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운 채 두 손으로 망연한 얼굴을 감췄다. 이른 새벽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 때문에 잠에서 막 깬 상황이었다. 따듯하게 젖어 갔던 속옷이 차가움으로 축축해지자 잇새에서 작게 한숨이 나왔다.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날의 첫 몽정 이후로 가끔 몇 개월마다 이렇게 자다가 몽정을 하고는 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하는 몽정이었다. 침대 시트가 더러워지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축축한 속옷이 기분 나빴다. 따듯한 대리석 바닥에 발을 내리고 엉거주춤 걸었다. 씻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속옷도 대충 빨아야 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어두운 시간, 나는 또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방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가자 저 멀리 그의 방문이 보였다.
그는 회사에 있을까? 아니면 돌아왔을까? 아니면 선생님과 같이 있을까?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아다녔다. 마지막에 생각한 의문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가 회사에 있거나, 저택에 돌아와 자고 있었으면 좋겠다.
작게 한숨을 쉬고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 손에는 갈아입을 속옷이 들려 있었다. 다행히 바지는 젖지 않아 다시 입어도 문제없었다.
속옷도 헹구고 아래를 씻기 위해 바지를 벗었다. 젖은 속옷이 닿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벗어 샤워실 타일 벽에 붙은 수건걸이에 바지를 걸었다. 그리고 마저 속옷을 벗어 세면대에 넣었다. 아래가 휑하니 시원했다. 가져온 새 속옷은 거울 옆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선반에는 그의 흔적들이 있었는데 쉐이빙 크림, 면도기가 눈에 띄었다. 수염이 없고 체모가 옅은 나는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고개를 숙여 내 아래를 확인했다. 매끈한 성기가 정액에 젖어 축 늘어져 있었다. 어릴 적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 무안할 만큼 처음 났었던 부드럽고 얇은 음모가 더 나지 않고 그대로였다.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다. 겨드랑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와는 달리 매일 면도를 하는 것 같았다. 면도기는 항상 물에 젖어 있었고, 가끔 저녁에 늦게 퇴근하는 그를 운 좋게 볼 때면 그의 턱 주변은 어두운 푸른빛이 돌았는데 다음 날 아침 식사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턱이 멀끔해져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가 매일 쓰는 물건이기에 괜히 눈길 한 번 더 주고, 손으로 슬쩍 만져 보았다. 손에 닿으니 그의 것을 사용해 보고 싶다는 간질간질한 마음이 일었다. 나는 속옷을 헹구고 바짝바짝 말라 가는 정액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얼마 없는 솜털이라도 밀어 보고 싶어 면도기를 들었다. 쉐이빙 크림도 쭉 짜내 코 밑에 얹었다. 책에서 보던 산타클로스 같은 모습이 거울에 비치자 웃음과 함께 콧바람이 나왔다. 콧바람에 크림이 거울로 튀었다.
면도기를 코끝에 살짝 갖다 대고 한 손은 세면대를 꼭 쥐어 거울 쪽으로 몸을 숙였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정확히 모르니 흉내만 낼 참이었다. 조금 떨리는 손을 움직이자 거품에 면도기 헤드가 파고들더니 서늘한 칼날이 인중에 닿았다. 원래 남자였지만 왜인지 더욱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
살짝 닿으니 실제로 면도를 해 보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살살 해 보면 되지 않을까? 조심하면 되지 않을까?
서늘한 칼날이 내 인중 위를 천천히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숨까지 참아 가며 집중했다. 화장실 안은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크림을 반 정도 밀어 냈을까. 면도기 헤드에 묻은 크림을 털어 내고 다시 손을 놀리려 할 때였다.
눈앞의 거울에 비치는 배경이 돌연 바뀌고 내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코 밑을 노닐던 면도기를 잡고 있는 손이 삐끗하며 작은 생채기를 냈다.
“……아!”
“…….”
거울에 비치는 사람은 나 외에 또 있었다. 바로 그였다. 나머지 크림을 치워 내는 순간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고 문가에 그가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팔짱을 끼고 몸을 비스듬히 문틀에 기대고 섰다.
