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3/27)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서 오늘 있었던 선생님과의 첫 수업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선생님은 평소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엄마와 유모, 또 회장님 그리고 고택에 어쩔 수 없이 두고 온 열대어가 있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나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고개를 크게 젖히고 웃었다. 선생님이 왜 웃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최대한 질문에 솔직함을 담아 얘기했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 외로 또 좋아하는 것은 따끈하고 촉촉한 카스텔라와 단지 모양의 바나나 우유가 있었다.

‘제과 제빵을 가르칠 수도 없고 말이죠. 영우 군, 좋아하는 것 말고 배우고 싶은 것은요?’

나는 세상을 알고 싶었다. 내가 스무 해 동안 볼 수 없었고 지낼 수 없었던 세상을 배우고 싶었다. ‘세상’이라 말하는 나를, 선생님은 조용히 지켜봐 주었다. 그리고 오랜 생각을 하더니 곤란한 듯 웃었다.

‘세상이라, 정말 쉬우면서도 어려운 수업 주제네요. 어떻게 가르칠지 다음 수업까지 생각해 올게요.’

그러나 선생님은 이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세상을 알려 줄 사람이 생긴 것이 마냥 기뻤다. 선생님은 기대에 찬 내 눈빛을 보았는지 너무 크게 기대하지 말라며, 자신도 세상은 아직 배우는 중이라고 그 누구도 세상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동감을 했다.

선생님과 나는 나머지 시간 동안 간단하게 대화와 함께 문제 풀이로 나의 학습 능력 수준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혼자서 공부한 것치고 생각보다 학습 능력이 좋다며 나를 칭찬한 선생님은 다음 수업에 보자며 방을 나섰다. 이 저택의 고고한 도련님인 나는 선생님을 현관까지 배웅하지 않고 그의 서재에서 간단하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나간 뒤 나를 위해 준비된 책상이 아닌 그의 자리에 앉아 한 실장이 저녁 식사를 알리기 전까지 서재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가 늘어놓은 서류들을 조금이라도 흐트러트릴까 봐 조심하며 고개를 내려뜨리고 한쪽 뺨을 책상 위에 가져다 댔다. 차갑고 매끈한 나무의 결이 뺨에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이 책상을 사용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몰래 책상 서랍 속을 열어 그가 피우는 담배가 몇 갑씩 가지런히 쌓여 있는 걸 발견한 나는 그것을 토대로 그를 상상 속에서 그리기 시작했다. 기다란 손가락엔 담배가 걸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씩 재떨이에 재를 털며 서류를 들여다보겠지, 그러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짙고 가지런한 눈썹을 휘며 깊은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을 것이다. 그럼 나는 이곳에 떠다니는 공기가 되어 그의 폐 속에서, 입 속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를 온몸으로 맞이한다. 연기를 맞이하고도 폐가 아프지도 않고 기침을 하지 않는 공기인 나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건강한 내가 되는 것은 상상 속에선 쉬운 일이었다.

“영우 도련님, 식사 준비됐습니다.”

“네. 나갈게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상상 속의 건강한 공기인 나를 한 실장이 없애 버렸다. 상상을 마친 나는 어느새 뜨듯해진 책상의 나뭇결에서 뺨을 떼어 내곤 일어났다. 조심스레 뺨을 만져 자국이 남았는지 확인했다. 매끈한 책상처럼 반질반질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의 모습을 보고 한 실장이 지적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손바닥을 들어 유리창에 눌어붙은 것 같은 뺨을 만지작거리며 서재의 방문을 열었다. 나를 부르고 늘 먼저 1층으로 내려가던 한 실장이 오늘은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살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것 같기도 했다.

“마침 지 이사님께서 퇴근 중이십니다. 식당으로 가시기 전 먼저 이사님을 맞이하세요.”

그가 오늘도 일찍 퇴근한 모양이었다. 그의 마중을 전달하기 위해 한 실장은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뜻밖의 소식에 기분 좋아진 나의 속내가 들킬까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대답 없는 내게 한마디 하려는지 입을 벌리던 한 실장이 다시금 입을 꾹 다물고 뒤를 돌아 앞서 복도를 걸었다. 외롭고 쓸쓸한 이 저택에 적응이 되고 있었지만 한 실장의 다그침은 여전히 낯설었기에 다물어 버린 그녀의 입이 참 고마웠다.

사뿐사뿐 걷는 한 실장의 발뒤꿈치를 보며 그대로 졸졸 쫓아 내려갔다. 어제도 오늘도 그를 또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가벼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실장이 다시 무게를 실어 주었기 때문이다.

“어제 지 이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현관에서 두 손 모으지 마시고, 고개도 숙이지 마세요.”

“…….”

“영우 도련님.”

대답 없는 나를 한 실장이 다그쳤다.

“그렇게 할게요.”

“도련님은 사용인이 아닙니다. 이사님의 형제입니다.”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내게 말하는 한 실장의 말투가 매서웠다.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어떤 표정일지 나는 알고 있었다. 분명 못마땅한 얼굴일 터였다. 며칠 동안 가르치고 가르쳐도 잘해 내지 못하는 나를 그녀가 성에 안 차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에 서 계세요.”

