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네가 살아가는 세상
시사회는 성공적이었다. 객석에서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새로운 대작이 세상과 만나는 순간을 함께한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일종의 자부심마저 엿보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희민의 작은 얼굴은 유독 눈에 띄었다. 뺨이 발갛게 물들어 손이 부서질 정도로 손뼉을 치는 모습에 수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희민은 저 자신이 잘되는 것보다도 수현의 일이 잘 풀리는 것을 더 기뻐했다. 사람들이 수현을 칭찬해 주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희민의 핸드폰 사진첩에는 기자나 평론가들이 수현에게 보낸 찬사를 모으는 공간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오늘은 수현과 작품을 둘러싼 현장의 열기를 체감한 만큼 평소보다 몇 배로 신이 난 얼굴이었다.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희민의 즐거움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조잘조잘 떠들며 영화에서 좋았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꼽았는데, 사실상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보아도 좋았다.
그런가 하면 자신도 이제 스릴러를 즐길 수 있는 관객이 되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수현은 그래, 대단하다, 하며 맞장구를 쳤다. 영화를 보는 내내 쥐어뜯었는지 밑단이 늘어난 티셔츠는 모른 척해 주었다.
마냥 귀여워서, 결국 저를 아껴 주는 마음이 예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던 게 문제였을까.
평소 술자리 구석에서 그림처럼 웃기나 하던 희민은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희민의 잔도 함께 돌아다니며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반복했다. 희민이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은 감독 조윤석의 테이블이었다.
“근데요, 그때 뒤에서 범인이 지나가잖아요.”
“그렇지, 그렇지! 이야, 우리 희민 씨가 그걸 알아봐 주네.”
조 감독과 희민은 죽이 잘 맞았다. 조 감독은 자신의 디테일을 하나하나 짚어 주는 희민이 퍽 마음에 든 눈치였다. 내년 스케줄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수현은 미소를 머금고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조 감독은 지나친 완벽주의자라는 것만 빼면 함께 일하기 좋은 사람이었다. 감독으로서의 입지가 탄탄한 것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배울 점이 많았다. 조 감독과의 작업은 희민을 한층 성장시킬 기회가 될 것이었다.
수현은 적당한 타이밍을 노렸다. 조 감독에게 희민이 얼마나 성실하고 적극적인 배우인지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때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서 누군가 수현의 이름을 불렀다.
“희민아, 나 잠깐 저쪽 좀 다녀올게.”
희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확인한 후 수현은 자리를 비웠다.
다시 돌아왔을 때, 수현이 마주한 것은 하얀 얼굴 가득 붉은 물이 든 희민이었다. 희민은 수현을 보자마자 팔을 뻗어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목소리에 술기운이 짙게 배어 있었다.
“형 어디 갔었어요. 저 계속, 계속 형 찾았는데. 계속 형이 안 보여서 속상했어요. 말이라도 해 주지. 계속 찾았는데. 저는 형 엄청 보고 싶었는데….”
수현은 기가 차 픽 웃었다. 조금 떨어지기는 했지만 같은 공간 안에 있었는데, 그사이에 술을 얼마나 마셨으면 저를 찾지도 못했나 싶었다.
“미안.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서. 감독님이랑 얘기는 잘 했어?”
“네. 감독님 차기작 얘기 들었어요. 엄청 좋았어요. 형한테도 얘기해 줄게요. 그러니까….”
수현은 끝이 질질 늘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희민의 상태를 가늠했다. 이대로라면 얼마 못 가 쓰러질 것 같았다. 마르고 가벼운 희민을 옮기는 것은 수현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희민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희민의 곁으로 좋은 사람들이 모여들기를 바라는 것, 희민이 받아 마땅한 사랑을 받기를 바라는 것과는 별개로 저만 알았으면 하는 모습들이 있었다.
평소보다 나른하고 물기 어린 눈빛, 긴 밤을 보내고 잠겨 든 목소리, 제 품을 파고들며 매달리는 몸짓, 팔꿈치 안쪽의 살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부분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입이 마르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희민을 지켜 주고 싶은 온후한 애정과 독점하고 싶은 불같은 욕구 사이, 마음의 온도는 아슬한 균형을 유지했다.
수현은 제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열망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희민이 제게 갖는 의미, 희민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랑은 이성만으로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집에 갈 시간이었다.
“궁금하다. 자세히 듣고 싶은데 들어가서 얘기할까?”
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희민을 부축하며 일어섰다. 수현 씨 가? 벌써 가? 아쉬움을 담아 붙잡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저희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수현 씨, 언제부터 이렇게 신데렐라가 됐대. 우리 네 시까지 마시면서 작품 얘기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하하, 그러게요.”
수현은 적당히 너스레를 떨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대리 기사가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는 열두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희민은 이미 반쯤 졸고 있었다. 수현은 기사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 희민의 앞에 등을 보이며 앉았다.
“자, 업혀.”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저 그 정도는 안 취했어요. 저 다리도 안 아파요. 집까지 걸어서 갈 수도 있고 뛰어서 갈 수도 있어요. 형 저 계단 뛰어가는 거 볼래요? 저 계단 세 개도 뛰어요.”
수현은 희민을 돌아보며 웃었다.
“알아, 그 정도로 취한 건 아닌 줄 아는데, 내가 업어 주고 싶어서 그래.”
희민은 가만가만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하고 싶으면… 다 돼요. 저는 형한테 다 해 줄 거예요. 형 하고 싶은 거 다.”
“얼마나 더 해 주려고? 일단 업혀서 생각해 봐.”
수현은 등을 더 내밀며 재촉했다. 잠시 후 긴 다리가 수현의 옆구리 사이로 내려오더니 등에 가벼운 무게감이 더해졌다. 하얀 팔이 수현의 어깨를 감쌌다. 수현은 희민의 팔이 제 어깨를 더 단단하게 잡도록 만져 준 뒤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차 문을 닫고 주차장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내내 희민은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저 업히는 거 엄청 오랜만이에요. 일곱 살 때 마지막이었으니까… 지금 십육 년. 십육 년 됐어요.”
“십육 년 전 일도 기억이 나? 우리 희민이는 역시 대단해.”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형은 왜 제가 뭘 하든 다 대단하다고 해요. 형 같은 사람을 팔불출이라고 하는 거래요.”
“그렇구나. 그럼 난 팔불출 할래.”
희민은 그 말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팔불출, 팔불출, 하며 수현을 놀려댔다. 수현은 네, 부르셨어요, 하며 장단을 맞췄다. 희민은 그럴수록 신이 나서 아이처럼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와 평소보다 조금 올라간 체온이 사랑스러웠다. 수현은 조금 더 이대로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 바퀴만 걷고 들어갈까.”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이 수현의 귓가에서 앞뒤로 흔들렸다. 알겠다는 뜻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여름밤의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깊은 밤이 찾아온 후에도 채 식지 않은 낮의 열기가 느껴졌다. 어디선가 매미가 울고, 공을 끌어안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산책로를 뛰어갔다.
수현은 제 높은 체온 탓에 희민이 힘들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희민은 덥지도 않은지 수현의 등에 몸을 더 바짝 붙여 왔다.
“아까 감독님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
“감독님 차기작 얘기요. 있잖아요, 어떤 여자랑 남자가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데요. 여자는 계속 두 사람이 헤어지는 꿈을 꿔요. 그래서 자꾸만 뒷걸음질을 쳐요. 남자는 반대예요. 자기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수현은 제 고백을 거절하던 희민을 떠올렸다. 겁에 질린 눈,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 그 순간 수현은 어린 초식동물을 궁지에 몰아넣은 포식자가 된 듯한 죄책감을 느꼈다. 머리에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희민의 상처를 알게 된 후에야 그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다시 사랑할 용기를 내 준 희민에게 수현은 늘 고마웠다.