거울을 통해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더 마주치지 못하고 부끄러움에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화장실을 이용할 때 문을 잠그는 버릇이 없는 내가 벌인 실수였다. 그는 항상 혼자 쓰던 버릇으로 노크 없이 문을 열었을 테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그를 보며 열이 오르지 않는 날이 오는 것일까? 지금 내 얼굴은 보나 마나 그 어느 때보다도 새빨개져 있을 것이다. 허리 아래는 발가벗은 상태로 시원하다 못해 추웠다. 세면대 안 축축이 젖은 속옷, 말라붙은 아래. 내가 아무리 성에 무지하다 해도 수치스러운 걸 모르는 애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면도기를 몰래 쓰는 것을 들키고 말았다. 주인에게 말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했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수치스럽고,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두 발은 못 박힌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어서 그가 다시 문을 닫아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어깨에 부드러운 가운이 올려진 것이 느껴졌다. 그가 한 것이었다. 가운이 나의 발가벗은 아래를 가려 주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가 보았을 것이다. 한껏 거울로 몸을 숙이느라 훤히 드러난 내 엉덩이와 아래를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가려 주는 것이겠지.
“뒤돌아봐.”
“…….”
눈을 감고 있는 내 귓가에 그의 낮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상처가 났어.”
“제…… 제가 할…… 할게요.”
아까 실수로 삐끗한 상처가 이제야 생각났다. 지금 너무도 혼란스러워 상처의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그를 벗어나서 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고집 피우지 마.”
하지만 그는 내게 숨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박탈해 갔다. 내 어깨를 잡은 그가 손쉽게 완력으로 나의 몸을 돌렸다. 세면대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고 나는 그와 정면으로 바로 서게 되었다. 여며지지 않은 가운의 앞섶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뜨고 허둥거리며 가운의 끈을 찾았으나 당황한 마음에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끈은 그의 손에 있었다. 가운 앞섶을 닫고 그가 끈을 매 주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도 숙이지도 못하고 정면으로 보이는 그의 가슴팍만 바라보았다. 멍청이, 바보, 등신!
“고개 들어.”
“…….”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고개 들어.”
그의 명령에 고개를 들었다. 내 몸에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유전자가 흐르는 것이 분명했다. 부끄러워도, 창피하고, 수치스러워도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제 막 퇴근한 모양인지 샤워를 하려 화장실에 온 듯했다. 타이가 풀린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내게 둘러진 가운은 그가 샤워 후 입을 것이었는지 끝자락이 내 발목에서 웃돌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데도 그의 얼굴은 빛을 잃지 않고 환했다. 짙고 가지런한 눈썹, 우뚝한 코, 깊고 매서운 눈매 그리고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 입술…… 입술.
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내 윗입술 위로 그의 엄지가 지나갔다. 물을 틀어 적신 그의 손이 다시 내 입술 위를 훑었다. 예민한 입술의 점막은 그의 거칠고 따듯한 엄지의 표면을 적나라하게 느꼈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자 그가 꾹 하고 아랫입술을 눌렀다.
“물 들어가니까 입 닫아.”
“…….”
입술을 지나 인중까지 크림을 닦아 낸 그는 수납장에 있는 흰 수건을 꺼내 가볍게 물기를 두드려 닦아 주었다. 흰 수건에 희미한 핏자국이 묻어 나왔다.
“잡는 손부터 잘못됐어.”
“……?”
“움켜잡듯이 쥐지 말고, 엄지와 검지로 면도기 기둥을 잡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감싸 쥐어.”
처음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다. 그는 내게 면도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보기에도 수염 하나 없는 내게, 솜털만 가득한 내게 말이다.
“먼저 면도할 곳을 따듯한 물로 충분히 적셔.”
그의 손이 내 인중을 적셨다.
“크림은 너무 얇지 않게 수염의 역방향으로 펴 바르고.”
인중을 지그시 스치듯 그의 손가락이 머물렀다 움직였다. 잠잠했던 나의 심장이 다시 쿵쿵대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그의 눈동자에 내가 보였다. 그의 눈은 나를 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도 내 눈 안에서 그를 찾았을까?
