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12/27)

병과의 싸움은 지루했다. 쓴 약을 먹고 기침을 동반한 통증을 이겨 내고 견딘다. 힘이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애써 힘을 내 보려는 간절함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시간은 잘 가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리기 위해 나는 먹고 싶지 않아도 미음을 꼬박꼬박 먹었고, 약도 챙겨 먹었다. 내가 병마를 이겨 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바로 그였다. 그와 조금이라도 함께하고 싶었다. 비록 시한부와 같은 짧은 시간이라도 그와 함께하는 꿈같은 나날들을 지속하고 싶었다. 비록 그 나날들이 남들이 알지 못하는 깊은 시간의 도둑 같은 만남일지라도 말이다.

그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하루 내내 사용인이나 한 실장과 함께 보냈고 저녁을 먹을 때쯤 관장님께서 들어오셔서 새로운 젤리를 선물로 주셨다. 하얗고 고운 설탕이 발라져 있는 젤리는 꼭 작은 인절미같이 생긴 모양이었다. 흰 설탕 가루 속 빨갛고, 노랗고, 파랗고 다양한 색들이 알록달록 참으로 예뻐 보였다.

“사탕은 다 먹었지?”

“아뇨, 조금 남았어요. 관장님이 하나씩 먹으라고 하셔서 맛있어도 아껴 먹었어요.”

“잘했어. 많이 먹으면 충치가 생겨, 특히 젤리는 먹고 양치해야 한다?”

관장님은 내 아버지인 회장님보다 내게 더 관심 있게 챙겨 주신다. 어릴 때부터 회장님은 우리 모자의 생일 같은 특별한 기념일을 제외하고는 주로 엄마와 내 컨디션이 좋을 때만 고택에 와 주셨다. 그래야 나가서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또 엄마와 같은 방에서 주무실 수 있었다. 회장님이 돌아간 다음 날이면 엄마의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았지만 몸만큼은 어찌 된 영문인지 평소보다 잘 가누지 못했었다. 왜 그랬는지는 내 첫 몽정 이후로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나와 엄마는 회장님의 아름다운 세공품 같은 존재였다. 가끔 생각나면 찾아오고 아프면 쳐다봐 주지 않는, 딱히 쓸모는 없는 존재. 만약 깨져서 없어지기라도 하면 망가진 것에 대해 화는 나겠지만 슬프진 않을 그런 존재. 그걸 알면서도 엄마는 회장님을 사랑했고, 나는 회장님을 좋아했다.

관장님 입장에서는 나와 우리 엄마는 암과 같은 존재일 텐데 이런 고약한 덩어리에게 왜 잘해 주시는 걸까. 게다가 우리 엄마를 알고 계셨다. 다정하게 ‘문희’라고 이름을 말하기까지 하셨다.

“관장님.”

“응?”

나는 물끄러미 젤리를 내려 보다가 관장님을 불렀다. 비장하게 터진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하지만 비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뭔데 그러니?”

비장한 나완 달리 관장님께서는 담백한 말투로 반문하셨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그의 고요한 눈빛과 많이 닮은 그녀의 눈을 보자 나는 또다시 죄책감이 들었다. 곧고 단단한 시선에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묻고 싶은 것을 물어야 했다. 내 비장함의 이유인 질문을.

“말해 봐.”

“……우리 엄마는 어떻게 아세요?”

“문희?”

“네…….”

일가친척 하나 없는 폐병 환자인 엄마의 이름은 ‘서문희’였다. 일찍이 돌아가신 외조부모님께서 남겨 주신 재산으로 평생을 안락하게 살 수 있었지만 유부남을 사랑하고 미혼모가 되길 자처한 여자가 우리 엄마였다.

“내가 예뻐한 동생이야. 어릴 때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어. 문희가 얘기 안 해 줬어?”

“네…… 몰랐어요.”

“문희 아버지하고 내 아버지는 막역한 관계였는데 문희 부모님께서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시자 혼자 된 그 애가 우리 집에서 지냈지. 저번에 얘기한 재형이 부친도 문희를 아주 잘 알고 있어. 아, 한 실장도 마찬가지야. 한 실장은 우리 집에서 내가 데려온 사람이거든.”

