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제 다시 열이 끓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즐거웠던 수업을 되새기는 것을 고장 난 몸이 질투를 했는지 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아우성치듯 제 존재감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좋은 기분과는 별개로 내 고질적인 기침은 여전했고 뭐가 또 잘못됐는지 평소보다 더 심한 열이 나를 삼켰다.
결국 나는 오늘 아침에 나를 깨우는 그의 발소리를 듣고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저 저미는 통증을 참으며 제시간에 내려오지 않는 나에게 화가 난 한 실장이 내 방 앞에 당도할 때까지 빳빳한 시트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눈물이 났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한 만성적인 통증이 나의 마음과 이성을 야금야금 삼키고 있었다.
이곳이 내게 낯선 곳이라는 게 실감났다. 혼미한 정신에도 엄마와 유모 그리고 고택에 두고 온 열대어들이 눈꺼풀 안쪽에서 둥둥 환영처럼 떠올랐다. 그 환영을 쫓아 내 몸도 고통 속으로 둥둥 부유하게 됐을 때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한 실장의 고저 없는 무색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린 것 같기도 하다. 그 말소리의 뜻이 무척이나 매섭고 아팠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지금의 상황이었다. 낯설지는 않았다. 고택에 있을 때 종종 있던 일이었다. 이 저택에 오기 몇 달 전부터 이렇게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횟수가 점점 잦아지던 터라 오히려 익숙한 상황이기도 했다. 나의 왼쪽 팔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바늘 근처에 생긴 수많은 멍이 이번에도 내 혈관을 찾느라 수고했을 주치의를 떠오르게 했다.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적막한 어둠과 고요만이 자리했다. 따듯한 봄 햇살을 보고 싶어 늘 걷어 두었던 커튼은 작은 바람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꼭꼭 닫혀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아파서 흘린 식은땀인지 아니면 더워서 흘린 건지 헷갈릴 정도로 더웠다. 그리고 내 곁엔 내 평생의 동반자처럼 함께한 가습기가 백색 소음을 내고 있었다.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고개를 살짝 돌려 괘종시계를 보았다. 짧은 나뭇잎 모양의 시곗바늘이 3을 가리키고 있었고 긴 나뭇잎 모양의 시곗바늘은 이제 막 2를 향하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목이 타는 듯이 말랐다.
이곳은 나를 보살펴 줄 유모가 없는 곳이었다. 유일하게 나를 알아봐 주는 그는 없을 시간이었다. 내가 직접 물을 먹으러 내려가야 했다. 평소 같으면 미련하게 한 실장이 들어올 때까지 참았을 나였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타는 듯한 목에 물을 흘려보내 기운을 차려야 했다. 내가 깨어났음을 알리고 싶었다. 계속 아플 순 없었다. 이제야 알아 버린 세상을 공부하고 싶었다.
기운을 끄집어내 몸을 일으킨 나는 혈관을 찾느라 애썼을 주치의의 수고를 무시하고 링거 바늘을 뽑아 버렸다. 하얀 팔뚝에 붉은 피가 흘렀으나 개의치 않고 소매로 슥슥 닦곤 비틀비틀거리는 걸음을 다잡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손에 잡히는 금속 문고리가 유난히도 차가웠다.
문이 열리자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복도로 나와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내가 잠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나서야 내가 한 실장이 질색하는 맨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리려는 의지는 나를 내 방으로 되돌아가게 하지 않고 1층으로 향하게 했다.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조용히 내려갔다. 오늘따라 더 삭막하게 느껴지는 대리석 바닥을 발바닥 하나하나로 느끼며 저택 안을 거닐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고, 거실로 향하는 복도 끝에 다다랐다. 한 실장은 어디 있을까, 비록 나를 좋아하진 않지만 나를 보살필 ‘임무’가 있는 한 실장을 찾기 위해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 향하던 나는 멈칫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엔 내가 찾는 한 실장이 아니라 다른 여인이 있었다. 그녀도 나를 발견했는지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을 내려놓는 우아한 손짓이 꼭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윤기 나는 피부 결, 검은색 융단 같은 머리카락은 고상하게 어깨 위에서 구불거렸다.
