寢息(침식)
오랜만에 들어온 곳이었다. 과거의 일로 정원에 위치한 아틀리에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은 뒤부터 마련한 어머니의 작업실이었다.
저택 1층에 위치한 어머니의 방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회사 일로 바쁘기 전까지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려 종종 들르던 곳이었다. 찬찬히 고개를 돌려 내부를 살펴보았다. 어머니의 성정을 보는 듯 차분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좀 전까지 격앙되었던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파혼 소식에 분노한 아버지, 그리고 별안간 아들의 성벽을 알아 버린 어머니까지. 늘 조용한 침묵이 어울렸던 집안이 난장이 되었다.
그 일로 나를 따로 작업실로 부른 어머니께선 아까부터 조용히 뒤돌아 계실 뿐 아무 말이 없으셨다. 아무래도 생각지 못한 아들의 성벽에 적잖은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다. 작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어깨와 숨을 가다듬는 뒷모습을 보니 자식 된 입장에서 죄송스러운 심정이 앞섰다.
작업실 한가운데에 서서 어머니 말씀을 기다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흔들림 없는 또렷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언제부터였니?”
“처음부터요.”
그녀가 묻는 질문에 가감 없이 대답했다.
“네 아버지도 알고 있는 사실을 나만 몰랐었구나.”
“죄송합니다.”
어머니와 다르게 아버지는 내 주변을 시시각각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자신의 아들로서 적합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에 성벽은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내 부적절한 행위를 지켜볼 뿐 질타하지 않으셨다. 다만 자신이 그려 놓은 설계에 내가 따라와 주지 않는 사실이 화가 났을 뿐이었다.
“그냥 좀 놀랐어. 내 아들이 가시밭길을 걷는다 생각하니 잠시 눈앞이 캄캄해지더구나.”
“…….”
“아니, 처음엔 화가 났어. 왜 내 아들이…….”
여전히 뒤를 보이시던 어머니가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돌아섰다. 항상 총기를 띠고 있던 어머니의 눈빛이 바래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20년 전 아버지와 서문희가 부정을 저지른 사실을 알았을 때와 같아 보였다.
“힘들었겠구나.”
“아닙니다.”
힘든 것은 없었다. 나는 내 위치와 힘을 잘 알고 있었고 내 성벽이 그러한 것들을 위협할 수 없는 것도 알았다. 나는 아버지를 닮은 아들이기도 했다. 탐욕스럽고 뻔뻔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일말의 죄책과 부채를 쉬이 덜어 낼 수 있는 이였다.
잠시 말없이 나를 묵묵하게 바라만 보던 어머니의 입술이 달싹였다. 아들의 상황을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 텐데도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네가 견뎌야 할 몫이 힘이 들 때. 언제든지 이야기하렴.”
남편을 닮아 무뚝뚝하고 냉정한 아들인 나를 보며 어머니는 옅게 미소 지으셨다. 본인이 감내해야 할 고된 몫이 있음에도 자신의 아들이기에 끌어안아 주시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영우가 많이 놀랐을 텐데……. 내가 가서 달래 주고 싶지만 여력이 나질 않네. 네가 해 줄래?”
“네, 그럴게요. 제가 할게요.”
“그래, 알겠다. 이제 나가 봐. 혼자 있고 싶어.”
다시 뒤를 돌아선 어머니는 내게 나가 보라 손짓하셨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느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뒤돌아선 어머니가 보지 못해도 그녀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작업실을 나왔다. 죄송하다는 내 인사의 진짜 속내는 성벽에 대한 속죄가 아니었다. 어머니를 또다시 절망케 할 동생을 향한, 나의 비틀린 마음에 대한 속죄였다.
❊ ❊ ❊
한국을 떠나 출장지에 머문 지 나흘째였다. 최소 일주일, 일이 잘 안 풀렸을 경우엔 열흘까지 생각해야 할 출장이었다. 출장지는 신제품 품평회가 있는 유럽이었다. 품평회와 함께 개발 중인 다음 신제품 사업권을 따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업권을 획득하는 일이 현재 아버지와 적을 세우고 있는 입장에서, 회사에서의 내 위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 수 있는 것 중 하나였기에 최근 정신없이 몰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나 회사 문제는 되도록이면 아이에게 하지 않았기에 출장지에 출발하기 전까지 함구하고 있다가 출장을 떠나기 전날 밤, 내 품 안에서 잠이 들려는 아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오랫동안 출장을 가게 되면 불안해하는 아이를 위해 사소한 일처럼 들리게끔 건너가듯이 말했다.
