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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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딸기 셔벗이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넘어갔다. 흰죽과 바나나 우유만 먹다가 진밥을 먹기 시작한 첫날이었다. 그릇에 덜어진 내 주먹의 반밖에 안 되는 셔벗이 아까워 조금씩 티스푼으로 겉 표면을 긁어 먹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을 감싸자 어깨가 잠시 부르르 떨렸다. 그러자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나를 걱정하는 질문이 나왔다.

“춥니?”

“아니요, 맛있어서요. 이사님이 사다 준 딸기 아이스크림보다 더 맛있어요.”

관장님과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아 여름 과일과 셔벗을 먹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귀가하신 관장님 손엔 예쁜 포장 가방이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엔 나를 위한 딸기 셔벗이 들어 있었다. 조금씩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날 위해 사 오신 것이었다.

“영우야.”

녹는 부분 먼저 살살 뜨느라 집중한 나를 관장님께서 부르셨다. 스푼 위에서 녹기 전에 얼른 입에 집어넣은 나는 셔벗을 음미하며 대답했다.

“네?”

“언제까지 이사님이라 부를 거야? 가족인데 형이라고 불러야지.”

“아…… 네. 죄송해요.”

“혼내는 것이 아냐. 이제 곧 새사람도 들어오는데, 형한테 이사님은 너무 딱딱하잖아?”

관장님이 부드럽게 내 호칭을 지적하셨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진작에 고쳤어야 할 호칭이었다. 회장님도 관장님도 당사자인 그도 이사님이라 부르는 것에 아무 말 없었기에 계속 부르고 있었다. 실은 어색하기도 했지만 형이라 부르고 싶지 않은 치기 어린 생각이 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형이라 부를 마음이 없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기로 했는데 ‘형’이라는 굴레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관장님 말씀처럼 우린 가족이었고, 곧 그가 결혼을 하면 그의 아내도 있을 텐데 스무 살 동생이 형한테 ‘이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기 좋지 않을 터였다.

“아직 입에 잘 안 붙어서요……. 그치만 오늘부터 노력해 볼게요.”

“그래, 오늘부터 불러 보자. 학영이가 그래도 너한텐 다정한 편이잖니. 좋아할 거야.”

관장님 말씀처럼 그는 나에게 다정했다. 밤마다 아픈 나를 위해 내 방에 찾아왔고, 잠들기 전 매번 그는 내 몸을 녹진하게 녹아내리게 만든 후 잠을 재웠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있어 주었다. 매일 밤마다 기분 좋게 기력을 소진하는 나는 숙면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 날 좋은 컨디션으로 끼니를 잘 챙겨 먹을 수 있었다.

“한동안 몸이 안 좋아서 걱정됐었는데 그래도 요즘 나아져서 다행이야.”

내 지병의 호전은 그의 영향이었다. 관장님의 말씀에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아예 배제할 수 없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관장님께서 달콤한 디저트를 사다 주시는 횟수가 늘수록, 나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실수록 내 고개는 점점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그녀의 순수한 걱정을, 과연 받을 자격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지만 시원하게 결론 내릴 수 없었다. 어찌 됐든 나는 엄마가 관장님을 배반한 삶을 산 증거이기도 했고, 나 또한 그녀를 배반하고 있기에 내심 그녀가 나를 미워해 주었으면 했었다. 이기적이게도 내 마음 편하자고 그걸 바라고 있었다. 정말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었다.

“왜 그러니? 속이 안 좋아? 찬 음식을 오랜만에 먹어서 그래?”

“아니에요. 그냥 잠시 다른 생각 했어요.”

“몸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얘기해야 한다? 알겠지?”

“네. 그럴게요.”

걱정스러운 눈빛의 관장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부끄럽고 창피한 만큼 밝게 미소 지은 상태였다. 내 미소를 보시고는 관장님께서 같이 웃어 주셨다. 화려한 외모를 가진 관장님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무뚝뚝한 학영이만 보다가 너를 보니 기분이 말랑말랑해지는구나.”

나보다 더 적은 양의 셔벗을 다 먹지 않고 남기신 관장님은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날카롭지만 아름다운 눈매가 휘어졌다.