내가 모르던 사실들이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엄마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 속에서 멀어지고 싶어 한 사람이었다. 회장님만 바라보던 사람이었다. 어쩔 땐 아들인 나보다 회장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서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엄마는 옛날 얘기 하는 거 싫어했어요.”

“그럴 수도 있었겠다. 문희는 자존심도 세고, 고집도 셌었어. 그래도 언니, 언니 하며 잘 따랐었지. 내가 결혼을 하며 집을 떠날 때 제일 많이 운 사람이 문희였어.”

과거를 회상하는 관장님의 즐거운 눈빛은 얼마 가지 못하고 빠르게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엔 안타까움과 분노가 뒤따랐다. 나의 궁금함이 관장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버렸다.

“어리석었어.”

“…….”

누가 어리석다는 말씀인 걸까. 묻고 싶었지만 관장님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하기 싫은 마음이 궁금증을 눌렀다. 또한 묻지 않아도 어리석은 이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재능이 많은 아이였는데, 사랑이 뭔지 모든 걸 포기하더구나. 이렇게 일찍 갈 줄 알고 그랬나 봐.”

엄마가 사랑과 맞바꾼 것은 세상이었다. 하고 있던 공부도, 삶도 또한 자신이 잘 따르던 자매 같은 관장님도 모두 다 포기하고 회장님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나를 낳았다. 엄마는 나를 낳고 행복했을까? 자신이 포기한 세상에 견줄 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늘 우울을 앓고 살았으니 알 수 있었다. 같이 자란 언니의 남자를 빼앗을 마음도 없었을 테다. 그냥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우울을 안고 살았으리라.

엄마의 성격, 외모, 체형, 질병까지 똑 닮은 나는, 그래서 엄마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내 심정 또한 그러하니까. 하지만 나에게 세상은 그였다. 나는 사랑과 세상을 맞바꿀 수 없었다. 그는 내 세상이고 내 사랑이니까.

“……죄송해요.”

그녀의 소중한 것을 빼앗는 도둑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에 관장님에겐 난 자꾸 죄인이 되고 만다.

“문희 대신 사과하는 거니?”

“…….”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엄마에 대하여, 나의 존재에 대하여 관장님에게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으니까. 관장님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 있었다. 담담하면서도 건조한 그녀의 목소리가 나에게 너무나 슬프게 와닿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안 그래도 돼. 사과는 문희…… 네 엄마에게 충분히 받았어. 세상에 갇혀 자신을 가두는 그 애를 보며 알 수 있었어.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구나. 죄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구나.”

“…….”

“자기 자식조차도 세상에 내보이지 못하고 자책하고 있구나…… 하고.”

슬픈 목소리를 내는 것은 관장님인데 눈물을 흘리는 건 나였다. 나는 내 평생에 걸쳐 한 사람의 침묵과 우울을 곁에서 지켜보았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사랑이었고, 결코 내보이지도 인정받지도 못한 외롭고 기형적인 감정이었다.

코끝과 눈시울이 뜨겁고 매웠다. 눈이 부실 정도로 눈물방울이 속눈썹에 그렁그렁 매달렸다. 나의 어리석은 앞날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친절하고 좋은 관장님을 배반하고 그녀의 아들을 사랑하는 내가, 우리 엄마와 같을 내가 그려졌다.

자기가 낳은 자식도 내보이지 못하는 죄책감 속에서도 엄마는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이 동경하고 좋아하던 관장님을 다시 보지 못하더라도 기뻐했을 것이다. 문득문득 끼치는 우울감에 외로이 몸부림치더라도 엄마는 괜찮았을 것이다.

나는 멍청이같이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이렇게 좋은 분을 두고 왜 회장님을 사랑했을까, 작은 원망이 일기도 했었다. 지금도 엄마의 행동이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은 하진 않지만 비난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닮았기에.

그녀를 아주 많이 닮은 나는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럴 거니까. 엄마와 같은 삶을 선택할 것이니까.