뾰족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늘게 휜 눈매는 그녀가 미인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듯이 아름다웠다. 도도함을 넘어 위압감이 서린 미모. 나는 온몸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그러자 목구멍에 간질간질 기침이 찾아왔다. 축축하고 차가운 손을 기침을 막기 위해 입으로 가져갔다.
빤히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느껴졌다. 한동안 나를 조용히 보던 그녀는 내가 누군지 알았는지 눈을 작게 휘며 미소 지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낯선 이의 반가운 미소. 애송이인 나는 저 웃음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너구나.”
“…….”
“아프다더니, 괜찮니?”
그녀의 다정한 질문에 나의 기침이 부서지는 폭포처럼 거칠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폐가 쥐어짜이는 것처럼 아파 왔다. 나의 허리는 제 구실을 못하고 90도로 휜 채 바닥을 향해 있었다. 거실엔 나의 기침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이 저택에 상주하는 모든 사용인들이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한 실장의 빠른 등장은 당연한 것이었다.
마른 목구멍에 피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이미 목구멍이 너덜너덜 갈려 살점이 떨어진 것 같은 고통이었다. 나는 뿌예지는 시야 속에서도 나를 보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 일어난 그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실장은 서둘러 나를 붙잡더니 기침을 가라앉히는 호흡기 치료제를 가져와 코와 입을 막았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에 사람들이 보였다. 많은 사용인들이 나를 부축하려 달려오고 나의 기침을 멎게 하려 한 실장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쩔 줄 모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그녀를 보았다.
나는 아파서 정신없는 와중에 안타까운 그녀의 눈빛을 보며 의문을 가졌다. 왜 나를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걸까. 나의 아버지인 회장님은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시고, 회장님의 아들인 그는 나에게 감정을 비추지 않는다. 나를 돌볼 임무를 가진 이 저택의 집사인 한 실장도 나에게 저런 눈빛을 보여 준 적이 없는데, 왜 그녀는 나를 저렇게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일까?
내가 상상했던 그녀의 눈빛은 경멸과 증오였지 안타까운 눈빛이 아니었다. 회장님의 아내인 그녀의 눈빛은 내가 상상하지 못한 것의 종류였다. 나는 아직 어수룩하게 세상을 모르는 아이인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이 어려웠고, 알 수 없었다.
한 실장의 호흡기 치료 아래 사용인에게 들쳐 업혀졌다. 그녀는 이 저택에서 만난다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몸뚱어리는 쓸모없게 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망신스럽고 수치스러운 첫 만남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힘없는 팔다리는 꼭두각시처럼 흔들렸다.
다시 나의 팔뚝엔 링거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주치의가 오기 전 상주하는 간호사가 여러 차례 혈관을 쑤셔서 찾아 꽂는 바람에 핏줄이 터졌는지 멍 자국이 더 넓게 흩뿌려져 있었다. 다행히 의식은 잃지 않았기에 나는 제정신으로 내 앞에 앉은 관장님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관장님은 내가 사용인들에게 들쳐 업혀 와 이곳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키고 계셨었다. 지금은 인공호흡기 신세인 내 침대 근처 의자에 앉아 계셨다. 산소통이 내 옆 침대에 있었기에 조금 멀리 떨어져 계셨다.
이 정도로 호흡기라니, 민망해졌다. 고택에서 어렸을 적부터 있었던 발작과도 같은 기침은 흔한 것이기에 산소통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호흡기 없이도 숨 쉴 수 있었다. 이 투명한 플라스틱 막이 몸서리치게 답답했다.
“답답하니?”
“…….”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호흡기를 쓴 고개를 움직이며 끄덕였다. 관장님은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호흡기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아프지 않게 벗겨 내 주셨다. 그녀의 부드러운 잔향이 코끝에 머물렀다.
“문희도 꼭 너같이 이걸 답답해했었어.”
“…….”
인공호흡기를 내 머리 근처에 내려놓은 관장님은 추억을 되새기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당황했다. 관장님의 입에서 나온 ‘문희’는 죽은 내 엄마의 이름이었다. 내 당황을 눈치챘는지 관장님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엄마를 아주 잘 알고 있단다. 문희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거든.”
“…….”
“너는 문희를 꼭 닮았구나.”