“그 무뚝뚝한 녀석이 중학교 다니기 전까지 동생을 낳아 달라고 몇 번을 말했었어. 그러다 포기했는지 더는 얘기를 안 했었지. 그때 네가 이 집에 있었다면 아마 정말 많이 예뻐했을 거야.”

“이사님이 동생을 갖고 싶어 했어요?”

“이사님?”

생각 없이 늘 말하던 버릇대로 그를 이사님이라 칭하자 관장님께서 호칭을 짚어 주셨다. 오늘부터 노력하겠다고 말씀드리고선 입에 척 달라붙지 않는 ‘형’이란 호칭을 떠올리며 다시금 말했다.

“아, 죄송해요. 혀, 형이요.”

“그래, 네 형이 예쁜 동생 낳아 달라고 그렇게 떼를 썼었어. 뭘 통 부탁하는 애가 아니었는데 그랬었어.”

“상상이 잘 안 돼요.”

동생을 갖고 싶어 관장님께 떼를 쓰는 어릴 적의 그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독남으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군림하며 자랐을 그가 갖고 싶은 것이 예쁜 동생이었다니, 그래서 내게 다정하게 잘해 주는 걸까?

아이였을 때 그나마 귀여웠던 아들의 모습을 추억 삼아 이야기하시는 관장님의 얼굴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내 표정도 아마 관장님과 비슷할 것 같았다. 내가 모르던 그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듣는 일은 퍽 즐거웠다.

“쪼끄만 녀석이 그때부터 얼굴을 얼마나 많이 따졌는지 못생긴 동생은 싫고 예쁜 동생 낳아 달라고…….”

눈을 곱게 휘던 관장님은 눈매를 살짝 동그랗게 키우며 말끝을 흐리셨다. 같이 웃고 있던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관장님의 눈이 향하는 곳에 시선을 주었다.

“애 앞에서 언제 적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이제 막 퇴근했는지 그가 슈트를 입은 채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는지 내심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나는 자리에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관장님이나 회장님과 같이 있을 땐 그가 퇴근을 하더라도 배웅하러 나가지 않았었다. 생각보다 빠른 그의 귀가에 기분이 좋아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지만 관장님께서 앞에 계셔서 꾹 참았다.

“이사님, 오셨어요.”

“그래.”

관장님께 인사를 드리며 그가 내 옆자리에 앉자 빤히 바라보던 나도 같이 자리에 앉았다.

“영우야. 이사님?”

“아…….”

관장님께서 부드럽게 미소 지으시며 고개를 까딱 움직이셨다. 호칭을 다시 하라는 뜻이었다. 내게 지적을 하시는 관장님을 보는 그의 눈에서 약간의 의문의 빛이 스쳤지만 곧 사라졌다.

이사님이 아닌 다른 호칭을 불러야 하는 나는 막상 그가 내 앞에 있자 입을 떼기가 더 어려워졌다. 입 밖으로 말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목을 한번 가다듬었다. 긴장한 내 얼굴을 지켜본 그가 물었다.

“무슨 할 말 있어?”

“영우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단다.”

어색한 기분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날 관장님이 부드럽게 지켜봐 주셨다. 할 말이 무엇이냐는 듯 내 쪽으로 방향을 틀어 준 그가 내 얼굴을 내려 보았다. ‘형’이라는 한 글자가 뭐라고 이렇게 내뱉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손가락에 들려 있던 티스푼을 내려놓고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고개를 살짝 돌리고, 정확히는 관장님 쪽으로 돌려 다시 인사했다.

“오, 오셨어요…… 형.”

“크게 말해야지. 하나도 안 들렸어, 영우야.”

관장님의 말씀은 거짓이었다. 인사를 하고 흘끗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인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모깃소리만치 목소리가 작았어도 두 사람이 들은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 정도 소리로는 어림없는 모양이었다.

“어서, 영우야.”

다시금 부드럽게 관장님께서 재촉하셨다. 그와 단둘이 있을 때는 형이라고 부를 생각이 없는 것은 여전했지만 절대 하기 싫은 건 아니었다. 조금 어색하고 부끄러울 뿐이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슬쩍 올려 보니 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 그만하세요.”

