함께.

맥주잔에 반지가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가 작게 울렸다. 한 번은 내가 잃어버리고, 한 번은 준휘가 잃어버려 세 번째로 맞춘 커플링이었다. 똑같은 반지를 둘 다 하고 다닐 순 없고, 준휘는 내가 반지를 끼고 다녀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는 준휘가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니 어쩔 수 없이 조금 다른 디자인으로 골라야 했다. 반지 안쪽에 각인한 같은 문구가 씁쓸한 마음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처음엔 같은 디자인으로 맞췄다가 목에 걸고 다니던 내가 잃어버렸고, 두 번째 커플링은 준휘가 군부대에서 분실했다. 가뜩이나 고생이 많아 해쓱한 얼굴에 어두운 표정을 가득 띄운 게 속상해서 면회 가서 조금 울었었다. 내가 곁에 있다고 딱히 도움이 될 것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같이 가야 했다고 후회했다. 일찌감치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던 나는 준휘와 함께 입대하지 못했다. 결국, 몇 개월 차이로 가게 될 거면서, 함께 갔어야 했다고 꽤 오래 후회했다. 준휘가 제가 우겨서 미룬 건데, 자길 탓할 생각 아니라면 이제 마음에서 좀 버리라고 할 때까지. 이준휘의 말은 언제나 진리에 가깝다.

“촛불도 불어?”

“파티인데, 불자.”

하얀 생크림 케이크에 초를 콕콕 꽂아 불을 붙이고 방 불을 껐다. 희미한 불빛 너머로 보이는 준휘의 말끔한 얼굴이 아름다웠다. 코끝이 찡할 정도로. 실수로 촛불을 끄지 않게 조심하며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불렀다. 어색하게 개사한 축하 노래에 준휘가 맑게 웃었다. 동그랗게 모인 입술에서 바람이 훅 빠져나왔다. 어두워진 방 안을 더듬어 입술부터 한 번 포갰다. 자연스레 목 뒤에 팔을 두른 준휘가 짧지 않은 입맞춤에 기꺼이 응했다.

타액으로 흠뻑 젖은 입술을 떼고 어둠을 핑계로 마음속에 있던 말들을 하나씩 꺼냈다. 군대 2년을 제외한 대학생활 내내 우리는 늘 함께였다. 제대 후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거의 매일 붙어 있었다. 불편함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하루하루가 충만한 날들이었다. 준휘로 가득 찬 하루. 완벽하게 채워진 우리의 공간. 그걸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나는 서럽고 두려웠다.

“너 입사하면, 한동안 보기 어렵겠지.”

“교육 기간에는, 응…….”

품 안의 몸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하면 준휘가 어디 가지 못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합격 발표가 났을 뿐, 교육이 시작되는 건 한 달 뒤인데도 나는 당장 불안한 마음을 어쩔 줄을 몰랐다.

“……교육 끝나면 다시 이리로 올 거야?”

“어디로 배치받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올 수 있을 거야. 오고 싶어.”

“이준휘. 내가 너 정말 많이 사랑해.”

“알아. 나도 그래, 진우야.”

준휘의 손이 가만가만 내 등을 두드렸다. 한 달 반이라는 짧은 시간이라고는 해도, 준휘가 떠난 집에서 나는 어떻게 살지. 실험을 끝내고 새벽에 귀가해도 작은 등이 켜져 있던 따뜻한 방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씻게끔 만드는 침대 위 준휘도.

“진우야. 우리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싸운 거 기억해?”

“……그건 싸운 거 아냐.”

“응, 그럼 그냥 내가 너 서운하게 했던 거.”

“내가 잘못한 거야.”

“그래. 그랬다고 하자. 그때 네가 했던 말 나는 아직도 하루에 한 번씩 떠올려봐.”

준휘의 손이 다정하게 내 등을 쓸고 목 뒤를 감쌌다. 따뜻한 손이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며 귓가를 문질렀다.

“우리는 삶에서 아주 긴 시간을 함께할 거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당장 하루에서 함께 할 시간이 조금 줄어들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 나는 이제 너를 믿는 만큼 나도 믿어. 너는 어때?”

“나도 그래.”

“진우야, 나도 되게 속상해. 네가 없는 하루 같은 거, 생각도 하기 싫어. 이미 내 삶에서 너는 너무 커져 버려서, 사라지면 그 빈자리가 너무 눈에 잘 들어올 테니까. 그건 분명 내 마음을 아주 아프게 할 거야. 하지만 짧지 않을 우리의 삶에서, 서로의 곁을 차지하기로 우리는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나는, 우리가,”

“괜찮을 거라고 믿어.”

눈물로 흐려지는 말을 대신 마무리했다. 변화는 아무리 겪어도 쉬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도 변화가 찾아올 것이란 예측은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래도, 우리 두 사람의 삶 전체를 보면, 그러면.

“괜찮아.”

울먹이던 나보다 더 서럽게 우는 젖은 눈가에 입술을 눌러 붙였다. 똑같이 불안하고 똑같이 두렵다. 매일 믿음을 꺼내봐야 할 것이다. 바래지 않도록,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빛을 내고 있도록. 함께하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걸 아니까, 이제 믿음으로 그 ‘함께’를 지켜나가야 한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몸의 떨림이 멈출 때까지. 눈물이 다 잦아들 때까지.

함께 맞는 두 번째 졸업식이 돌아왔다. 준휘는 한참 신입사원 연수를 받다가 외출을 받고 빠져나왔다. 들어간 지 겨우 열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부쩍 야위어 있었다. 속상해서 얼굴을 곱게 펼 수 없었다. 내가 미리 받아놓은 졸업가운을 걸친 준휘는 어두운색 때문인지 더 피곤해 보였다.

