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지막은 내 생일이 지나가는 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을 발견한 사람은 나였다. 그날도 갑자기 오른 열로 자리를 보전하고 있던 나는 성인이 된 스무 살 생일이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쉬워서 유모도 잠이 든 늦은 자정, 아픈 몸을 일으켜 엄마에게로 향했었다.
그날엔 내 생일임에도 회장님이 다녀가시지 않았기에 엄마는 혼자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래서 더욱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던 마음이 든 것도 같다.
시린 맨발로 낡은 마룻바닥을 종종 디디며 엄마 방으로 향할 때까지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엄마는,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며 나를 향해 빙긋 웃어 주었었다. 나는 바보같이 그 웃음을 보고도 같이 활짝 웃어 주지 못했었다. 갑자기 치솟았던 열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웃음이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아무리 아프고 힘이 들어도 예쁘게 웃어 주었을 텐데.
‘영우야. 생일 축하해.’
‘응, 엄마.’
축하의 말을 건네는 엄마에게 나는 그날, 예쁘게 웃어 주지 못했다. 여전히 아픈 몸이 잠시 원망스럽고 힘들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에 내세울 수 없었던 엄마의 부끄러운 사랑은 그날 그렇게 끝이 났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 보면 엄마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이 선택한 사랑의 결과가 후회스러웠지만 아이가 태어났고, 그 사실을 돌이킬 수 없음에 힘들어한 것 같았다. 자신이 한 사랑은 잘못되지 않은 것이라 믿으며 버티고 버티다 끝내는 무너져 떠나 버린 것이다.
가끔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집착하던 회장님에 대한 애정, 그리고 병든 아들인 나에 대한 과도한 모성애가 그녀를 버티게 한 원동력이자 죽음으로 내몬 끔찍한 감정이었다.
회장님은 엄마를 사랑했을까? 엄마는 회장님의 사랑을 받았을까? 받지 못했을까? 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이미 죽었으니까.
한 실장이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아 댔던 사실들을 되짚어 보았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이것 또한 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결국 오지 않았다. 이미 시간은 자정이 넘었고 그가 알려 준 출발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아까 낮에 한 실장 앞에서 한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전화를 하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그는 내게 전화를 하지 않았고 나는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 없이 밤을 지새우는 나날이 열흘이 넘었고, 그가 내 몸에 남겨 준 흔적들은 희미함을 넘어서 모두 없어진 지 오래였다.
한숨 자고 일어나 눈을 떴을 때 그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괴롭히는 미열도 없이, 힘들게 하는 기침도 없이 건강하고 평범한 남들처럼 오후 늦게까지 잠을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바람을 실천하기 위해 이불 안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났다. 모두가 잠이 든 지금 시간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고 숨을 쉬는 순간이었다. 그를 만나고, 그와 사랑하는 시간. 오늘은 그 없이 온전하게 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맨발에 닿는 바닥이 버석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내 방에 걸린 괘종시계로 다가가 까치발을 딛고 섰다. 부드러운 나뭇결이 느껴지는 밑동을 살짝 들어 올리자 하얀 종이봉투가 툭 하고 떨어졌다. 민첩하지 못한 내 손이 봉투를 놓치자 안에 든 내용물들도 같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데굴데굴 구르는 알약들은 몇 개월 전부터 내가 모아 온 수면제들이었다. 처음엔 몰래 그의 방에 가기 위해 내 방에 머무는 사용인을 재우려 모았던 것이 습관이 되어 하나둘 쌓인 것들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사방으로 흩어진 수면제들을 주웠다. 오늘 밤 홀로 지낼 수 없는 나를 위한 것들이었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침대 밑바닥에 도망친 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수거를 했다. 벌어진 종이봉투 입구에 수면제를 우르르 집어넣었다. 수면제 한두 알로는 잠들 수 없는 나였다.