수현은 저릿하게 아파 오는 마음을 감추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생각이 완전히 반대네.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제 생각에는요…. 그래도 결국에는, 사랑이 두려움을 이길 거예요.”
저도 그랬거든요, 말하는 목소리에는 엷은 웃음기가 배어났다.
“형이 너무 좋아서, 형 없이는 살 자신이 없어서 무서웠어요. 그런데 있잖아요. 지금은 훨씬 더 많이 좋아하는데요, 그때처럼 무섭지 않아요….”
희민의 목소리는 차츰 낮고 흐릿해졌다. 웅얼거리던 말이 완전히 끊어졌을 때는 작은 머리가 수현의 목 옆으로 축 떨어져 있었다.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은 희민의 몸을 조금 더 단단히 받쳐 업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희민은 집으로 들어와 침실까지 오는 동안에도 뒤척임 한번 없었다. 그래도 수현은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희민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늘어진 티셔츠를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수건을 적셔 와 손발과 얼굴을 닦아 주었다.
따뜻하게 젖은 수건이 손가락 사이사이의 여린 살을 지나갈 때면 천사 같은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자면서도 간지러움을 타는 모양이었다.
수현은 수건을 내려놓고 희민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부드럽게 손가락에 감기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마저도 희민다워서,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반듯한 이마, 곱게 감긴 눈꺼풀 아래 긴 속눈썹, 곧은 콧날과 말랑한 입술을 차례로 건드리자 가벼운 칭얼거림이 돌아왔다.
문득 희민과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났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 순간. 수현은 넋을 잃었다. 섬세한 선과 투명한 색채로 이루어진 얼굴은 현실감이 없었다.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었다.
태양의 신에게 사랑받았던 미소년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린 수현은 그 이야기를 읽고 아이다운 호기심을 느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면 가장 눈부신 빛의 신을 사로잡았을까. 오래도록 잊고 있던 질문의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은 희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지상에 내려온 천사를 만난 것 같기도 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보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겨우 처음 만난 그가 제게 특별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첫 작품을 찍던 날처럼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뛰었다. 제가 배우가 아니었다면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며 웃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희민의 아름다움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슬픔을 걷어내고 웃기 시작한 얼굴은 전과 비할 수 없이 아름다워서, 바라보고 있자면 경건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한 번씩 다른 모습의 희민을 상상하게 될 때가 있었다. 희민이 이렇게까지 아름답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면 덜 힘들게 살 수 있었을까. 세상 사람들도 그 애를 쉽게 사랑하고 쉽게 미워하는 대신 마음을 보아 주었을까.
깊은 산속의 물처럼 순하고 맑게 세상을 비추는 마음은 천사 같은 얼굴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수현은 그것을 보려 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조금 야속했다.
희민은 입버릇처럼 수현이 다정하다고 말했으나 수현의 눈에는 희민이야말로 누구보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희민의 다정함은 서투르고 어색했지만 진심을 담고 있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하기 위해서도 희민은 오래 고민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둥글고 무르기만 한 말에도 모난 부분이 없는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김혜주 감독이 스쳐 지나가듯 말했다. 신희민 씨는 자기가 툭하면 아프니까 남들도 그런 줄 알아요. 수현은 그 말에 동의했다. 쉽게 상처받고 작은 일로도 고민하는 희민은 다른 사람들도 저와 같을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이 상처받는 아픔을 알기에 다른 이들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누구도 미움받지 않고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모든 사람이 있는 그대로 소중히 여겨지는, 오직 사랑으로 가득한 희민의 마음속 세계.
수현은 그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을 알지 못했다. 희민이 내는 빛은 한낮의 햇살 아래에서도 가려지지 않았고,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숨겨지지 않았다.
“잘 자.”
희민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 주고 나직이 속삭이며, 수현은 소망했다. 희민의 밤이 평온하기를. 꿈속에서 만날 사람들이 희민 자신만큼만 다정하기를. 너무 많은 슬픔을 지나온 연인이 꿈에서라도 슬프지 않기를.
* * *
수현은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본 광경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무래도 희민은 지난밤 꿈에서 아주 흥미로운 모험을 한 것 같았다. 머리가 사방으로 뻗쳐 있었고 눈은 아직도 꿈결을 헤매고 있었다. 희민은 웃음의 이유가 궁금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현은 들고 있던 복숭아 주스를 건네며 희민의 옆에 걸터앉았다. 수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연인은 배시시 웃으며 주스를 받아 들었다.
컵이 반쯤 비었을 때, 수현은 준비한 폭탄을 떨어뜨렸다.
“우리 아무래도… 결혼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 같아.”
“결, 혼이요?”
주스를 홀짝거리던 희민이 눈을 크게 떴다. 수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어젯밤에 차수현은 내 거라고 공표하면서 결혼 선언까지 했거든.”
“제, 제, 제가요?”
“응. 영상이 남아서…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게 됐어.”
희민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컵을 꼭 쥔 손이 덜덜 떨렸다. 희민은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한껏 낮춘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떡해요? 형 지금 결혼해도 괜찮아요? 계약서에 안 된다는 말 없어요? 회사에서 전화 안 왔어요?”
“다행히 그런 말은 없어. 회사에서도 뭐, 괜찮다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에요….”
한숨처럼 중얼거리던 희민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컵을 내려놓고 이불을 헤집었다. 지켜보던 수현의 앞에 다시 튀어나온 손은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수현은 자신이 완전범죄에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취한 희민을 챙기기 바빠 핸드폰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볼을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모습을 더 볼 수 있었는데, 못내 아쉬웠다.
희민은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토독토독 두드리다가 뚝 멈췄다.
“형.”
차갑게 내리깐 목소리는 작은 동물이 한껏 부풀린 꼬리 같았다. 수현은 부러 능청을 떨며 답했다.
“응. 우리 결혼 기사가 벌써 났어?”
“거짓말쟁이. 형 진짜 거짓말쟁이예요. 안 믿어.”
부루퉁한 볼. 치켜떠도 사납지 않은 눈. 여전히 부스스한 머리. 하나하나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수현은 침대 위로 쓰러지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희민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희민은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수현도 자연스럽게 그쪽을 보았다. 발신자는 조윤석 감독이었다. 지난밤 술자리에서 번호를 교환한 듯했다.
“감독님…? 네, 네… 저는 잘 들어갔어요.”
수현은 통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희민의 머리카락을 빗어 주었다. 희민은 그 손길에 누그러져 가만히 머리를 맡겨 왔다. 여름 복숭아처럼 무른 연인의 화는 오 분을 가는 법이 없었다.
“오늘이요? 아뇨, 안 될 건 없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희민이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형, 저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조윤석 감독님이 하실 말씀 있다고 하셔서요.”
“데려다줄까?”
희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수현도 따라 웃으며 그래, 그럼, 하고 답했다. 차기작 이야기의 연장선이라면 혼자 가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희민이 돌아왔을 때, 수현은 제 선택을 후회했다.
저녁 식탁에 앉은 희민은 고민으로 머리가 터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속이 복잡할 때면 늘 그렇듯 밥을 깨작거렸고, 좀처럼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단순히 차기작 이야기만 오가는 자리가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무슨 이야기하고 왔어?”
“…어, 그러니까….”
“일단 이거 하나 먹고.”
수현은 웃으며 희민의 그릇에 계란말이를 하나 놓아주었다. 거짓말에 서툰 연인을 더는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윤석을 털어 보면 될 일이었다.
