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공부 선생님은 바로 만날 수 없었다. 회장님께서는 좋은 공부 선생님은 바로 구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있었기에 불평 없이 며칠 동안 이 집에서 지루함과 심심함을 참고 지낼 수 있었다.
아직 관장님이 도착하지 않은 이 집의 생활은 놀라울 만큼 단조로웠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7시 정각에 식사를 한 뒤 출근하는 회장님과 그를 배웅하고 나면 온전한 나의 시간이었다. 처음엔 황량하고 쓸쓸한 이 커다란 저택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쩔 줄 몰랐다. 엄마와 유모가 없는 이곳의 내 방 안에서 틀어박혀 누워 있거나, 몸이 좀 괜찮다 싶으면 아직 쌀쌀하지만 내리쬐는 봄의 햇살을 보고 싶어 저택의 잘 만져진 정원에 나가 앉아 있었다.
그러다 식사 시간이 되면 내가 어디 있는지 귀신같이 찾아내는 한 실장의 부름에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게 알약을 주고, 나는 여전히 그 알약을 넘기지 못하고 목구멍에 걸친 채 쓴 침만 꼴깍 삼켰다.
오늘도 홀로 저녁을 먹고 알약을 넘기지 못한 채 2층에 있는 내 방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항상 맨발 아니면, 양말로 딛는 걸음에 익숙한 나는 아직도 슬리퍼에 적응하지 못하고 딛는 계단마다 꾹꾹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놀리며 조용히 올랐다. 높은 계단을 오르고 2층 복도에 도착했다. 나는 복도 끝으로 보이는 그의 서재를 주시했다.
그와 나와의 관계도 여전했다. 아침이면 함께 커다란 식탁에 마주 앉아 형식적인 대화를 이어 가는 그와 회장님을 보며 밥을 먹는 것이 다였다. 첫 식사에 집요하게 시선을 주었던 그는 그날 이후 다시 나를 바라보는 일이 없었다.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정말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담백함이 나를 좀 더 안달 나게 했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된 나이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막연하게 그를 동경하고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그를 처음 본 순간 좋아하게 된 것은 의심할 수조차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내가 늘 상상 속에서 그리던 멋진 모습보다 더 멋졌고, 아름다웠다.
항상 작고 좁은 세상에서 세공품같이 갇혀 살던 내게 쏟아져 내리는 새로운 감정은 늘 아픈 몸 때문에 고통을 삭이느라 견디기 힘들었던 시간을 아주 조금은 빠르게 만들어 주었다. 이 저택에 늦은 밤 손님처럼 도착하는 그를, 나는 오늘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다.
목구멍에 작게 남은 쓴맛 때문에 고인 침을 삼키며 내 방 문 앞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방 문고리를 돌리기 전 2층 계단으로 누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 저택에 머물면서 습득한 게 있는데 발걸음 소리만으로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는 재주였다. 지금 들리는 발걸음 소리는 사뿐사뿐 규칙적이고 제어된 소리. 한 실장이었다.
“도련님, 이사님 도착하셨습니다.”
계단을 다 오르고 2층 복도에 서 있는 그녀가 내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전언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손목에 둘린 회장님이 선물해 준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오후 7시. 그가 평소에 들어오는 시간이 아니었다. 심지어 늘 먼저 오시는 회장님보다 빠른 시간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그의 도착이 반가워 나는 잠시 한 실장의 재촉에도 멍하니 서 있었다. 결코 그를 마중하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지루했던 나날들 중에 가볍게 생긴 기쁨의 파장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영우 도련님.”
그런 나를 한 실장이 다시 한번 불렀다.
“아, 내려가요!”