어느새 집 안 현관에 다다른 한 실장이 정면으로 제일 잘 보이는 위치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어제 사용인들과 나란히 서 있던 곳과는 다른 위치였다. 한 실장보다도 더 앞에 선 나는 곧 들어올 그를 기다렸다. 두 손은 모으지 않고, 고개 또한 숙이지 않고.

“어서 오세요. 이사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실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반가움에 나는 또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을 뻔했다. 움찔한 손을 누군가가 보았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고개 숙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셨어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환하게 웃고 싶었지만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뚜렷해 웃을 수 없었다. 긴장으로 침이 입 안에 고였다. 그가 보는 앞에서 침을 삼키기엔 내 목울대가 커다랗게 움직일 것 같아서 삼키지 못하고 마냥 있었다.

“이사님, 식사는 준비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입 안에 고인 침을 언제 삼켜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한 실장이 말을 걸자 그가 시선을 내게서 거두어 갔다.

“아직 전이야.”

“먼저 2층에 올라가세요?”

“아니, 바로 식당으로 갈게.”

그의 대답에 나의 뺨이 기쁨으로 움직였다. 아침 말고도 저녁까지 그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혹시나 뺨이 붉게 달아올랐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손등을 뺨에 갖다 대어 만져 보았다. 역시나 다를까 뜨끈뜨끈한 온도가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브리프 케이스를 사용인에게 넘기지 않고 식당으로 향하는 복도로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실장이 그의 뒤를 쫓았다. 나도 그 둘을 쫓아 식당으로 향했다. 사뿐거리는 한 실장의 발걸음 소리보다 그의 발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이 저택의 무법자 같은 소리였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듣는 소리였다. 조심스럽지 않고 거침없는, 요란하지 않고 저벅저벅한 나를 울리는 소리, 나를 깨어나게 하는 소리.

발소리마저 나를 감격하게 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내 눈앞엔 한 실장이 보이지 않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나의 눈을 멀어 버리게 하는 존재였다.

“영우 도련님, 자리에 앉으셔야죠.”

“아…….”

어느새 식당 안이었다. 나는 우두커니 커다랗고 기다란 식탁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내 맞은편 늘 앉는 자리에 슈트 재킷을 벗고 앉아 있었다. 그와 한 실장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의자를 당겨 내 자리에 앉았다.

내가 앉자 사용인들이 따듯한 밥과 국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 먼저 그리고 내 앞에 하나둘씩 그릇이 놓였다. 따듯한 밥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코에 스며들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그를 보고 큰 용기를 내어 인사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 의외였는지 그가 수저를 들다 나를 보았다. 그가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열려고 할 때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과외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 즐거웠어요.”

내게 세상을 열어 줄 선생님을 뽑아 준 사람이 그였다. 연달아 빠르게 말을 내뱉자 약간 숨이 찼다. 안 하던 행동을 해서 그런지 가슴이 좀 뛰는 것 같기도 했다. 뺨도 달아올랐을 것이다.

“즐거웠다니, 다행이군.”

그가 내게 해 준 말은 단 두 마디였다. 나의 마음속은 그 두 마디에도 환희로 가득 찼다. 수저를 든 그가 식사를 시작하자 나도 따라서 내 앞에 놓인 밥을 먹었다. 보기 좋게 소리 없이 밥을 먹는 그를 조심조심 지켜보았다. 그는 나처럼 먹고 싶은 것만 편식해서 먹지 않았다. 골고루 균형 있게, 마지막 수저까지 우아하게 식사를 마쳤다. 그가 수저를 내려놓자 나도 따라 내려놓았다. 나의 밥공기에는 절반이 넘는 밥이 남겨 있었다. 열심히 먹는다고 먹었는데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엄마와 유모랑 살 적에는 때로는 미음이나 죽만 먹기도 했었고, 밥을 먹을 때에는 소량씩 자주 먹었다. 이런 나의 고약한 식습관 때문에 유모는 하루에 상을 일곱 번이나 차린 적이 있었다. 나를 조금 더 먹이려고, 나를 조금 더 건강하게 만들려 한 유모의 수고였다. 하지만 이 저택의 식사 준비에는 맞지 않았다. 수고를 해 줄 사용인은 많았지만 그런 상차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밥공기에 아직 남아 있는 밥을 눈치챈 한 실장이 다가왔다.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려던 나의 계획이 실패하는 순간이었다.

“도련님, 좀 더 드세요.”

“……배가 부른데, 더 이상 먹으면…….”

말을 이으려던 나는 한 실장의 매서운 눈에 풀이 죽어 다시 고개를 식탁으로 내렸다. 또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그러다 한 실장이 주는 알약을 목구멍에 걸치고 그 없이 혼자 터덜터덜 2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나는 괜스레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나를 구원해 주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마. 그만 먹어.”

그가 재킷과 브리프 케이스를 챙기고 의자를 뒤로 밀며 식탁에서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개운하지 않아 보였다. 한 실장은 그의 말에 나를 이 식당에 더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늘 챙겨 주던 알약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 알약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바닥을 펼쳐 받아 들었다.