나의 엄마를 말하는 관장님의 눈이 슬퍼 보였다. 나는 문득 가슴이 죄어 왔다. 나는 아직 애송이지만 사랑을 둘로 나눌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관장님은 회장님의 아내이고 나의 엄마는 회장님의 여자다. 나의 존재는 관장님에게 마냥 반가운 존재는 아니라는 것쯤은, 그리고 내가 관장님에게 죄송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죄송해요…….”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세상에 태어난 나의 존재가 부끄러웠다. 관장님 앞에서 그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부피를 부풀렸다. 여전히 찢어질 것 같은 목구멍 사이로 나는 겨우겨우 목소리를 내어 그녀에게 사과했다. 내 사과에 그녀의 슬픈 눈이 의아함으로 번졌다. 다시 용기를 내어 사과했다.
“……죄송해요.”
“영우야, 네가 죄송할 건 하나도 없어.”
“…….”
“네가 나에게 죄송할 일은 없어.”
의아함을 띠웠던 그녀의 눈에 언뜻 화가 비치는 듯도 했지만 곧 다시 나를 향해 웃어 주었다. 나를 향한 화는 아니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전하는 그녀의 눈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 눈을 보니, 나는 처음으로 나의 엄마가 미워졌다. 이런 분을 두고 엄마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관장님은 내 이불을 정리하며 노크 소리에 답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오늘도 평소보다 이른 퇴근이었다. 브리프 케이스를 든 채였다. 자신의 방에 두지도 못하고 바로 내 방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어머니.”
“오랜만에 얼굴 보는구나. 퇴근했니?”
내가 이 집에 온 지도 열흘이 넘었다. 그와 관장님은 최소 열흘 만에 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둘은 어제 본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웠다. 당연한 것이다. 두 사람은 모자 사이였다.
오히려 어제도 그를 보았던 내가 더 오랜만에 그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파서 나약해진 마음 때문인지 그를 보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죄송한 마음이 드는 관장님의 아들, 그리고 이 감정이 정확히는 모르지만 우선은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였기에.
“잘 다녀오셨어요?”
“생각보다 일정이 늦어져서 고단했지만 갖고 싶었던 그림을 가져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다행이네요.”
그가 관장님 곁으로 다가오자 그만큼 나에게 가까워졌다. 누워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분명 얼굴색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 보일 테고, 이불 위로 삐져나온 팔은 멍 투성이로 엉망일 것이다. 숨 쉬는 것초자 제대로 못해 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해 보여 나는 결국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내 부끄럽고 초라한 눈물을 그와 관장님이 발견했다.
“많이 아프니?”
관장님이 내게 인공호흡기를 다시 씌우려고 하셨다.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저어 거부했다. 쓰고 싶지 않았다. 나를 병든 환자로 만드는 이 모든 것을 다 벗어 버리고 싶었다.
“안 아파요. 죄송해요.”
“…….”
“괜찮아요.”
내가 아픈 것은 몸뚱어리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싫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낳아 온 아이,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통해 낳은 동생. 그것이 이 두 사람에게 보이는 나일 것이다. 아프다는 이유 하나로 그들에게 동정이나 안타까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호흡기 다시 씌워 줄까?”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호흡기 없어도 돼요.”
나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양옆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눈치 없는 눈물은 주룩주룩 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려 베개를 적시기 시작했다. 귓가가 눈물로 젖어 축축했다. 눈물이 차오르니 콧물이 차오르고 숨 쉬기가 어려워졌다. 이건 내 폐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단지 눈물이 흘러서 숨 쉬기가 어려운 것뿐이었다. 거칠하고 마른 입을 벌리고 숨을 쉬려 노력했다. 쌕쌕 소리를 넘어서 거칠고 뜯긴 듯한 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마.”
꼴사나운 모습은 그의 손짓에 사라졌다. 그가 인공호흡기를 내게 다시 씌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호흡기를 쓴 채 코를 훌쩍였다. 관장님께서 티슈를 뽑아내 내 눈가와 관자놀이를 적신 눈물을 닦아 주셨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다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터져 버린 눈물을 그칠 새 없이 계속해서 흘렀다.
“울지 말렴, 그렇게 울면 기운 빠져.”
관장님께서 다정하실수록 죄송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커져 갔다. 그리고 외로웠다.
“……죄송해요. 미워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죄송해요.”
“…….”