“면도기를 정방향으로 내려 미는 거야. 너무 힘을 강하게 주지 말고 천천히.”
느릿느릿 천천히, 면도기로 분한 그의 엄지손가락이 뜨거운 체온을 흘리며 내 인중을 배회했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앞이 보이지 않자 온 신경과 감각이 들끓으며 그의 손끝에 닿은 피부로 몰리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그는 수납장을 열어 작은 반창고를 꺼내고 있었다. 크고 기다란 손가락이 섬세한 움직임으로 손톱만 한 반창고를 떼어 상처가 난 내 윗입술에 붙여 주었다.
“……고맙습니다.”
“아직 안 씻은 것 같은데, 씻어.”
나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그가 몸을 돌려 화장실에서 나가려 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지금이 꽤나 부끄러운 상황이었다는 걸 상기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 냈다. 나는 그에게 초콜릿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매우 기뻐서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이 마음을 그에게 전달해 주고 싶었다.
“저기요.”
형도 아니고 이사님도 아닌 애매한 ‘저기요’라는 건방진 말로 그를 불러 세웠다. 나의 건방진 호칭에도 그는 돌아봐 주었다.
“아까 초콜릿 감사했습니다. 먹어 봤는데 맛있었어요. 입에서 녹았어요.”
“안 녹는 초콜릿이 있던가? 맛있었다니 다행이네.”
별것 아닌 초콜릿이었다는 듯 그는 무심히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난 그 별것 아닌 초콜릿으로도 정말 좋아서,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좋아서……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한다 해도 초콜릿만으로도 좋아서……. 어차피 나와는 그럴 수 없는 사이인 걸 알고 있으니까. 이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정확히 알 수 없는 감정이라도.
“달콤했어요.”
달콤했다. 그가 준 초콜릿이, 그가 내게 주는 다정함이 현재의 나를 잊을 정도로 달콤했다.
“…….”
“감사합니다.”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다가갔다. 한 걸음 다가간 용기보다 더 큰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어 그의 셔츠 끝을 붙잡았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나의 가슴이 뛰며 팔딱팔딱 진동을 했다. 그의 셔츠 끝을 붙잡은 손끝도 빨갛게 물들 정도로 나는 뜨거워져 있었다.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은 작아질 줄 모르고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위험했다. 이러다 곧 터져 버려 내가 사라질 것 같았다. 고개 숙인 채 그를 붙잡은 나의 손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한 호수와 같은 그는 말없이 내 머리를 닿을 듯 말 듯, 손바닥으로 쓸어 주었다. 내 머리 위로, 내 가슴속에 따듯한 온기를 새긴 그는 조용히 공간을 떠났다. 말없는 다정함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이 점막에 가득 차오르자마자 뚝뚝 떨어졌다. 사랑 같았다. 이렇게 마음이 울리고 저린 것은, 떠나는 그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랑이었다.
세상으로 나온 내게 처음을 선사해 주는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순리였다.
나는 화장실에서 돌아온 뒤 침대에 누워 그가 내 입술을 만져 주었던 순간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그가 내 머리를 쓸어 주었던 순간을 되새김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물론 곧 아침 식사를 할 시간이 다가와 잠이 들어도 문제였지만 그를 상상하는 시간이 너무나 즐거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고택에서 지낼 때 매일 밤 잠 못 이루고 창밖을 멍하니 보던 엄마가 떠올랐다. 공감할 수 없었던 그녀의 행동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는 회장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잠을 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 그녀를 집어삼키고 말았을 것이다. 나약한 정신은 메말라 가고 피폐해졌을 것이다. 당당하지 못한 연정에 숨어 지내는 상황에, 사랑으로 낳은 아들이 자신을 닮아 병을 갖고 태어나 세상에 내보일 수 없는 현실도 그녀를 슬프게 했을 것이다.
엄마를 닮은 나. 회장님의 아들을 사랑하는 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나.