“한 실장.”

“네, 이사님.”

아직 식당에서 떠나지 않은 그가 한 실장을 불렀다. 나는 넘겨 먹지 못하는 알약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이것마저 가루로 빻아서 사탕과 달라고 하면 나를 알약도 먹지 못하는 애라고 한심하게 바라보겠지’라는 생각 따위를 하며.

“이 집에서 도대체 하는 일이 뭐지?”

“네……?”

내 생각은 거기서 끝났다. 그가 갑자기 한 실장을 힐책했기 때문이다. 항상 차분하고 완벽하게 이 저택의 살림을 책임지는 한 실장이 그에게 힐책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가? 한 실장도 자신을 나무라는 그가 당황스러웠는지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그녀의 고운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머릿속으로 자신의 잘못이 있었는지 찾는 눈치였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이 권태로운 것 같은 한숨이었다. 그 모습에 한 실장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내가 안쓰럽다 생각될 정도로. 그런 그녀의 얼굴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한숨 끝에 툭 그가 말을 내뱉었다.

“구급상자 가져와.”

“네……?”

“집 안에서 사람이 다쳤는데, 몰랐나 보군.”

그의 마지막 말에 한 실장과 나는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말을 들은 다른 사용인이 눈치 빠르게 구급상자를 가지러 식당을 나갔다. 한 실장은 자신이 놓친 무언가를 찾으려 애쓰는 모양새였다. 나도 같이 이 저택에 다친 사람이 누구였는지 오늘의 일과를 떠올렸지만 별달리 생각나는 게 없었다.

“지 이사님, 오늘 어디 다치셨나요?”

사용인에게 구급상자를 건네받은 한실장이 뚜껑을 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대답 없이 챙겨 들었던 재킷과 브리프 케이스를 다시 의자에 내려놓았다. 나는 데굴데굴 눈만 굴리며 내 손안의 땀으로 슬슬 끈적거리기 시작하는 알약을 신경 썼다.

“지영우.”

“……?”

알약을 잠시 식탁 위에 올려놓던 나는 흠칫 놀라 그를 보았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른 것이 맞는지 재차 확인하고 싶은 표정으로.

“지영우, 대답해.”

“……네.”

내 이름을 부른 것이 맞았다.

“손가락.”

그의 말에 나는 내 손가락을 보다 ‘아’ 하고 또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아프지 않던 손가락이 통증을 내며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과외 시작 전 만년필 촉에 찔린 내 손가락은 피가 묻어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작았지만 어쨌든 자세히 보면 바늘구멍 같은 곳에서 피가 굳어져 비빈 듯한 흔적이 있었다. 나도 잊고 있던 상처였다.

나는 만성적인 통증에 익숙했다. 손가락이 조금 찢겨 피가 흐른다 해도 쉽게 잊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예전에 이 정도로 다쳤다면 엄마와 유모가 바로 알아채 주었을 테지만 이곳은 고택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잊고 있었다. 내가 ‘다쳤다’는 것을.

“……괜찮아요. 만년필 촉에 찔린 건데 조금 따가운 것 빼곤…….”

그가 말한 다친 사람은 나였다. 내 부주의로 다친 나는 이 저택의 누구도 모를 상처가 생긴 것에 대한 변명을 내뱉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얼굴은 북풍과 같아 보였다. 시리고 시린 차가움, 또는 얼어붙은 표정. 그의 표정을 한 실장도 읽었을까?

“한 실장.”

얼음장과 같은 그의 목소리에 한 실장은 몸을 떨었다. 실제로 떨진 않았지만 내 눈에는 그녀가 떠는 것처럼 보였다.

“네, 이사님.”

“한 실장을 지영우 곁에 붙인 것이 소용이 없잖아. 지금.”

그는 낮은 목소리로 한 실장을 힐난했다. 한 실장은 그에게 고개 숙여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한 실장이 나를 미워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었지만 나는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저택에서 아무도 모르고, 또한 나조차도 잊은 나의 상처를 그가 알아봐 주었다.

“죄송합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어서 치료하겠습니다.”

구급상자에서 소독액을 꺼낸 한 실장이 내 손을 살펴봤다. 소독액이 손가락에 닿자 따끔한 통증에 어깨가 작게 움츠러들었다. 톡톡 솜으로 핏자국과 잉크 자국을 닦아 낸 후 반창고를 꺼내 압박을 해서 감아 주었다. 빠르게 치료되는 별거 아닌 상처였다. 이 별거 아닌 상처를 그가 내게서 발견해 주었다. 나는 그가 치료해 준 것이 아닌데도 반창고가 붙은 손가락이 너무나 기꺼워서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감사합니다.”

이 상처는 한 실장이 아닌 그가 치료해 준 것이다. 이 저택에서 항상 뻣뻣했던 나의 입매가 슬며시 부드럽게 풀렸다. 나는 한 실장이 아닌 그를 보며 인사했다. 그는 내 얼굴과 손을 바라보곤 식당을 나갔다. 그가 나에 대한 아주 사소한 것을 알아봐 주었다. 이 저택은 엄마와 유모랑 살던 고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겼다. 그였다.