내가 회장님의 부름으로 저택에 살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 상상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관장님과 회장님의 아들에게 모진 멸시를 받을 거라 생각했다.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어도 TV를 보아도 알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사실이었다.
설마 내가 아파서 관장님과 그가 날 덜 미워하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병들고 아픈 세상천지 무지한 아이이기에, 미움도 원망도 주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아이이기에 그런 걸까? 그렇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너무나 슬플 것 같았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나를 관장님과 그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관장님의 표정도, 그의 표정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조금 더 목에 힘을 주어 말을 꺼냈다. 그럴수록 인공호흡기는 뿌옇게 달아올랐다.
“아파서 잘해 주시는 거라면 안 그러셔도 돼요. 미워하셔도 돼요.”
계속 흐르는 눈물과는 달리 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계속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점점 호흡은 힘들어지고 말은 느려졌다. 호흡기 안에서 말소리가 웅웅거렸다.
“영우야, 나는 사람에게 동정을 할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란다.”
잠자코 듣고 있던 관장님이 내 말에 대답을 하시고 다음에 내뱉을 말을 신중하게 고르는 것이 보였다. 곤란한 표정, 가끔 보이는 매서운 표정, 하지만 마지막에 보인 것은 미소였다.
“내 마음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란다. 그래서 괜찮아.”
“…….”
“미안하구나.”
그녀의 사과에 내 눈이 커졌다.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관장님이 아니라 우리 엄마였다. 그리고 이 저택에 들어온 엄마의 아들인 나였다. 사과를 받은 나는 조금 놀라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용한 방 안에 딸꾹질 소리가 울렸다. 그녀가 나를 보고 작게 웃었다.
“내가 가야지 편히 쉬겠지?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나가려 했는데 학영이가 있으니 나가 봐도 될 것 같아.”
“제가 있을게요. 나가 보세요.”
“괜찮지? 한 실장에게 올려 보내라고 할게.”
그에게 내 식사를 부탁한 관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나를 내려 보았다. 나는 멀뚱멀뚱 눈을 뜨고 여전히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내게 작게 웃어 보였다. 그가 웃으면 꼭 저런 얼굴일까 싶은 모습이었다. 두 모자의 외모는 닮지 않았으나 분위기나 하는 모양만큼은 꼭 닮아 있었다.
“이제 울지 않는구나. 식사하기 전에 멈춰서 다행이야. 푹 쉬렴.”
뒤돌아 나가는 관장님에게 인사하고 싶었지만 목이 막히는 기분에, 딸꾹질로 사레가 콱 걸릴 것 같아 입만 벙긋거리며 소리 내지 못했다. 대신 내 두 눈으로 방을 나가는 관장님의 모습을 빠짐없이 담았다. 곧은 걸음으로 소리 없이 걷는 관장님의 발걸음은 이 저택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느 발걸음이든, 누구의 발걸음이든 소리만 듣고 맞힐 수 있는 내가 도저히 맞힐 수 없을 것 같았다.
관장님은 발걸음처럼 내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나를 미워해야 하는데 미워하지 않는 사람, 사과를 받아야 하는 사람인데 오히려 사과를 하는 사람.
방문이 조용히 닫히자 나는 방 안에 남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관장님이 앉아 있던 의자에 어느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는 재킷을 벗어 작은 스툴 위에 올려놓았다. 이 저택은 나의 집이 아니라 그의 집이기 때문일까? 하나도 위화감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 방에 머무는 사람은 나인데, 내가 아니고 그가 머무는 곳처럼 보였다. 그래서 좋았다. 아무렇지 않게 내 곁에 있는 그가 잘 어울려서 좋았다.
나는 뻔뻔하게 관장님과 함께 있을 때 나를 사로잡았던 죄책감 따위는 날려 버리고 다시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호흡기 좀 벗겨 주세요.”
그와 조금이나마 같은 숨을 공유하고 싶었다.
“고집은 그만.”
그는 브리프 케이스 안의 서류를 꺼내며 나의 용기를 단칼에 눌렀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존재를 알고서부터 늘 궁금했던 그였다. 그가 있는 이 저택에 온 이상, 내가 언제 떠나게 될지 모르는 이상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벗겨 주세요.”