“아,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내 더딘 행동에 괜히 관장님께서 나를 다그치시는 모양새가 된 것 같아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형, 오셨어요?”

이번엔 목소리에 힘을 실어 그를 똑바로 보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의 입매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날카롭고 서늘한 눈매가 관장님처럼 부드럽게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진작에 했어야 할 호칭인데 이제야 하게 된 나를 반성했다.

“너는 뭐 하니, 애 인사 받아 줘야지.”

관장님의 작은 타박에 그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래.”

잘 지냈냐는, 오늘은 어땠냐는 애정 어린 것이 아닌 짧은 인사말이 그의 손길과 함께 가슴에 묵직이 스며들었다.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그를 올려 보았다. 희미하게 떠올랐던 부드러움이 사라진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돌아온 그였지만 눈동자 안에 넘실대고 있는 나를 향한 기운은 감춰지지 않았다. 순간 그의 입술에 뽀뽀를 하고 싶었지만 이것 또한 꾹 참아야 했다.

“학영아, 손에 든 건 뭐니? 아이스크림?”

그의 손엔 연두색 포장 가방이 들려 있었다. 전에 그가 사다 주었던 수제 딸기 아이스크림이었다. 얼마 전 밥을 먹을 수 있을 때 또 사다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네, 근데 한발 늦었네요.”

“그러게. 오늘 내 간식도 셔벗이었거든.”

테이블 위의 딸기 셔벗을 보며 관장님께서 말씀하셨다. 모자는 내 간식거리를 경쟁하듯 사다 주는 사람들이었다.

“이건, 다음에 먹도록 하자. 한 실장, 냉동실에 보관해 줘.”

관장님의 지시에 곁에 서 있던 한 실장이 그의 손에서 포장 가방을 건네받았다. 몸이 호전된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하루에 셔벗과,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수는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티스푼을 입에 물고 떠나가는 아이스크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행복한 아쉬움이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 결혼 전까진 계속 바쁠 줄 알았는데.”

“……어머니께 드릴 말씀도 있고, 또 당분간은 요전처럼 바쁘진 않을 겁니다.”

나 때문에 먹기 시작한 약차를 입에 머금으며 관장님이 궁금함에 고개를 기울이셨다.

“드릴 말?”

“네, 이따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따로 나눌 대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혼자서 궁금해했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기에 추론하기 어려웠다. 내가 같이 듣기에 불편한 대화인 정도로만 예상됐다. 관장님도 나와 같은 생각인 건지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관장님, 회장님 들어오십니다.”

곁에 있는 한 실장이 우리에게 회장님의 귀가를 알렸다. 회장님 또한 모처럼의 이른 귀가였다. 관장님이 찻잔을 내려놓으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시자 나와 그도 이어서 일어났다. 같이 움직이려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관장님이 물으셨다.

“영우, 같이 갈 수 있어?”

“네. 오늘은 괜찮아요.”

“회장님께서 좋아하시겠네. 가자.”

그가 먼저 앞장서서 걷고 관장님과 내가 뒤이어 현관으로 향했다. 넓은 저택의 긴 복도를 지나 현관에 다다랐다. 현관 앞에는 이미 사용인들이 회장님을 맞이하려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의 자리를 잡고 회장님께서 들어오시길 기다렸다. 그가 항상 내게 말해 주었던 도련님 지영우의 자세를 기억하며 신경 썼다. 실내화를 신은 발을 가지런히 정리하자마자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사용인들처럼 허리를 숙이지 않아 들어오는 회장님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회장님이 저택에 내딛는 발걸음이 심상치 않았다. 오랜만의 맞이라 기분 좋은 미소를 얼굴에 만연하게 짓고 있던 나는 어딘가 굉장히 화가 난 회장님의 모습을 보자 미소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거칠고 빠른 발걸음으로 들어오신 회장님은 자신에게 인사하는 사용인들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화를 낼 곳이 정해져 있는지 회장님께서는 곧은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셨다. 그가 빼닮은 서늘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오늘따라 더 무서워 보여 나는 작게 몸을 움츠렸다.