나는 이 벅차오르는 기분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했다. 치료를 마친 한 실장이 잊지 않고 내게 다시 준 알약이 목구멍에서 꽉 막혀 쓴 물을 뿜어내도 나는 알지 못했다. 쓴맛도 밀어 내는 이 기분이 무엇인지 밤새도록 생각했다.

이틀이 지나고 또다시 공부하는 날이었다. 나는 전보다 더 흥분 상태였는데 본격적인 수업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 코피를 쏟은 것을 제외하고는 컨디션도 매우 좋았다. 하마터면 식사 중에 쏟을 뻔했는데 그랬다면 나는 특별한 공부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은 정말 특별한 공부였다. 첫 수업 이후 두 번째 만에 굉장한 행운을 얻었다. 그 행운을 그가 아닌 한 실장이 가져다준 것이 흠이었지만 기실 터럭만도 못한 것이었다. 김재형 선생님이 나의 세상 공부를 위해 준비한 것은.

“도련님, 오늘 공부는 야외에서 진행된다고 합니다.”

아침을 먹고 한 실장이 건네주는 알약을 받으며 나는 순간 이것이 현실인가 싶을 정도의 감탄 어린 충격을 받았다. 믿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한 실장을 보았지만 그녀의 눈매와 입매는 언제나 그렇듯이 꾸밈 있는 다정함과 단단함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기에 되물어 보았다.

“야외 수업이요?”

“네, 김 선생님께서 지 이사님께 허락받으셨다고 합니다. 아까 연락 왔습니다.”

“와… 우와…….”

나는 그만 한 실장 앞에서 어린아이 같은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컨디션은 좋지만 기운이 넘쳐 나는 것은 아니었기에 번쩍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니라 약하게 숨을 내뱉는 정도의 탄성이었다. 야외 수업이라니, 늘 고택에 정체되어 있거나 회장님과 엄마와 함께 갔던 요릿집, 또는 근처의 동산. 지금은 이 커다란 저택에 박혀서 기침이나 해 대는 나에겐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내 기쁨을 아는지 마는지 한 실장은 산통을 깨듯이 얼른 약을 먹으라며 내 손에 크리스털 물 잔을 쥐여 주었다.

“어서 약 드시고 한숨 자세요. 쉬셔야 수업도 제대로 받을 수 있어요.”

이틀 전 그에게 지적받았던 한 실장은 그 뒤로 나를 심하게 쪼기 시작했다. 약은 잘 먹는지, 밥은 한 그릇 다 비우는지, 기침의 빈도나 한 시간마다 재는 체온 등. 그가 말한 내 곁에 붙여 둔 것이 소용이 있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피곤해졌지만 해 봐야 얼마나 해 보겠나 싶어 반은 포기하고 그녀의 쪼임을 받으며 알약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이제 내 방에 올라가 조금이라도 쉬어야 했다. 그녀의 말대로 잠시나마 휴식을 취해야 야외 수업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입 안에 물을 가득 머금고 침대에 누웠다. 어서 녹길 바라며 가글 하듯이 입 속에서 알약을 굴렸다. 이러나저러나 쓴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열심히 볼 운동으로 약을 녹여 먹고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공부에 대한 기대감과 야외 수업을 허락해 주었을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분명 야외 수업을 생각해 낸 것은 선생님일 텐데 나는 선생님보다 그에게 더 감사했다. 스무 해 만에 처음 본 나의 이복형이 왜 이렇게 나를 기분 좋게 하는가, 설레게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는 바람에 나는 결국 한숨도 잠들지 못하고 오전을 보내 버렸다.

지금 입은 ‘야외 공부 옷’은 유모가 좋아하는 벚꽃잎을 닮은 연분홍빛 셔츠에 밝은 회색 카디건이었다. 바지는 밝은 아이보리 빛이었는데 안감이 매우 부들부들했다. 응접실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고 지루함을 견뎌 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1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선생님이었다.

“네, 들어오세요.”

나의 대답과 함께 문이 열리고 한 실장과 김재형 선생님이 들어왔다. 오늘도 미소를 지은 채 선생님이 내게 인사를 해 왔다. 기쁜 마음에 내가 먼저 하고 싶었으나 뒤에서 날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한 실장 때문에 우물쭈물 서 있어야 했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면 분명 그녀의 서릿발 서린 눈빛에 등짝이 쓰라렸을 거다. 안 그래도 늘 아픈 나였기에 그녀의 서릿발 공격을 조금이나마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꾹 참고 선생님의 인사를 먼저 받았다.

“영우 군, 잘 지냈어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 수업 얘기는 들었어요?”

“네.”

선생님은 긴 재킷을 입고 있었다. 바깥이 약간 쌀쌀한지 선생님의 하얀 볼은 복숭아같이 붉어져 있었다. 응접실에 들어온 선생님은 의자에 앉지 않고 나에게 손짓했다.

“뭐 해요? 움직이지 않고, 우리 나가서 수업해요.”

꼭 마법에 빠지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가 나지 않게 걷는 습관을 잊을 정도로 발걸음이 신이 난 나는 응접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도련님, 그대로 나가시면 안 돼요.”