소록소록 잠이 든 아이를 품에 안고 밤새도록 지켜보며 그 몸에 수없이 많은 흔적들을 남겨 주었다. 나 없이도 외로워하지 않게, 흔적들을 보며 나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한 마음에 출장지에 도착한 이후부터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 아이가 깨어 있을 시간에 전화를 해 보았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식사 후 곤히 잠이 들어 깨울 수가 없다는 한 실장의 말에 수화기만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는 것이 반복됐다.
아이에게 전화를 하려고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린 시각은 새벽 3시. 오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이와 통화를 해야 했다. 곤히 잠들었더라도 깨워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것은 걱정되는 상황이었고, 그 말을 전해 주는 사람이 한 실장이기에 더 못 미더운 상황이었다.
통화음이 세 차례 울리고 전화를 받는 사용인의 음성이 들렸다.
“지학영입니다.”
-아, 이사님 안녕하세요. 출장지에서 일정은 편안하세요?
한 실장이 아닌 다른 사용인의 목소리였다. 간단한 안부를 묻는 사용인의 인사의 대답은 제쳐 두고 통화의 목적부터 물었다. 한 실장에게는 아이가 별일 없이 괜찮다는 이야기만 들은 터라 정확한 상태가 궁금했다.
“영우 상태는 요즘 어떤가요.”
-식사 챙겨 드리면 드시려고 노력은 하시는데 이사님 계실 때처럼 못 드세요. 안색도 안 좋고 잠도 한두 시간 정도 겨우 눈 붙이는 수준이에요. 관장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세요.
“거동은 좀 어떻습니까?”
-거동에 문제는 없는데…… 이사님 출장 가신 뒤부터 방 안에서 통화만 기다리세요.
“……영우 바꿔 줘요.”
예상대로였다. 한 실장이 내게 거짓을 고한 사실이 놀랍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둘 순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다. 일정을 마치고 어머니와 상의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어머니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이에게 행하는 행위가 옳지 않은 것을 안다면 어머니도 그런 한 실장을 그냥 보고만 계시진 않을 터였다.
-이사님!
“잘 지냈어?”
전화기 너머로 아이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으니 걱정으로 한껏 예민했던 신경이 녹진하게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왜 이제 전화하셨어요. 내가 얼마나 전화를 기다렸는데.
이제 전화를 하냐는 투정 어린 말에 작은 의문이 서렸다. 나는 출장 온 뒤로 아이가 깨어 있을 시간에 꼬박꼬박 전화를 여러 번 했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기다렸다고?”
-당연하죠! 밥 잘 먹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한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실장은 아이가 잠이 들었다는 거짓을 내게 고하고 아이에게도 나의 연락을 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를 넘어서는 행동을 한 그녀가 불쾌했지만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아이를 달랬다.
투정과 소소한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애가 닳은 마음이 느껴져서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늘 솔직하고 진실하게 다가와 주는 아이에 비해서 나의 표현은 보잘것없는지라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나마 내가 아이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
-이사님……
나를 부르는 아이의 소리가 좋다.
“그래.”
-또 전화 주실 거죠?
“이따가 또 할 거니 걱정하지 마.”
-…….
“자기 전에도, 내일 일어날 때도, 밥 먹을 때도, 내가 그곳에 갈 때도.”
아이가 원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 모두 다 들어주고 싶다. 그것이 나를 곤란하게 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나의 대답에 위로를 얻은 아이가 용기를 내어 고백해 온다.
-네……. 보고 싶어요.
아이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면 나는 아이를 볼 것이고.
-키스하고 싶어요.
아이가 나와 키스하고 싶다면 기꺼이 입술을 내줄 것이다.
-안기고 싶어요.
내게 안기는 것을 원한다면 몇 번이고 품에 안아 어루만져 주고.
-그리고…… 사랑해요.
“……그래.”
사랑을 말해 오면 어렵게 간직해 왔을 그 마음을 받아 줄 것이다. 나는 그러기로 했다. 아이가 내게 말해 오는 모든 바람들을 들어줄 것이다.
신제품 사업권을 따내는 일이 생각처럼 순조롭지 않아 최소 일주일로 생각했던 출장 일정이 열흘 가까이로 길어졌다.