관장님과의 대화 후 나는 묵직하지만 불쾌하지 않은 죄책감을 내 가슴속에 새겨 넣기로 했다. 평생 안고 가야 할 책임과도 같은 거였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그의 곁에서 머무를 거니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그가 늦는다는 소식을 한 실장이 전달해 주었다. 하루 종일 그만 기다리는 내게 갈증을 일으키는 소식이었지만 괜찮았다. 늦는다는 것을 핑계 삼아 그의 방에 미리 들어와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늦는 건지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나의 잠자리를 확인하고 나간 뒤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그와 내 방이 있는 2층은 조용해진다. 그 조용함을 틈타 움직이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방의 주인인 그가 없다는 점이었다.

주인 없는 방 침대에 나는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항상 팔베개를 해 주던 그가 없었기에 베개 없이 그냥 누웠다. 이불도 마찬가지로 덮지 않았다. 수면 가운을 두른 채 커다랗고 황량한 침대에 누워 그를 기다렸다. 그의 방에 걸려 있는 소멸과 같이 있는 것이 무서워서 방 불을 켜고 싶었지만 문밖으로 빛이 새어 나가 내가 이곳에 있음을 알릴까 봐 켜지 못했다. 그 없이는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바보 같고 행복한 짓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끝을 알 순 없었다.

그는 곧 윤 교수의 장녀를 만날 것이고 문제가 없다면 그녀와 결혼을 할 것이다. 이 집에서 그녀와 같이 살 수도 있고 아니면 나가 살 수도 있었다. 두 가지 다 내가 원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나마 내게 희망을 주는 쪽은 그가 결혼을 하고서도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내 것이 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몰래 숨어 들어올 순 없지만 같은 곳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다. 오다 가다 눈을 마주치고 운이 좋다면 손길을 스칠 수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내 눈앞의 그가 익숙해진 터라 그가 없는 삶을 상상하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이 덩그러니 놓인 내가 그리움에, 외로움에, 괴로움을 견디는 그런……. 어떡하지…… 어떡할까……. 그 없이 이대로 숨이 막혀 소멸해 버릴 것 같았다.

“후읍…….”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며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별다른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님에도 나는 고른 호흡을 유지하려 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나를 안정시켰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내 가슴을 바라보며 몸을 더 웅크렸다. 그는 언제 들어오는 것일까. 점점 손과 발끝이 차가워지고 시릴 무렵,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거침없는 소리, 그였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한 자세로 오랫동안 누워 있던 탓인지 마음과 달리 몸은 빠르게 반응하지 않았다. 천천히 팔다리를 움직이는 사이 그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알싸한 냄새가 코끝에 흘러왔다. 술 내음이었다. 자주 맡아 보지 못했던 냄새, 고택에 방문하시던 회장님에게서 아주 가끔 나던 냄새였다.

어두운 시야에서도 엉거주춤 움직이는 나를 발견한 그는 놀라지도 않았다. 이곳에 있을 거라고 예상한 모양이었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가까이 다가올수록 풍기는 술의 내음이 짙었다. 그래도 걸음걸이나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한 실장이 말 안 해 줬어? 늦는다고 했잖아.”

목에 매인 타이를 풀어 헤치며 그가 조용히 말했다. 늦은 새벽에 잠 못 이루고 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풀은 타이를 떨구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같이 있기로 했잖아요.”

“내가 언제 들어올 줄 알고. 잠도 안 자고 기다려.”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으며 그가 말했다. 나는 그의 품에 속절없이 안기며 눈을 감았다. 여태까지 돌지 않았던 따듯한 기운이 전신에 돌았다. 이제 막 들어온 그의 품에선 바깥의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쫓으며 더욱더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더 이상 틈이 없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파고들었다. 그런 내 움직임을 그는 가만히 받아 주었다. 나를 꽉 끌어안아 주는 그의 안락함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술 마신 거예요?”

“조금.”

“조금 아닌 거 같은데. 많이 마신 거 같은데.”

“취하진 않았어.”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말을 할 때마다 짙은 술 내음이 퍼졌다. 마신 양이 상당한 듯했지만 그의 말대로 취한 것 같진 않았다. 대신 그에게서 나는 술 내음이 꼭 나를 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술 한 방울 마셔 보지 못한 나는 취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말이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두움 속에서도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웃음이 나왔다. 까끌까끌 수염이 돋은 턱을 잠시 만지다, 코밑을 만지다가 그의 팔을 부여잡고 얼굴을 가까이 해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가 움찔하고 고개를 돌렸다. 내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기도 전에 멀어졌다. 그의 거절에 손끝이 떨렸다.