“밥은 잘 먹는 거야?”

“전화로 계속 확인해놓고 만나서 또 묻기야? 잘 먹는다니까.”

“얼굴이 너무 상했으니까 그러지.”

“잠을 좀 못 자서 그래. 그룹 연수라 그렇지, 계열사 연수는 이렇게까지 안 빡세대. 걱정하지 마.”

“……노력할게.”

다행히 날이 맑았다. 식을 볼 필요는 없어서, 사진을 찍고 학교를 좀 돌아다니다가 가운을 반납하고 두 가족이 모여 중국집으로 향했다. 졸업식 후엔 자장면이라는 묘한 공식을 떠올리면서. 준휘와 내가 몇 년을 붙어 있다가 결국엔 같이 살기까지 해서, 부모님들도 나름 가까워지셨다. 가끔 함께 식사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만. 번갈아가며 반찬을 보내주실 수 있을 만큼.

대기업에 떡하니 취직한 준휘를 향한 칭찬이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상을 가득 메웠다. 내 일인 양 흐뭇해하며 앉아있으니 오히려 준휘가 눈치를 봤다. 내가 들어간 랩의 경쟁률이 얼마나 높은지를 아는 사람은 준휘 뿐이고, 애초에 칭찬에 인색한 준휘의 부모님은 입을 무겁게 하고 앉아 계셨다. 어머니는 준휘네 부모님의 그런 태도가 가끔 자존심이 상하시는 모양이었지만,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표정을 푸셨다. 나는, 오렌지 슬라이스가 얹힌 찹쌀 탕수육을 티 나지 않게 준휘의 접시에 꾹꾹 눌러 쌓고 있었고.

부모님은 식사만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오후에 다시 돌아가야 하는 준휘를 데려다주기 위해 어머니의 차를 빌렸다. 용인의 한적한 마을에 있는 연수원은 교통편이 좋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 카페에 들러 준휘가 먹고 싶었다던 신메뉴를 주문했다. 진동벨 위에 손가락을 하나씩 겹쳐놓고 지문을 맞대고 문지르는 게 행복했다. 손끝에 좁게 닿은 온기와 나를 바라보는 연인의 다정한 눈빛. 시곗바늘에 매달려 시간이 가는 걸 늦출 수 있다면, 손바닥이 다 베여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연수원까지 가는 길은 너무 짧았다. 열흘 만에 보는데 입 한 번 맞춰보지 못하고 보내야 한다는 게 퍽 서러웠다. 휴게소나 건물 화장실, 어디서든 기회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입술 좀 맞대고 끝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참기로. 졸업식에 다녀온 사람이 입술이 다 헤지고 눈가가 짓무를 이유가 없었으니까. 새벽 세 시에 잠들어 여섯 시에 일어나는 게 당연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준휘를 무리시킬 수도 없었다.

“갈게.”

“밥 잘 챙겨 먹어.”

“밤마다 야식도 먹고 있거든.”

“너무 성실하게 수업 듣지 말고, 좀 졸기도 하고 그래.”

“알았어. 너도, 실험실에서 쪼그리고 자지 말고 집에 가서 자.”

“응.”

서로 지키지 못할 약속만 했다. 나는 준휘가 졸린 눈을 억지로 떠가며 성실하게 과정에 임할 것을 알고 있고, 준휘는 내가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실험에 매달릴 거란 걸 안다. 그래도 굳이 한마디씩 하는 건, 제 몸 돌보는 건 서툰 우리일지라도 상대를 떠올리는 순간에는 자신을 돌보려 할 테니까. 틈날 때마다 서로를 떠올릴 거고, 그건 바쁜 일정에 무뎌져 가는 감각을 다시 다듬어줄 것이다.

준휘는 몇 번이고 차가 있는 쪽을 뒤돌아봤다. 복귀를 알리고 방에 돌아가 짐을 내려놓고서도 나를 확인할 수 있도록 차 밖에 나가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내 존재가 준휘에게 휴식이 되고 안심을 준다는 게 참 다행스러웠다. 잠깐 준휘를 봤다고 온기를 되찾은 몸이 이제 좀 쉬라고 명령했다. 연구보다 더 중요한 걸 잊지 좀 말라고.

인생에 중요한 것이라곤 눈앞에 보이는 딱 하나의 목적밖에 없는 것처럼 구성원을 몰아세우는 집단에 속해, 스스로 생각해볼 시간조차 갖지 못하면, 사람은 종종 가장 중요한 것을 헷갈리곤 한다. 학교에 다니는 내내 준휘와 내 일상은 무척 바빴다. 세상은 요구하는 게 많았고, 목숨을 걸고 몰두해야 한다는 식으로 다들 말했다. 그건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거라고. 그 쉽지 않은 레이스를 다치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었던 건, 나를 소중히 하는 걸 잊을 때마다 그걸 되짚어주는 내 옆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쳐서 금세 회색빛으로 물드는 세상에 단번에 색을 가져와 주는 사람.

단순한 자극에서 시작된 관계가 삶의 색 자체가 되기까지 우리는 거의 3천 일의 시간을 함께했다. 잊고 있었던 자신의 색을 발견하고, 그게 상대와 섞이면 어떻게 변하는지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확인했다. 그래도 아직 닿지 못한 색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믿는 함께하는 시간 속에 숨겨진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잃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삶에 색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 안에 행복을 피워내는 나무를 심었다. 준휘가. 그리고 내가. 그 나무에 물을 주고 돌보면서 말한다. 나와 함께 나무를 심고 기르는 당신이 바로 내 짝이라고. 나무가 흙으로 돌아갈 날까지 우리는 짝으로서 함께 하리라 믿는다.

내 짝, 마침.

진우와 준휘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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