두려움에 심장이 뛰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제야 피어오르기 시작한 마음을 어떡해야 할까. 스무 해 동안 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이제야 폭발하듯이 터져 나온 감정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뜬눈으로 침대 위를 뒤척였다. 뒤척이는 도중에 미세한 바깥 소음이 들렸다. 그가 아침 출근을 위해 화장실을 이용하는 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문에 바짝 다가가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았다. 엉덩이가 딱딱한 대리석에 닿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문에 귀를 갖다 대고 꾹 밀착시켰다. 그를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어제와 조금 다른 아침 식사였다. 다른 점이란 내 밥그릇 근처에 내가 좋아할 만한 반찬들이 놓여 있는 것이었다. 소고기찜, 갈치구이, 동그랑땡 같은 반찬이었다. 나는 관장님이 이루어 준 마법 같은 아침 식사인 것을 알았다. 오늘은 밥 세 수저에 반찬 한 젓가락이 아닌 밥 한 수저에 반찬 한 젓가락씩 골고루 먹었다.
식사 시간은 조용했다. 이상할 것 없는 광경이었다. 회장님께서는 묵묵히 식사를 하셨고, 관장님만 조금씩 그에게 오늘 일정을 물어보는 정도였다.
“오늘도 늦니? 어제 늦게 들어온 모양이던데.”
“네, 오늘도 늦어요. 그래도 어제보단 일찍 들어올 것 같습니다.”
나는 관장님과 그의 대화에 신경이 곤두섰다. 어제 그는 밤을 지새우고 오늘 새벽 4시가 되고서야 들어왔었다. 거의 외박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바빠서야, 여자는 어떻게 만나? 아니, 이미 만나고 있는데 얘기를 안 하는 거니?”
관장님께서는 어제 그의 늦은 귀가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관장님께서도 나와 같은 생각이실까? 그는 어제 누굴 만나고 오느라 늦게 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정말 선생님과, 선생님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온 것일까?
궁금했다. 선생님은 그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만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거나, 섹스를 할 때도 무뚝뚝하다고 했었다.
“생기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결혼을 하라는 소리는 아니야. 알잖아. 나는 결혼을 그렇게 권장하는 편이 아니라는 거.”
“크흠.”
내가 보는 관장님께서는 참 당당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눈빛은 항상 또렷하고 여유가 흘러넘친다. 그리고 사람을 휘어잡는 위압감도 가지고 계셨으나 다정했다. 그래서일까? 관장님의 말에 회장님께서 작게 헛기침을 하셨다. 회장님께서는 관장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거슬려 했지만 대화에 딱히 제재를 하진 않으셨다.
이 대화에 제일 큰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은 관장님도, 회장님도, 그도 아닌 나였다. 나는 수저를 몇 번이나 휘저으며 소복이 쌓인 밥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다만 모임에 나가면 다들 내 아들 어디 문제 있는 거 아니냐는 소문만 무성하게 내 귀에 들려오니까, 네 연애 참견하기 싫은데.”
“걱정 마세요. 결혼은 올해 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용했던 공간에 쨍그랑하고 수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중대한 발표에 방해를 놓은 것은 나였다. 세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 죄송해요.”
나는 황급히 허리를 숙여 그와 나의 사이에 떨어트린 수저를 주우려 했으나 줍지 못했다. 그가 팔을 뻗어 나를 제지한 탓이었다. 그의 팔은 내 목 아래에 가슴팍을 막고 있었는데 그가 쓰는 코롱 냄새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그의 제지에 나는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내 뒤에 있던 사용인이 재빠르게 발치에 있는 수저를 거두고 새 수저를 가져다주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대화가 시작됐다. 대화를 시작한 사람은 회장님이었다.
“생각해 둔 사람이 있는 거냐.”
“딱히 없습니다. 회장님하고 어머니께서 정해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네 뜻이 그러면 내 알아보마.”
회장님의 표정은 흡족해 보였다. 하지만 관장님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내 표정은 보나 마나 뻔했다. 굳어 있을 것이다. 눈 밑이 뻐근할 정도였다.
슬쩍 바라본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평소처럼 날카로운 눈매는 이 상황에 관심 없다는 듯 식사에 열중할 뿐이었다.