헉헉거리는 숨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말했다. 딸꾹질은 계속된 채였다. 닿지 않는 그를 향해 힘없는 손을 뻗었다. 나의 모습을 보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삐죽 올렸다. 그리고 사납게 말을 내뱉었다.
“이건 돈가스 따위를 먹는 세상 공부가 아니야. 네 현실이지.”
어제 내게 한발 물러서 주었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완강했다.
“이 정도는 호흡기 없어도 숨 쉴 수 있어요.”
“말대꾸하지 마. 쓰고 있으라면 쓰고 있어.”
내 뜻은 그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는 울음으로 차오른 콧물 때문에 코가 굉장히 답답했다. 입으로 쉴 수 있었지만 딸꾹질도 버거운 상태였다. 물론 호흡기를 빼고 싶은 약간의 핑계이기도 했지만.
“……그럼, 잠깐만 호흡기 빼서 콧물만이라도 닦을래요. 코 막혀서 답답해요.”
“…….”
그의 침묵, 그리고 나의 딸꾹질과 코를 훌쩍이는 소리.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흡기를 제거해 주었다. 그리고 가습기 옆에 있는 티슈를 세 장 뽑았다. 나는 티슈를 받기 위해 오른손을 올렸다. 그가 내 오른팔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자리한 곳은 혈관을 찾느라 엉망이 된 팔뚝에 꽂힌 바늘이었다. 이런 팔로는 티슈를 잡아 내 코를 풀 수 없었다. 바늘 때문에 굽힐 수도 없는 엉망인 팔이었다.
나는 꼭 치부를 들킨 것 같았다.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수치스러워졌다. 내 팔뚝이 이렇게 엉망진창인 것은 으레 있는 일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손가락에 있는 미세한 상처도 알아봐 준 그는 좋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이렇게 꼴사납고 나약한 모습을 보는 그는 싫었다.
머리로 열이 올랐다. 양 뺨이 수치로 붉게 물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올렸던 오른손을 감추지도, 그렇다고 당당하게 티슈를 받아 들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 머뭇거림도 잠시였다. 나는 다른 의미로 부끄러운 열이 양 뺨을 넘어서 귀까지 전이되는 것을 느꼈다.
티슈를 잡은 그의 손이 내 콧방울을 꾹 쥐었다. 장난스레 코를 쥐었다 놓는 것처럼 그의 엄지와 검지가 집게처럼 내 콧방울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딸꾹, 커다란 딸꾹질과 함께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가 내 코를 풀어 주고 있었다. 나에게 닿은 그의 손은 한 치의 떨림도 없이 묵묵하게 하고자 하는 행동을 수행했고, 오직 나만이 부끄럽고 낯간지러운 이 상황을 인지하고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예고치 않게 때때로 나를 흔든다.
“…….”
“하…….”
그의 손가락이 나의 코에서 떨어지고, 나는 작은 탄식 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손이 내 코에 머물렀을 때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잔잔한 진동이 파문을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숨을 쉬고 싶었지만 그 진동이 너무나 저릿하게 다가와 그럴 수가 없었다. 뜨겁게 열이 오르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티슈를 정리해 버리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직도 답답해?”
“…….”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고개만 작게 흔든 나는 시원한 코와 다르게 아직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아 인공호흡기를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눈에 비칠 내 모습이 얼마나 얼뜨기 같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홍당무처럼 얼굴 전체, 귀, 목덜미까지 빨개졌을 것이 분명하다.
나의 코를 풀어 준 그는 아무렇지 않은데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혹시나 숨을 곳이 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식사 가져왔습니다.”
한 실장이었다.
“들어와.”
그의 말이 떨어지자 방문이 열리고 작은 쟁반에 그릇을 받치고 한 실장이 들어왔다. 나는 그제야 멈추었던 숨을 쉴 수 있었다. 호흡기의 산소가 아닌 그와 나누는 공기가 내 콧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나는 물에 빠졌다 살아난 사람처럼 숨을 갈급하게 들이마셨다. 내가 숨 쉬기가 불편해 보였는지 그가 다시 호흡기를 씌워 주려 했다. 내 고장 난 폐가 기능을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향한 마음의 진동이 지독하게 울리는 것뿐이었다.
“이사님, 강 박사님이 자가 호흡이 가능하다고 의식이 또렷하면 호흡기는 제거하라고 하셨어요.”