한 실장이 뒤에서 얇은 코트를 걸쳐 주었다. 3월의 봄 날씨는 나에겐 겨울과도 같은 추위였기에 군말 없이 받아 입고, 장갑과 모자까지 쓴 다음 선생님을 따라 나갔다.

선생님은 나보다 반 뼘 정도 키가 컸는데 그래서 그런지 걸음걸이가 빨랐다. 살랑살랑한 것 같기도 하고 가볍게 톡톡 튀는 것도 같았다. 선생님의 걸음을 따라잡으려 애쓰느라 슬리퍼를 신은 발가락에 힘을 꾹 주고 걸었다.

광활하고 넓은 저택의 대리석 바닥을 가로질렀다. 가로지르고 또 가로지르고 현관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기 전에 나는 처음으로 회장님과 그에게 내가 해 주던 배웅을 사용인들에게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당황하고 민망한 마음에 말을 좀 더듬었다. 오히려 선생님이 나보다 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다정스레 사용인들에게 인사를 해 주었다. 나는 동경 어린 눈으로 선생님을 보았다. 저렇게 당당하고 편안하게 이 저택에서 지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생각했다.

선생님이 10년이 넘도록 이 저택에 드나들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도 10년이면 이 저택에 적응이 될까? 아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게 10년이라는 시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원 차도엔 커다랗고 검은 차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님이 엄마와 나를 보러 고택에 오실 때마다 타고 온 것과 같았다. 정원 차도는 그가 나를 이 저택에 데리고 왔을 때 이후로 처음 나와 보는 것이었다. 차량 기사님이 나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인사를 받는 것이 부끄러워 소심하게 고개만 까닥하고 뒷좌석에 엉거주춤 앉았다. 곧이어 선생님이 따라 탔다.

“날씨가 좀 더 따듯했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 야외 수업 못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비가 안 와서, 왔으면 정말 방에서 시청각으로 세상 공부할 뻔했어요.”

뒷좌석 안전벨트를 착용하며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선생님은 내 쪽으로 몸을 숙여 나에게도 벨트를 해 주었다. 멍청하게 선생님을 보고 있던 나는 손짓에 따라 벨트를 만지작거렸지만 이미 벨트는 버클에 꽂힌 상태였다.

“내가 선배에게 영우 군 야외 수업 하게 해 달라고 어제 하루 종일 부탁했어요.”

기사님이 차를 출발시켰다. 나와 선생님이 탄 차는 정원을 가로지르고 저택의 정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드디어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감사합니다.”

나는 정말로 감사한 마음에 고개를 꾸벅이며 선생님에게 인사했다. 내 인사를 받은 선생님은 환하게 웃어 주었는데 그 웃음이 예뻐서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생님의 예쁜 웃음을 혹시 그도 보았을까 하는 생각. 그도 이 웃음을 예쁘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

“감사하긴요. 내가 더 영우 군에게 감사하죠. 자, 세상 공부하러 가 봅시다.”

선생님과 내가 탄 차는 30여 분을 달렸다. 달리는 중간중간 선생님은 내 관심 사항이 뭔지 계속 물어보았는데 나는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신기하게도 선생님 앞에서는 그와 회장님 앞에서처럼 긴장되지 않고 편하게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열대어는 키우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아요. 물 온도하고 밥만 제때에 잘 주면 돼요. 처음엔 깨끗한 곳에 살라고 물을 자주 갈아 줬었는데 그게 잘못이었죠. 그때 많이 죽었었어요. 아직도 많이 미안해요.”

어릴 때 외롭게 자라 왔던 나에게는 엄마와 유모, 가끔 보는 회장님이 전부였다. 동생은 당연히 없었고 형은 만날 기회도 없었다. 애완동물이라도 키워서 외로움을 달래게 해 주려고 엄마와 유모가 많이 노력했었다.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는 정말 키우고 싶었지만 폐가 좋지 않은 엄마와 나 때문에 당연히 기를 수 없었다. 토끼도 물론이었다. 아, 햄스터도.

그렇게 털이 없는 동물을 찾다 보니 거북이, 카멜레온 등이 있었지만 파충류는 싫었다. 그래서 난 열대어를 키우기 시작했다. 네모나고 투명한 사각형 어항에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물고기들을 보는 것이 나의 낙이었다.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와 눈을 마주쳐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과 교감을 한다고 생각했다.

“열대어 어디가 좋았어요?”

“음, 우선 내가 그 애들 밥을 줄 수 있었어요. 조그만 티스푼으로 떠서 수조 안에 풀어 놓으면 알록알록 예쁜 애들이 와서 입을 벌려 먹어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가 준 걸 먹는 걸 보면 뿌듯했어요.”

진공 청소기로 빨아들이듯이 파랗고 노란 아이들이 달려와 먹이를 먹었었다. 나는 몸이 좋지 않아 늘 누워 있거나 앉아 있거나 아무튼 할 일 없는 애였는데 열대어들은 그런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들에게 밥을 줄 때면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애들 밥을 주기 위해서라도 이 세상에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것 같았다.