오늘도 결국 나는 밥을 남겼다. 솔직히 그가 올해 안으로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목구멍이 꽉 막히는 바람에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국만 조금씩 넘기며 혼란한 아침 식사를 버텼다. 한 실장이 챙겨 준 약은 방 안으로 들고 가 먹을 예정이었다. 약을 먹고 바로 초콜릿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슬리퍼를 벗어 던졌다. 소리가 나든 안 나든 내키는 대로 쿵쾅거리며 걸었다. 현실은 내게 가혹했다. 그를 좋아하지 말라고, 사랑하지 말라고, 마음을 죽이는 강으로 날 떠미는 것 같았다.
어차피 마음을 죽이지 않아도 나는 아파서 죽을 텐데 억울했다. 삶에 아주 작은 미련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삶에 작은 미련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커다란 바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바람이 커져 가고 있는 상태였다. 오기가 생겼다.
먹기 싫은 약을 입 안 가득 머금었다. 그리고 신줏단지처럼 모셔 놓은 초콜릿 상자를 열어 하나 꺼내 먹었다. 그가 주는 달콤함이 입 안 가득 쓴맛을 밀어 내고 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달콤한 맛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었다. 달콤함이 내 입 안을 차지하는 만큼 그를 차지하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이 차올라 나는 소매를 끄집어서 거칠게 눈을 비볐다. 오늘의 옷은 순면 셔츠가 아니어서인지 눈두덩이 따가웠다. 그래도 울고 싶지 않아 계속 비볐다.
“안에 있니?”
“……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멍해 있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녀가 듣지 못하였을까 봐 다시 한번 외쳤다.
“저 여기 있어요!”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렸다. 관장님께서는 바쁘신 분이었다. 그처럼 자정을 넘겨 들어오진 않으셨지만 어제 내가 저녁을 혼자 먹은 걸 보면 자주 늦게 들어오실 정도로 바쁜 분이었다. 내가 일주일 동안 앓아누웠을 때도 늦은 저녁에 들어오셔서 안부를 묻곤 하셨었다.
“약 먹고 있었구나?”
“네…….”
관장님께서는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다가와 앉으셨다. 나는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내 옆에 약간의 간격을 둔 채였다. 그녀와 나의 사이엔 그가 준 초콜릿 박스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것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숨기기엔 늦은 상태였다. 관장님께서 초콜릿 박스를 발견하시고 뚜껑을 집어 드셨다.
“수제 초콜릿으로 유명한 집인데, 선물 받았니?”
“아…… 네.”
“회장님?”
회장님이냐고 물어보시는 관장님의 질문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혼외자에게 아내 몰래 초콜릿을 사다 준 걸로 오해하실까 봐서였다. 강하게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두 손도 아니라고 같이 저었다. 그런 나를 보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 실상은 다정한 눈매가 휘어졌다.
“너무 강하게 부정하니까 맞는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이건…….”
“학영이니?”
울상이 되어 부정하는 내게 관장님께서 정답을 말했다.
“……네.”
“어머, 별일이네.”
다시 한번 초콜릿 박스를 들여다보는 관장님의 눈은 의외라는 눈빛을 띠었다가 이내 나를 보더니 미소 지으셨다.
“별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학영이가 어렸을 때부터 귀엽고 예쁜 것을 좋아했거든.”
“아, 네……. 초콜릿이 예쁘긴 해요. 저 이렇게 예쁜 초콜릿 처음 봤어요.”
내가 그동안 먹었던 초콜릿들은 아파트 모양처럼 각진 네모거나, 동그란 알 같거나, 물방울 모양 정도가 다였다. 그가 준 초콜릿은 모양이 섬세하고 다양했다. 결마다 깎아 만든 것 같은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그처럼 아름다웠다. 어느새 초콜릿에 빠져 멍하니 바라보는 내게 관장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초콜릿이 아니라 네가 귀엽고 예뻐서 사다 준 것일 거야.”
“네?”
“내 아들은 내가 잘 알지. 선수를 빼앗겼네, 이것 받으렴.”
초콜릿에 정신이 팔려서 잘 듣지 못한 알쏭달쏭한 말을 생각하고 있는데 관장님이 작은 종이봉투를 주셨다. 노란색의 종이 주머니였는데 얼떨결에 받아 드니 무게가 묵직했다. 리본으로 주름져 묶여 있었다. 이게 무엇일까 눈앞에서 뜯어 볼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 내게 관장님께서 주머니의 정체를 알려 주셨다.