한 실장이 들고 온 쟁반을 침대 옆 협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덕분에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호흡기를 내려놓았다. 누워 있는 나를 한 실장이 부축하려 다가왔다. 팔을 자유자재로 굽히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몸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한 실장의 부축을 부드럽게 거절하며 커다란 쿠션 두 개를 받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한 실장은 내 무릎 위에 쟁반을 올려 주곤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하얀 사기그릇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도련님, 오늘 이게 첫 식사라 미음으로 준비했어요. 이거 먹고 약을 드셔야 합니다.”
가지런히 놓인 수저와 젓가락이 보이자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이 저택에서 했던 식사 중에 한 실장의 감시 없었던 식사는 없었다. 애정 어린 관찰자가 아닌, 임무의 책임감이 어린 감시자와 함께하는 식사는 즐거울 리 없었다. 쟁반에 놓인 미음 그릇과 투명한 종이에 든 알약을 보았다. 그가 풀어 준 코가 무색하게 다시 훌쩍이고 싶어졌다. 아니, 훌쩍였는지 모르겠다.
“한 실장, 나가 봐.”
“네?”
“나가 보라고. 식사는 알아서 할 테니.”
“하지만 관장님께서 식사를 챙기라고 말씀하셨는데…….”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나가 봐.”
지난번에 이어 그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 한 실장이었다. 나가 보라는 그의 말에 이번에도 당황한 눈치였다. 나의 식사를 ‘챙기라’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방에서 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못내 통쾌했다. 그녀가 있었으면 억지로 먹어 가며 끝내 미음 그릇의 비워진 바닥을 보았을 것이다. 표정 관리가 안 됐던 것일까? 그가 혀를 차며 내게 말했다.
“한 실장 나갔다고 좋아하지 마. 다 먹진 못해도 반이라도 먹어.”
“…….”
“오른손잡인가?”
그가 링거 바늘이 꽂힌 내 팔을 보며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한숨 소리가 작게도 들린 것 같았다. 내 무릎 위에 있는 쟁반을 그가 가져갔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수저가 미음을 뜨느라 사기그릇을 긁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내 귀는 보청기를 낀 것 같았다.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리가 증폭되어 들리기 시작했다.
“먹어.”
한 수저 뜬 부드러운 미음을 그가 내 입술 앞으로 가져왔다. 고소한 쌀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고택의 서영우도 어린아이일 때 빼고는 유모나 엄마가 이렇게 먹여 준 적이 없었다. 수저 들 힘이 없을 땐 링거만 맞았었고, 이렇게 팔에 바늘이 꽂혀 있을 땐 꽂히지 않은 손을 이용해 밥을 먹었다. 나는 실은 양손잡이였다. 설마 하고 거짓으로 응한 것이 커다란 호의로 다가왔다.
부르터서 피 맛이 나는 입술을 작게 벌리자 따듯한 미음이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는 누군가를 ‘먹여 주는’ 행위가 무척이나 낯설고 서툴러 보였다. 덕분에 미음의 절반은 내 입이 아닌 턱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서둘러 혀를 내밀어 핥아 보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티슈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왼손으로 티슈를 받아 젖은 턱을 닦아 냈다. 흘러내린 미음이 너무나 아까웠다. 그가 내게 주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다 갖고 싶었다. 이번엔 흘러내리지 않게 입을 크게 벌렸다. 아까보다 작게 뜬 미음이 입 안으로 모조리 들어왔다.
최소한의 간만 되어 있는 미음은 고소했다. 미지근하고 질척이는 액체는 오랫동안 입 안에 머물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최대한 느릿하게 또 천천히 먹고 있었다. 이 그릇을 다 비우면 그는 나가고 먹기 싫은 알약을 입에 걸친 채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 순간이 최대한 늦게 다가오도록 노력했다. 느리게 먹는 나를 그는 타박 하나 없이 먹여 주었다.
내가 동생이어서 이렇게 챙겨 주는 것일까? 만약 내가 어릴 때 이 저택에서 같이 살았다면 그는 내게 잘해 주었을까? 우애 좋은 형제가 되었을까? 아니,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하더라도 우애 좋은 형제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그를 열과 진동이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흠모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를 독차지한 이 시간을 즐겼다. 내 입술로 다가오는 그의 길고 정갈한 손가락, 수저를 움직일 때마다 보이는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어깨 부근, 그는 내 시선에도 묵묵히 미음을 먹여 주었다. 그런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맛있어요.”