바닥에 딱 붙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협탁 서랍에 넣어 둔 그가 선물한 초콜릿, 그리고 관장님께서 주신 젤리도 같이 챙겼다. 한 손엔 초콜릿과 젤리, 다른 한 손엔 수면제가 든 종이봉투를 꾹 쥐고 내 방을 나섰다. 그의 방에서 잠이 들고 싶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바로 그를 볼 수 있게 말이다.
그의 방에 가는 순간은 늘 설렜다. 무거웠던 몸도 가벼워지고, 치밀어 오는 기침도 잠잠해진다.
열흘 동안 주인 없이 비워진 방은 썰렁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가 없어도 청소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용인들 덕분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항시 난방을 하는 내 방과는 다르게 그의 방은 서늘하다 못해 쌀쌀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 나는 수많은 옷 사이에서 그의 재킷 하나를 꺼내어 내 어깨에 둘렀다. 그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은 작은 마음에서 한 행동이었다. 말끔하게 세탁된 옷에선 미세한 섬유 냄새만 날뿐 그의 체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 냄새마저 그의 체취인 양 듬뿍 들이마셨다.
마른 몸을 덮다시피 한 재킷을 짊어지고 그의 침대 위로 몸을 모로 눕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을 청해 본다. 늘 그렇듯이 나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눈을 떴다. 감았다. 수없이 반복했다. 미치도록 잠이 들고 싶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그를 보고 싶었다.
손에 꾹 쥐고 있던 봉투의 입구를 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밖으로 터져 나올 듯한 쿵쾅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봉투를 기울이니 눈앞에 하얀 알약들이 감색 시트 위로 쏟아졌다. 그렇게 쌓인 수면제는 자그만 언덕을 이루었다. 둥근 언덕 꼭대기에 있는 알약을 검지와 엄지로 살며시 집어 들어 입 안에 넣었다.
혀로 굴려지는 이 작은 알은 금방 내 입 안을 점령했다. 쓰디쓴 물이 구석구석 퍼지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독히도 쓴맛과는 달리 약은 내게 잠이 오는 위력을 보여 주지 못한다. 천천히 혀를 굴리며 두 번째 알약을 입에 넣자 반사적으로 침이 가득 고였다. 침과 함께 꿀꺽 약을 삼켜 보지만 알약은 목 끝에 머물 뿐 넘어가지 않았다.
말똥말똥한 눈을 깜박이며 쉬지 않고 세 번째 알약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그사이 첫 번째 알약은 반 토막이 되어 버렸다. 너무도 쓴맛에 절로 눈에 눈물이 고여 흐르기 시작했다. 입 안에 오래도록 머무는 쓴맛 때문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빨리 잠들고 싶은 내 마음과는 달리 잠은 오지 않았고 괴롭기만 했다.
아껴 둔 초콜릿과 젤리를 수면제 언덕 옆에 꺼내 놓았다. 예쁜 모양의 초콜릿과 알록달록한 젤리를 보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 약들보다 나를 낫게 해 주는 것들이었다. 그 무엇보다 아깝고 귀한 내 사랑을 하나 집어 입 안에 넣자 소름 돋는 달콤함이 퍼졌다.
달콤함이 사라지기 전에, 알약을 두세 개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용기를 내어 우드득우드득 소리가 나게 이로 씹어 먹었다.
“우욱……!”
급격하게 쓴맛이 밀려와 헛구역질이 절로 터져 나왔지만 입을 막고 참았다. 손바닥이 타액으로 젖었지만 개의치 않고 다시 알약을 털어 넣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입 안을 가득 메운 알약들 사이로 내 사랑 하나를 다시 집어넣었다. 부스러진 알약과 힘없이 뭉개진 사랑들이 한데 뒤엉켰다.
기침이 터져 나올 것같이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씹기 시작했다. 수면제 언덕이 반이나 줄어들었는데 나는 아직도 잠이 오지 않았다.
“후흡…… 하아…….”
이로 부숴 먹고, 녹여 먹은 내용물들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는 기침으로 잠시 참고 있던 숨을 재차 들이켰다. 모로 누웠던 몸을 움직여 천장을 향했다.