회장님께선 무서운 눈빛을 하고 그에게 다가가고 계셨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화가 난 회장님을 바라보기만 할 뿐 의아해하지 않았다. 꼭 그 모습이 회장님이 왜 화가 나셨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의아해하는 사람은 관장님과 나, 그리고 사용인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의아함은 곧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이 형편없는 놈!”

대노한 고함과 함께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꺾여 돌아갔다. 나는 별안간 벌어진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회장님이 다짜고짜 그의 뺨을 갈긴 것이었다. 꺾인 고개를 그가 바로 세우자 회장님이 끓는 음성을 내고는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려 강하게 내리치셨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네놈이!”

“회장님!”

내 옆에서 관장님의 새된 소리가 터졌다. 나는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손찌검에 머리가 멍했다. 그리고 무서움으로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같은 곳을 연달아 맞아 입 안이 터졌는지 그의 입가에 피가 묻어 나왔다. 분명 아플 텐데도 그는 내색 없이 고개를 바로 하고 회장님을 마주 보았다. 그 빳빳한 모습이 더 화가 나는지 회장님께서는 눈을 형형하게 뜨셨다. 또 손찌검을 하실 것 같아 두려웠다.

“그만하세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다 큰 성인을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화가 나도…….”

그는 회장님 앞에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관장님께서는 부자 곁으로 다가가셨다. 그녀도 나처럼 현 상황의 이유를 알지 못하였으나 손찌검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아직도 화가 많이 나신 회장님께서는 말리는 관장님을 아랑곳하지 않고 눈앞의 그에게 벼락같은 고함을 던졌다.

“결혼이 애들 장난이야! 집안 망신을 시켜도 정도껏 시켜야지! 네가 하겠다고 한 결혼이야! 네 멋대로 깨 버릴 거면 왜 하겠다고 했어!”

회장님께서 화나신 이유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가 회장님과 관장님께 말없이 결혼을 깨 버린 모양이었다. 근처에 있던 한 실장이 사용인들을 주변에서 무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색 없이 이 자리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러자 조용하고 매서운 침묵만이 자리에 남았다.

관장님도 아들의 독단의 이유가 궁금하신 듯 그를 바라보셨다.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은 회장님께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만큼은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모두가 궁금한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의 파혼이 나 때문이 아니길 바랐다. 그의 온전하고 완벽한 삶에 오점이 생기는 것이 나로 인한 것만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었다.

“상대방도 잘 납득했습니다.”

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전한 뜻은 회장님과 관장님이 원한 답이 아니었다. 잠시 분을 삭이던 회장님이 분노에 찬 질타를 내뱉으셨다.

“뭐? 그걸 말이라고 해!”

“회장님! 좀 진정하고…….”

“당신은 지금 저놈이 벌인 짓이 이해가 가오?”

다시 회장님의 손찌검이 시작될까 봐 곁에 계시던 관장님께서 그의 앞을 막았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박힌 못처럼 벌벌 떨며 서 있었다.

“저도 학영이가 잘했다고 생각은 안 해요. 그렇지만 다짜고짜 당신이 이러면…….”

“다짜고짜? 난 참을 만큼 참았소! 당신은 모르겠지만 저 녀석이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녀도 넘어가 줬소! 근데 그걸 눈감아 준 대가가 이런 짓이요!”

“더러운 짓이라뇨?”

회장님의 분노는 여전히 극에 달해 있었다. 회장님께서 하시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한 관장님께서 되물었지만 회장님께서는 대답해 주지 않으셨다. 대신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남자 새끼하고 붙어먹는 짓거리 아직도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이 결혼 못 하겠다고 했어?”

“…….”

“재형이 놈하고도 그 짓거리 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아버지.”

회장님의 화를 고스란히 받고만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 사나운 표정이 번졌다. 관장님께서는 지금 본인이 들은 소리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하시는 표정이었다. 본인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제 귀를 의심하면서 다시 부자의 얼굴을 바라보셨다. 그 눈동자에 미세한 떨림이 보였다.

“아버지, 들어가서 따로 말씀하시죠.”

“네 엄마나 동생 앞에서 부끄러운 짓거리인 줄은 알고 있는 게냐! 네놈이랑은 따로 할 말 없다! 네가 깨 버린 결혼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지 않는 이상! 내 얼굴 볼 생각 말아!”