눈을 한번 깜박인 나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그제야 한 실장은 나를 다시 한번 바라보곤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녀의 꼿꼿한 등허리를 쫓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회장님이나 그가 도착했다고 알려지는 때는 그들이 정문을 지나고 있을 즈음이었다. 회장님의 저택은 무척이나 크고 넓어서 정문으로 차량이 진입하고서도 5분은 지나야 현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들이 온다는 전언을 들으면 나는 방 안에 있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5분 내로 현관 앞에서 사용인들과 서 있어야 했다. 하지만 혼자 들어오는 그를 맞이한 적은 없었다. 그는 빠르게 올 때는 회장님과 함께 왔고, 늦게 올 때는 아예 늦은 밤인지라 그를 맞이하는 일은 없었다. 늦은 밤에 올 때면 나는 내 방에서 기척을 느끼고 그가 집에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들어올 현관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 두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순간 헷갈렸다. 회장님께서 오실 때면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됐었는데 혼자 들어오는 그에게도 똑같이 해야 하나 고민이 드는 것이었다. 이미 맞이를 준비하는 사용인들을 흘끔 보았다. 그들은 간단한 묵례를 할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나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 역시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시야에 내 새하얀 양말이 들어왔다. 혹여 더럽거나 때 묻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양말과 바짓단을 유심히 보고 있을 때 그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 숙인 나는 그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이사님, 다녀오셨어요?”
“…….”
사용인들의 묵례와 함께 한 실장의 인사가 따랐다. 나는 그저 홀로 있는 그를 맞이하는 것이 처음이라 아직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내 하얀 양말만 보고 있었다. 꼭 그가 지켜보고 있는 것같이 정수리가 곤두서는 느낌이 들기 시작할 때였다. 아무 말 없던 그의 목소리가 터졌다.
“고개 들어, 고개 숙이는 것은 네가 나한테 할 일은 아니지.”
“…….”
혹시 나한테 하는 소린가 싶었다. 그가 너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이 저택에서 많지 않았다. 한 실장을 제외한 사용인들에게 일절 말을 섞지 않는 그였다.
“지영우.”
나에게 말하는 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그를 보는 사람이라면 오해할 정도의 오만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날카로움이 서린 긴 눈매는 오싹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 눈매 아래에 자리 잡은 콧대는 아주 잘 다듬어진 명검으로 베어 낸 것같이 곧고 높았다. 그리고 그 아래 굳게 다물어진 입술은 마치…….
“지영우.”
“대답하셔야죠. 영우 도련님.”
나는 항상 정체되어 있던 삶에 있었기에 남들보다 모든 것이 느렸다. 그걸 이 저택에 와서 알게 되었다. 바로 한 실장의 다그침 때문이었다. 회장님이 내게 말을 걸고 내 대답을 기다려 주실 때마다 곁에 있는 한 실장은 항상 ‘도련님’이라고 나를 일깨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 네.”
“턱 끝 살짝 들고, 양손은 가볍게 말아 쥐고 허벅지 양옆에 붙여.”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시작으로 손끝까지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그 시선에 꼼짝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말하는 소리에 입을 움직여 반응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가 주문한 동작을 머릿속에 새기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다였다. 나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지만 고갯짓만으로 만족했는지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한 실장에게 나직이 말했다.
“식사는 됐어. 30분 뒤에 내 서재로 간단한 다과를 내줘.”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리고…… 지영우.”
입을 가만히 벌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살짝 몸을 움찔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본 그가 살짝 눈썹을 휘며 이어 말했다.
“30분 뒤에 내 서재로.”
그의 말에 내 가슴이 쿵쿵거리며 크게 울렸다. 나의 고장 난 폐가 심장까지 영향을 미친 것인가 의심할 정도였다. 서재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려 2층 계단을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오른손을 들어 가슴 부근을 잠자코 쓸어내렸다. 늘 지루하고 무료했던 나날들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그가 말한 30분이 지나기 전까지 나는 내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침대에 잠시 누워 있을까 하다가 입고 있는 셔츠가 구겨질까 봐 그만두었다. 대신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벽에 붙어 있는 금박의 괘종시계만 노려보고 있었다. 나뭇잎 모양의 기다란 바늘은 숫자 ‘5’를 향하고 있었다. 초침의 바늘이 느릿느릿, 꼭 거북이 같았다.
나는 그 거북이를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서재로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한 상상이었다. 회장님의 저택에 온 뒤로 나는 그와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었다. 매일 아침 식사에서 대면을 하며 종종 눈을 마주치는 것이 다였다.
그가 내게 말을 걸어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가 나를 이 저택에 데리고 왔을 때조차도 그는 내게 일절 말 한마디 없었다. 그런 그가 나를 따로 불렀다. 회장님이 안 계신 이곳에서 그의 공간으로.