“우욱, 컥…….”
기침이 쏟아졌다. 폐를 쥐어짜는 고통과 함께 전신을 흔드는 기침이었다. 겨우 먹은 수면제를 토할까 봐 긴장이 되었다. 아직 잠이 오지 않는데 이대로 뱉어 낼 수 없었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상체를 곧추세웠다. 토하지 않도록 입을 막고 정신없이 기침을 해 댔다.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과 재킷이 흘러내렸다.
흔들리는 몸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오고 싸늘한 공기가 내 몸을 휘감았다. 전신이 부르르 떨릴 만큼의 싸늘함에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아.”
새카맣게 어둠이 내려앉은 그의 방, 이곳엔 내가 있었고 내가 두려워 마지않는 소멸도 함께였다. 두 눈에 생경하게 꽂혀 들어오는 소멸의 모습이 오늘따라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흐윽…….”
그가 보고 싶다. 잠이 들고 싶다. 모든 것을 잊고 달콤한 잠에 취해 꿈속을 헤매다 그를 만나고 싶다.
두려움에 순간적으로 기침이 멈춰진 틈을 타 양손으로 수면제를 끌어모아 입에 넣었다. 우드득우드득 거친 소리가 계속됐다. 양 볼이 빵빵해지도록 젤리와 초콜릿을 쑤셔 넣고 씹어 댔다. 급하게 씹다 혀를 깨물었는지 얼얼한 고통이 피어올랐지만 괜찮았다.
입술 사이로 타액인지 혈액인지 모를 액체가 스며 흘렀다. 츄읍 소리를 내며 들이마셨지만 소용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소멸을 다시 외면하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웠다. 손을 더듬어 그의 재킷을 찾아 뒤집어썼다.
싸늘하게 체온이 식어 가는 몸에 이불을 덮고 싶었지만 까무룩 정신이 넘어가는 느낌이 몰려와 그럴 수 없었다. 드디어 잠이 오는 걸까……? 이제 잠이 드는 걸까……? 자고 일어나면 그가 내 눈앞에 있을까……?
모자란 숨을 쉬느라 벌어진 입에서 차마 삼키지 못한 타액이 줄줄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빙글빙글 머리가 도는 것같이 정신이 몽롱해져 왔다.
감기는 눈꺼풀 사이에서 그가 환상처럼 떠올랐다. 잠에서 일어나 보여야 할 그가 잠이 들기 전에 보이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나를 향해 맹렬하게 다가오는 그가 보였다. 공포가 가득 담긴 낯선 눈을 하고서 절규를 하는 그가, 환상인 주제에 매우 슬퍼 보였다.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잠을 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눈을 감아야 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늘 기다리던 사람은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나를 기다려 주길 바랐다. 보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나를 기다려 주었으면 했다.
깊고 깊은 잠이 쏟아졌다. 모처럼, 긴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깊고 긴 잠, 건강한 몸으로 행복하게 노닐며 사랑을 말하는 나를 꿈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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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언제나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기분 좋은 마음으로 그를 볼 수 있기를 바랐고 조금이라도 내 몸이 건강하길 바랐다. 그리고 내 앞에 도사리고 있는 커다랗고 흉한 죄책감도 함께 사라졌으면 했다. 스스로 행한 벌로 이만큼 고통스러우면 된 것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 바람을 비웃기라도 한 듯 그 어느 하나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점멸하는 등불처럼 깜박이는 의식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그를 찾았고,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했다. 망가진 몸이 끓어오르는 열을 내뿜으며 내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었고 나는 그 속에서 울부짖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슬퍼하며,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내 자신의 생을 한탄하며.
도피처로 삼았던 꿈속이 편안한 장소가 되지 못했고 깨어난 지금 이 순간에도 난 쫓기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쫓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만들어 낸 죄책의 허상이 나를 쫓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이 저리도 슬퍼 보여서는 안 되었다. 나를 보고도 기뻐하지 못하며 감정을 묵인하는 그의 모습은 내가 만들어 낸 추악한 결과였다.