회장님께선 엄포를 내리신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뜨셨다. 자리에 남은 사람은 이 상황을 정확히 납득하지 못하신 관장님과, 놀라 얼어붙은 나,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한 실장 그리고 그였다. 조용한 공기 중에 관장님의 깊은 한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실장.”

“네, 관장님.”

“영우 방에 데려다줘. 그리고 학영이 넌 나랑 얘기 좀 하자.”

한 실장이 내게 다가와 가볍게 어깨를 감싸 쥐었다. 꼼짝도 하지 못했던 몸이 그녀의 손길에 조금씩 움직였다. 회장님의 고함과 손찌검에 놀란 몸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이 사달을 낸 그의 얼굴을 방에 가기 전 보고 싶었지만 등 돌린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그의 앞에서 매서운 표정을 짓고 계신 관장님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그의 걱정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사달의 원인이 꼭 나인 것만 같았다. 회장님에게 맞은 그의 뺨이 걱정됐다. 입가의 흐른 피는 멈추었는지 궁금했다. 발길을 떼지 못하는 내 몸을 부드럽지만 강하게 한 실장이 이끌었다. 어쩔 수 없이 내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 실장이 방에 데려다주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나는 그의 방에 몰래 숨어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몸 편히 침대에 누워 있을 수도 없었고 마음 편히 널브러져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방문 바로 옆 벽에 등을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바깥의 기척을 주시했다. 더운 여름이 무색하게 서늘한 기운이 내 온몸에 맴돌았다. 무서운 마음이 일어 조금 더 몸을 강하게 감싸 안았다.

지금 벌어진 상황은, 그러니까 그가 결혼을 깨 버린 상황은 겁쟁이인 나에게 마냥 즐거움과 기쁨을 안겨 주지 못했다. 비록 완전한 행복을 갖지 못하더라도 그의 곁에서 머물기로 다짐한 이상 결혼은 마음속에서 비워 둔 부분이었다.

모순적이게도 그가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나를 사랑할 수 없기를 바랐다. 그는 내게 사랑하라 말했지만, 나라는 존재가 이미 그에게 짐이 된 이상 무얼 더 바라거나 원하지 않도록 내 사랑을 감내하고 있었다.

부모에게 수치를 까발려진 그가 나라는 더 큰 수치를 내보이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 되면 나는 정말 슬퍼질 것 같았다. 나에게 삶이란 한정적이고 제한적인 것이었으나 그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내겐 완벽한 세상인 그가 나라는 존재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했다. 나로 인해 멸시받는 삶을 살지 않길 바랐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시시각각 흔들리는 나약한 마음에 환멸이 일었다. 멀리 떨어진 고택에서 죽은 듯이 숨어 살던 엄마가 생각났다.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회장님에게 흠이 되지 않도록, 관장님에게 더 큰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살았던 것일까? 행복으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후회하지도 못하고 불행이 행복인 양 믿으며 그렇게 살았을까?

울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 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양 뺨이 흥건히 젖었다. 손으로 닦아 내려도 또다시 젖어 들어 닦아 내는 걸 포기했다. 콧속에 눈물이 차 코 밑으론 맑은 콧물이 흘러내렸고 호흡은 엉망이 되어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가 오는 소리를 놓칠세라 흐느끼는 소리마저 죽이고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고 관장님과 대화를 마쳤을 그의 발걸음 소리가 문밖을 통해 들려오고 있었다. 한결같이 거침없는 소리였다.

나는 황급히 얼굴을 들어 옷자락 끝으로 문질렀다. 부드러운 면이 얼굴을 몇 번이고 훑어 내리자 젖어 있던 얼굴이 조금은 말끔해졌다. 대신 옷자락이 축축해졌지만 괜찮았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에 일어나려 다리에 힘을 주었으나 오래 웅크려 있던 탓인지 쉽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바닥을 바닥에 딛고 몸을 일으키고 있을 때 그가 들어왔다. 잠시 휘청거리는 몸을 그가 단단히 부여잡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팔 안에 갇힌 채 제일 먼저 궁금했던 그의 얼굴을 보았다. 회장님께 손찌검을 당한 뺨의 붉기는 가라앉아 있었으나 부은 상태였다. 내일 아침이면 흔적이 남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입가의 피가…….