“사탕이야. 이 집엔 사탕이나 초콜릿을 먹는 사람이 없어서 한 실장이 챙겨 줄 생각을 못했을 거야.”
“……감사합니다.”
“많이 먹으면 이가 썩으니 약 한 번에 하나씩 먹어.”
또다시 엄마가 생각났다. 이렇게 다정하고 좋으신 관장님의 남편을 엄마는 왜 사랑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작은 죄책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회장님을 사랑하는 엄마. 그를 사랑하는 나. 그리고 관장님.
두 손으로 사탕 봉투를 꼭 끌어안았다. 회장님을 사랑했던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수록,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 키워 갈수록, 관장님의 마음이 소중하고 또한 무서웠다.
갖지 못하는 그를 생각하거나 다가올 선생님의 수업을 기다리는 나의 날들은 단조롭기만 했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회장님이나 관장님, 또는 그가 나가거나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배웅이나 마중 따위를 하고 낮잠을 잔다. 이따금씩 거실에 앉아 TV를 보며 지영우 도련님 행세를 하다 보면 그 단조로운 시간도 훌쩍 지나가 버렸다. 아픈 몸은 나아질 기미 없이 여전했고, 흐물흐물한 내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오늘은 그 단조로움에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과 오늘, 그것도 ‘성’에 대해서 공부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저번 주 수요일에 왔어야 할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수업을 일주일 정도 미루는 바람에 나의 기다림이 더 길어졌었다.
저번 수업을 하고 나서 그날 밤 몽정까지 했었다. 내심 내 마음이 이번 수업을 생각보다 더 기대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기대한 수업이었는데 그는 내게 스쳐 지나가듯이 이번 주는 선생님의 개인 사정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언제 다시 재개할지 모른다는 답답한 말만 전할 뿐이었다.
나는 그와 마주칠 때마다 틈만 나면 선생님의 수업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조용히 나를 내려 보며 ‘나중에’ 또는 ‘기다려’라는 말만 할 뿐 기쁜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다. 그럴 때면 의기소침해져 내 방으로 돌아가 선생님과 공부하기로 한 ‘성’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그러길 일주일, 어젯밤 그가 내게 내일부터 수업을 다시 시작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직 내 공부방이 마련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그의 서재에서 수업을 기다렸다. 한 실장에겐 선생님이 내준 숙제가 있으니 숙제를 먼저 하고 있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한 시간 전부터 들어와 있었다. 당연히 숙제는 없었다. 그저 그의 공간에서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가 사용하는 책상, 그가 앉는 의자, 그가 피우는 담배를 하나씩 만져 보며 창밖을 보기도 하고 맨바닥에 누워 있기도 하고 빽빽한 책꽂이에 꽃인 두꺼운 책 하나를 꺼내 들어 읽어 보기도 했다. 뭐 이런 잡다한 것들을 하다 보니 한 시간이 10분처럼 훌쩍 지나갔다. 장식품 하나 없는 그의 서재였지만 나에게는 궁금하고 구경할 만한 것들이 충분하고도 넘쳤다. 책꽂이에 꽂힌 책의 개수를 하나둘씩 세고 있을 때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나의 대답과 함께 문이 열리고 선생님과 한 실장이 들어왔다. 한 실장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40분 뒤에 오겠습니다’ 하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내 옆 의자에 앉는 선생님의 얼굴은 어딘가 수척해 보였다. 나는 지난 월요일 저녁 그와 단둘이 서재에 남아 대화하던 낯선 선생님이 떠올랐다.
“수업 약속 못 지켜서 미안했어요.”
“아니에요. 아프셨어요?”
“조금요.”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는 선생님의 얼굴이 티가 나게 말라 있었다. 원래도 살이 있는 체형이 아닌 그가 더 살이 빠지자 인상이 조금 날카로워 보였다. 일주일 동안 많이 아팠던 것이 분명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일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프지 마세요. 아프면 힘들어요.”