희민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수현은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조 감독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짧은 신호음 끝에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독님, 차수현입니다.”
- 어, 수현 씨. 무슨 일이야?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오늘 희민이랑 만나셨잖아요.”
- 어어, 희민 씨가 한다고 했어?
수현은 미간을 좁혔다. 무엇을 한다는 것인지 바로 알아듣기 어려웠다.
“감독님 차기작 말씀이세요?”
- …아직 수현 씨한테도 말 안 했나? 어지간히 고민되나 보네.
“네?”
알 듯 말 듯 엉킨 말을 풀어놓으라고 요구하려는 찰나, 조 감독이 말했다.
- 괜히 아는 척하지 말고 혼자 고민하게 둬. 조언이 필요하면 알아서 구하겠지. 그럼 끊는다.
뚜, 뚜, 전화가 끊겼음을 알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수현은 입술을 맞물며 어두워진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조 감독이 희민에게 해로운 일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민이 비밀을 만들 때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초조해지는 기분을 어쩔 수 없었다.
* * *
하얀 종아리가 한들한들 흔들린다. 몸을 지탱하는 팔 위로 마른 어깨가 삐죽 솟아있다. 어깨부터 등을 지나 떨어지는 선이 버들가지처럼 유려하다. 동그란 갈색 뒤통수만 보아도 집중한 기색이 느껴진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은 마음과 이 평화로운 풍경을 더 감상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수현은 언제나처럼 고민했다.
소파에 엎드려 무언가를 써 내려가던 희민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눈이 기쁨과 반가움을 담아 휘어졌다. 하얀 뺨에 발그스름한 물이 들었다. 색이 고운 입술이 벌어지며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냈다. 표정의 변화 하나하나가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형 왔어요? 왜 왔다고 안 했어요?”
수현은 팔을 벌려 품으로 안겨드는 희민을 마주 안았다. 마른 팔은 보기보다 강한 힘으로 수현의 등을 끌어안았다.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흩뿌려졌다. 희민은 고양이처럼 이마를 비비적거렸다가, 고개를 들고 방싯방싯 웃었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어.”
하루 종일 함께 있는 생활에 익숙해져도 수현을 반겨 주는 희민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랑스러운 환영 인사는 수현에게 매번 마음이 아플 정도로 행복한 기분을 선사했다. 너무 행복하면 조금 아픈 기분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을, 수현은 희민을 만나고서야 배웠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어.”
“형, 행복해요?”
형이 행복하면 저도 행복해요. 희민은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사랑을 가득 담은 눈으로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다갈색 눈이 견딜 수 없게 사랑스러워서, 수현은 희민의 뺨을 감싸고 입술을 포갰다. 부드럽고 말랑한 입술의 감촉이 꼭 희민 같았다.
수현은 한참 만에 희민을 놓아주고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신경을 분산할 곳을 찾던 수현의 귀에 잔잔하게 사랑을 노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이 노래 알아. 부른 사람이… 가브리엘라 존스였나?”
“맞아요. <나의 사랑하는> OST.”
수현은 최근 거실에 하이엔드 오디오 브랜드의 스피커를 들였다. 하루 종일 헤드폰을 끼고 지내는 희민에게 작은 즐거움을 더해 주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희민은 가격을 검색해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 이런 것은 받을 수 없다고 우겨댔지만 수현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너 혼자 헤드폰 끼고 있으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제가 뭐 듣는지 알려 주면 되잖아요…. 아니면 이런 거 말고, 블루투스 스피커 조그만 거 사서….’
수현은 논리를 내세워 설득하는 대신 희민을 약하게 만드는 표정을 지었다. 서글픈 표정을 짓고 고개를 처연하게 떨어뜨렸다. 애달픈 눈빛을 꾸며내고 가련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받아 주면 안 돼? 나는 너한테 백 개 해 주고 싶은 걸 참다가 겨우 하나 해 주는데, 네가 그것도 안 받겠다고 하면 울고 싶어.’
희민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수현은 속으로만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날부터 거실의 풍경에 변화가 생겼다. 수현은 외출에서 돌아올 때마다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소파에 길게 엎드린 희민을 보게 되었다. 희민은 가만히 음악을 듣기도 했고 책을 읽거나 작은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기도 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수현이 온 것을 알아채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래도 수현은 서운하지 않았다. 제 일상에 희민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깊이 자리 잡았다는 실감이 나면 마음 깊은 곳부터 행복이 차올랐다. 수현은 희민이 들어온 후로 달라진 삶의 풍경을 사랑했다. 집 안 곳곳, 가구 하나하나마저도 전과는 다른 의미를 띠었다.
침대를 보면 저를 마주 보고 누운 희민이 겹쳐 보였다. 온 세상을 다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게 웃는 얼굴,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 체온이 낮지만 안고 있으면 금세 데워지는 몸. 가물가물 감기는 눈으로 잘 자요 인사하고, 겨우 반만 뜬 눈으로 좋은 아침이라고 말해 주는 순간.
함께 잠들고 눈뜰 때마다 희민은 자신의 눈에 비친 수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려 주었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것은 본인이면서, 수현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귀한 사람처럼 대해 주었다. 수현은 과분한 사랑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침대 옆에는 희민과 함께 살게 된 것을 기념해 들인 조명이 있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빛 아래서 책을 읽는 희민을 보고 있자면 이대로 세상이 끝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면 가장 먼저 짙은 푸른색 셔츠가 보였다. 수현은 옷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이 셔츠는 특별히 아껴 좋은 날에만 꺼내 입었다. 입을 때마다 선물을 받은 과정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희민은 이 셔츠를 선물해 주기 위해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작전을 계획했다. 비가 내려 쌀쌀한 날에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고 덜덜 떨면서 나오더니, 집에 갈 때가 되자 춥다며 셔츠 하나를 빌려 갔다. 그리고 얼마 뒤 브랜드와 사이즈가 같은 셔츠를 선물이라며 가져왔다.
당시 희민은 지나칠 정도로 눈치를 보는 편이었다. 제가 선물을 주는 입장이면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수현은 희민이 늘 들고 다니는 가방 모서리가 뾰족뾰족 튀어나온 것을 보고 눈치를 챘지만 장단을 맞추느라 모른 척을 해야 했다. 희민이 쭈뼛쭈뼛 선물을 내민 것은 집에 갈 때가 다 되어서였다.
수현은 최선을 다해 놀라움을 연기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기쁨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희민은 그제야 말갛게 웃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절로 녹아내리는 미소였다.
그 시절의 희민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지만, 수현은 역시 지금의 희민이 더 좋았다. 좋아하는 것, 바라는 것, 서운한 것까지 종알종알 이야기할 때면 작은 새처럼 사랑스러웠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주면 좋을 텐데, 욕심이 없는 성격에 제가 해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는 점이 아쉽기도 했다.
욕실은 어느 곳을 보아도 희민이 보이는 공간이었다. 향이 첨가되지 않은 제품을 선호하는 희민에게 맞춰 바꾼 바디 워시. 보드라운 것을 좋아하는 희민을 위해 들인 도톰하고 포근한 수건. 색만 다른 칫솔 한 쌍. 사이좋게 놓인 슬리퍼 두 켤레. 수현은 주변을 둘러볼 때마다 질리지도 않고 행복해졌다.