“울었어?”

그의 걱정으로 인한 다급한 마음임에도 들려오는 사나운 목소리에 몸이 움찔 떨렸다. 내 얼굴을 샅샅이 쫓는 시선이 느껴졌다. 울음의 흔적을 지운다고 지웠는데도 소용이 없었나 보다.

“울었냐고, 묻잖아.”

“네. 울었어요.”

사나운 목소리가 나를 꾸중하는 것이 아닌 걸 아는데도 서러웠다. 대답을 하면서 다시 울음이 터졌다. 그가 나를 걱정하는 것을 알았지만 나도 그만큼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터진 입가와 부은 뺨이 아파 보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엉엉 울어 버렸다.

“왜 결혼 취소하셨어요!”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묻고 울먹이며 소리쳤다. 나는 이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온전한 삶을 파괴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한 번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그의 불문율을 내가 깨 버린 것 같아서…….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지영우.”

죄송하다고 말하는 내 얼굴을 보려 했는지 그가 품 안에 묻은 내 고개를 떼어 내려 했으나 나는 더 세차게 그를 끌어안으며 얼굴을 묻었다. 터진 울음은 아까 전 내 옷도 적신 것도 모자라 그의 옷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당신의 결혼이 속상했던 것은 맞지만 제가 원한 상황은 이런 것이 아니었어요.”

“…….”

“당신이 회장님께 질책 받고, 관장님을 실망시키게 하는 상황을 바라진 않았어요.”

“지영우.”

그가 계속 나를 불렀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정받을 수 없는 미련한 사랑을 꿈꾸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가 결혼을 포기한다고 해도 그와 내가 완전히 행복해질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기에 이제야 속마음을 고백하고 있는 내가 치졸하다 느껴졌다.

“죄송해요. 사랑한다고 말해 놓고 이 정도밖에 감당할 수 없는 애라 죄송해요.”

좋지 않은 기관지 때문에 엉엉 울던 울음소리가 형편없이 꺽꺽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두 눈에선 쉴 새 없이 눈물이 그의 가슴팍을 계속 적시고 있었다.

거대하고 잔잔한 깊은 호수와 같은 그의 마음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나라는 돌멩이가 뛰어들었다. 퐁당퐁당, 한 번, 두 번. 어떨 때는 풍덩거리며 고요한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고 그 파문이 이젠 포말이 되어 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눈부신 세상을 만나 기쁨에 겨워 천지 분간 못 하고 뛰어들었기 때문에…….

“지영우.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그가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는 나를 떼어 냈다. 우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반항했지만 그의 힘에 어쩔 수 없이 떨어졌다. 그는 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고 남은 팔로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나와 다르게 평온해 보였다.

“울지 마. 내가 말했잖아.”

눈 밑의 도톰한 부분을 그가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고여 있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자 손가락으로 훔쳐 갔다.

알고 있다. 그가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머릿속과 마음속에 깊이 들어박혀 빠져나올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괜찮아.”

“…….”

“다 괜찮아.”

“…….”

“네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선택한 거고. 네가 이렇게 자책할 만한 일도 없어.”

나를 향한 수많은 고뇌와 번민은 이제 끝났다는 듯 단호한 말투였다. 흔들리는 기색 하나 없이 완고한 눈을 하고서 내게 단언했다. 아직까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갈팡질팡 힘들어하는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지영우, 키스해 줄까?”

키스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가 내게 물었다. 꽉 막힌 목으로 소리 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까치발을 들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나를 들어 안아 올리는 그의 힘이 느껴졌다. 번쩍 몸이 들리자 양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쌌다. 눈높이가 같아지자 터진 그의 입가가 훤히 보였다. 안쓰러운 마음이 물밀 듯이 밀려와 입술을 내려 혀로 핥았다. 내가 그를 보듬어 주고 싶었다. 아프지 않게 해 주고 싶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 번졌다. 혀끝으로 그의 상처를 핥는 것에 집중했다. 촘촘하고 꼼꼼하게 할짝거리는 혀끝이 감질났는지 그의 혀가 성마르게 쫓아와 내 입술을 삼켰다.