드디어 나뭇잎 모양의 기다란 바늘이 숫자 ‘6’의 정중앙으로 움직였다. 가느다란 초침은 숫자 ‘12’를 막 넘기고 있었다. 나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고 작게 심호흡했다. 내 방에서 만큼은 벗고 있던 슬리퍼를 다시 신고 그의 서재로 가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로 나가자 끝에 자리한 그의 서재가 보였다. 나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저택에 있는 동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던 공간이었다. 나의 방을 건너 맞은편에 있는 화장실을 지나치자 어느새 그의 서재 앞이었다. 이렇게 쉽고 가까운 곳을 나는 올 수 없었다. 나의 공간이 아닌 타인의 공간이었고, 나는 이곳의 이방인과 마찬가지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초대받았기에 당당히 노크를 했다. 똑똑, 하고 두 번 두드렸다.
“들어와.”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망설이지 않고 그의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들어가 본 그의 서재는 생각보다 정돈되어 있는 곳은 아니었다. 사방의 벽을 채운 책장은 빽빽하게 책들로 들어차 있었고, 커다란 창 앞에 있는 책상 위에는 종이와 서류철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그 책상에 앉아서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이제 막 태우기 시작한 기다란 담배가 걸려 있었다.
솔솔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한 코끝에 지독하리만치 강한 매캐함이 끼쳐 왔다. 자동적으로 숨이 턱 막히고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잘게 시작된 기침이 요란하게 점점 바뀌었다. 나는 내 고장 난 폐가 조금이라도 진정하길 바라며 코와 입을 막고 허리를 숙인 채 기침을 참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한번 시작된 기침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됐다. 강한 기침에 눈에선 찔끔 눈물이 맺혔다. 눈을 강하게 감았다 뜨면서 눈물을 털어 내고, 꼴사나울 모습을 보고 있을 그를 보았다.
그는 책상에 있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있는 커다란 창을 활짝 열고 있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
목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그의 손에는 기다란 담배가 사라진 상태였다. 공기 중에 피어오르던 연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 밤에는 차가운 봄바람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그 바람을 마시자 기침이 서서히 멎어 갔다. 나는 가슴팍을 잠시 팡팡 두드리며 폐가 진정하길 기다린 뒤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론 조심할게. 자리에 앉아.”
그는 서재 한편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1인용의 소파는 그가 독서를 할 때 앉는 의자 같았다. 동그란 테이블 위에는 한 실장이 가져왔을 다과와 다기가 있었고 소파 앞엔 폭신해 보이는 스툴이 있었다. 나는 스툴을 잠시 치워 놓고 1인용 소파에 앉아서, 창가에 양손을 기대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로 보이는 새카만 밤하늘의 달이 오늘따라 시리게 빛나는 것 같았다.
“공부 선생을 구했어.”
밤하늘을 등지고 있는 그를 홀린 것처럼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가 나를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앉아 있던 몸을 좀 더 바르게 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공부를 가르쳐 줄 선생님의 이야기였다.
“회장님께서 신신당부하시는 바람에, 조금 늦었지만…….”
“…….”
“너만 괜찮다면 내일부터 공부를 봐 줄 수 있게 됐어.”
“괜찮아요! 내일부터 할 수 있어요.”
항상 느리던 내가 다급하게 대답하자, 그가 조금은 놀라운지 창틀에 기대고 있던 손을 풀고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가까워지는 그 걸음에 칭찬을 받는 아이처럼 기분이 좋아져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얼른 하고 싶어요. 요즘 기침도 덜 하고 열도 많이 안 나요.”
실은 거짓말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기침은 밤이면 밤마다 계속됐고, 열은 어젯밤에도 끓어올라 시트가 흥건히 젖었었다. 밤새 나를 간호해 줄 유모가 없었기에 홀로 외로이, 한 실장이 건네준 목구멍에 넘길 수 없는 알약인 해열제를 먹고 덜덜 떨었다.
“그렇다면, 공부 선생에게 말해 두지.”
“네!”
나는 최대한 괜찮은 표정과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괜찮다고 내일부터 당장 시작할 수 있다는 나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무릎 위에 올린 내 두 손으로 그가 보지 않을 때 살짝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얼마 없는 살가죽이 아팠다. 이건 현실이었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이 세상에 생긴 아주 좋은 현실.
“내일 당장 시작한다면 공부방이 문제인데.”
“…….”
문제라는 그의 말에 내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외부인에게 침실을 보일 순 없고.”