서재에는 희민의 사진 액자가 있었다. 희민이 그룹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잡지를 사고 받은 포스터를 걸어 두었으나, 지금은 수현과 같은 소속사로 옮겨와 찍은 첫 사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물에 젖은 앞머리를 이마 위로 흐트러트린 채 투명한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희민. 수현은 사진 속 희민과 눈이 마주칠 때면 사이렌에 홀린 뱃사람처럼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평생을 가도 이 아름다움에 무감해질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두 사람의 둥지로 바뀐 집 안에서 수현이 가장 사랑하는 공간은 희민의 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희민에게서 나는 부드럽고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맞은편에 걸린 수현 자신의 사진을 마주해야 하는 민망함만 제외하면 그 방에 들어가는 순간은 언제나 행복했다.
희민은 늘 방을 쓸고 닦았지만 말끔히 정리하지는 못했다. 책장에는 서로 연관되지 않은 책들이 삐뚤빼뚤 늘어섰고, 책상 앞에는 고양이 구조 단체에서 보내온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창가에 놓아 준 소파 위에는 읽다 만 책들이 엎어져 있었고, 그 아래 깔린 러그에서는 허물처럼 흘리고 간 담요가 굴러다녔다.
수현은 문간에 서서 그 하나하나를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말끔히 정리해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삐뚤어지고 흐트러진 모양도 희민의 흔적이라면 있는 그대로 사랑스러웠다.
솜사탕 속을 걷는 듯한 일상은 모두 눈앞의 연인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수현은 희민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물었다.
“뭐 하느라 그렇게 바빴어?”
“어… 그게요, 형 저녁은 먹었어요?”
희민은 누가 봐도 의심스럽게 움직이며 수현을 부엌으로 이끌었다. 수현은 웃으며 희민이 하는 대로 따랐으나, 또다시 심란한 감정이 올라왔다.
수현의 연인이 비밀을 만드는 것은 대부분 수현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을 때였다. 묻는 말마다 동문서답으로 답하고 행동이 어색해진다 싶으면, 그 하루의 끝에는 반드시 정성껏 준비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혹시 그런 것은 아닐까, 수현은 조금 기대했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희민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것을 내놓을 기미가 없었다.
수현도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틈만 나면 희민을 떠보았고, 조 감독을 귀찮을 정도로 찔러댔다. 돌아오는 것은 끝을 흐리는 대답과 기다릴 줄도 모르냐는 질책뿐이었다. 수현은 날이 갈수록 엉켜드는 속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 * *
“저도 글을 써 보려고 했는데요, 잘 못 쓰겠어요.”
윤 작가와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그녀는 희민이 조심스레 꺼낸 이야기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소설을 쓰겠다는 거예요?”
“아, 아니요…. 그냥 제가 말을 잘 못하니까, 글로 생각을 정리해 보면 어떨까 하고… 그런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윤 작가는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쓰느냐보다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가 중요하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세요. 한글 처음 배운 할머니들 글에 다들 감탄하잖아요.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는 그런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희민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이었다는 사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멜론을 향해 포크를 옮기던 윤 작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희민 씨 정도면 나이에 비해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것 같은데요. 하고 싶은 말 많지 않아요?”
“저는… 제가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부터 일만 해서, 모르는 게 많아서요….”
그녀는 이번에도 고민 없이 명쾌한 답을 돌려주었다.
“그럼 어떤 식으로든 세상 돌아가는 걸 봐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얼마나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지, 겪어 보지 않고도 알 방법은 많으니까요.”
희민은 윤 작가의 조언대로 세상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고 나면 거실 테이블에 노트북을 놓고 지난 하루의 일들을 찾아보는 것, 아홉 시가 되면 TV 앞에 앉아 뉴스를 보는 것이 희민의 일과가 되었다.
희민은 자주 노트북을 앞에 두고 눈시울을 붉혔다. 수현은 희민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뒷목에 입을 맞추는 척하며 화면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어떤 이야기들이 희민을 아프게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 가운데는 전 국민의 관심을 받는 사건도 더러 있었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사건 사고가 대부분이었다.
뉴스 페이지의 구석에 처박힌 죽음들. 같은 목숨에 매겨지는 다른 값. 안전장비보다 값이 싼 목숨들. 사람이 죽어야 바뀌는 일들. 사람이 죽어도 바뀌지 않는 일들. 가족을 잃고도 슬퍼할 겨를 없이 거리로 나와야 하는 사람들.
그런 이야기들은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기사를 써 주는 사람도 댓글을 달아 주는 사람도 적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날짜만 바꾸어 되풀이되는 비극은 지켜보는 이들마저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계속 화를 내고 슬퍼해도 바뀌는 것이 없으니까, 매일 반복되는 일로 울다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드니까, 사람들은 마음을 무디게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다. 때로는 고개를 돌리고 때로는 세상살이가 원래 그렇다고 되뇌었다.
그러나 희민은 매번 온 마음을 다해 슬퍼했다. 어떤 사람의 불행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을 긋고 층을 나누어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희민의 마음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었고, 그 자리의 주인들은 마땅한 애도를 받았다.
지치지 않고 슬퍼할 줄 아는 마음 앞에서 수현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깊은 슬픔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버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희민이 모든 것을 고백해 왔던 날, 수현의 가슴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무너졌다. 그 애가 어떤 말을 듣고 어떤 취급을 받아 왔는지 확인하는 순간에는 숨이 턱턱 막혔다.
그래도 귀를 막거나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그 역시 희민의 일부였으므로. 희민을 사랑한다면 그 아픔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를 나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것. 사랑을 통해 기쁨과 행복만 취하려 하지 않는 것. 너무 사랑해서 괴롭다는 핑계로 상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 상대가 마주한 폭력과 부조리에 함께 맞서는 것.
상처로 가득한 희민의 과거를 알아 가며 수현이 내린 사랑의 정의였다.
그런 것이 사랑이라면, 희민은 온 세상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희민의 작은 심장은 세상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그 안에 숨은 아픔을 모른 척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수현은 언젠가부터 희민이었다면, 하고 가정하기 시작했다. 지금 눈앞에 놓인 상황을 희민이었다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어떻게 행동했을지. 희민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아픔과 슬픔으로 가득한 동시에 기쁨과 행복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저도 모르게 희민처럼 생각하고 말하게 될 때도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랜만에 만난 대학 후배와의 술자리에서였다. 후배는 최근 직장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고, 수현은 씁쓸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후배는 수현의 반응에 조금 놀란 듯했다.
“선배 변했네요. 그런 식으로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그랬어?”
후배는 정말 몰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배는 다정하긴 하지만 너무 건강하고 건설적이라고 해야 하나. 누가 울고 있으면 같이 울어 주기보다는 팔 걷어붙이고 해결책 찾아 주는 스타일이었잖아요. 전 선배가 법률구조공단 이야기부터 꺼낼 줄 알았다구요.”
수현은 후배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과거의 자신은 지금과 달랐다. 타인의 비극 앞에서 당사자가 느낄 괴로움을 생각하고 분노하기는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함께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부당한 일이 일어났다면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을, 행동할 수 있는 영역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음과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 세간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제 길을 가는 사람.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내고 그로써 인정받는 사람.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사람. 그것이 이십 대의 차수현이 꿈꿔 온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 시절 수현은 제 인생에 요동치는 감정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을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저를 잠식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몇 차례 연애를 하면서도 사랑에 빠져 본 적은 없었다. 연애란 좋은 사람과 마음이 맞으면 하는 것이었고, 대체로는 안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했다.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난 덕에 마음의 균형은 평화롭게 지켜졌다. 즐겁게 지내다가 맞지 않는 때가 오면 서로의 행복을 빌어 주며 돌아섰다.