“으응…….”

늘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그와의 입맞춤이었다. 이 행위를 하지 않으면 숨도 쉴 수 없다는 듯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세차게 빨아들이고, 문지르고, 혀로 감아올리는 행위가 순서 없이 뒤엉켰다. 입 안에 삼켜지는 그의 녹진한 혀가 사탕같이 느껴졌다. 빨고 빨아도 작아지지 않는 마법의 사탕처럼 나를 안달 나게 만들고 허전하게 만들었다. 닿아 있는 체온을 더 뜨겁게 느끼고 싶어 목덜미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허리를 감은 다리를 세게 옥죄었다.

내 간절함을 느꼈는지 나를 감싸 안은 품에 힘이 들어갔다. 허겁지겁 그의 입술과 혀를 핥으며 머릿속의 찌꺼기 같은 근심들을 뒤로 잠시 미뤄 두자 붕 떠오른 몸처럼 정신이 혼몽해졌다. 끓어오르는 고열에 시달릴 때와 같은 증세였다.

“흐으…….”

내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렸다. 등에 닿는 감각이 따듯한 온기가 되어 전신에 퍼졌다.

이상했다. 아프지 않은데 몸이 펄펄 끓어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가 나로 인해 본래 위치에서 자신을 끌어내린 이 현실에 나는 절망했고 상심했다. 또한 괴로웠다. 그런 양심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마음 한편 숨겨 놓았던 비양심적인 감정이, 바로 기쁨이라는 파렴치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래,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를 사랑하기로 한 순간부터가 잘못된 시작이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것을 진작에 넘고 있었으면서 비루한 죄책감을 가지고 선을 넘지 않은 척, 그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유혹했다.

“으응, 이, 이사님.”

꽉 맞물린 상체를 그에게 비비며 입술을 떼고 눈을 떴다. 나를 살짝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보였다. 코앞에서 역동적인 정염을 목격했다. 한동안 내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달아오른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런 그의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간지러운 감각에 흐느끼는 콧소리가 났다. 그의 허리를 감은 내 다리가 힘없이 달랑거렸지만 그의 단단한 팔은 굳건하게 내 허리를 다잡고 있었다.

“흐읏, 이사…니임……!”

내 부름에도 그는 내 목덜미를 핥아 내리고 입술을 부딪치느라 대답하지 않았다. 츕츕거리는 젖은 소리가 귀밑까지 올라왔다. 귓바퀴까지 올라온 혀의 움직임을 느꼈다. 다시 눈이 질끈 감겼다. 기분 좋은 쾌감이 나를 더 아스라이 먼 곳으로 데려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어쭙잖게 갖고 있는 양심이 짓밟혔으면 했다.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이사님, 하고 싶어요.”

“…….”

내 목덜미를 배회하던 그의 입술이 멈추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간절한 속삭임을 똑똑히 들은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내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들을 참 좋아했다. 무심하고 건조한 눈빛, 어딘가 화가 난 서늘한 눈빛, 잔잔하고 고요한 어둠과 같은 눈빛, 그 정적인 눈빛들 속에서 휘몰아치는 수많은 격정들을 좋아했다. 그것이 나에 대한 슬픔이든 기쁨이든 상관없이 모두 다.

속삭임의 뜻을 이해한 지금 그의 눈빛은,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다 담고 있었다. 그것들이 한데 엉켜 오로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를 통해 성장하고 싶었다. 새롭게 만난 나의 세상에서 기쁨에 겨워 소리치고 싶었다. 아픔에 울부짖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생의 전반을 이루어 주길 원했다. 그것이 나의 뜻이고 바람이었다.

‘나를, 안아 주세요. 아프게 해 주세요. 기분 좋게 해 주세요.’

내 속삭임에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자신이 두르고 있던 마지막 짐을 벗어 던진 것 같았다. 다정하지만 다정하지 않은 그는 내게 대답해 주었다.

그의 대답은 늘 같았다.

“그래.”

그 어느 때보다 심장이 뛰었다. 곧바로 다가올 금기의 행동이 내가 살아 있음을 예고했다. 죽음의 문턱과 가깝다 느껴졌던 내 삶이 그로 인해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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