“이사님.”
아직도 잠긴 목이 풀리지 않았다. 주치의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나는 자그마치 열흘 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고 했다. 기면 상태와 함께 폐렴이 도져 난생처음으로 나는 회장님의 저택이 아닌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내 곁엔 그도 없었고, 관장님도, 회장님도 안 계셨다. 무섭고 미운 한 실장마저도 없었고 내 의식을 체크하는 의료진이 곁에 있었다. 간단한 인지 상태와 혈압이나 심박 체크를 마치고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사님.”
다시 한번 그를 불러 보았다. 내 부름에 눈을 마주하기만 할 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고 있는 듯했다.
나도 그랬다. 슬픈 그의 눈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가 없는 동안 한 실장이 무섭고 두려웠었다고 말할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실은 사랑이 아니고 죄악이라고 불리는 사실을 고백할까?
“출장 잘 다녀오셨어요?”
“…….”
“보고 싶었어요.”
“…….”
“……죄송해요.”
고민했던 말들은 저 멀리 달아나고 먼저 안부를 묻고, 보고 싶다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걱정했을 그를 위한 사죄의 말.
“지영우.”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마지막 나의 사죄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었다. 나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를 슬프게 하는 말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사님, 이사님이 그러셨잖아요.”
“…….”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스무 살 애송이의 용기 있는 사랑만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고 싶었다. 마냥 행복하고 즐거우며 웃음이 나는 그런 사랑을, 그가 허락한 이상 마음껏 하고 싶었다. 이렇게 비겁한 마음으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래, 말해 봐.”
그는 언제나 넓고 깊은 뜻으로 나를 받아 준다. 성치 않은 몸으로 죽을 수도 있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어도 다그치지 않고 나를 헤아려 준다. 오로지 나를 향한 마음으로, 나를 위해서 기다려 준다. 그런 그에게 나는, 잔잔한 그의 호수에 돌을 던지고 커다란 돌덩어릴 밀어 넣고 휘저으며 첨벙첨벙 뛰놀던 나는 이제 그만하려 한다. 그에게 진한 파문만을 남기고 그만하려 한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요.”
“…….”
“감당은 이사님이 할 테니,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이제…….”
가슴속 깊은 곳에서 꽉 막힌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다음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딱딱하게 굳어 버린 것 같은 목구멍 안에서 말들이 산산이 흩어지길 수십 번.
조용히 나를 기다려 주는 그의 눈을 보면서 용기를 내고, 마음을 다잡고, 죄악이 되어 버린 내 소중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연다.
“이제…… 못 하겠어요….”
“…….”
“이사님을 기다리는 것도, 바라보는 것도.”
한번 입을 열자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아 왔던 비겁한 감정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그 양이 버거워 헐떡이는 나를 그가 바라본다.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매일매일 가슴 졸이며 사랑하는 것도 못 하겠어요.”
너무나 행복했다. 이것이 사랑인 것이구나, 나도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나의 마음을 충만하게 차오르게 하는 이 신기하고 반짝반짝하고도 눈부신 경험을 할 수 있어 행복했었다. 매일매일 가슴을 졸이며 사랑하는 것도 힘들지만 괜찮았다.
그를 기다릴 수만 있다면, 바라볼 수만 있다면…… 이런 작은 바람으로 나를 위로하고 또 위로하며 감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이고 있던 못난 감정이 꿈틀꿈틀 몸을 비틀며 내 머릿속을 기어 다녔다.
“당신에게 사랑을 바랄 수 없는 내 자신이 초라해서…….”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볼 수 없었다. 눈 안에 가득 차오르는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빛에 부딪혀 내 눈을 멀게 만들었다. 어그러지는 그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이제 못 하겠어요.”
“…….”
“죄송해요. 저 때문에…….”
그는 나 때문에 선을 넘었고, 많은 것을 포기했다. 나는 그가 놓아 버린 것들을 책임져 줄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사랑하는 거였다.