내 말에 그가 나를 살짝 쳐다보았다. 나는 이어서 다시 말했다.
“어제 치즈돈가스만큼 맛있어요.”
“몸은 아파도 굶고 자라진 않았을 텐데.”
학생 식당의 기름진 돈가스와 밍밍한 미음이 맛있다고 벅차서 말하는 내가 웃기는지 그의 얼굴에 어이없는 웃음이 번졌다.
“더 먹을 수 있겠어?”
“네, 다 먹을 수 있어요.”
어느새 3분의 2나 먹었다. 사기그릇 바닥엔 적은 양의 미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저 미음도 다 비워 먹고 싶었다. 그를 내 곁에 좀 더 붙잡아 두고 싶었다.
“다음 주 수업은 취소했어.”
“네?”
입 안에서 진득한 미음을 음미하고 있는데 별안간 날벼락이 떨어졌다. 수저가 입술 앞으로 다가왔으나 고개를 피해 거부했다. 공부가 취소되다니!
“내 실수였어. 네가 오늘 이렇게 아픈 것은…….”
“아니에요!”
나는 채 마치지도 못한 그의 말을 자르고 강하게 부정했다. 그는 내가 이렇게 아프게 된 것이 어제의 야외 수업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원래 이래요! 태어날 때부터 이 쓸모없는 몸은 그냥 아팠어요! 이유가 없었어요!”
내가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은 매우,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거의 없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젖 먹던 힘을 모아 내 주장을 내세워야 했다. 공부가 하고 싶었다. 세상을 알고 싶었고, 그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선생님이 중간중간에 얘기해 주시는 그의 대한 이야기가 즐거웠고 내가 모르는 세상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이 빌어먹을 몸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도 열이 오르고, 기침이 나요. 어제 밖에 나가서가 아니에요.”
“…….”
“날이 쌀쌀해서도 아니고, 사람 많은 곳에 가서도 아니에요.”
“…….”
“그냥 제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어서 그래요.”
“…….”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스스로 나약하게 보이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앙다물고, 손을 꼭 그러쥐었다. 나의 아픈 몸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 싫었다. 늘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병치레가 오늘만큼 미웠던 적이 없었다.
나의 외침을, 나의 간절함을 그가 알아차리길 바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길 바랐다.
잠자코 나의 간절한 외침을 지켜보던 그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알 수 없었다. 늘 고요한 호수가 그의 뒤에 숨어 있었다.
“말 잘하네, 목소리도 또랑또랑하고.”
“…….”
“앞으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바닥만 보고 있지 마. 한 실장에게 하기 싫은 건 싫다 말하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고 싶다고 말해.”
“…….”
“너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이 집에 데리고 온 것이 아냐.”
다시 내 입술 앞으로 수저가 들이밀어졌다. 문을 두드리듯이 수저가 가볍게 내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앙다물었던 내 입술이 슬며시 열리고 수저가 작은 틈을 부드럽게 비집고 들어와 미음을 흘렸다. 분명 첫 수저에는 서툴렀던 그였는데 어느새 나를 먹이는 것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면 다음 주 공부하게 해 주세요.”
“이거 마저 다 비우고.”
그의 말에 천천히 먹기로 한 다짐은 물거품이 되고 새처럼 받아먹었다. 삼키고 입을 벌리고 또 삼키고 입을 벌리길 여러 번. 사기그릇의 바닥이 깨끗하게 드러났다. 그가 수저와 그릇을 쟁반에 내려놓았다.
“그럼 다음 주 월, 수는 쉬고 금요일부터 시작해.”
“금요일은 너무 늦어요! 내일이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더 이상은 못 봐줘. 금요일부터, 그리고 수업은 외부가 아닌 서재에서.”
그의 표정이 단호했다. 나는 더 조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나를 곧 깨지거나 부서질 유리처럼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런 그도 좋았다. 칼질을 해 주는 그, 미음을 먹여 주는 그, 모두 다 좋았다.