첫 작품의 성공이 독이 되었던 시기에도 같았다. 차수현은 이제 끝났지. 처음부터 볼 것도 없었어. 천재 감독 만나서 잠깐 반짝한 거야. 빨리 다른 길 찾는 게 나을걸…. 저주에 가까운 말들이 쏟아질 때에도 제가 흔들리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수현은 스스로에게 상처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상처받는 순간 저는 그 말들에 굴복하는 것이고, 슬퍼하고 화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희민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그렇게 극복했으니 제가 옳은 답을 골랐다는 확신을 굳힌 채. 상처받는 마음을 나약한 것, 버리고 고쳐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때는 그랬는데, 이제는 생각이 좀 달라졌어. 함께 슬퍼하는 마음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수현은 그렇게 말하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후배는 흥미롭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나쁘다는 건 아닌데, 선배처럼 주관 뚜렷하던 사람이 변한 걸 보니 좀 신기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문득 희민에게 처음 고백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희민은 빗방울이 부서지는 차창을 바라보다 말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완전히 바꿔 놓기도 한다고. 그때도 수현은 그 말에 동의했지만, 그것이 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작은 어항 같던 수현의 세계는 희민을 만나 바다로 변했다. 희민에 대해 알고, 희민의 세계를 제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수현은 새롭게 눈을 떴다.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을 이해하고,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느끼고, 귀한 줄 몰랐던 것들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수현은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희민이 깊게 배어든, 희민을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제 모습이 좋았다. 희민이 가져다준 변화는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후배와 헤어진 수현은 택시를 잡아탔다. 행선지를 말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희민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었다.
수현은 핸드폰 배경에서 웃고 있는 희민을 아쉽게 들여다보다가 창밖의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에게 희민과 저를 겹쳐 보았다.
희민과 걷는 거리는 다른 세상처럼 다정했다.
땡볕 아래 전단지를 나눠 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희민은 늘 같은 핑계를 댔다. 제가 잘 잃어버려서, 한 장 더 주세요. 희민의 성격상 한참을 고민해 정한 레퍼토리가 분명했다. 힘들게 일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고 싶으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지하도에서 바구니를 앞에 두고 엎드린 사람들 앞에서도 희민은 무심히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누군가 뒤에서 들으란 듯 크게 말했다. 저렇게 구걸하는 사람들, 집에 갈 때 보면 외제 차 끌고 다닌다며? 아직도 저런 데 속는 사람이 있네.
수현은 굳은 얼굴로 돌아서려 했으나, 간절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희민을 이길 수 없었다. 희민은 제법 먼 길을 걸어온 후에야 작게 중얼거렸다.
다 들려서… 속상했을 것 같아요. 그 사람 딴에는 엄청 용기 내서 도움을 요청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너무 힘들 때 누가 조금 도와주면 다시 할 수 있는 힘이 나는데….
그 말에 수현의 분노도 천천히 누그러졌다.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의 말을 곱씹기보다는 희민의 고운 마음을 보고 싶었다. 선의를 이용당했다는 의심이나 배신감이 끼어들 자리 없는 마음은 맑게 갠 하늘 같았다. 다시 떠올려도 반짝이는 기억이었다.
희민과 같은 사람을 사랑하면서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빛에 물들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수현은 창에 기대 눈을 감았다.
* * *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수현은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면 걸음을 멈췄다.
힘의 위계를 드러내는 대화가 오가지는 않는지, 그들 중 하나가 곤란하고 괴로운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는지, 감각을 곤두세우고 관찰했다. 이상한 기미가 느껴지면 다가가 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수현의 체격에 지레 겁을 먹은 불량아들은 이상한 거 아니에요, 친구예요, 따위 말로 얼버무리며 흩어지곤 했다. 수현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경찰을 부르는 게 맞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희민이 겹쳐 보이면 몸부터 나가는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새 출발선에 선 희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수현은 여전히 희민에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했다.
좀 소심하긴 한데 진짜 좋은 애야. 요령도 모르고 마냥 열심히만 하는데 그게 예뻐. 너도 보면 예뻐라 할 거다. 희민을 소개해 주기에 앞서 영호가 그렇게 말했을 때만 해도 수현은 그것이 희민의 타고난 성격이겠거니 생각했다. 연예인이라고 내향적 성격을 갖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희민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 후로, 수현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희민은 작은 실수에도 울 것처럼 속상해했다. 촬영 중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모두 제 탓으로 돌렸다. 스태프들 앞에서 지나치게 저자세로 행동하는가 하면, 매니저가 일 처리를 엉성하게 해도 항의하는 법이 없었다. 마치 저는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것처럼. 그 태도를 단순히 소심하다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제 어디가 부족하다고 그렇게 기죽어 다니는 걸까. 수현은 때때로 희민의 가라앉는 눈동자와 달싹이다 다물고 마는 입술 뒤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단서를 잡은 것은 희민의 팀 멤버들을 불러 집들이 장면을 찍던 날이었다. 그날 수현은 몹시도 들떠 있었다. 희민과 함께 생활하며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설렜다.
수현은 그들이 희민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희민은 누가 봐도 좋은 애니까, 몇 년을 함께한 멤버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들 사이에서 평소보다 편안해할 희민의 모습과 그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될 희민의 이야기가 기대되었다.
하지만 촬영 당일 수현이 보게 된 것은 잔뜩 긴장해서 숨도 쉬지 못하는 희민이었다. 멤버들은 카메라가 꺼지자 희민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수현을 칭찬한답시고 꺼낸 말에는 누군가를 향한 가시가 가득했다. 수현은 그 가시가 희민을 찌르고 있음을 눈치챘다.
문제가 있다는 직감과 함께 찾아온 것은 혼란이었다.
그 전까지 수현은 제가 희민을 동생으로서 귀여워한다고 여겼다. 희민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처럼 어린 사람을 연애 상대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희민은 지금껏 수현이 만나 온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들이 외향적이고 씩씩하며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면, 희민은 누군가 잡아 주지 않으면 쓰러질 듯 위태롭고 연약해 보였다.
그러니 이 감정이 사랑일 리 없다고 생각했던 수현은, 희민을 향한 재원의 공격에 낯선 분노를 느꼈다. 희민이 보이는 괴로운 기색에 숨이 막힐 듯 답답해졌다.
무르고 약한 희민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에 화가 나는 것인지,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답을 찾을 수 없어 수현은 밤을 지새웠다.
깨달음은 첫 방송을 함께 보던 날 찾아왔다.
평소보다 들뜬 말투로 재잘거리던 희민은 한순간 스위치를 눌린 사람처럼 공황 상태에 빠졌다. 수현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희민에게 체온을 나눠 주었다. 희민의 상태를 예민하게 살피며, 천천히 잦아드는 떨림에 안도했다.
그리고 방송이 끝난 후 희민이 미소 지었던 순간, 수현은 오래 고민했던 문제의 답을 확신할 수 있었다. 희민의 웃는 얼굴에 세상 모든 것을 주고 싶어지는 마음을, 힘들어하는 모습에 애가 타서 견딜 수 없는 이 마음을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한번 사랑이라 자각한 순간부터는 걷잡을 수 없었다. 수현은 평생을 모르고 살아왔던 격랑에 휩싸였다. 열망과 분노, 고통과 슬픔이 수현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하얀 목덜미를 보면 열이 들끓었고, 마른 몸을 가볍게 안을 때면 더 깊이 몸을 맞대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다.
희민의 매니저와 그룹 멤버들을 마주하면 정수리 끝까지 분노가 솟구쳤다. 저는 희민이 부서질까 두려워 세게 잡지도 못하는데, 세상 무엇보다 귀한 사람이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희민의 고백을 듣던 그날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과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다. 죄 없는 희민을 한계까지 몰고 간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제가 잘못했다는 듯이 사과하는 희민을 보며 숨이 쉬어지지 않을 듯 아팠다.