“술 마셔서 안 돼.”

내 떨림을 느꼈는지 그가 내 손을 그러쥐며 말했다.

“괜찮은데……. 키스하면 안 돼요?”

“…….”

“하고 싶어요. 네?”

그의 거절에도 다시 용기를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번엔 그가 피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입술로 와닿는 감촉을 느꼈다. 거칠한 그의 입술 근처를 맴돌다 부드럽고 폭신한 입술에 힘을 주어 꾹 하고 눌렀다. 혀를 내밀어 굳건하게 다물어진 그의 입술 틈을 살살 쓸어내렸다. 내 혀끝이 말하고 있었다. 열어 달라고 조르고, 조르고 또 졸랐다. 결국 입술마저 열리고 나는 멋쩍은 어린아이처럼 그 틈새에 혀를 넣어 그를 맛봤다. 그의 셔츠를 꼭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버석하니 마른 옷감이 손안에 가득 들어찼다.

달콤하고 비릿한 쓴맛이 혀에 감겼다. 아직 그의 입 안에 남아 있는 알코올 기운이었다. 역하거나 거북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와 달리 조심스럽게 내 혀를 받아들이며 빨아 주었다. 요즘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그와의 입맞춤이 달고 달았다.

어느새 침대에 나를 눕힌 그가 입술을 떼며 팔베개를 해 주었다. 그는 아직 옷을 벗지도 못했고 씻지도 못한, 막 들어온 상태였다. 불편할 텐데도 그런 기색 없이 자신의 품 안으로 나를 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어. 우선 자자.”

“씻고 오세요. 기다릴 수 있어요.”

나의 말에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지 그는 대답하지 않고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답답해 보이는 눈앞의 셔츠 단추를 풀어 주고 싶었다. 그에게 갇힌 채로 손을 들어 단추를 하나씩 풀자 그의 가슴팍이 드러났다. 그가 몸을 뒤척이며 셔츠를 벗어 냈다. 따듯한 체온이 코앞에 다가왔다. 늘 단정하고 깔끔했던 그가 셔츠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바닥에 떨어뜨렸다.

무슨 용기가 난 것일까, 그의 거침없는 행동에 나는 벨트로 손을 내렸다. 금속의 버클이 딸깍하고 손에 잡혔다. 곧이어 내 손 위로 그의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불편하잖아요.”

정말 내가 말한 뜻으로 그의 벨트를 만진 것이 다였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다른 음흉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벗는 게 더 불편해.”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한 그가 내 손을 옭아맸다. 결국 나는 벨트를 풀지 못하고 다리 사이에 얽힌 그의 빳빳한 바짓단을 종아리로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내 움직임에 고른 숨을 내쉬며 그가 내 등허리를 쓸어 주었다.

“오늘 뭐 하고 있었어?”

나를 재우려는 듯 낮고 조용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퍼졌다. 이 시간을 하루 종일 기다리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방에 매일 숨어드는 나에게 단조로워서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을 물어봐 주었다. 그러면 나는 눈을 감고 그의 허리를 꼭 껴안은 채로 대답하다 잠이 들었다.

“책을 읽었어요.”

“무슨 책.”

“이사님 서재에 있는 책 아무거나, 멋져 보이는 거요.”

“그런 책이 있었던가.”

내 하루의 동선은 내 방 아니면, 그의 방 또는 서재였다. 누워 있는 것이 지루하면 고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었다. 서재에 들어가 그가 읽은 흔적들이 있는 책들을 둘러보며 가장 두껍고 무거운 양장본을 꺼내어 읽었다. 솔직히 내가 읽을 수 없는 책이었다. 경영 관련된 서적이었는데 어려운 그래프가 잔뜩 그려져 있기도 했지만 책을 이루는 문자가 영어였다.

나는 영어에 관해선 까막눈인지라 검은 활자들을 읽는 것이 다였다. 무슨 내용인지 몰랐지만 이 어려운 책을 거뜬히 읽고 보았을 그를 떠올리다 보면 순식간에 책장이 반은 넘어가 있었다. 물론, 그냥 넘겨서 그런 거지만.