다음 주 수업 전부 취소에서 그나마 금요일 수업을 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헸다. 금요일 수업이라도 어딘가. 일주일 내내 하릴없이 이 집 안을 떠돌아다니는 신세보다는 나았다. 비록 실내 수업일지라도 말이다.
“수업은 그렇게 알아두면 되고 이제 약 먹어.”
그가 나에게 알약을 주었다. 늘 먹는 하얗고 둥근 약, 그리고 오늘은 종종 열이 나거나 평소보다 기침이 더 심할 때 먹는 약까지 추가되었기에 한 알이 아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알약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이걸 언제 녹여 먹어야 하나, 벌써부터 목에 쓴 물이 올라왔다.
“저기…….”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지 말라는 그의 말을 상기하곤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언제 큰소리 높여 얘기했냐는 듯 기어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바뀌었지만 그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 주었다. ‘왜’, ‘뭐’ 따위의 말은 없었지만 말해 보라는 듯 나를 가만히 바라봐 주었다.
“저기……. 저…… 알약 못 먹어요!”
눈을 질끈 감고 외치듯이 말했다. 내 목소리의 시작은 작았으나 끝은 장대했다. 멍청한 사실을 내뱉고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창피해서 눈을 감았는데 그의 얼굴이, 그의 표정이 궁금했다. 이불 시트를 꾹 쥐고 슬며시 눈을 떠 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좀 화가 난 듯도 싶었다.
그냥 말하지 말 걸 그랬나? 다 큰 남자가 알약을 못 먹는다는 사실은 좀 수치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그냥 꾹 참고 하나씩 천천히 녹여 먹을걸. 괜히 말해서 그가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다 못해 화가 날 정도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너.”
“…….”
“지영우.”
“네…….”
목소리가 낮았다. 역시 그가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몸도 병신이고 생각도 어리고 알약도 못 먹는 애송이 이복동생이 한심할 것이다.
“그럼 그동안 알약은 어떻게 먹었지?”
나는 내 손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알약들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굴리며 대답했다. 손가락에 걸려든 커다랗고 하얀 알약. 매일 먹는 알약이었다.
“전에 살던 집에선 유모나 엄마가 알약은 곱게 갈아서 물에 타 주셨어요.”
“…….”
내 말을 듣는 그의 표정이 흉흉했다. 다급하게 변명을 붙여 보았지만…….
“몇 번 연습했는데 그때마다 목에 걸려서 아프기만 했어요. 유모가 괜찮다고 갈아서 먹으면 된다고 해서…….”
그래도 소용없었다. 그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아니, 그 집에서 말고 지금 이 집에선 그럼 약을 어떻게 먹었어.”
“입에 넣고 녹여 먹었어요……. 물하고 먹어 봤지만 넘어가질 않아서 그냥 입에 넣고 녹여 먹었어요.”
“후…….”
그가 한숨을 쉬며 잘 만져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덕분에 머리칼이 살짝 헝클어졌다. 그 모습이 멋있어서, 나 때문에 화가 난 모습이 멋있어서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먹고 속 안 아팠어?”
원래 항상 아팠기 때문에 잘 몰랐다. 그냥 입 안에 쓴 물을 물고 있는 것만 괴로웠다. 아프지 않았느냐는 그의 물음이 따듯한 온기를 그리며 내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냥…… 좀 쓰고 구역감만 있어요. 아픈 거는 원래 늘 그런 거니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바닥 위에 있는 알약들을 그가 거두어 갔다. 버리려는 걸까? 짧은 시간에 짐작을 해 보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쟁반에 있던 사기그릇 뚜껑 안쪽에 알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수저의 볼록한 부분으로 알약들을 힘 있게 눌러 으그러트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에 둥그렇고 딱딱한 알약들이 무참히 바스러졌다. 나를 위한 그의 행위가 무척이나 다정했다.
화가 났음에도 다정한 그 모습을 황홀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고택에서 유모와 엄마가 빻아 준 약처럼 곱지 않고 투박하게 바스러진 약이었지만 형용할 수 없는 벅찬 마음이 일기에 충분했다.
이 삭막한 저택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대로의 알약이 아닌 빻아져 가루가 된 알약을 먹었다. 그는 늘 나에게 처음을 선물해 주었다. 그 사실을 못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