따로 한 실장에게 연락해 경고를 주었기에 늘어난 일정에도 아이와의 통화는 매일 이루어졌다. 불안해하지 않게 틈나는 대로 전화를 걸어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시차 때문에 내가 있는 곳에서 전화하는 시각은 늦은 밤, 깊은 새벽이거나 이른 아침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만큼 나 없이 지내고 있는 아이가 걱정되었다. 그를 두고 출장을 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님에도 이번엔 괜한 기우가 앞섰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뭔지 모르게 불안정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귀국 일정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한 결과 애먹던 사업권을 따낼 수 있게 되었고, 열흘로 생각했던 일정이 하루 앞당겨져 오늘 귀국하게 되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아 입국장으로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며칠 동안 밤을 지새웠지만 기내에서 잠깐 눈을 붙여서인지 생각보다 많이 피곤하지는 않았다.
출장지에서 사 온 아이의 선물이 짐 가방 안에 제대로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체될까 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기내에 탑승하기 전 마지막 통화를 할 때 아이에게 깜짝 놀랄 기쁨을 선사해 주고 싶어서 비행 시간을 하루 뒤인 원래 일정으로 얘기했다. 일정대로라면 지금쯤 나는 아이에게 전화를 한 뒤, 상공을 나는 기내 안에 있어야 했다.
아이에게 예정보다 이르게 도착해 큰 기쁨을 선사해 주고 싶은 마음으로 벌인 일이었다. 출발하기 전 전화를 하겠다고 했는데 전화가 없어 서운해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모양새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 미안함에 마음이 급해졌다.
자정이 넘어 도착한 입국장에서 만난 수행 직원에게 차 키를 건네받고 집으로 향했다. 나를 보고 반가워할 아이의 기쁨보다 내 기쁨이 더 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열흘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몸은 좀 괜찮은 건지, 내가 없어 잠을 잘 자지 못해 살이 많이 빠진 건 아닌지, 나 모르게 피를 또 쏟은 건 아닌지 별의별 걱정과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두 눈으로 어서 확인하고 싶었다.
늦은 시간이라 뻥 뚫린 도로를 달리니 평소보다 빠르게 집에 도착했다. 미등을 제외한 등이 모조리 꺼진 저택이 유난히 을씨년스러워 정원을 가로지르며 눈으로 아이의 방 창문을 쫓았다.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이미 잠이 든 모양이었다.
늦은 새벽 이르게 도착한 나를 맞이하는 사용인이 간단한 인사와 함께 집안사람들의 안부를 전했다.
“출장은 잘 다녀오셨어요? 회장님, 관장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세요.”
“영우는?”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요.”
고개만 끄덕이고 바로 2층으로 향했다. 욕실에 들러 간단하게 손을 씻고 고요한 기운이 맴도는 아이의 방문 앞에 섰다. 방 안에서 기침 소리나 앓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안심할 일인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그 침묵이 꺼림칙했다. 평온한 침묵이 아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정적이 이상해서 서둘러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
방 안엔 아이가 없었다. 침대 위는 이불만이 약간 구겨져 있을 뿐 온기도, 빛도,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아이가 자신의 방 안에 없다면 있을 곳은 내 방뿐이라는 걸 아는데도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몸을 돌려 빠르게 뛰다시피 내 방으로 향했다.
내가 없는 시간이 외롭고 힘들어서, 출발하기 전 연락을 하지 않아 서운해서 내 방으로 갔으리라. 문을 열고 내 방 안에 들어가면 이불 안에서 웅크려 잠이 들었을 아이가 보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이를 끌어안아 예쁜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고…….
“…….”
내가 그동안 수없이 결정하고 행하여 왔던 것들이 모두 잘못된 것들이었을까. 옳지 않은 것이었을까.
“지영우!”
살아오면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 온 것이 있었던가.
“영우야!”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눈이 크게 뜨였다. 내 앞엔 소멸되어 가는 아이가 있었다. 푹 꺼져 버린 마음에서 절망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품 안에 힘없이 들어오는 차갑고 마른 몸이 내 아이가 아니기를 바랐다. 꼭 끌어안아 맞닿은 가슴이 뛰길 바랐다. 붉은 피를 쏟는 입가에서 숨결이 느껴지길 바랐다.
어리석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늘 바라는 것뿐이었다. 아이가 나를 사랑해 주길, 나를 원하여 주길,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기를…….
결국 내가 바라 온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들이었을까?
지독한 현실을 마주하고 나서야 자문한다.
과연 아이를 위한 것이었을까?