희민에게 죄가 있다면 악의에 악의로 맞서지 못한다는 것 정도였을 것이다. 한없이 여리고 순해서, 누구도 원망할 줄 몰라서. 세 치 혀끝의 칼날은 잘잘못과 관계없이 가장 미워하기 편한 상대를 향하기 마련이므로. 사람들은 마음 편히 희민을 미워하며 괴롭히고 착취했다.
지금도 그들을 생각하면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수현은 매번 마음을 다잡았다.
희민이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삶을 선택했다면, 분노와 슬픔에 자신을 내주는 대신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자신도 그 방식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희민이 살아가는 세상을 함께 살고 싶었다.
* * *
「안녕하세요, <밤의 속삭임> 신희민입니다.」
심야 라디오에 어울리는 부드럽고 나직한 인사였다. 수현은 안녕, 혼잣말로 답하며 웃었다.
희민이 혼자 운전해 가기를 고집하지 않는 날이면 수현은 꼬박꼬박 제 손으로 희민을 출근시켰다. 그리고 주차장에 남아 희민의 라디오를 듣곤 했다. 수현에게는 무척 소중하고 특별한 시간이었다.
희민의 진행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희민은 마음을 다해 사연을 읽고 제가 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을 내놓았다. 다정한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하는 말들은 깊은 밤의 별처럼 빛났다.
청취자들은 입을 모아 희민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했지만, 수현은 그 뒤에 숨은 노력을 알고 있었다.
희민은 아나운서의 동영상을 보며 발음 연습을 했고, 이야기를 잘 듣는 법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다른 라디오 진행자들에게서 배울 점을 공부하고, 시나 소설 속에서 아름다운 구절을 발견하면 청취자들에게 들려주겠다며 따로 적어 두었다.
고민에 대해 충분한 답을 주지 못했다 느끼면 며칠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나는 한편, 희민이 라디오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느껴졌다.
어느새 사연 몇 개를 읽고 답까지 마친 희민이 다음 순서로 넘어가겠다는 말을 했다.
「가브리엘라 존스의 디어 유, 듣고 오겠습니다.」
얼마 전 함께 들었던 노래였다. 희민이 고른 걸까, 고르면서 그날 생각을 했을까. 미소 짓던 수현의 눈에 조수석 발치에 떨어진 물건이 들어왔다. 파란 표지의 작은 노트. 희민이 늘 들고 다니며 비밀스럽게 써 내려가던 그 노트였다.
희민의 물건에 멋대로 손대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머리와 희민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하는 심장. 그 사이에서 수현은 잠시 고민했다. 승기를 쥔 것은 후자였다.
독점욕은 부드러운 껍질 아래 더 무른 과육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저만 알고 싶은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 무른 과육의 안쪽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싶었다. 수현은 희민의 전부를 원했고, 제가 모르는 희민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다.
수현은 희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주변을 둘러본 후 노트를 펼쳤다.
노트는 짧은 일기로 시작되었다. 어디에 갔고 무엇을 했는지에 관한 기록이었다. 매번 수현과 함께해서 좋았다는 말로 끝이 났다.
[7월 23일. 형이랑 슬픈 영화를 봤다. 내가 너무 많이 울어서 형이 놀랐다. 그래도 영화라고 생각하니까 괜찮았다. 슬픈 일은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서, 아무도 진짜로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형이랑 같이 영화를 봐서 좋았다.]
[7월 30일. 형이랑 같은 티셔츠를 샀다. 커플 티라고 말하기는 조금 쑥스럽다. 아무 무늬 없는 티셔츠를 살까 하다가 조금 용기를 내서 줄무늬로 골랐다. 형 옷을 입어봤는데 나한테 너무 커서 형이 놀렸다. 부끄러웠지만 형이 즐거워해서 좋았다.]
[8월 5일. 형이랑 농구를 했는데 동네 애들이 다 형만 응원했다. 형은 안 봐주겠다고 했으면서 자꾸 가짜 실수를 했다. 다 티 나는데. 조금 그랬다. 그래도 바람 불 때 시원하다고 웃는 얼굴이 멋있어서 좋았다.]
일기는 몇 장 만에 끊겼다. 한 페이지를 사이에 비워 두고, 다른 방식의 글쓰기가 이어졌다. 주제어를 두고 떠오르는 단어나 문장들을 써 내려간 듯 보였다.
[새벽: 별도 보이지 않는 까만 하늘. 불 꺼진 창문들. 텅 빈 거리에 혼자 서있는 가로등. 세상에 나만 깨어있는 것 같은 외로움. 눈을 감으면 옛날 생각이 나서 슬퍼지는 마음.]
수현은 불면증에 시달리던 희민을 떠올렸다. 어둠뿐인 하늘도 인적 없는 거리도 모두 희민에게는 익숙한 일상이었을 터였다. 홀로 외로웠을 희민을 생각하니 심장께가 저릿하게 아파 왔다. 그러나 이내 그 아래 꾹꾹 눌러쓴 한 줄이 보였다.
[잠 못 자던 때는 되게 힘들었는데 형을 만나서 다 까먹었다.]
수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울렁거리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여름: 푸른 잎사귀. 나무 그늘. 차르르 우는 매미 소리. 형 생일날 같이 갔던 바다. 바다에서 별이 태어나는 것처럼 반짝반짝했다. 눈이 부신데도 계속 보고 싶었다.]
희민과 완전한 연인으로 거듭났던 그날이었다. 윤슬이 그렇게 아름다웠던가, 수현은 기억을 더듬다가 웃었다. 제 기억 속에는 희민의 미소만이 가득했다. 세상이 다 환해지도록 웃는 희민이 아름다워서 다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를 보고 별의 탄생을 떠올린 희민이 귀여웠다. 희민은 제가 무척 진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수현의 눈에는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더 많았다.
[사랑: 형. 형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빨리 뛰는 것. 형이 좋으면 나도 좋은 것. 조금 속상한 일이 있어도 형을 만나면 다 잊게 되는 것. 형한테 뭐든지 다 해 주고 싶은 것. 형이랑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은 것.]
수현은 잠시 그 페이지에 머물렀다. 희민의 사랑은 그 마음만큼이나 순하고 맑았다. 안아 줄 때마다 사랑스럽게 뛰는 심장에 수현 자신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희민에게 사랑은 온통 저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다음 페이지의 맨 첫 줄에는 아예 <형>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수현은 긴장과 설렘이 섞인 기분으로 삐뚤빼뚤한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형이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때
손끝이 간질간질한 느낌]
[형 오른쪽 이마에 있는 점
메이크업 받으면 가려지니까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거 좋아]
[형은 웃을 때 장난꾸러기 같고, 강아지 같고, 여름 같다.]
[자면서 웃는 형이 너무 귀여워서 볼에 뽀뽀해 주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얘기했는데 꿈에서 들었을까?]
[우리가 아주아주 오래 같이 있어도 형이 계속 나를 우리 희민이 하고 불러 줬으면 좋겠어요.]
수현은 노트를 덮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슴속에서 물결치는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다. 넘치는 행복과 사랑은 심장을 아프게 눌러 왔다. 가끔은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희민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일이었으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희민이 주는 것이라면 아픔마저도 사랑스러웠다.
라디오가 끝난 후에도 희민은 바로 내려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올라가 보려던 때, 겨우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희민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수현의 마음은 덜컹 내려앉았다.
“무슨 일 있었어?”