내 멍청한 행동을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작게 들썩이는 웃음과 함께 기침이 쏟아지자 그가 이마를 맞대어 열을 체크했다. 튀지 않는 물 흐르는 듯한 행동이었다.

“열은 없는데.”

“네. 없어요. 좀 나아졌어요. 그래서 내일부터 다시 1층에 내려가서 밥 먹을 거예요.”

기침은 원래 고질적인 병이었으므로 이 정도는 괜찮았다. 어느 정도 내 몸이 회복됨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 관장님께서 계실 때 한 실장 앞에서 이미 선포하듯이 내비친 내 뜻이었다. 아프다는 이유로 언제까지 방에 틀어박혀 있기 싫었다.

“그래, 그러자.”

“이사님.”

“그래.”

그의 따듯한 품에 솔솔 졸음이 쏟아졌지만 억지로 졸음을 쫓으며 자꾸 말을 했다. 내 하루 중 사탕같이 달콤한 시간을 그냥 보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도 이런 나를 잘 알고 있기에 잠투정을 아무 말 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늦은 귀가와 음주로 피로할 텐데도.

“술은 왜 드셨어요?”

“마셔야 할 일이 있어서 마셨지.”

“얼마나 드셨어요?”

의미 없는 스무고개와 같은 질문을 쏟아 냈다. 그저 그의 목소리가 좋아서 더 듣고 싶은 일념 하나로. 실은 책을 하나 가져와 그에게 읽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참았다.

“양주로 한 병 조금 안 되게.”

“그렇구나…….”

“지영우.”

“……네.”

조금씩 내 목소리가 흐려졌다. 마약처럼 취하는 그의 품 안을 버텨 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눈 감아. 자자.”

“……네.”

암흑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내 머리 위로 그의 숨도 내려앉고, 내 콧등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잠이 드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그리고 언젠가 깨어나야 하는 현실을 알기에 행복한 만큼 무서웠다.

계속해서 언제까지고 그의 곁에서 머무르고 싶었다.

기분 좋은 꿈을 꾼 것 같았다. 구름 속을 거니는 듯한 상황이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모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몸과 따듯한 기운이 좋은 꿈을 꿨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아마도 꿈에서 엄마나 유모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언제나 내게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었기에.

개운한 몸을 일으키기 전에 이 느낌을 좀 더 만끽하고 싶어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게 되면 덩그러니 혼자서 내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의 품에서 잠이 들지만 일어날 땐 나 혼자였다. 그래서 나는 안락한 그의 품에서 자고 싶지만 잠들고 싶지 않은 모순된 마음이 들곤 했다.

조금만 더 게으름을 부리고 싶었다. 오늘부터 1층으로 내려가 밥을 먹기에, 늦으면 안 되지만 아주 조금만 눈을 늦게 뜨고 싶었다. 고택에서의 따듯함을 그리며 좀 더 여유를…….

“도련님, 일어나세요.”

“…….”

작은 한숨이 터졌다. 그 누구보다 부지런한 한 실장이 나를 깨우러 방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런 한 실장 덕분에 나는 이른 새벽마다 그에 의해서 내 방으로 옮겨졌다. 다 큰 남동생이 형의 방에 새벽마다 찾아간다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오늘부터 1층에서 식사하시는 것 알고 계시죠?”

“……네. 알아요.”

“이사님은 벌써 씻고 준비 중이세요. 일어나세요.”

늦게 들어와 나를 재우고 피곤할 텐데도 그는 부지런하다. 한 실장이 부지런한 것은 얄미운데 그가 부지런한 것은 참 멋있다. 그의 생각에 입가가 느슨해지고 웃음이 절로 쏟아졌다. 한 실장이 볼까 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씨익 웃었다. 기지개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 실장이 다가와 체온계를 내 귀에 꽂았다. 삐빅 소리와 함께 체온을 확인했다.

“체온 정상이에요. 간단하게 세면하시고 내려오세요. 옷은 옷장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네.”