“지영우, 네가 원하는 것이 정말 그거야?”
어룽어룽 보이는 그의 모습과는 달리 또렷한 그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낮고 서늘한 그의 음성. 내게 진실을 요구하는 그의 목소리.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함과 동시에 원하지 않는 것이기에. 다그치듯 요구하는 그에게 비겁하게도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사랑을 말하며 그리고 또 바라며, 그의 견고한 마음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던 나의 마지막은 결국 보잘것없는 선택이었다.
어룽지는 그의 모습마저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 몸과 마음을 휘감으며, 때로는 매섭게 내리쳐 가며, 빠르게 또는 느리게 전신을 흔들며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저택에 돌아온 나는 전보다 사용인들의 더욱 심한 돌봄과 감시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나의 어리석은 행동에 그 누구보다 놀란 사람들은 회장님과 관장님이셨는데 회장님 같은 경우에는 나의 손과 발을 아예 침대에 묶어 놓으려 하셨다. 내가 스스로 엄마처럼 목숨을 끊으려 했다고 생각하신 탓이었다. 실제로 묶일 뻔한 나는 관장님이 회장님을 설득해 주신 덕분에 손과 발이 묶이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사용인들이 24시간 항상 내 곁에 상주하게 된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무어라 반박할 기운도 나지 않았기에 나는 그저 회장님과 관장님이 처리하신 대로 뜻을 따랐다. 아마 관장님께서 말려 주시지 않아 회장님 뜻대로 침대에 묶였어도 수긍하며 따랐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그를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매일매일 변함없이 내 방을 방문했다. 그에게 반응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나를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다 물러나곤 했다.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겠다는 나의 다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평소와 다름없이 나만 알 수 있는 따듯함으로 공간을 채우다 돌아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몇 번이고 흔들렸다. 나의 마음을 울리는 그가 내 곁에 머문다는 사실이 좋으면서도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내가 이렇게 아플 수밖에 없는 이상, 이 저택에 머무르는 이상.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또 반복될 터였다.
“도련님, 일어나셔서 식사하세요.”
“먹기, 싫어요.”
열흘 동안 쓰러져 있던 나는 영양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 링거와 영양제를 맞았더라도 식이를 섭취하지 못한 몸은 비실비실 말라 있었다. 원체도 약한 체력이 드디어 바닥을 기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도 몸도 의욕이 없는 나는 내 방 안에 갇혀 시름시름 시들어 갈 뿐, 더 나아지지 않았다. 가을의 높고 파란 하늘도, 창밖으로도 느껴지는 청량한 날씨도 내게 그 어떤 기쁨을 주지 못했다.
“안 드시면 저희가 관장님께 혼나요.”
“……먹으면 토할 것 같아서 그래요.”
정말이었다. 돌덩이라도 들어찬 것 같은 목구멍은 숨을 쉬기도 힘에 부칠 정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잔기침만 끊임없이 하는 나를 보며 사용인은 어쩔 줄 몰라 발만 굴렀다. 평소 같으면 그녀들이 안쓰러워 조금이라도 먹으려 했었지만 요즘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드셔야 해요. 그래야 약을 드실 수 있어요.”
한 실장 대신 나를 전담하게 된 사용인은 젊은 여자였다. 나는 저택에 온 뒤 관장님께 한 실장을 보고 싶지 않다고 부탁드렸었다. 관장님은 나의 간절한 부탁에 이유를 묻지 않고 청을 들어주셨다. 한 실장은 마법처럼 내 곁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저택 속속들이 어딘가 그녀의 일을 하고 있을 테지만 내 앞에만큼은 나타나 주질 않았다. 실로 다행이었다. 나는 그녀가 두렵고 무서웠다.
“정말이에요. 먹기 싫어서 아니고, 토할 것 같아요.”
“도련님, 그러지 마시고…….”
안타까운 사용인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웠다. 작은 한숨 소리가 이불 너머에 울려 퍼졌다. 예전의 소심했던 나는 그 한숨 소리에 눈치를 보았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 저택의 도련님이 되어 가고 있는 증거였다.