❊ ❊ ❊
아버지가 보냈던 미국 지사 일을 정리하고 연락 없이 6개월 만에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입국 날 쌀쌀했던 날씨는 하루 사이에 한껏 풀어져 이른 봄날이 되어 따듯한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이상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은 세상의 자연스러운 이치이고 순리였다. 그 굴레에 엮여 있는 나는 변함없는 저택의 아침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별안간 어젯밤 집에 도착한 나를 본 어머니는 놀라지 않고 별말씀 없이 맞아 주셨고, 일찍이 귀가 후 먼저 잠에 드셨다던 아버지는 내가 집에 복귀한 것을 아직 모르고 계셨다.
이곳에 온 내 모양새는 겉으로 보기에 갑작스러운 귀국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에 나가 있는 6개월 동안 내가 선택한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 고군분투하여 돌아온, 예정된 귀국이었다.
아이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과 아직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볼품없는 일말의 자신감에 기대어 지냈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많은 것을 내려놓았고, 또한 많은 것들을 버렸다. 단단하게 가로막고 있던 신념의 아집을 내려놓기를 다짐했을 때 내게 주어진 짐들과 책임을 버리는 건 예상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그러고 나니 내게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나에게 사랑을 바랄 수 없다는 아이가 내게 남은 전부였다.
“시차 적응은 한 거니?”
식당 입구에서 어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자리에 일어나려 몸을 움직이자 어머니는 되었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내 앞에 바르게 착석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의자에서 떼었던 몸을 바로 하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얼굴을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그쪽 일이 힘들다고는 들었어.”
아버지는 이복 남동생과 붙어먹는 아들의 정신 상태를 전부 뒤흔들어 놓겠다는 듯, 이제 막 새 프로젝트를 돌입해 아직 자리 잡히지 못한 미국 지사에 나를 보냈었다. 바쁜 일정을 해결하다 보면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제 어느 정도 자리는 잡은 상태라 괜찮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거니?”
아버지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식당 안에는 나와 어머니 그리고 몇몇의 사용인들이 있었다. 정갈하게 놓인 아침상 앞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인 나와 당신만 있는 것처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눈빛을 담고 나를 보고 계셨다.
무심코 어머니를 마주 보고 있던 나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그래서 돌아 온 거니?’에 담긴 의미를. 아들의 부정을 알아 버린 어머니를.
“어머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른 이를 통해서가 아니라 언젠가는 직접 말씀드려야 할 사실을 지금 고해야 하는지 선뜻 자신이 서질 않았다.
아직 식당에 도착하지 않은 아버지, 지켜보고 있는 몇몇의 사용인들, 그리고 마지막일 수도 있는 집에서의 아침 식사. 내 평생에 걸쳐 왔던 행위들을 끝마치는 자리에서 어머니께 다시 한번 비수를 꽂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습관처럼 생각의 꼬리가 물리려 할 때 지금의 망설임이 우스워졌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내 전부는 아이만이 남았는데 어떠한 것이 대수로울 수 있는가.
아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입을 열고 어머니께 사실을 고하려는 순간이었다.
“네가 여기 왜 와 있는 거냐.”
적막한 공간에 익숙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변하지 않는 옹성 같은 목소리였다. 식당 입구를 지나 어머니께서 앉아 계신 자리 옆에서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 계셨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광경이 의심스러운 양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제 들어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를 향해 인사했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체념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다.”
점점 낮아지는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어머니는 식당에 남아 있는 사용인들을 물리었다. 좋지 않은 분위기에 사용인들이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아버지의 자부심인 언제나 우아하고 고상하던 저택의 아침 식사 자리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 팀장에게 사표 전달했습니다. 수리 처리 해 주세요.”
“뭐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아이에게 온전히 돌아가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서문희에게 했던 것처럼 바람같이 들러 가며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자리하며 머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본인이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난 아들의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안타까울 정도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틀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알면서도 애써 부정하는 아버지의 신념과 고집을 나는 이해한다.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고 많은 것을 누리지만 때로는 외롭고, 지치기도 하는 숙명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전철을 밟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이 집에서의 아침 식사는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부모님을 향한 통보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없는 아버지와 그토록 자신이 바랐던 아들의 행복이 옳지 않은 방향임을 알게 된 어머니 사이에서 참담한 감정이 떠다녔다.
“제가 견뎌야 할 몫이 여기까지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나를 외면하지 않고 지켜보는 부모님의 얼굴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져 입 안이 썼다. 내 선택과 결정이 앞으로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줄지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나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이 마음이 비록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옳지 않은 길이라 해도.
나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그대에게 가는 길이 아직 늦지 않았기를, 이제라도 찾아가는 것이 늦지 않았기를.
나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을 그대에게 고백한다. 내게 전부인 널, 나 또한 사랑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