침대 위에 있던 발을 바닥에 내려놓는 나를 확인한 한 실장이 아침 식사를 살피기 위해 방을 나갔다. 어제까지 미열이 조금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 오늘은 정상 체온이었다. 어쩐지 몸이 개운하다 싶었다. 그의 품과 입맞춤이 그 어떤 쓴 명약보다도 내겐 보약이었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지근한 대리석 바닥을 디디며 옷장 앞으로 갔다. 누워 있느라 면으로 된 잠옷만 입었었는데 이제야 옷다운 옷을 입는 것이 신이 났다. 샤워를 하고 옷을 바로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한 실장은 내가 또 아플까 봐 간단하게 세면을 하라고 했지만 모처럼 1층에 내려가는데 세수만 하고 내려갈 수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날씨는 이제 완연한 봄을 넘어서 여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일어나고 나면 보송보송하긴 해도 자면서 나는 열로 인해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깨끗이 샤워를 하고 계절이 바뀜에 따라 한결 가벼워진 새 옷을 입고 싶었다.

기대감에 부푼 마음으로 옷장을 활짝 열었다. 약간은 도톰한 흰 반팔 티와 짙은 베이지의 면바지가 ‘아침 식사 옷’으로 걸려 있었다. 옷장 문에 달린 거울로 보이는 지금 입은 잠옷 색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빳빳한 질감과 각이 잡혀 있어 그나마 내게 위안을 주었다.

이것저것 생각을 하며 거울에 비치는 시계를 보았다. 또 꾸물거리느라 한참 시간이 갔다. 나는 옷걸이에 걸린 옷을 빼 들고 방을 나섰다.

부지런한 그가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오랜만에 잠옷이 아닌 ‘아침 식사’ 옷을 입고 1층으로 향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아까부터 사용인 하나가 방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걸 보니 또 늦었나 보다. 발끝에 힘을 주고 걸음을 빨리했다.

“관장님께서 천천히 내려오셔도 된다고 하셨어요.”

평소보다 빠른 내 걸음이 위험해 보였는지 뒤따르는 사용인의 목소리가 불안했다. 빨리 걷다가 한번 휘청거려서 더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사용인의 걱정을 잠재우려 계단을 내려갈 땐 손잡이를 잡았다. 뒤에서 어쩔 줄 모르며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발걸음 하나에도 주위 사람들의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식당에서 먹는 식사라 조금 들떠 있기도 한 나는 평소 같으면 사용인의 눈치를 봐서 걸음을 늦췄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계단을 벗어나자마자 달리듯이 복도를 누볐다.

“도련님, 그러다 넘어지시면……!”

“이 정도는 괜찮아요!”

간만에 목에 힘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세 살짜리 아이의 뜀박질을 걱정하는 듯한 사용인에게 웃음과 함께 안심시켰다. 긴 복도를 가로지르고 거실을 지나치자 식당 입구가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경박스럽지 않게 보이고 싶어서 뛰다시피 걷던 걸음을 늦추고 숨을 골랐다. 내가 좋아하는 생선을 구웠는지 고소한 냄새가 코끝에 흘렀다. 기분 좋은 식사가 될 것 같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영우 내려왔구나.”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 자리에 앉으렴.”

내 인사에 관장님께서 반겨 주셨다. 식당에는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이 각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목례를 한 나는 사용인이 끌어당겨 준 의자에 앉았다.

옆에 앉아서 묵묵히 식사를 하는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언제나 아침 식사를 먹고 바로 출근하던 그는 늘 슈트 차림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질 않았다. 편한 옷을 입고 아침 식사를 하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학영이 오늘 쉬니?”

“네.”

“오랜만에 휴무일이구나, 요새 너무 일만 하는 것 아닌가 했었어.”

관장님의 말씀을 듣고 오늘 그가 휴무일인 것을 알았다. 나에게는 1년, 한 달, 일주일, 평일, 주말이라는 일정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하릴없이 집에서 아픈 몸을 붙잡고 쉬는 처지였기 때문에 날짜나 일정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건 이 집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워낙 바쁘고 일이 많은 사람들이라 잦은 출장과 늦은 귀가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나마 관장님께서 주말에 몇 번 쉬시는 정도였다. 아파서 몰랐던 것일 수도 있는데 내가 이렇게 온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그가 쉬는 날을 맞이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랑 있어 줄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또 부풀었다.