“저한테 되게 중요한… 물건이 없어졌어요. 없어지면 안 되는데….”
아, 수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아는 척을 해서는 안 되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나갈 필요가 있었다.
“물건? 어떤 건데? 집에 가서 찾아볼까?”
“집에 없어요. 제가 분명히 들고 나왔는데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에 마음이 아팠으나 수현은 차근히 단계를 밟았다.
“일단 차 안에 있는지 한번 보자.”
희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기대 없이 처진 어깨로 들어가던 희민은 어,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수현은 희민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를 죽여 웃었다.
“뭐야, 찾았어?”
“찾, 차, 찾았는데요… 어… 형, 혹시, 그러니까 제가 형을 의심하는 건 아닌데….”
수현은 희민이 삼킨 뒷말을 읽어 냈다. 제가 노트를 보았는지 궁금하지만 차마 물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수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표정과 태연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이 정도 연기도 하지 못한다면 배우 소리를 들을 자격이 없었다.
“왜? 뭐가 없어졌어? 무슨 물건이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희민이 완전히 안심한 듯 웃었다. 수현도 마주 웃어 보였다.
노트를 보았다고 솔직히 말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고, 노트에게도 질투가 났다고 솔직히 말한다면 희민은 고민도 없이 용서해 줄 것이었다. 수현의 연인은 사랑 앞에 그토록 무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진실을 숨긴 것은, 피어나기 직전의 꽃봉오리 같은 사랑의 말들을 기다려 주고 싶어서였다. 말이 무르익어 활짝 핀 꽃이 될 때까지. 희민이 제 귓가에 반짝이는 별들을 흘려 넣어 줄 때까지. 이번 기다림은 길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반쯤 열린 서재 문 사이로 희민이 보였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기타 가방을 메고, 손에는 반쯤 마신 커피를 들고 있었다.
“어서 와.”
수현은 안경을 벗어 놓고 희민에게로 다가갔다. 마른 몸을 당겨 안고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잠시 그대로 안겨 있던 희민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있잖아요, 형한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어요.”
희민이 노래를 불러 주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대개는 듣고 있던 음악이 마음에 들거나 분위기가 좋아지면 즉흥적으로 한두 곡 불러 주는 식이었다. 이렇게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노래를 들려주겠다 선언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 안으로 걸어 들어온 희민이 기타를 꺼내 들고 앉았다. 작게 헛기침을 한 후 기타 줄 위로 손을 올렸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았다.
“노래 제목은 여름밤이고요. 가수는… 저예요.”
수줍게 고백한 희민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겨울밤엔 세상이 조용한데
여름밤엔 모두가 즐거워서
나는 혼자 외로워졌어
열대야를 핑계로 전화하는
잡은 손이 뜨거워도 놓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면
너는 내 여름밤의 별
지난여름 내내 널 기다려 왔어
조금만 더 여기 있어
오늘은 해가 늦게 지니까
밤이 와도 함께 있어
네 눈에 뜬 별이 보고 싶어
떠들썩한 여름밤의 분위기 속에서 홀로 느끼는 외로움을 말하던 목소리에 점차 설렘이 묻어났다. 너와 함께하는 여름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앞으로의 여름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희민은 꾸밈없이 깨끗한 색으로 노래했다. 수현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희민의 목소리로 처음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수현은 이 노래가 좋았다. 시원하게 튀어 오르며 더위를 날려버리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여름밤의 아련함을 담고 있어 계절과 어울렸다. 앞으로 여름이 올 때마다 이 노래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를 마친 희민은 입술을 꾹꾹 말아 물며 수현을 바라보았다. 밝은 갈색 눈동자가 기대로 반짝였다. 수현은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좋다. 사랑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
희민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쳐 가고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기타 줄을 잡은 손가락도 쑥스러운 듯 꼼지락거렸다.
“저 그때 조 감독님 만나고 왔었잖아요. 그 자리에서 감독님 친구분이 노래는 이제 그만둔 거냐고 물어보셨어요. 저는 기회만 되면 언제든 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럼 노래를 만들어 볼 생각도 있냐고….”
드문드문 흩어져 있던 점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글을 쓰고 싶다던 말. 영화와 드라마의 OST로 채워진 플레이리스트. 하루 종일 노트 위로 써 내려간 조각글들.
수현은 희민이 제게 만든 비밀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우리의 여름> OST로 들어갈 노래니까 여름에 얽힌 추억을 써보라고 하셨는데요, 그 말 들으니까 형이 제일 먼저 생각났어요.”
희민은 기억을 더듬는 눈으로 웃었다.
“형을 만나기 전에는 여름밤이 엄청 쓸쓸했거든요. 사람들 나와서 산책하고, 편의점 가면 다들 맥주 마시면서 노는데, 저만 혼자라서요. 근데 올해 여름에는 한 번도 외롭다는 생각 안 했어요. 형이랑 같이 여행 가고, 드라이브 가고, 손잡고 공원 산책하고… 좋은 일만 엄청 많았어요.”
수현의 마음속에서도 함께 만든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바다를 보며 희민이 지었던 미소, 강변도로의 바람에 흩날리던 희민의 머리카락, 제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워진 희민의 손가락.
“계속 비밀로 해서 죄송해요. 형한테 깜짝 선물처럼 들려주고 싶었어요.”
작은 새가 지저귀듯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수현은 끝물에 다다른 여름을 생각했다.
희민과 보내는 계절은 선명한 빛을 띠었다. 푸르른 하늘과 초록 잎사귀, 하얗게 빛나는 태양. 수박의 맛, 매미의 울음소리와 소나기의 빗줄기마저도 또렷해졌다. 수현은 때로 첫 여름을 맞은 아이처럼 세상을 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미 차고 넘치게 행복했던 시간을 희민은 노래로 만들어 선물해 주었다. 지난여름은 모두 기다림의 시간이었다고, 우리가 만나서 더는 여름밤이 외롭지 않다고, 여름이 얼마나 아름다운 계절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앞으로의 여름도 함께하고 싶다고.
행복이 높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수현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애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어떤 말을 해야 제 사랑이 전해질지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서툰 말이 나왔다.
“나도, 올해 여름은 네가 있어서 좋았던 기억밖에 없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천천히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진 후, 희민이 말했다.
“오늘 여섯 시에 음원 공개하는데요. 같이 일한 분들 말고는 형한테 제일 먼저 들려주는 거예요. 더 빨리 들려줄 수도 있었는데, 연습 많이 하고 싶어서… 조금 늦었어요.”
수현은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시곗바늘이 다섯 시 오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 안 남았네.”
“저 엄청, 엄청 떨려요….”
수현은 희민의 팔을 당겨 등과 가슴을 맞대고 안았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잘될 것이라는 말 대신 희민의 노래가 얼마나 좋았는지,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끊임없이 속삭였다.
몸을 들썩이던 희민은 차츰 안정되는 것 같았지만, 여섯 시가 되었을 때는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으로 그 위를 덮었다.
“너무 떨려서 못 보겠어요….”
소리 없이 웃은 수현은 음악 스트리밍 앱을 열었다. 신곡 목록에 희민의 이름과 여름밤이라는 제목이 나란히 쓰여 있었다. 수현은 곡을 선택한 후 재생 버튼을 눌렀다.
후반 작업을 거쳐 듣는 희민의 노래는 또 달랐다. 너는 내 여름밤의 별… 읊조리는 목소리는 별의 파편을 품고 있는 듯 반짝였다.
수현은 문득 마음을 스치는 충동을 입 밖으로 꺼냈다.
“네 노래 듣고 있으니까 손잡고 걷고 싶어져.”