“뻐끔뻐끔 입 벌려서 밥을 먹는 걸 보다 보면 시간도 잘 갔어요. 마음도 편안해지고요. 아이들이 물결에 따라 살랑살랑 지느러미를 흔드는 것도 예쁘고.”

“한번 회장님께 부탁드려 봐요. 열대어를 키우면 안 되느냐고.”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저택에서 열대어를 키우게 된다면 내 방이 아니라 거실이나 복도일 테고 밥을 주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한 실장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열대어들을 계속해서 볼 수 없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아니에요. 회장님 집에선 안 키워도 돼요.”

저택엔 열대어가 없지만 그가 있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아, 이제 다 왔네요. 내려요. 영우 군.”

차가 멈추었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며 창밖을 보았다. 선생님과 얘기를 하는 내내 흘끔거리며 창밖을 보았을 때는 복잡한 도로 위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밖에는 커다란 건물들이 광장 같은 곳에 듬성듬성 있었고 저 멀리에도 여러 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다니거나, 혼자 다니거나 자유로이 활보하고 있었다. 활기가 넘치며 설렘이 있는 이곳은 아마…….

“학교예요. 내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학영 선배 모교이기도 해요.”

“아…….”

나는 기사님이 차 문을 열어 주시기도 전에 다급하게 문을 열어서 내렸다. 아직 차가운 봄바람이 훅 하고 나를 지나쳤다. 눈앞에는 항상 상상으로 그리기만 했던, 다니고 싶었던 학교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영우 군이 아프지 않았다면 이곳에 다녔겠죠? 영우 군 또래들이 지내고 있는 세상이에요.”

“……와 ……우와.”

나는 또 바보처럼 감탄을 했다. 오전에 한 실장 앞에서 뱉은 것보다 더 힘 있고 큰 감탄이었다. 수많은 내 또래의 학생들이 바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학교가 어찌나 큰지 저 멀리에도 엄지만 하게 건물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세상을 구경했다. 원시인이 정글을 나와 도시를 보며 신기해하듯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영우 군, 가 볼까요?”

“네!”

나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선생님이 웃으며 나를 보더니 손짓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선생님을 쫓았다. 나를 지나쳐 가는 수많은 학생들의 웃음소리, 이야기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내가 꼭 이 세상의 일원이 된 기분이었다.

선생님과 나는 작지 않은 교내 정원을 거닐었다. 힘들면 건물 안에 들어가 쉬다가 쉬는 시간마저 아까워하는 나 때문에 곧 다시 나오곤 했다. 그저 좋았다. 내가 이곳을 걷고 있다는 것, 바깥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보는 것조차 행복했다.

내가 여태껏 살아왔던 제한된 삶들을 나쁘게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고택에서 엄마와 유모와 함께하는 삶은 내 나름대로 즐거웠었다. 가끔씩 찾아와 주시는 회장님만으로 내 아픈 삶은 충분했었지만 고택을 나와 조금씩 세상을 맛보게 되자 나는 이 삶에 조금씩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학교를 둘러보는 시간이 마침 점심시간이었기에 선생님과 나는 학생회관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는 이곳에서도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없는 것이 있을까?’ 할 정도로 여러 시설이 있었다. 식당부터, 매점, 안경원, 인쇄를 해 주는 곳, 꼭 TV에 나오는 백화점 같았다. 갑자기 너무 많은 세상이 내가 밀려온 것 때문인지 머리가 아찔할 정도였다.

“영우 군, 목 안 아파요?”

미어캣처럼 휙휙 고개를 들고 작은 기척에도 반응하는 나를 보며 걱정스레 선생님이 물었다. 나는 그만 부끄러워졌다.

“괜찮아요.”

정말 신기했다. 나는 항상 조용하고 힘없는 정체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활기찬 기운이 못내 감격스러웠고 그 감격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눈으로 담고 머릿속에 새기는 중이었다. 언제 또 이곳에 올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다음에 또 같이 와요. 학영 선배에게 부탁하면 돼요. 또 가 볼 만한 곳이 어디 있으려나…….”

“정말요?!”

식당엔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선생님은 신학기라 신입생들이 학생 식당을 많이 이용해서 그렇지 평소엔 이 정도까진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다. 바글바글한 학생들 사이로 내가 뒤쳐질까 봐 선생님은 내 어깨를 감싸 잡아 주었다. 지나가며 부딪치는 사람들의 어깨마저 처음이라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진동을 가만히 느꼈다.

“선택을 잘못했나…… 사람이 너무 많네, 다른 데 가서 먹어야 하나.”

선생님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픈 내가 위험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괜찮았다. 구두가 살짝 발에 밟혀도, 팔뚝이나 어깨가 사람들과 스쳐도 다 괜찮았다. 오늘만큼은 이곳의 학생이고 싶었다. 그의 모교인 이 학교에서.

“선생님, 저 괜찮아요. 여기서 밥 먹고 싶어요.”

“정말?”

“네, 제가 좀 더 힘내서 걸을게요.”

“그래요, 우리 학교 왔으면 치즈돈가스는 먹고 가야 해요.”