“…….”
“제가 많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잘 알아요. 선생님은 아프지 마세요.”
“고마워요. 얼른 나을게요.”
“아직 다 나은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수업하러 오셔도 되는 거예요?”
“네. 내가 아픈 건 쉰다고 낫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괜찮아요.”
선생님은 자신의 가방 안에서 공책보다 조금 큰 책 하나를 꺼내 내게 주었다. 오늘 수업의 시작이었다. 혹시 오늘 무엇을 공부하기로 했는지 선생님이 잊었을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건네받은 책을 보니 그 마음은 기우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처음 보는 형태의 책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질반질한 재질에 반짝거리는 듯한 책의 표지는 컬러 사진 같았다. 손톱 반 마디 정도 되는 두께의 책.
“잡지예요.”
“아…….”
“성인 잡지. 물론 이 잡지가 성을 유익하게 알려 주는 지표는 아니지만 남자들이라면 한 번씩 보고 지나가는 바이블 같은 거예요.”
선생님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지 솔직히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내가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잡지의 표지가 너무 충격적이라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내 충격적이고 멍한 표정이 훤히 드러나서 그런 걸까? 선생님이 내 얼굴을 가만 살펴보더니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영우 군이 알아왔던 섹스는 교과적인 수준의 내용이 다일 거예요. 맞죠?”
“……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아는 섹스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행위, 남녀가 몸을 부둥켜안고 움직이는 행위가 다였다. 열다섯 생일이 지나가는 밤. 엄마와 회장님이 했던 행위가 잔상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가끔 늦은 새벽녘에 나오는 성인 영화의 장면들. 그것이 내가 아는 섹스였다. 신음을 지르고 서로를 애타게 부르며 뒤로 넘어갈 듯이 좋아하는 것.
“이런 잡지가 남자들에게 이상한 판타지를 심어 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거짓은 아니에요.”
내 앞에 반듯하게 놓인 잡지의 표지를 쳐다보았다. 금발의 서양 여자가 내 머리통만 한 커다란 가슴을 움켜잡고 아주 조그만, 과연 속옷의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삼각형 팬티만을 입은 채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었다.
“흔히 남자들은 이런 걸 보고 좋아하고 더 나아가서는 흥분해요.”
나는 민망했다. 솔직히 이런 자극적인 여성의 알몸을 적나라하게 본 적이 없었기에 낯설고 불편했다. 흥분이 되기보단 부끄러웠다. 잡지에 손도 못 갖다 대고 물끄러미 보기만 하는 날 보며 선생님이 표지를 넘겼다.
표지를 넘기니 이번엔 다양한 옷을 입은 여자들이 노골적인 포즈를 취한 사진들이 있었다. 굉장히 짧은 치마의 간호사복을 입은 여자, 경찰 제복을 입은 여자, 수영복같이 생긴 짧은 턱시도를 입고 있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물처럼 구멍이 뚫린 검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남자들이 이런 걸 보고 좋아한다고?
“저…… 선생님.”
“네.”
“남자들이 이런 걸 보면서 좋아하고 흥분한다고요?”
“남자라면 그래요. 성에 관한 거라면 좋아하죠. 이런 걸 보면서 자위하기도 하고. 잡지로 부족하다 싶으면 비디오를 보기도 하고요.”
나는 다시 한번 선생님이 펼친 부분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부끄러웠지만 그렇다고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여자들을 보는 것이 좋지는 않았다. 터질 것 같은 커다란 가슴, 둥그런 엉덩이, 흰 피부와 붉은 입술 중에서 어딜 보고 좋아하고 흥분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런 걸 보면서 좋아하고 흥분하는 것이 섹스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음…… 섹스는 그냥 할 수 있는 것 이 아니에요. 남자들은 우선 발기를 해야 할 수 있어요.”
아직 감을 잡지 못하는 내 표정을 보며 선생님은 계속해서 설명했다. 선생님의 고운 눈이 건조하게 잡지 안의 여자들을 훑어 내렸다.