“하반기에는 일정이 더 바쁠 것 같아서 그 전에 한 번 쉬려고요. 어머니 말씀처럼 너무 일만 하기도 했고요.”

“그래, 잘 생각했어.”

“오늘 휴무이면 윤 교수 딸 선약 잡지 그랬느냐? 어제 둘이 잘 만났으면 오늘 같은 날 나가서 식사라도 하고 그래야지.”

관장님과 그의 대화를 듣고 있던 회장님이 불쑥 참여하셨다. 잦은 기침과 열로 부은 목 때문에 밥이 아닌 죽을 먹고 있던 나는 예상치 못한 발언에 수저를 꾹 말아 쥔 채 회장님을 보았다. 내가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그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였다. 회장님 말씀에 따르면 어제 그는 윤 교수 딸을 만난 모양이었다. 그는 회장님의 말씀에도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이어 갔다.

“하여튼 무뚝뚝해 가지고는. 만났으면 잘 만났다, 어쨌다 말이 있어야지. 얼마 전에 윤 교수랑 식사하는 자리에 잠깐 찾아와서 몇 마디 얘길 나눴는데 내 보기엔 똘똘하니 괜찮은 애더구나.”

회장님이 그에게 하는 핀잔을 듣고 계시던 관장님의 얼굴에서 아차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이 내 미술관 사무실을 알려 줬나 보죠? 며칠 전에 생성과 소멸의 성공적인 전시를 축하한다고 꽃바구니를 보내와서 누군가 했더니 그 아가씨더군요.”

“맞소.”

“꽃바구니가 참 부담스러웠어요. 학영이랑 잘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남의 집 귀한 아가씨 흔들지 말아요.”

관장님의 목소리는 흐르는 물과 같이 매끄러웠다. 말의 뉘앙스는 상대방을 위하는 것 같았지만 윤 교수의 딸이 걱정된다는 어조는 아니었다. 관장님은 잘 알지 못하는 윤 교수의 딸이 불편한 듯했다. 두 분의 핑퐁 같은 대화가 숨이 막혀 고개를 숙였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 아이가 생각해서 보낸 것을 부담스럽다니, 벌써부터 시어머니 행세하는 거요?”

“시어머니라뇨. 아직 학영이가 그 아가씨 좋다 소리도 안 했는데 당신 너무 멀리 가신 것 아녜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는 두 분의 얼굴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목소리와 몸으로 끼쳐 오는 분위기만으로도 식당의 상황이 그려졌다. 관장님께서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입술에 걸치고 계실 테고 회장님은 위엄 있고도 자비로운 얼굴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그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무심한 얼굴로 두 분을 주시하고 있겠지.

“지 이사가 만나겠다고 한 자리고, 결혼하겠다고 한 만남이오.”

“그렇겠죠. 당신을 닮은 학영이니 어련히 이 집에 걸맞은 집안과 능력 있는 아가씨를 데려다놓겠죠.”

분명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기분 좋았었는데 대화의 내용도, 분위기도 철렁 내려앉은 내 마음을 조이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꾹 막힌 목을 가다듬느라 소리를 내었다. 기침도 아니고 울음도 아닌 흐느낌 같은 소리가 흐르자 두 분의 대화가 끊겼다. 숨 막히는 정적이 식당에 내려앉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고 우왕좌왕 말을 꺼냈다.

“……아, 죄송해요. 목이 막혀서……. 하던 말씀 계속하세요. 죄송해요…….”

목소리가 속삭이듯이 작아졌다. 쥐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손을 무릎 위로 올렸다. 물론 고개는 다시 숙인 채였다. 내 옆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났다.

“여자를 만나는 것도, 데려오는 것도 접니다. 제가 알아서 해요.”

그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에 회장님과 관장님은 더 이상 가타부타 말씀이 없었다. 식당은 여전히 조용한 침묵이 유지됐다. 곧이어 커다란 헛기침 소리를 내며 회장님께서 다시 식사를 재개하셨다. 울적한 마음에 입맛이 뚝 떨어진 나의 손은 다시 식탁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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