굳은 결심을 하듯 선생님이 식권 판매소 앞으로 나를 끌고 길을 헤쳐 나갔다. 웅성웅성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 고함 소리에 내 귀를 맡기고, 이 분위기에 내 걸음을 맡겼다. 내 어깨를 잡은 선생님의 손아귀가 점점 단단해졌을 때였다.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웅성임 사이에서 꽂혀 들어왔다.

“세상 공부가 학생 식당에서 밥 먹는 거라니.”

내 등 뒤로 단단하고 안락한 품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입에선 바보 같은 음성이 소리 없이 터졌다.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선생님의 손이 떨어져 나가고 내 뒤에 있는 다른 누군가의 손이 비어 있는 어깨를 잡았다. 몸이 흠칫 굳었다. 싫어서가 아니었다. 느껴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단단하고 따듯하고…… 거친.

“선배! 어쩐 일이에요?!”

선생님의 반가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웅성웅성거리는 식당 안에서도 선생님의 반가운 목소리는 감출 수 없이 반짝반짝 빛났다. 감춰지지 않는 그 빛이 부러웠다.

나의 가슴은 갑자기 나타난 그 때문에 반가움의 감정이 번지고 있었다. 나도 선생님처럼 반갑게 인사하고 싶었다.

“얘기는 나가서, 여기 너무 복잡해.”

여전히 내 어깨를 끌어안은 그가 말했다. 나는 이곳을 떠나기 싫었다. 오늘만큼은 이곳의 학생인 나는 귀가 아플 정도로 소란스러운 학생 식당에서 치즈돈가스를 먹고 싶었고, 사람들에 휩쓸릴까 봐 나를 붙잡은 그의 품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한번 우르르 학생들이 줄지어 가자 선생님도 곤란한 듯 웃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복잡한가? 나갈까요?”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고받았다. 나를 위해 왔으면서 나의 의견은 묻지 않고 나가려고 하다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오늘은 내 수업을 위한 날이었다.

“싫어요.”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였다.

“싫어요. 여기서 치즈돈가스 먹고 싶어요.”

내 의견을 들어주지 않을까 걱정됐다. 나는 엄마와 유모, 열대어만이 있는 낡고 오래된 고택의 소심한 애송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말하고 싶었다.

“배고파요! 지금 먹을 거예요.”

치즈돈가스가 먹고 싶다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집을 피웠다. 나의 외침이 의외였는지 나를 내려다보는 그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곧고 잘생긴 눈썹이 살짝 위로 치솟아 있었다. 그래도 고집을 굽히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나의 승리였다. 나는 선생님과 나란히 학생 식당의 기다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저 멀리서 사람들을 헤치며 걸어왔다. 학생들이 흘끔흘끔 이쪽으로 걸어오는 그를 보는 것이 보였다. 복잡한 식당 내에서 나를 데리고 식권을 끊고 밥을 받아 오는 것이 번거롭다 생각했는지 그는 선생님에게 나를 데리고 있으라 말하고 혼자 식사를 가져오는 중이었다.

한눈에 봐도 커다란 장신, 빳빳하게 다려진 어두운 계열의 슈트, 잘 만져 올린 머리,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멋진 외모의 사내가 양손에 치즈돈가스가 올려간 쟁반을 들고 있었으니 시선 집중이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학생 식당의 사람들도, 나도, 선생님도 모두 그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가 내 앞과 선생님 앞에 쟁반을 내려놓고 나서야 나는 지금의 현실을 직시했다.

“선배가 가져다주는 밥을 먹다니, 오늘 기념일 해야겠다.”

선생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내 눈앞에 놓인 치즈돈가스를 보았다. 큰 플라스틱 접시에 치즈돈가스 한 덩어리, 네모난 단무지 세 개, 케첩이 뿌려진 양배추 샐러드 그리고 옆에 따로 놓인 수프 접시와 칼과 포크. 그 어느 때보다 진수성찬인 식사 같았다. 세상은 좋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선배, 잘 먹을게요.”

잘 먹겠다고 인사한 나와 선생님과는 달리 그의 앞 테이블에는 잘 먹을 음식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나와 치즈돈가스를 보고 있었다. 저택에서 그와 먹었던 첫 아침 식사가 떠올랐다. 그는 그때도 집요한 시선을 지금처럼 주었었다. 나는 시선을 느끼며 조심스레 포크를 들었다. 바보 같지만, 난 치즈돈가스가 오늘 처음이었다.

“학영 선배, 학교는 졸업 후 처음 아니에요?”

내가 오른쪽에 놓인 칼을 어떻게 써야 하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선생님이 수프를 스푼으로 저으며 물었다. 나도 선생님과 같이 수프를 떴다. 칼 사용법을 몰라 언제 칼을 쓰실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떠먹은 수프는 뜨겁지 않고 미지근했다. 유모가 만들어 주던 미음보다 조금 더 달고 고소하고, 느끼한 것 같았다.

“오랜만이긴 하지.”