가까이 다가왔던 그가 자신의 책상에 허리 부근을 기대고 서서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나를 지그시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응접실에서 공부하기엔 격이 떨어지고.”
“저…… 저는 괜찮아요.”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이 저택의 도련님인 내가 응접실에서 공부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맘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내가 괜찮지 않아. 지영우.”
그랬다. 나는 서영우가 아닌 지영우였다. 그의 말에 나는 살짝 의기소침해져 붙잡은 손을 더욱 강하게 쥐어 잡았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꼭 담배 연기를 내뱉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회장님 서재는 당연히 안 되고…… 어쩔 수 없네. 내일부터 오후 4시, 내 서재에서.”
“아…….”
“당분간만이야. 네 서재가 마련될 때까지.”
“네.”
이곳에서 공부를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별안간 내려진 그의 결정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공간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책상에 기대고 있던 허리를 떼곤 다시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팔랑팔랑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이 서재에서 이렇게 계속 앉아 있어도 되나 조바심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그의 일하는 모습을 보며 머무르고 싶었다.
“공부 선생은 남자야.”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는 그가 무심히 정보를 전달했다.
“여러모로 박학다식한 사람이니,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생각해 놔.”
“네. 저…… 고맙습니다.”
“그만 나가도 좋아.”
그는 내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퇴장을 명했다. 일하는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나 엄마와 나의 집이었던 고택의 마루를 밟듯이 서재 바닥을 밟았다. 하지만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상했다. 분명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나의 움직임을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했다.
“아…… 저, 안녕히 주무세요.”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어색한 마음에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 나를 보며 그는 무심히 ‘그래’라며 대답해 주고 일을 시작했다. 기다랗고 정갈한 손이 서류를 넘기다가 라이터를 집더니 다시 놓았다. 나 때문에 피우지 못하고 다시 내려놓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빠른 발걸음으로 그의 서재 안에서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온 나는 가만히 복도 벽에 기대서서 숨을 골랐다. 내가 이 저택, 이 집에서 무언가를 처음 한 날이었다. 비록 테이블 위에 놓인 다과와 차를 마시진 못했어도, 사람을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이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니,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그가 내게 처음이었다.
새벽 6시, 나는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눈이 말똥말똥한 상태였다. 어젯밤 그에게 공부 선생님에 대한 언질을 서재에서 들은 뒤부터 설렘에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기침이 덜한 것 같기도 했고, 열도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늘 뜨끈하게 젖어 있던 내 목덜미가 오늘만큼은 보송했다.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던 나는 버석거리는 이불을 치워 내고 일어났다. 커다란 창밖으로 여명이 떠오르고 있었다.
맨발로 방바닥을 딛자 미지근한 대리석 바닥이 느껴졌다. 내가 살던 고택의 뜨끈하고 포근한 구들장이 아니라서 그런지 건조하고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슬리퍼를 신고 다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나는 멀찍이 치워 둔 슬리퍼를 신을 생각 하지 않고 옷장으로 가 한 실장이 걸어 놓았을 오늘의 옷을 입기 위해 문을 열었다.
옷장 문을 열고 잠시 느릿하게 생각을 했다. 오늘은 걸린 옷이 두 벌이었다. 왼쪽에 걸린 옷 은 오늘 날짜와 ‘아침 식사’라고 적힌 쪽지가 있었고 또 다른 한 벌에는 ‘공부’라고 적혀 있었다.
이 저택에 오고 나선 며칠 동안 한 실장이 준비해 준 오늘의 옷을 입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어제까지는 한 벌만이 걸려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내가 느릿하게 도출해 낸 생각으로는 여태까지 입었던 옷들, 예를 들어 순면으로 된 새하얀 셔츠라든가 부드러운 면직물로 된 바지 따위는 이 저택의 막내 도련님이 집 안에서 편히 쉴 때 입는 옷들이었나 보다. 왼쪽에 걸린 ‘공부’ 옷은 조금 더 날이 선 모양의 옷들이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와 베스트, 그리고 은은히 광택이 나는 바지. 여러모로 볼 때 대외용 옷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이 나왔다. 엄마와 유모와 함께 살던 고택에선 부드러운 잠옷이 내 평상복이었다. 잔병치레가 잦기도 했고, 금세 식은땀으로 젖어 버려 쉽게 벗어 버릴 수 있는 옷이 제일 편하고 좋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정교한 틀을 벗어나면 큰일 날 것처럼 정해진 대로의 것들을 해야 했다.