잠시 수현을 올려다보던 희민이 몸을 일으켰다. 무언의 승낙을 알아들은 수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오렌지빛 노을이 드리운 한강을 걸었다. 보는 눈이 많아 손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어깨가 스칠 듯 가까이 서서 발걸음을 맞추었다.
희민은 수현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곡의 작업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형 덕분에 해 보겠다는 마음은 먹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사흘 동안 노트 펴놓고 한 줄도 못 썼어요. 계속 못 쓸까 봐 엄청 걱정했어요. 일정도 있는데, 지금이라도 못 한다고 말씀드릴까 고민하고요.”
다시 생각해도 난감하다는 듯 희민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서 일기도 써 보고, 생각나는 말 아무거나 써 봤거든요. 그런데 뭘 쓰든 마지막에는 꼭 형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예요.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잘 때까지 형 생각만 하니까….”
수현은 희민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희민의 목소리는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다웠다. 습기를 머금은 여름밤의 공기도, 미지근하게 불어오는 바람도, 아스라이 들리는 풀벌레 소리도 모두 기억 속에 오래 남기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 수현은 다시 스트리밍 앱을 켰다. 희민의 노래를 들을 생각이었다. 거실 스피커와 연결해서 들어보면 또 다른 느낌일 것 같았다.
그러나 앱의 로고가 지나가고 첫 화면이 나왔을 때, 수현의 손가락은 액정 위 어정쩡한 위치에서 멈춰 섰다. 눈을 감았다 떠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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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많이 듣는 곡
2위 신희민 – 여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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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은 모르지만 이거… 엄청 어려운 거 아니야?”
“뭐가요?”
옷을 갈아입으러 가던 희민이 돌아왔다. 수현은 희민의 눈높이에 맞게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어, 어어… 왜, 왜 여기 있죠… 마, 말도 안 돼.”
“우리 희민이 대단하다.”
빙긋 웃으며 건넨 칭찬은 전해지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희민은 고장 난 인형 같았다. 놀란 토끼 표정을 하고 왜, 이게 왜, 하는 말만을 반복했다. 수현은 희민의 눈이 그토록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핸드폰을 쥔 손을 거둬들인 수현은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검색어 순위에서도 희민의 이름과 곡 제목을 찾아볼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확인한 검색 결과도 호평 일색이었다. 제 영화가 인정받았을 때보다 더 큰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수현의 가슴을 채웠다.
“이거 봐. 다들 네 노래 얘기하고 있어. 네 목소리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대.”
“진짜 말도 안 돼요….”
“왜 말이 안 돼. 내가 말했잖아. 네 노래에는 진심이 묻어나서 마음이 움직인다고… 다른 사람들 듣기에도 그랬을 거야.”
젖어 들기 시작한 희민의 눈가를, 수현은 손등으로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희민은 그 후로도 한참 믿기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공을 수현에게로 돌렸다. 수현을 만나지 못했다면 제 목소리를 되찾지도, 가사를 쓰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아니라고, 모두 네가 해낸 일이라고, 수현은 딱 잘라 말했다. 희민은 젖은 눈으로 웃으며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럼 우리 둘이 같이 해낸 일이라고 해요. 형이랑 저랑 같이, 우리 둘이니까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수현은 빙그레 웃으며 그런가 봐, 하고 답해 주었다.
* * *
함께 씻고 잘 준비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이 희민의 노래를 두고 한 말을 읽어 내려갔다. 누군가는 담백한 음색이 듣기 편안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은 가사를 이해하고 부르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말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희민은 쑥스러워했고, 수현은 그저 행복했다.
그러다 희민의 팬들이 모인 공간을 발견한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그곳은 희민을 위한 작은 천국 같았다. 희민을 사랑하고 아끼는 말들만이 가득했다. 희민의 이름마저도 동글동글 굴러가는 발음으로 불렸고, 그 옆에는 온갖 사랑스러운 비유가 따라붙었다. 수현은 글 하나하나를 눌러볼 때마다 웃음을 터트렸다.
“너보고 아기노루궁뎅이버섯이래.”
“아기노루… 그게 뭐예요? 형은 알아요?”
찾아보니 하얀 솜뭉치 모양의 버섯이 나왔다. 정확한 이름은 아기노루궁뎅이버섯이 아니라 노루궁뎅이버섯이었다. 희민은 제가 이렇게 생겼냐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수현은 일리 있는 비유라고 느꼈다. 하얗고 보들보들한, 말랑하고 사랑스러운 희민에게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희민과 수현이 함께 찍힌 사진을 모아놓은 게시물도 있었다. 희민은 그 글을 발견하고 무척이나 기뻐했다. 댓글란에는 희민을 향한 칭찬이 대부분이었으나 수현의 커리어나 외모, 태도를 칭찬하는 말도 많았다. 희민은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형 멋있대요. 형은 얼굴도 잘생겼지, 키도 크지, 연기도 잘하지, 못하는 게 뭐냐고….”
그러나 수현의 눈에 들어온 댓글은 따로 있었다. 수현은 그 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거 봐. 이 사람이 쓴 댓글. ‘나 요즘 차수현한테 관심 생겼는데 희민이랑 친한 걸 보니 괜찮은 사람인가 봐’.”
들떠서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던 희민의 움직임이 천천히 멎었다. 수현은 희민과 눈을 맞추고 언젠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었다.
“기억나?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다들 알아줄 거라고 했잖아.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까지 좋은 말을 듣는 날이 올 거라고.”
<밤>의 캐스팅을 둘러싼 억지 논란이 터진 후였다. 희민은 함께 외출을 해 놓고도 수현의 옆에 서지 못했다.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수현이 나쁜 말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움츠러들었다.
수현의 생각은 달랐다. 수현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도 희민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주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들도 희민이 품은 찬란한 빛을 언제까지나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런 날이 오면 자신이야말로 희민의 덕을 보는 사람이 될 것이었다.
희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수현은 희민이 눈물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고개를 든 희민은 눈가를 조금 발갛게 물들였을 뿐, 씩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윤 작가님이 글을 잘 쓰려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셨지.”
희민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다정한 갈색 눈에 깃든 빛은 또렷하고 맑았다.
“저는 형을 만나고 계속…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 인생에서 제일 큰 사건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된 거였거든요.”
그렇냐고, 내게도 그렇다고 수현은 희민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차오른 감정에 잠겨버린 목은 소리를 내지 못했다. 대신 수현은 희민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에서 눈으로 가능한 많은 사랑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제 마음속 세상은 아주 오랫동안 깜깜한 밤이었는데요. 형을 만난 후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어요. 형이 해 준 말들이 별처럼 남아서요, 저한테 길을 보여 줬어요. 형은 저한테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이고, 제일 특별한 사람이고,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말을 마친 희민이 세상이 다 환해질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밤이 찾아온 세상이 낮보다 더 밝게 빛났다. 사랑과 행복이 파도처럼 밀려와 수현의 마음을 휩쓸었다. 수현은 감정이 저를 흠뻑 적시도록 두었다. 이대로 영원히 잠식당해도 좋을 것 같았다.
밤새 희민의 눈을 들여다보며 들려주고 싶은 말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희민아, 너야말로 내 세상을 바꿔 놓았어. 나한테는 네가 빛이라 너를 보고 있으면 눈이 부셔. 내 여름밤의 별은 너야. 내가 생각하는 사랑도 온통 네 얘기뿐이야. 네가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끔은 눈물이 날 것 같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라서, 수현은 희민의 귓가에 겨우 세 글자를 속삭일 수 있었다. 희민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다정한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너를 알아가는 일 외전, 끝.>