“보통 남자들은 성욕이 일 때 좋아하는 여자의 엉덩일 보면 만지고 싶고, 가슴을 보면 빨고 싶고 깨물고 싶어 하고, 입술을 삼키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점점 흥분하게 되죠. 흥분하게 되면…… 알잖아요. 성기가 발기가 되죠. 그리고 사정하고 싶어지고, 섹스를 하고 싶어져요.”
발기는 성기가 빳빳하고 딱딱하게 부푸는 것이었다. 나도 가끔 발기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그저 가라앉길 기다렸었다. 사정을 하면 가라앉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사정을 유도해야 하는지 몰랐다. 차마 발딱 선 내 것을 보기가 그랬고 만지고 싶은 마음은 더욱이 들지 않았다. 끙끙거리며 앓다가 잠들어 몽정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나는 내 성기가 발기를 할 때면 잠이 들려고 노력했다.
근데 그때는 발가벗은 여자들을 보고 발기하진 않았었다. 그냥 샤워를 하다가, 자기 전에 생각을 하다가 정말 가끔 아래에 열이 몰리고 빳빳해질 때가 있었다. 음모를 만지작거리다가 발기를 해 버려 유모에게 달려갔을 때를 생각해 보면 자극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지만 그 외에도 이유 없이 빳빳하게 커질 때도 있었다.
“사정을 하면 기분이 어때요?”
나의 물음에 선생님의 고운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가 이내 돌아왔다.
“……영우 군.”
“……네.”
“아직 한 번도 사정을 안 해 봤어요?”
선생님은 나를 다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순수의 질문을 내게 던졌다. 그래도 나는 그만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나도 내가 좀 보통의 아이들과 다르게 자랐다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와 유모는 내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전전긍긍하셨고, 아무것도 못하게 하셨다. 나는 그저 예쁜 도자기 인형처럼 그녀들과 회장님의 사랑으로만 자라 왔었다. 서영우라는 이름 석 자만 가지고 외부의 환경과는 단절된 채 말이다.
“……몽정은 해 봤어요.”
“몽정 말고 깨어 있을 때는요?”
“한 번도요. 발기가 되긴 하는데, 어떻게 할 줄 모르고 무섭기도 하고…… 그리고 사정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책은 없었어요…….”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고 선생님을 보던 시선이 내 무릎으로 향했다. 선생님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되었다. 두 손이 저절로 무릎 위로 올라와 어쩔 줄 몰라서 꼭 마주 잡았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죄지은 사람 같은 자세가 되었다. 무지하다는 것이 이렇게도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영우 군, 고개 들어요. 괜찮아요.”
“…….”
“저는 조금 당황스러운 것이…… 영우 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미안해요. 고인을 욕되게 하고 싶지도 않고, 영우 군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폄하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이건…….”
내가 상처받을까 횡설수설하는 선생님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몸이 아픈 것을 제외하고는 멀쩡한 나를 사람들이 인형처럼 키웠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운 듯했다. 나도 스무 해를 살면서 답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실은 그게 답답한 건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열로 인한 어지러움, 가끔씩 죄이는 듯한 가슴 통증만으로도 사는 것이 벅찰 때가 많았으니까. 지금이야 이력이 나서 괜찮지만 어릴 땐 아니었다. 열 속에서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 세상에 대한 궁금증은 늘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씩 의문이 피어올랐었다. 나는 왜 집 밖에 나갈 수 없는 거지? 나는 왜 회장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없는 거지? 죽을 만큼 아파도 학교를 한 번 가보고 싶었고, 숨이 차올라 폐가 찢어질 것 같아도 뛰어 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들이 답답함의 결과일 거라고 여기지 못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팠던 엄마는 나를 챙겨 줄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유모는 나이가 많았기에 나를 마냥 아이처럼 대했었다. 나는 그것이 당연한 거라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내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런 두 사람이 내 곁에서 떠나자 나는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서 나의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엄마의 사진을 빼앗기고, 유모와 함께하지 못하고, 열대어 아이들도 없는 지금 내게 남은 건.
“선생님, 저에게 알려 주세요.”
“…….”
“다 알고 싶어요. 저를 아무것도 못하는 천치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나는 간절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 보고 싶었다. 선생님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는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