나는 ‘아침 식사’ 옷을 입기 위해 내 몸에 걸쳐진 부드럽다 못해 미끈거리는 실크 파자마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슬리퍼를 신고 내 방에서 나가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7시가 되기 5분 전이었다. 나는 항상 서두른다고 서두르는데 늘 아침 식사 시간이 촉박하게 다 돼서야 준비가 끝나곤 했다. 나의 천성과 느긋한 생활 습관과는 별개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그와 화장실을 같이 쓰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오늘의 옷을 입고 내 방문 앞으로가 귀를 갖다 대고 그의 기척을 쫓았다. 그가 먼저 화장실을 쓰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왠지 내가 씻고 난 뒤의 화장실을 그가 본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다 씻은 기척이 들리고서야 나는 살금살금 화장실로 가 양치와 세수를 했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샤워 부스의 바닥, 그리고 거울에 살짝 서린 김, 은은한 샤워 코롱 냄새 따위를 눈과 코로 쫓는 것이 내가 이 저택에서 할 수 있는 유희 중에 하나였다. 오늘은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는지 거울에 서린 김이 평소보다 옅었다. 그래서 덕분에 양치를 하는 내 얼굴을 오랜만에 꼼꼼히 살펴보았었다. 잠을 잘 자지 못한 덕분에 얼굴이 오늘따라 조금 거칠거칠한 것 같아서 세수를 할 때 신경 써서 꼼꼼히 닦았다. 오늘 오시는 공부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었다.
“얼른 오셔서 앉으세요.”
식당 입구에 도착하자 한 실장이 서둘러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손목의 시계를 보자 7시가 되기 1분 전이었다. 나름 걸음을 빨리 놀려 내 자리에 가 앉았다. 앞에는 언제나 그렇듯 그가 완벽하고 멀끔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가볍게 목례로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고개만 까닥하며 그가 인사를 받아 주었다. 항상 저보다 늦게 내려오는 나를 타박한 적 없는 그였으나 한 실장은 달랐다. 이 저택의 장남인 그보다 굴러 들어온 돌인 내가 늦게 오는 것에 대해 굉장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영우 도련님, 앞으로 조금 더 일찍 내려오세요. 이사님보다…….”
입구를 등지고 서서 고저 없는 말투로 내게 말하던 한 실장의 입이 순간 다물어졌다. 그가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목에 매인 타이가 흔들리지 않도록 오른손으로 가볍게 받친 그가 입구에 들어서는 회장님께 인사드렸다. 나는 그의 각 잡힌 그림 같은 모습에 멍하니 입을 벌려 보고 있다가 내게 웃음을 지어 주시는 회장님의 얼굴을 보고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덕분에 의자가 바닥에 시끄럽게 끌렸다.
“다들 앉자.”
회장님께서 상석에 앉으시자 그와 나도 따라서 의자에 앉았다. 회장님은 어젯밤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어제 아침 식사와 출근 배웅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영우는 어제 잘 지냈어?”
조용한 식사 자리였다. 식기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 없이 우아하고 삭막한 시간이었다. 회장님께서 조용히 밥을 먹고 있는 내게 굴비 살을 건네주시며 물었다. 나는 흰 생선살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굴비를 가장 좋아했다. 그걸 회장님께서 알고 계셨다.
“네.”
나는 회장님이 준 굴비 살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먹으며 대답했다. 내 앞의 그는 회장님의 낯간지러운 사랑을 보지 못했다는 듯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턱 근육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나는 또 홀리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장님께서는 내 밥 위에 다시 커다란 굴비 살을 올려 주시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관심을 돌리는 말을 꺼내셨다.
“공부는 오늘부터 시작한다고?”
나는 공부라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회장님을 바라보았다.
“내 특별히 지 이사에게 부탁했지. 동생의 공부 선생을 형이 구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던 그가 회장님께서 주제를 꺼내시어 이야기를 시작하자 식사를 멈추고 회장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굴비 살을 아직 오물거리고 있는 것이 민망해서 나는 목구멍이 아파도 꼭 참고 입 안의 덩어리들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회장님과 그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선생은, 재형이라고 했나?”
“네.”
“그래, 재형이라면 영우 공부 선생이 되어 줄 만하지. 그 녀석은 아직도 학교에 있는 거야?”