“선배랑 학교 다니던 옛날 생각나요. 사람 많은 거 싫다고 학생 식당엔 얼씬도 안 했던 사람인데, 제 앞에 그러고 앉아 있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옛 추억을 곱씹듯이 선생님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스푼을 들었다. 그는 선생님의 말에 크게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온 학교도, 사람 많은 학생 식당도 관심 없어 보였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오로지 나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별안간 쏟아지는 그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언제쯤이면 치즈돈가스를 먹을까 하고 선생님의 손만 쳐다보았다. 미지근한 수프는 목에 잘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입맛엔 조금 느끼하고 밍밍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여전히 수프도, 샐러드도, 치즈돈가스도 손대지 않고 스푼만 휘저으며 그에게 말을 할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야외 수업도 겨우 허락해 준 사람이. 설마 내 수업이 걱정돼서 확인하러 온 거예요?”

선생님은 들떠 보였다. 오늘 선생님의 모습은 전에도 느꼈지만 회장님과 식사하는 우리 엄마 같았다. 나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또 나 혼자 둘 사이에서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대답 없는 그에게 선생님이 재차 물었다.

“정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일하다가 나왔어요?”

나는 쓸쓸하게 포크를 어색하게 들고 치즈돈가스를 찍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치즈돈가스가 너무나 궁금한 나는 결국 칼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내 방식대로 먹어 볼 참이었다. 멍청이 같지만 나는 칼도 여태껏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포크로 찍으니 돈가스에서 기름이 찍 하고 스며 나왔다. 그리고 나는 커다란 덩어리를 포크째 들어 올려 바삭바삭해 보이는 치즈돈가스를 먹으려 입을 벌렸다. 하지만 돈가스는 내 입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만 얘기하고, 어서 먹기나 해.”

선생님에게 핀잔을 준 그가 내 손에 들린 포크를 가져가고 내 치즈돈가스가 놓인 쟁반도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나는 돈가스를 먹기 위해 벌렸던 입 모양 그대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봐야 했다. 입 벌린 채로 그를 지켜보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의 시선을 받고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칼을 들고 치즈돈가스를 조각내기 시작한 그는 순식간에 반을 자르고, 또 반을 잘랐다. 반복되는 그의 칼질에 어느새 전부 반듯하게 조각났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먹어.”

쟁반을 내 앞으로 돌려준 그가 다시 팔짱을 꼈다. 나는 치즈돈가스를 한번 그를 한번 번갈아 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엊그제 그가 나의 상처를 발견해 주었을 때 느꼈던 감정이 다시 끓어올랐다.

그가 잘라 준 치즈돈가스를 한 조각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이미 식어 버린 눅눅한 튀김이 입 안에 가득 찼다. 이로 천천히 씹자 기름이 스며 나오고 비린 돼지고기 누린내와 밀가루의 풋내가 코를 찔렀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 맛있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한 조각,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기 시작했다. 고택을 떠난 뒤로 온전하게 다 먹은 첫 식사였다.

마지막 치즈돈가스 조각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어 내리자 그가 말한 것은 오늘 수업은 끝이라는 거였다. 저택에서 나온 지 한참이었고, 저녁 식사 전에 들어가 휴식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아직 반도 못 먹은 상태였지만 곧 알겠다고 수긍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굉장히 천천히 먹는 사람인데 선생님은 나보다 더 느렸다. 회장님과 밥을 먹을 때의 우리 엄마처럼.

나는 후회했다. 이렇게 식사로 끝이 날 수업이라는걸 알았다면 지금보다 더 천천히 먹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만 가득한 채로 학생 식당에서 나와 타고 온 차에 올라탔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바로 집으로 간다고 했고, 그는 다시 일하러 들어가야 했다. 공부하러 올 때와는 달리 돌아갈 때는 혼자였다.

차 문이 닫히자 나는 기사님에게 창문을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창문이 내려가자 나는 냉큼 얼굴을 내밀었다. 아직 떠나지 않은 그와 선생님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영우 군, 이번 주말 잘 쉬고 월요일 날 봐요. 그때 또 무슨 공부할지 생각해 놔요. 나도 수업 준비하고 있을게요.”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앉은 채로 꾸벅 인사하자 선생님이 환하게 웃어 주었다. 옆에 서 있는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것이 다였다. 그런 그에게, 다시 무심한 사람으로 돌아간 그에게 용기를 내 인사했다. 그는 내가 용기를 낼 수 있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따 집에서 봬요.”

“…….”

그는 대답 없이 나를 보았다. 옆에 서 있는 선생님이 대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결국 그의 인사를 받지 못하고 창문이 닫혔다.

“도련님, 출발하겠습니다.”

“네.”

기사님이 출발을 알렸다. 나는 조용한 차의 움직임을 느끼며 좌석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순간도 놓칠 수 없었던 오늘 수업을 되새겼다. 처음 나온 세상, 쌀쌀한 봄바람, 눈부셨던 햇살, 비록 지나친 것이 전부였지만 반가웠던 또래들, 그가 다녔던 학교, 그가 가져다준 치즈돈가스, 그가 잘라 준 치즈돈가스, 나를 보던 무심한 눈빛, 때로는 집요했던 시선.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이 순간에서야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나는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모조리, 남김없이 다 갖고 싶었다. 나에게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도 떠나기 전 소중한 것을 모조리 가슴속에 가져갔을까?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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