“그거 나 주고, 나가 봐.”
“……관장님.”
“줘.”
이불을 그러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관장님이셨다. 나는 뒤집어쓴 이불 안으로 더 깊숙이 몸을 구부려 집어넣었다. 사용인은 분명 반가운 표정으로 관장님께 내 미음을 맡기고 나갔을 것이다
“영우야.”
관장님의 부름은 거절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의 나를 향한 애정과 내가 그녀를 향한 죄책감이 같이 상기되기 때문이었다.
“영우야, 일어나 봐.”
두 번째 부름에 결국 나는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켜야 했다.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다며, 미음도 안 먹고, 약도 안 먹고…… 입맛이 없어?”
걱정과 안타까움이 담긴 관장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곳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과연 관장님의 걱정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먹으면 안 돼.”
“……관장님.”
“그래, 아이스크림이라도 줄까? 그거 먹을래?”
꺼져 가는 불빛처럼 힘없는 내 목소리조차 반가운 소리인 양 관장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반응해 주셨다. 이렇게 다정한 그녀에게 나는 이미 파렴치한 아이였다. 그리고 이제 은혜도 모르는 아이가 되려고 한다.
“저…… 돌아가고 싶어요.”
그와 닮은 깊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저택에 돌아와 지내는 동안 수천 번, 수만 번 고민하고 고민한 결과의 뜻이었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 평생토록 그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내 평생의 삶이 너무 안쓰럽고 불쌍할 것 같아서, 그 마음을 접어야 했다.
“돌아간다는 말은…….”
내 말뜻을 바로 이해하셨는지 관장님의 아름다운 미소가 천천히 흐려졌다.
“예전에…… 엄마와 살던 집으로 가고 싶어요.”
반년 남짓한 짧은 기간, 나는 스무 해 동안 살아왔던 내 인생의 전반을 뛰어넘는 많은 것들을 느끼고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세상에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춥고, 낯설고, 신기했다. 내 몫이 아닌 것들을 누리기도 했고, 사랑받기도 했다. 또한 그만큼 외롭고 애달프며 쓰라리기도 했다.
“……이곳에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
“원래도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곳도 아니었어요.”
거짓말을 내뱉으며 관장님에게 비수를 꽂는 것은 나인데, 왜 내가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왜 서러운 건지 모르겠다. 아이처럼 울어 버리는 내가 너무나 미웠다. 나라는 존재 하나가 이 저택의 모든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유모가 보고 싶어요.”
“내 욕심 때문에…… 미안하다. 영우야.”
“죄송해요.”
죄송해요, 당신의 아들을 내가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 말아야 할 행동까지 하고서 행복해했어요. 꼭 내가 그와 사랑을 나누는 것 같은 우스운 착각을 할 정도로 좋았어요. 모든 것을 다 치워 버리고 뻔뻔해질 만큼, 그를 높은 곳에서 끌어내 버리고 싶을 만큼, 내 사랑에 눈이 어두워 그의 신념을 흔들고 망가뜨렸어요.
“……죄송해요.”
꾸역꾸역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낯설고 외로웠던 이곳에서 나는 사랑을 배웠고, 세상을 배웠다. 다시없을 소중한 감정을 선물처럼 가졌으니 이제 물러나야 했다.
병들고 아픈 몸, 인정받을 수 없는 사이라는 커다란 장애물을 넘을 수 없었다.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시간과 세월이 멈춘 그곳으로, 내 생각과 마음을 홀로 간직할 수 있는 곳으로.
“거기선 잘 먹고, 잘 지낼 거야?”
“…….”
“문희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 안 할 거니?”
관장님의 담담한 목소리가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를 향한 그녀의 걱정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라,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 그거면 됐어. 그렇게 하자.”
관장님이 작게 웃음 지어 보이셨다. 나는 그 배려에 또 다른 사랑 하나를, 작고 좁은 마음속에 담았다.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버겁고 소중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