“네. 윤 교수 밑에 있습니다.”
“윤 교수? 윤 교수 밑에 있을 거면 그만 고집 피우고, 일하러 들어오라고 해.”
“그 녀석은 학구파라서요. 제 말을 듣지 않네요.”
나는 그와 회장님의 대화를 핑퐁 보듯이 고개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보고 있었다. ‘재형’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의 공부 선생님은 회장님도, 그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공부는 어디서 하기로 했어?”
“당분간은 제 서재에서요.”
“그래, 영우를 아무 데서나 공부시킬 순 없지. 한 실장.”
회장님의 부름에 뒤편에 서 있던 한 실장이 즉시 대답했다.
“네, 회장님.”
“영우 공부방 좀 마련해 줘. 볕이 잘 드는 곳이면 좋겠어.”
“네, 알겠습니다.”
이 저택에 나의 공간이 하나 더 생기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의 서재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실은 더 좋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는 나에게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더 챙겨 주고 싶어 하셨다.
“영우야, 당분간만 지 이사 서재에서 공부하거라. 내 곧 좋은 공부방 하나 만들어 줄 테니.”
“네, 감사합니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회장님의 마음이 어떤 것임을 매우 잘 알기에 기쁘게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에게 나는 곧 없어질 아픈 손가락이었다.
하루 종일 시간이 가질 않아 힘들었다. 공부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잘 가지 않는 시간을 버티고 버티며 기다렸다. 아침을 먹고 회장님과 그를 배웅하고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 방에 누워 있다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해 ‘공부’ 옷을 입고 그의 서재 앞을 서성였었다. 그러다 공부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그의 서재 안에 들어와 앉아 있는 중이었다.
그의 서재는 나를 위해 약간 가구 배치가 바뀌어 있었는데, 커다란 책상은 그가 업무를 보던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고 어제 내가 앉았던 중앙 공간의 1인용 소파와 티 테이블이 치워지고 기다란 원목 책상과 편안해 보이는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의자 중 하나에 앉아서 공부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는 선생님을 직접 맞이하고 싶어서 응접실이나 현관 앞에서 있고 싶었지만 한 실장은 나의 조심스러운 의견을 ‘도련님은 서재 안에서 그냥 기다리고 계시면 됩니다’라며 단칼에 제지했다.
그의 서재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한번 슬쩍 보았다. 5분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한 실장이 건네준 고급 필기 세트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만년필의 뚜껑을 열고 날카로운 촉을 검지로 아프지 않게 톡톡 두드려 보고 있는데 육중한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실수로 촉에 손가락을 찔리고 말았다.
“도련님, 선생님 오셨습니다.”
한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년필 촉에 찔린 손가락을 감싸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찔린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나는 문밖에서 기다릴 사람들을 위해 황급히 대답을 했다.
“네!”
“문 열겠습니다.”
한 실장의 말소리와 함께 서재 문이 열렸다. 나는 어제 그가 말했던 자세를 기억하며 턱 끝을 약간 들고 양손을 살짝 말아 쥐어 허벅지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훤칠한 키와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피부가 하얬다. 여태껏 내가 보아 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TV 속 사람들까지 다 합한 것 중에 지금 온 선생님이 가장 예쁘게 생긴 남자였다. 안경을 쓴 선생님의 가는 눈매가 살짝 접히며 웃음을 띠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나도 모르게 먼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아까 선생님이 오기 전 한 실장이 입이 닳도록 주의를 준 ‘먼저 인사하지 마세요’가 무색하게도 말이다. 나의 인사를 받은 선생님의 웃고 있던 가는 눈매가 살짝 커졌다. 그러나 이내 다시 가늘어졌다.
“오늘부터 도련님을 지도해 주실 김재형 선생님입니다.”
표면적으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지만 분명 속으로 나를 한심하게 여길 한 실장이 선생님을 소개시켜 주었다. 선생님은 간단하게 목례를 하며 내게 인사했다.
“반가워요. 영우 군, 오늘부터 수업을 맡게 된 김재형입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 예쁜 눈웃음, 나는 그 모습에 움찔 몸이 떨렸다.
“네…… 지영우입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만년필 촉에 찔린 내 왼 손가락이 다시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4시 수업 시작. 30분 수업 후 다과 시간 20분 갖고, 마무리 수업 30분 하신 뒤 수업 종료입니다. 도련님은 따듯한 박하차, 선생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차를 원하십니까?”
한 실장이 간단하게 수업 시간에 대해 설명을 하곤 나와 선생님이 마실 차에 대해 물었다.
“저도 영우 군과 같은 것으로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부족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내선 전화로 연락 주세요.”
한 실장이 간단하게 목례를 한 후 서재에 나와 선생님을 남겨 두고 나갔다. 나는 어색하게 책상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오히려 이 저택의 객인 선생님이 더 자연스럽게 서재를 둘러보며 서 있었다.
“늘 궁금했던 공간이었는데, 이렇게 와 보네요.”
“……?”
“십수 년이 넘게 이 집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지만 학영 선배 서재는 처음이에요.”
“아, 네…….”
“우리 앉을까요?”
선생님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어색하지 않은 표정과 몸짓 그리고 그를 부르는 말투. 모든 것이 내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갖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나는 주춤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물론 선생님은 벌써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자신의 가방 안에 있는 필기류를 꺼내고 있었다.
“아까 한 실장이 소개해 준 것 말고 나한테 더 궁금한 것 없어요?”
“아…….”
꺼낸 필기류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또 그만 그 자신 있고 당당한 모습에 멍청이같이 입을 벌리고 ‘아’와 같은 소리나 내뱉고 있었다. 그런 나를 선생님이 쳐다보더니 다시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모습이 예뻐서 나는 또 움찔했다.
“내 이름은 김재형이에요. 나이는 서른, 학영 선배 2년 직속 후배예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같이 다녔죠. 모교 교수님 밑에서 연구 중이고, 그리고 또 보다시피 오늘부터 영우 군 공부 선생이죠. 일주일에 세 번이나 만날 거예요. 우리.”
“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하는 그에게 나는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요. 영우 군 덕분에 선배 서재도 다 들어와 보고, 좋네요. 선배가 누구한테 뭐 부탁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근데 처음으로 저한테 부탁을 했어요.”
그의 서재 안을 꼼꼼히 살펴보며 말하던 선생님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꼭 서재를 보던 눈과 같은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선배의 부탁인데 거절할 수 없었어요. 또 기분 좋기도 했고.”
나는 선생님의 눈에서 반짝임을 보았다. 저런 눈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살아 있을 적에 고택에서 회장님을 기다리던 눈이었다. 오랜 고독을 견디다 잠깐의 만남만으로 반짝이던 엄마의 눈과 같았다.
“이복형제여도 동생은 동생인가 봐요. 이렇게 자기 공간을 내어 주는 거 보면.”
거침없는 선생님의 말투에 나는 긴장했다. 선생님은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호적에도 올려지지 않아 서류에도 없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저…… 제가 누군지 알고 계시나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엄마와 유모, 그리고 회장님과 그의 식구들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그럼요, 선배 동생이잖아요. 회장님의 혼외자. 아 미안해요,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아니에요. 다 맞는 말인걸요.”
나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나는 이 세상에 있어서 당당하지 못한 존재였다. 나이 든 회장님의 어린 여자가 낳은 아이, 인정받지 못해 숨겨서 키운 병든 아이.
“영우 군이 궁금했었어요. 회장님을 빼다 닮은 선배 때문에 혹시 영우 군이 선배와 비슷할까 생각했었는데 아니네요. 영우 군은 외탁했나 봐요.”
“네…….”
나는 엄마를 꼭 빼다 닮았다. 그래서 회장님이 나를 매우 예뻐해 주셨다. 어릴 적 나와 하나도 비슷한 구석이 없는 회장님의 얼굴을 볼 때마다 생각했었다. 내가 정말 회장님의 자식이 아니라서 ‘아빠’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이 세상에 드러내지 못할 존재였기에 아버지를 회장님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쁘고 순한 동생이라 선배가 직접 부탁했나 봐요. 사진 좀 보여 달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안 보여 주더니.”
나는 자꾸 따끔거리는 검지를 구부려 말아 쥐었다.
“어쨌든 반가워요. 오늘부터 성심성의껏 영우 군을 지도할게요.”
“네, 선생님.”
선생님이 나를 보며 활짝 미소 지은 채 하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선생님의 손을 붙잡았다. 이 손을 붙잡는 것이 꼭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